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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혼이든 미혼이든 홀로 가라>의 줄거리 :
항상 천국 총회에 참가하는, 하나님 아들들은 결혼과 이혼과 미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바른 결혼, 합당한 이혼, 부족함 없는 미혼, 모두 다 홀로 가기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홀로 가기란 외로움을 들이대며 강요하는 말이 아니다. 진정으로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길을 제시하고자 함이다. 고독해도 외롭지 말라는 것이다. 고독은 이 세상에서 홀로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은 외롭지 않아야 한다. 외롭지 않게 고독한 홀로 가기. 십자가만이 가져다줄 수 있다.
기혼이든 미혼이든 홀로 가라
(신명기 24:1~22)
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5.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
우리는 5절까지만 읽었습니다. 나머지 말씀도 5절까지의 주제를 통해 보면 수긍하고 납득이 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부분을 중심으로 <기혼이든 미혼이든 홀로 가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마음이 항상 천국 총회에 참가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홀로 가기란 무엇일까요? 홀로 가기란 말 자체가 외로움을 들이대며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자유로움을 제시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도 외로움과 고독함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고독은 이 세상에서 홀로 가도 마음이 외롭지 않은 상태입니다. 반대로 외로움이란 마음 붙일 대상이 어디에도 없는 상태입니다. 고독은 ‘이 세상에서는’ 마음 붙일 대상이 없는 상태라면, 외로움은 ‘어디에도’ 마음 붙일 대상이 없는 상태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 총회에 참석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에서는 고독하게 홀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외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 자유와 기쁨 속에서 홀로 갑니다. 그렇기에 ‘기쁨이 충만한 고독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십자가가 입구가 되어서 내 마음이 들어갈 수 있는 길입니다. 다만 이 길은 홀로 가야 합니다. 천국 총회에 참석할 때 각자의 마음은 하나님께 집중됩니다. 모두가 홀로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함으로써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이 세상에 대한 죽음인 이유는 세상에서 고독함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고독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고독함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대전제입니다. 4위일체로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일 때 세상에서는 고독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고독함이 유지됨이란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과 다르게 당시의 결혼이란 부모들끼리 계약을 한다든지 해서 생면부지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처럼 전혀 알지 못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기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때 수치되는 일이 발견된다면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 하십니다. 여기서 수치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 때문에 학자들이 골머리를 앓습니다.
“수치되는 일”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에르와트(עֶרְוָה)에 대해 어떤 학자는 혼전에 동정을 잃은 경우나 음행한 경우라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에 의하면 이혼의 사유가 아닌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남편이 아내를 사회적으로 부끄러워할 만한 점이나 적응할 수 없는 신체적 상처나 장애 혹은 병이 있는 경우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성경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다른 용례를 찾아보면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서 본 23장의 전쟁과 관련한 말씀에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 14절을 보면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불결한 것이라고 번역된 부분이 에르와트입니다. 이 구절에서 에르와트가 거룩하심의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도저히 함께하실 수 없게 만드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를 하나님 대신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수치되는 일이란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점을 발견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마음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남편은 이혼 증서를 써서 아내를 내보내고, 홀로된 여자는 다른 남자와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절 이하를 보면 이 여자가 재혼한 후에 또 이혼하거나 남편이 죽은 경우가 언급됩니다. 이처럼 두 번째 이혼을 하거나 남편이 죽었을 때 첫 번째 남편이 이 여자를 다시 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금지하십니다. 이혼한 여자를 다시 취할 가능성이란 시간이 지나자, 이전에는 그렇게 싫었던 아내가 이제는 싫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자가 재혼했다면 첫 번째 남편이 싫어했던 점을 두 번째 남편은 싫어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기준에서 수치되는 일에 해당하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아내가 너무 말이 많다든지, 집안일에 관심이 없다든지, 지나치게 까탈스럽다든지, 남편에게 무관심하다든지 하는 등의 일들이 수치되는 일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남편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입니다. 그런 것이 있다면 이혼 증서를 써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습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담긴 영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에 대해 해석이 어려웠던 것은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3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기에도 남편이 아내의 어떤 점을 싫어해서 버리는 것은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나중에 보면 그 점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규정에서 빈구석이 있음을 느끼며 예수님을 시험하는 소재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6절에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그러면 왜 모세가 이러한 규정을 만들었는지에 대해 따졌고 예수님께서는 8절에서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규정에 대해 질문합니다. 10절을 보면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싫은 사람과 함께 살 바에는 아예 장가를 가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남편이 아내를 싫어할 때 이혼 증서를 써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굳이 싫어하는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해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11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 살고 싶다고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혼자 살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악함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3의 해법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완악함이란 남편이 아내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남편이 아내에게서 외로움을 극복하려는 것은 당연합니다. 외로워서 결혼했고 아내를 통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것이 왜 문제라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총회, 천국 총회에 참여하는 아들들의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이 아닌 아내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아내를 통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는 태도는 아주 비겁하고 완악하고 불신앙적이라는 것입니다.
천국 총회에 참석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하나님께 마음을 붙이고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외로움을 극복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아내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내에게 싫어하는 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아셨기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도 아시고 여자도 아셔서 짝을 지어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혼을 허락하신 이유는 완악함 때문입니다. 내가 선민이라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쁨과 만족을 얻는 고독함을 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완악함이고 불신앙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불신앙이고 완악함입니다. 외로움이란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을 찾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 세상에서는 고독해야만 합니다. 외로움과는 다릅니다. 이 고독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 고독함 속에서 홀로 가기를 반드시 해야만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되는 일을 찾는 것과 같은 완악함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홀로 가기가 이루어진 남편이라면 아내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지 않습니다. 아내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아내가 밉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모세의 이혼 증서는 사실 남자를 위해 만든 법이 아닌 여자를 위해 만든 법입니다. 당시 여자는 인구수에 들지도 않고 물건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혼 또한 남자 중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물건이기에 내 마음에 안 들면 버리는 것입니다. 얼핏 여자에게 불리해 보이는 규정이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마음이 맞지 않아서 싫어 죽겠는데 같이 살아야만 한다면 아내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구박과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남편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아내가 평생 구박을 받아서는 안 되겠기에 모세는 마음에 맞지 않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합법적으로 내보내고 재혼할 수 있는 규정을 세운 것입니다. 첫 번째 남편이 싫어하는 부분일지라도 두 번째 남편은 오히려 매력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두 번째 남편으로부터도 이혼당했을 때 첫 번째 남편이 다시 아내로 삼는 것은 가증한 일로 여겨서 금지하십니다. 애초에 아내에게 이혼 증서를 써줄 때는 정말로 싫어할 일인지 아닌지를 정신을 차려서 잘 따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이혼 규정에 담긴 근본 취지를 완악함이라는 표현을 통해 가르쳐주십니다. 아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이혼을 하기에 앞서 완악함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완악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천국 총회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내 기쁨은 아내와 함께 살아가는 가정일 수 없습니다. 어차피 나는 하나님께로 홀로 가야 합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서 천국 총회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완악함이 없는 것이고 외로움의 불신앙에 잠기지 않은 상태입니다.
외로움이 불신앙이고 완악함인 이유는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을 찾기 때문입니다. 마음 둘 곳이 필요하면 천국 총회로 달려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만으로 외로움을 극복하고 더 이상 마음 둘 곳이 필요 없는 상태가 되어서 아내를 맞이합니다. 그럴 때 아내를 버릴 일도 없습니다. 수치되는 일이라고 번역된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싫은 점을 발견하지도 않게 됩니다.
오늘날은 남자만 주도권을 쥐는 세상이 아닙니다. 여자도 마찬가지로 주도권을 쥘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의 말씀은 남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라면 남편과의 관계에서 완악함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 마음에 안 들어서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천국 총회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나는 이미 이혼을 했는데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천국 총회에 참여하는 고독함이 십자가의 고독함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알았더라도 체험이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견딜 수 없어서 이혼했다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상태를 내 것으로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이혼을 했다면 이제부터 고독하기에 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나는 신앙도 부족하고, 생각도 부족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합니다. 여전히 배우자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고 싶은 마음이 잔뜩 남아 있는 상태에서 결혼을 했고 이혼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십자가 고독함을 체득해야 합니다. 마음에 안 맞아서 이혼을 했어도 외로움은 극복되지 않기에 여전히 세상에서 다른 마음 둘 대상을 찾고 있다면 이혼할 때 부족함의 상태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혼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닙니다.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부족함의 마음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마음 상태를 완전케 하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내 마음은 항상 십자가 고독함에 머물러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고독함이 있어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외로움은 퇴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미 이혼을 했다면 뒤돌아보지 말고 십자가 고독함을 생활화하는 일에 주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혼이라는 과거에 마음이 매이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과거를 떨쳐버리고 십자가 고독함으로 나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않는 외로움을 극복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책임지십니다.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도 하실 것이고, 혼자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 이후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이혼에 관한 규정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할 때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본래 불교 경전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독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홀로 가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는 하나님을 모르기에 마음을 아무 곳에도 두지 말라는 의미에서 홀로 가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홀로 가기는 마음을 우주 속에 내팽개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두려면 이 세상에서는 고독하게 홀로 가기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에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기쁨이나 만족을 원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상태까지 홀로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내 마음의 외로움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홀로 갑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이 충만해서 외로움이 사라진 뒤에는 누구를 만나도 상관이 없습니다. 결혼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이웃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내 마음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는 홀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만으로 외로움이 완전히 퇴치되는 상태까지 가야 합니다.
고독한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고독함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기 때문입니다. 고독함을 유지하면서 배우자를 만날 때 결혼도 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남녀가 서로 좋아서 너 없으면 못 산다고 결혼을 한다면 반드시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남편은 ‘이게 제대로 된 여자야?’라고 여기고, 아내는 ‘이게 제대로 된 남자야?’라고 여기는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발견하는 것은 배우자의 문제가 아닌 나의 완악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완악함의 문제임을 모릅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이혼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5절을 보면 “사람이 새로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면 그를 군대로 내보내지 말 것이요 아무 직무도 그에게 맡기지 말 것이며 그는 일 년 동안 한가하게 집에 있으면서 그가 맞이한 아내를 즐겁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결혼을 했으면 일 년 동안은 군대로 내보내지 말고 아무 직무도 맡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하십니다. 상식적으로도 얼른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 때 아내 때문에 즐거워하는 삶을 연상할 수 있는데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음이 천국 총회에 늘 참여하며 하나님만으로 외로움을 극복합니다. 이러한 신앙적 고독함을 유지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아내를 맞이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내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남편을 대하는 아내의 마음에서 즐거움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당시의 결혼이란 생면부지의 두 남녀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처음 보는 남녀가 한집에 있으니 낯설기 그지없습니다. 남편도 아내가 낯설고, 아내도 남편이 좋아할지 싫어할지 두렵습니다. 친정에서 편하게 지낼 때와는 다르게 너무 어색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아내가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외로움이 아닌 고독함 속에 있는 남편이라면 생면부지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깁니다. 선물을 받았기에 감사함이 넘칩니다.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하나님께서 주신 보물 같은 선물로 여긴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로부터 아내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시작한 결혼 생활의 일 년 동안은 아무 일도 시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물건이 아닌 인격체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워 외로움을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계속해서 이루어 가는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는 보물 같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인격체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에 감사가 넘치는 중에 아내라는 선물이 어떤 인격체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물건도 잘 쓰려면 설명서를 보고 익숙해지는 기간이 필요한데, 인격체가 대상이라면 더 많은 기간이 필요한 것이 당연합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내에서 얻은 아내라도 속한 가문이 다르고 살아온 과정이 다릅니다. 일 년 동안 전쟁에도 내보내지 말고 다른 직무도 맡기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보물과 같은 선물인 아내를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갖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아내를 위한 안식년을 제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홀로 가기란 무감각하고 냉담한 삶에 대한 요구가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볼 때 말과 행동에서 자기 때문에 감사하는 마음이 보인다면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완악함과는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완악함이란 아내를 맞이했을 때 같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싫은 점을 발견하는 외로움의 상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렇게 싫었던 점을 다시 좋아하게 될 수도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을 가진 남편이라면 그렇게 싫어할 점을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내의 어떤 특성들을 발견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의 풍성함을 누립니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아내의 어떤 점이 지긋지긋하게 여겨질 수 있는 특성입니다. 그런데 아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여기자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이러한 특성이 있구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또 다른 점을 발견해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또 다른 특성도 있구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어차피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으로 누리는 것이기에 아내에게서 기쁨과 만족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외로움을 퇴치한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1장 16절에는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25장 29절에서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배우자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갖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아내를 통해 외로움을 극복하려 하고, 아내에게서 너무나 싫은 점을 발견하고 이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는 남편은 아내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알고, 너무나 싫게 느껴지는 것까지도 주신 선물의 풍성한 특성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일 년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알고, 터득하고, 감사하는 기간으로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의 총회에 참석하는 아내라면 남편을 보면서 ‘내가 이 남자를 통해서 외로움을 극복해야지!’라는 마음을 먹지 않습니다. 남편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여깁니다.
결혼하여 일 년 동안은 아직 아이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아내의 업무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아내로서 남편을 내조함과 동시에 엄마로서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남편도 일 년이 지나 아이가 태어나면 이제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주어집니다. 결혼하여 일 년 동안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내를 즐겁게 하라고 하신 본문 말씀의 취지는 분명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값진 선물로 여긴다면 아내는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이끌어오셨을 때 아담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선물 중에 선물이로다’라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담에 대해 그렇게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혼을 했든 이혼을 했든 홀로 가기가 관건입니다. 배우자를 통해서는 마음 채움을 얻지 못합니다. 배우자 앞에서 십자가 고독함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혼을 했다면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하고 모자라서 이혼을 했더라도, 잘못하고 모자란 나는 십자가에서 죽을 뿐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의 고독함이 내 평생에 유지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독함이 유지되어 홀로 가기가 순조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 다른 상대와 결혼을 하게 하실 수도 있고 혼자 살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미혼이라도 홀로 가기는 이루어져야 합니다. 미혼이라고 외로움을 타는 것은 죄악이며 완악함입니다. 어차피 결혼해도 고독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의 고독함을 통해 하나님만으로 외로움을 극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만으로 외로움을 극복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결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결혼을 꿈꾸며 기도해야만 결혼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남편이 선물로 주어질 수 있고 아내가 선물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을 하겠다는 마음도, 이혼을 하겠다는 마음도, 혼자 살겠다는 마음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고독함 안에서 홀로 가기에 역점을 두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고독함 안에서 오직 아버지만으로 외로움을 퇴치할 때 나는 배우자를 넘어 누구와 함께 있어도 그들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위에서 모두를 즐겁게 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