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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1961년)영주 대수해 사건
류창수의 잊혀진 영주역사 이야기
신축년(1961년)7월 11일 영주에 큰 수해가 났다.
영주가 생긴 이래, 두 번째로 큰 재앙(災殃)이다. 영주사(榮州史)에서 가장 큰 사건은 1457년(세조3) 6월 27일 일어난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이 사건으로 순흥에 유배를 왔던 금성대군(世祖의 동생. 瑜)과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죽음을 당했고, 부(府)의 백성들은 모두 도륙되고 순흥부는 모두 불태워져 흔적을 없애고 혁파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 오백년사에서 가장 처참했던 사건이다.
신축년(1961년) 영주대수해사건은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가져온 큰 사건이다. 당시에 긴박(緊迫)했던 상황을 몇 회에 걸쳐서 상세하게 알아보자.
신축년(1961년) 7월 11일 영주에 대수해가 일어났다. 평화로운 농촌 소도시에 혹심한 수마가 휩쓸고 지나갔다. 1941년 7월 중앙선(청량리~경주)이 일부만 개통되면서부터 영주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시가지 서편으로 흐르는 서천(西川)의 제방을 튼튼히 쌓아서 철도시설보호는 물론이고 새로 조성되는 시가지를 수해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서천제방관리는 완벽치 못했다. 장마의 물살을 이겨내지 못하고 제방이 무너지고 말았다. 1942년 중앙선이 완전히 개통되고 난 뒤, 영주역을 중심으로 인가들이 속속 들어서고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앙선이 개통되기 전에는 장마철이 되면 어김없이 서천의 물이 지금의 시가지로 범람하여 애써 가꾸어놓은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등, 수해로 크고 작은 손실이 매년 일어나고 있었다.
그 당시 영주의 모습은 철탄산(鐵呑山)아래 옛 관아(현, 시의회)를 중심으로 행정, 치안이 이루어지고 부근에 상권이 형성되는 전형적인 촌락 모습이었다.
주거지역은 귀산(구성공원)부근과 철탄산아래 옛 관아부근을 중심으로 인구가 밀집되고 두서(영광중학 부근), 숫골, 향교밑, 원당, 광승 등지에 비교적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다. 1920년대 말경 영주의 호구(戶口)는 880호(그중에 일본인 46호, 중국인 12호)에 인구는 4,340명(일본인 104명, 중국인 50명)이고, 관공서로는 군청, 경찰서, 면소, 우편소, 등기소, 금융조합, 사방사업소 그리고 보통학교가 하나있었고 회사로는 양조회사가 유일하였다. (1929년 간행된 경북 연선지(沿線誌)에서)
그 무렵에 교통수단은 자동차뿐이었다. 자동차의 모습은 지프차에 헝겊을 씌운 모양으로 마치 인력거와 비슷했다. 정원은 8명이고 노선은 4곳뿐이었다.
노선은 다음과 같았다.
(1)영주~예천~김천. (2)영주~내성(봉화)~춘양. (3)영주~풍기~순흥~부석. (4)영주~안동. 하루 운행회수는 2~3회 정도였다. 당시에 영주는 예천상권에 속했다. 예천은 1928년도에 철도가 개통되어 경제활동이 활발하였으며 8.15광복 무렵까지 영주의 시장규모는 예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각종 물품은 예천에서 구매하여 소매를 했다.
1940년 영주면이 영주읍으로 승격되었다. 영주는 소규모 도시였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이었다.
신축년(1961년) 7월에 큰 수해사건이 일어나서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이때가 5.16혁명이 일어 난지 56일만이다. 혁명정부에서는 신속히 대처하여 피해복구는 물론, 서천(西川)의 물길을 안전하게 옮기는 등 새로운 영주건설에 큰 도움을 주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영주는 ‘전화위복’ 이라고 했다. 그때 일어난 영주대수해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살펴본다.
영주서편으로 흐르는 서천(西川)의 발원지는 소백산(小白山)의 4계곡에서 부터 시작된다. 죽계천은 비로봉과 국망봉에서 발원하여 초암계곡을 거치면서 신선도 알고 있는 죽계구곡(竹溪九曲)을 탄생시켰고, 배점을 거쳐 소수서원 우측을 굽이쳐서 장계들에 도착한다. 여기서 국망봉과 고치재에서 발원한 단산천을 만나서 창진리에 이른다.
풍기 희방계곡과 도솔봉에서 발원한 남원천은 비로봉에서 발원한 금계천과 풍기서 만나 창진리에 이르러 죽계천과 단산천이 만난 물과 합수가 되어 서천을 이룬다.
창진리는 두물머리라고 하지만, 소백산(小白山)의 4계곡물이 합수된 곳이다. 서천은 영주를 감돌아 흐르다가 무섬(수도리)뒤에서 내성천을 만난다. 여기서부터 강의 폭이 넓어지고 비단결 같은 백사장이 아름답게 펼쳐지며 장관을 이룬다. 해마다 우기철이 되면 서천은 소백산계곡에서 모여드는 많은 강수량으로 영주읍내는 물난리로 노심초사하였다.
예로부터 영주는 거북이(龜)와 인연이 많은 곳으로 전해온다. 지금의 영주 시가지가 생기기 전에 귀산(龜山.구성공원)을 가리켜서 들판 가운데 풀쑥 솟은 모양이 마치 거북이가 기어가는 형상이라 하였다. 동구대는 거북이의 머리로 서천의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하였는데, 반세기가 넘도록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신축년(1961년)에 서천을 옮긴지 58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영주는 도리(道理)를 근본으로 이어 온 유학의 고장이다. 조선 유학의 근원지로 학문이 크게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일찌기 안향(安珦)선생이 원(元)나라에서 주자서(朱子書)를 들고와서 우리나라에 보급을 하였다. 1542년(중종37) 주세붕(周世鵬)이 안향선생을 추모하는 소수서원을 안향선생 고향인 순흥에 짓고, 조선의 수많은 인재를 소수서원에서 양성하였다. 따라서 이 고장은 학문의 고장으로서 도덕과 도리를 생명처럼 여기며 이어 왔다.
이러한 고장에서 영주의 상징물인 거북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서도 외면하는 것이 바른 행동인가? 신축년(1961년)영주 수해가 나기전만 해도 동구대 주변에는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던 곳이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동구대는 물 맑은 서천과 흰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눈부신 백사장과 마치 석문(石門)처럼 조화를 이룬 서구대와 함께 펼쳐지는 풍광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하였다.
또 영주에는 시가지 동서를 통과하는 원당천(元塘川)이 있었다. 원당천은 동북 방향의 삽재와 단운동 부근에서 내려오는 개천과 조와리 방면에서 내려오는 개천이 보름골에서 합수되어 시가지 서편으로 흘러 가흥교 위에서 서천으로 유입되는 큰 개천이었다.
원당천 역시 장마철이 되면 하상이 높아서 물이 넘쳤다. 그때마다 시가지는 물난리를 겪었다.
그런 원당천도 1984년 수로변경공사로 물길을 외곽으로 돌려서 지금은 수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수로변경공사는 봉화통로 망월교밑에서 시작하여 이산방향 고개를 절개하여 용암대, 술바위, 구서원, 남산 고개를 넘어서 서천으로 유입되는 상당히 큰 공사였다.
원당천은 예로부터 영주사람들의 낭만의 장소였고 약속의 장소이며, 때로는 미움의 개천이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개구쟁이들이 모여서 물놀이를 하였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천진난만하게 뛰놀던 놀이터 이었고, 저녁을 먹고 식구들과 제방에 돗자리를 깔고 강바람을 쏘이며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추억어린 장소이기도 했다. 또한 영주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원당로(元塘路)로 변하여 좌우로 상가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섰고 도로에는 자동차가 줄을 이어 달리고 있다. 누가 이곳을 개천이 흐르던 곳이라고 말할까?
신축년(1961년) 영주대수해가 일어 난지 벌써 58년이나 흘렀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1961년 7월 11일 영주를 엄습한 수마의 폭위는 혹심하고 처참하였다. 계속 내리던 장맛비가 새벽 3시경 부터는 폭우로 변하여 아침 8시까지 까지 5시간 동안 337mm가 쏟아졌다. 이때 서천이 범람하여 지금의 영일초등학교 부근 제방 30m가량이 무너져서 삽시간에 시가지 2/3이상 침수가 되었다.
갑자기 황톳물이 노도와 같이 밀어닥쳐서 집들이 모두 물에 잠겨 지붕만 보이고 큰집들이 물 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처참했다.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면서 통곡소리만 사방에서 들렸다.
소용돌이 치는 황톳물에 부유물 들이 둥둥 떠다니고 주인 잃은 지붕이 거센 물살에 휩싸였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모두 망연자실하였다. 식구들은 아침밥을 먹고 직장과 학교에 갈 시간에 천지가 뒤집히는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이다. 그 참담함이란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인구 3만 2천여 명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작은 도시에 하늘은 너무나 가혹한 재앙을 내렸다.
당시 후생시장(지금의 고추시장 부근)은 서천제방이 무너진 곳에서 일직선상에 있었으므로 수마의 직격탄을 맞았다. 시장에 쌓아둔 많은 물건들은 손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모두 황토물이 휩쓸어 갔다. 후생시장은 영주에서 유일하게 규모를 갖춘 시장이었다.
오전 9시 30분경(서천제방이 무너지고 1시간 30분 후) 원당천(지금은 이산면 방향으로 물길을 돌렸음)은 시가지로 밀어닥친 서천의 물을 수문 밖으로 내보내는 배수구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긴급대책으로 원당천의 제방 50m을 끊어버렸다.
시가지에 가득 찼던 물들이 남산들(지금의 영주역 방면)방향으로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갔다. 원당천의 제방을 끊고 4시간 30분후, 오후 2시경 물속에 잠겼던 영주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당시 서천의 물길은 서천교~영일초등학교~불바위~동구대~상공회의소~경북자동차정비공장~휴천동천주교~남부초등학교~경북전문대북쪽~서천으로 흘러갔다.
영주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큰 물난리를 겪었다. 치산치수가 중요함을 새삼 깨달게 되었다.
삼각지 로터리(지금의 분수대)에 세워놓은 수해복구비(碑)는 그 당시 물이 영주 시내를 침수한 높이만큼 비(碑)의 높이를 맞추어서 세운 것이다.
이 비(碑)는 1970년 7월 11일 영주수해10주년을 맞아서 기념사업으로 세운 것이다. 당시 피해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o. 인명피해: 66명
(사망:14명. 부상:52명).
o. 이재민: 15,319명.
o. 도로: 유실: 3개소 800여m,
파손:2개소 203m.
o. 토지: 논 매몰:132정보,
밭 매몰:70정보,
전답침수:378정보.
o. 수리시설파괴: 32개소.
o. 건물피해: 유실:149동,
전파:176동, 반파:416동,
침수:1,971동.
o. 제방파손: 1,370m.
o. 가축유실: 1,479마리.
o. 재산손실:
약4억 환.
o. 정부양곡
침수: 4,114석이다.
전국에서 위문품이 답지했는데 구호금이 3천만 환, 양곡 7천석, 의류 8만 여점, 부식류 5천 500여점, 식사도구 7천300여 점, 학용품 4만 5천여 점, 의약품 등이다. 당시에 많은 가옥과 상가들이 유실되거나 파괴, 침수가 되어서 1만 5천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우선 공공시설에 이재민을 수용하고, 태극당 부근의 질벅질벅한 공터를 마른 흙으로 메우고 정비를 하여 천막을 설치해 나머지 이재민들을 수용하였다.
눈물겨운 천막생활은 수해복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뒤에 천막촌에도 <아리아>라는 다방이 생기고 대포 집(술집)도 생겼으니 사람 사는 곳이란 어디를 가도 다를 바가 없나보다.
이때가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불과 56일 만이었는데, 혁명정부에서는 신속하게 영주수해복구에 대처 하였다. 육군대학총장 이성가(李成佳)장군을 수해복구소장(뒤에 통제관)으로 임명하고 수해복구사무소는 군청 뒤 영훈정(迎薰亭)부근에 막사를 짓고 사무실을 만들어 수해복구 준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이 수해복구준비가 한창 진행될 때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의장이 수해현장을 시찰하던 중 한절마을(가흥동) 뒤 구수산(龜首山)끝자락을 절단하고 서천의 물줄기를 서편으로 돌려서 영원히 수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참으로 정확한 판단이었고 지금까지 영주를 수해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안을 혁명정부에 제안한 사람이 바로 영주사람 유욱호씨라고 알려지고 있다. 수해복구사업단에서 이번 수해의 원인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천은 수량에 비해 제방이 약했고 하상이 높았으며 하천의 굴곡이 심한 것이 원인’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수해복구사업단에서는 최종복구계획으로 동구대와 서구대사이로 흐르는 서천의 물길을 한절마을(가흥동)뒤 구수산 끝자락을 절단하고 서천의 물길을 완전히 서편으로 돌린 후, 서천이 흐르던 물길자리와 넓은 남산들을 시가지로 만들어서 신영주라는 새로운 도시건설을 시작하였다.
한편, 피해주택을 최우선으로 신축 또는 수리를 하고 기타 사업은 급한 것부터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본격적 공사는 7월 17일부터 시작되었다. 주민들도 수해복구계획이 매우 잘되었다고 흡족하게 생각했다.
이때 혁명정부에서는 영주출신 현역군인들에게 특별휴가를 제공하여 수해복구를 돕도록 배려까지 하였다.
하천공사로 생긴 부지는 앞으로 문화체육시설용으로 확보하고 우선 공설운동장(영주동 주공아파트 자리)을 조성하고 나머지 부지는 뒤에 실내체육관, 테니스장 등 공공복지 시설 계획으로 남겨 두었는데, 얼마 뒤에 영주군에서 대한생사공장부지(동진 타워와 강변아파트 지역)로 분양하고 말았다. 서천과 동구대, 서구대를 중심으로 수해로 없어져버린 문화유적지와 숨겨진 이야기 몇 편을 소개한다.
어쩌면 영원히 묻혀버릴지도 모를 이야기이다. 서천의 물길은 동구대와 서구대사이로 흘렀는데 하폭이 매우 좁았다. 걸어서 겨우 백 여보(步)의 거리였다.
불바위에서 휘몰아치는 서천물줄기가 동구대 암벽에 부딪치면서 석굴(石窟)이 생겼는데 사람들은 용궁(龍宮)이라 부르기도 하고 쪽박소라고도 불렀다. 귀산(구성공원)과 동구대와 서구대와 서천이 없는 영주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만큼 영주를 상징하는 장소들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귀산(구성공원)과 동구대는 영주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평일에도 많은 시민들이 나들이를 하였다. 특히 기념사진을 찍는 장소로 인기가 매우 높았던 곳이다. 그러나 신축년(1961년)수해로 동구대와 서구대와 서천의 운명은 갈라지고 말았다. 서구대는 없어지고(대순진리교 자리) 서천은 멀리 서편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옛날에도 여름철이면 서천냇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멱을 감고 물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동구대의 쪽박소에는 해마다 익사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쪽박소 부근은 수심이 깊고 불 바위 쪽에서 유입되는 물살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쪽박소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에 그 물살에 사람이 휩싸이게 되면 누구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일 년에 두세 사람씩만 희생이 되었다고 해도 천여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무서운 곳이다.
지금은 쪽박소를 흙으로 메워놓았다. 쪽박소 위편 암벽에는 계심대(溪心臺)란 글씨가 있고 그 옆에 정덕원년월일(正德元年月日)이라는 6자가 새겨져 있었다.
정덕원년(正德元年)이면 명(明)나라 연호로서 1506년(중종1)이며 당시 영천군수는 이항(李沆)이고 박눌(朴訥)이라는 사람이 쓴 글씨라고 전한다.
이 글씨도 지금은 흙으로 묻어 놓아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암벽 속에서 오백 수십여 년 전에 쓴 글자가 남아 있음을 아는 사람도 이제는 거의 없다.
동구대는 전체가 암석으로 평편한 곳은 십여 명이 앉아서 놀 수 있으며, 물이 푸르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예부터 많은 문사들이 모여서 자연을 감상하고 시를 짓고 뱃놀이를 즐기던 장소였다. 서쪽으로는 죽령(竹嶺)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학가산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우며 병풍처럼 펼쳐진 소백산을 배경으로 이곳의 운치는 더할 나위 없이 그윽하였다.
동구대 서편에는 또 하나의 대(臺)가 있으니 바로 경치가 일품인 서구대이다. 두 대(臺)의 거리는 겨우 백 여보쯤 되었는데 서천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서구대는 산수와 풍광이 절묘하고 명미했으며 영남에서도 이름있은 구학정(龜鶴亭)이 있던 곳이다.
구학정은 조선중기 대사헌을 지낸 백암(栢巖)김륵(金륵.1540~1616)선생이 만년에 지은 정자로 규모와 꾸밈세가 으리으리하고 단청이 아름다웠으며 금으로 쓴 편액이 걸려있었다고 전한다.
구학정 안에는 백암과 가까웠던 류성룡(柳成龍), 차천로(車天輅), 홍가신(洪可臣), 이수광(李수光), 이식(李植)등 당대의 쟁쟁한 인물들의 찬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름답던 물길도 비단결같이 펼쳐졌던 백사장도 자취를 감추었고, 그토록 우아하고 품격 높던 구학정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너무나 안타깝고 아쉽다.
그 자리에는 종교단체와 상가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동구대는 서천과 서구대와 백사장을 잃어 버렸다. 이렇게 고장의 유적지가 하나씩 사라져갔다. 조선조에 단종임금이 폐위되자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영주로 낙향한 집의(執義) 송인창(宋仁昌)선생은 동구대를 유상(遊賞) 장소로 가까이 하여 일명 집의대(執義臺)라 불렀다.
송인창(宋仁昌)선생은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본래 경기도 광주 사람인데 영주에 자리 잡기는 아버지 동강(東岡)송계(宋啓)선생으로부터 비롯된다. 동강선생이 영주로 낙향하게 된 데는 그가 영주의 토족인 부사 민용(閔용)의 사위였기 때문에 반연의 사연도 있었지 싶다.
더하여 동강선생의 사위인 문손관(文孫貫)도 영주인으로서 문과에 올라 전적을 지냈으며 그의 손자인 문경동(文敬仝)이 문과에 올라 예천군수와 청풍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들은 영주남쪽 남산 고개 넘어 초곡(草谷. 지금의 조암리)에서 크게 번창한 가문이다. 이퇴계선생의 부인 허(許)씨는 문경동의 외손녀가 된다.
동강선생 삼부자가 서천하류 지천굽이에서 낚시를 드리우던 부정탄(副正灘)이 지금도 남아있고, 송인창선생 아호가 귀암(龜巖)인 것을 보면 그가 동구대를 얼마나 애완하고 아꼈던가를 알 수 있다. 삼부자는 단종임금을 사모하여 화천(禾川)에 대(坮)를 쌓고 매월 초하루 보름 영월을 향해 네 번 절하고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고 한다.
신축년(1961년)수해복구 대책본부에서는 동구대가 장마에 서천의 물길을 막은 결정적 장애요인이라고 지목을 하여 동구대를 완전히 헐어버리고 거기서 나오는 석재로 신설하는 제방에 돌 부침용으로 사용 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일이었다. 수해복구도 중요하지만, 동구대는 이 고장의 중요한 문화유적이며 영주의 상징물이다.
동구대 위에 봉송대(奉松臺)는 안동권씨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선생이 고려 말 벼슬에 있다가 이조혁명에 불복하여 안동으로 낙향, 은거한 분으로 이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산수에 묻혀 유유자적하다가 뒤에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겨 와서 동구대 위에 봉송대(송악을 받든다는 뜻)를 짓고 절의정신을 받들었다. 위에서 동구대와 서구대를 장황하게 거론한 뜻도, 그만큼 상징적인 가치와 영주의 정서를 깊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영주읍의회 의장을 지낸 송시익(宋時翼)선생은 수해복구사무소를 찾아가서 동구대 제거는 영주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음을 거듭 강조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논의 하던 중, 한절마을(가흥동)뒤 구수산 끝자락을 절단하여 물길을 서편으로 돌리기로 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동구대 거북머리 앞으로 중앙선철길이 지나가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다. 서천과 동구대와 서구대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오면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을 영주와 함께하여 왔다.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영주는 귀산(구성공원)과 동구대, 서천, 서구대(없어졌음), 한절마을 뒷산인 구수산은 모두 거북(龜)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며, 서천도 옛날에는 귀천(龜川)이라고 불렀다 한다.
이점을 영주인은 알아두었으면 한다. 동구대와 구성공원 사이 봉송대 고갯마루에서 동쪽으로 약100여보 가량 떨어진 공원 밑 양지바른 곳에 삼판서 고택이 있었다. 삼판서 고택은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공의 집이였으나, 뒤에 사위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고 다시 외손자 문절공 김담(金淡)에게 물려준 집으로 1970년도 초반까지만 해도 비록 낡고 허술했지만 남아있었다.
지금은 고택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현대식 주택이 들어섰다. 영주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또 하나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수년전에 그 주택(삼판서 고택자리에 지은 집)을 시(市)에서 매입하여 집을 헐어내고 담장을 치고 잔디를 심고 유적비만 세울 것을 건의한 바 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들리는 소문이 삼판서고택을 새로 복원 하겠다는 것이다. 설계도면도 없이 삼판서 고택을 복원하겠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또 복원장소가 원래 삼판서 고택이 있던 장소에서 수백 미터가 떨어진 곳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10월에 본래의 삼판서 고택과는 전혀 모습이 다른 집을 서천 언덕마루에 정면 6칸 측면 7칸으로 짓고 말았다.
그것도 삼판서 고택의 기둥하나, 서까래하나, 주춧돌하나 보태지 않고 집을 지었으니 역사를 왜곡한 셈이다. 지금 사람들이 이집을 보고 삼판서 고택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곡에서 ‘왜(歪)’자를 보아도 不(아닐 불)밑에 正(바를 정)이 붙어서 바르지 않다는 것을 <歪왜>로 표시하고 있다. 이 내막을 후세사람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이 거창한 역사는 단순한 수해복구공사의 차원을 넘어서 대영주 건설을 구축하는 사업이라 하여도 무방하다. 이와 같은 역사를 수행함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인들 어렵지 않고 힘들지 않는 것이 없었겠지만 한절마을(가흥동)뒷산 구수산 끝자락을 절단하는 공사야 말로 힘이 많이 드는 난공사였다.
산을 끊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그 산의 지질이 암석도 아니고 흙도 아니고 다루기가 매우 힘이 든다는 마사토가 대부분이어서 공사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업자가 공사를 하다가 마사토를 만나면, 공사업자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마사토에는 다이너마이트도 맥을 못 쓰고 다만, 마사토를 조금씩 뜯어내는 정도라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좋다는 공병대의 중장비도 위력을 발휘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사용한 화약 값이 당시 돈으로 2천만 환이 넘었다고 한다. 봄이 오기 전에 서천의 물길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더운 여름과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는 모진추위와 거센 풍기 바람에도 공사를 강행하였다하니 국군장병들의 노고가 너무나 컸다.
국군장병들은 휴식도 없이 필사적으로 복구에 전력을 다했다. 그때 영주지방 유지들은 수해복구를 위하여 밤낮으로 고생하는 국군장병들을 위하여 칠사회(七士會)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七>은 七月을 뜻하고 <士>는 十一(11일)을 뜻한다고 했다. 수해가 일어난 날이 7월 11일이다. (七월 十 一 日) 회장에는 행모병원원장 정준(鄭浚)박사이고 부회장에는 전 영주읍의회 의장 송시익(宋時翼)선생이 맡았다고 한다. 칠사회(七士會)에서는 비용을 마련하여 수고하는 국군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음식을 만들어 연회를 베풀기도 하고 가을에는 안동 풍산에 가서 무 배추를 사서 기관장과 유지부인들이 김장을 하여 전달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 때는 찹쌀로 찰떡을 만들어서 국군장병들에게 대접을 하였고 가끔씩 노래자랑도 열어서 국군장병들의 노고를 위로하기도 하였다. 750여명 국군장병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9개월에 걸친 수해복구공사와 한절마을(가흥동)뒷산인 구수산 끝자락을 절단하는 공사가 마침내 1962년 3월 30일 완공되었다.
1962년 3월 31일 오전 10시 공설운동장(지금의 영주동 주공아파트)에서 영주수해복구공사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박정희(朴正熙)국가재건회의 의장이 치사를 하였다. 영주는 비로소 수해에 대한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들판과 물길자리는 모두 시가지로 변하여 오늘의 신영주가 되었다. 영주대수해의 복구기간은 1961년 7월 17일부터 1962년 3월 30일 까지 8개월 13일 만에 공사가 끝이 났다. 기간 중, 삼복더위와 혹한의 추위를 무릅쓰고 밤낮없이 노력한 국군장병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이 영주초도순시 때 지시한대로 한절마을(가흥동)구수산 끝자락을 절단하여 서천의 물길을 성공적으로 돌려놓았다. 제방도 튼튼히 돌 부침을 하여 견고히 쌓았다. 이로서 영주는 수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국군장병들의 복구실적은 다음과 같다.
* 투입병력: 737명(133공병대대 589명, 해병 1상육사단 137명, 정비중대 11명)
* 사업별 실적
. 주택: 615동(상가 35동, 일반주택 192동, 농가주택 388동)
. 토목공사 631m, 교량시설 204m, 배수, 취수문 11개소,
. 제방축조 8,508m, 사방공사 4개 지구, 산 절개(가흥동) 1개소.
* 연인원(기술자 및 인부): 51,038명.
* 소요예산: 5억 6천만 원.
서천이 흐르던 자리와 넓은 들판은 모두 시가지로 변하여 원래의 영주시가지 보다 더 넓은 신영주라는 신도시가 탄생을 했다.
1980년 4월 1일 영주가 시(市)로 승격이 되자, 신영주에 시청을 지어서 옮겨갔다. 영주의 진산인 철탄산 아래 영주군 자리는 이 지역의 최고명당으로 이름난 곳이며 옛 관아(官衙)였던 곳을 비워버리고 왜 신영주로 시청을 옮겼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축년(1961년)영주수해사건은 영주의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1955년 영암선이 개통되면서부터 강원도 탄전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고, 따라서 영주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영주역에는 사람과 물자수송으로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원래 관문이 바빠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이라 했다. 전국각지에서 강원도 탄전으로 이사를 들어가는 인구가 날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뒤이어서 식량, 부식, 기타 일반 생필품 등이 대량으로 줄을 이어 들어갔다.
한편 강원도탄전에서 무연탄을 싣고 나오는 화물열차가 꼬리를 물고 줄을 이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철도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영주의 상권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강원도 탄전의 노무자가 십여 만 명이 넘었다.
영암선 개통 전에 우리나라 무연탄 수급과정을 살펴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강원도 탄전지대(철암역과 도계역등)에서 무연탄을 열차에 싣고 묵호항으로 운송을 하면 묵호항에서는 선박에 옮겨 싣고 포항, 부산, 목포, 군산, 인천 등 항구로 운송을 한다. 각 항구에서는 다시 자동차 혹은 기차로 수요지까지 공급을 하는 실정이었다.(철암~묵호 간 철도는 1940년 개통됨.)
따라서 영암선이 개통되면서 무연탄 물류비용이 톤당 2,328환에서 260환으로 크게 절감되었고 운송시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축이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원동력인 무연탄 수송의 중심에는 영주가 있었다.
한편,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등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영주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열차연결이 가능하였으니 영주역전은 언제나 인파로 넘쳐났다. 기차표가 매진되면 하루를 더 영주에서 묵어야만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영주역전에는 수많은 여관과 여인숙과 식당과 유흥가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는 역전에 나오면 구경거리가 많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구두 닦는 소년들만 수십 명에 달했다.
영주역 화물취급소에는 강원도 탄전으로 물품을 발송하는 상인들로 늘 복잡했다. 심지어 ice cake까지 강원도 시장을 석권했다. 영암선이 개통된 후, 동해안에서 잡은 싱싱한 생선들이 아침에 묵호항을 출발하여 한낮이면 영주역에 도착했다.
그동안 영주사람들은 소금에 절인 간 고등어와 조기, 꽁치, 멸치, 말린 새우, 상어고기, 마른오징어, 기타 건어물과 미역 등을 해산물로 알았는데,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통 고등어, 정어리, 꽁치, 상어, 산 오징어, 산 문어, 소라, 대게, 새우, 물미역 등 처음 보는 해산물들이 날마다 공급되었다.
당시에 묵호 생선장수 아주머니들은 낮에 영주에 도착하여 생선을 다 팔고 오후 기차로 묵호에 갔다가 그 이튿날 다시 싱싱한 생선을 가지고 영주에 와서 장사를 했다. 영주문어는 지금도 유명하다. 이것도 그때 묵호아줌마들이 가지고 온데서부터 유래가 되었다.
동해안의 싱싱한 생선은 영암선을 타고 영주에 와서 다시 열차를 갈아타고 서울, 대구, 대전 등 내륙지방 시민들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었다. 이 역시 영암선개통의 덕분이었다.
1966년 영주역이 한창 번성할 무렵 영주역에서 ‘삭발의 모정’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이 영화의 story는 영주의 실화이다. 내용은 <군대에 갔던 아들이 첫 휴가를 왔는데 쌀이 없어서 아들에게 따뜻한 밥한 그릇을 지어 먹이지 못하는 어머니가 곱게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서 판돈으로 쌀과 고기를 사서 아들에게 밥상을 차려 주었다.>는 내용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인 어머니는 ‘반여옥’ 여사이고 군인이였던 아들은 ‘강종준’으로 당시에 철탄산 아래서 살았다고 한다.
“단 하루도 너 없이는 잠 못 드는 나였건만/너 하나 주린 창자 밥한 술 못 먹이고/눈물로 손목 잡는 이 어미의 마음/머리 팔아 지은 쌀밥/먹는 모습 즐거워라.”-<삭발의 모정 주제가>
영암선이 개통이 되고 영주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경북북부지역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962년에는 봉화에 있던 세무서가 영주로 나왔고 같은 해 태백건설국이 영주에 신설되었으며, 같은 해 강원도 장성(長省)에 있던 대한석공임무소가 영주로 나왔고, 1964년 삼척과 안동에 있던 철도국이 통합되면서 영주로 옮기게 되었다. 1966년에는 경북선이 개통되어 명실공히 우리나라 교통중심지가 되었다.
뒤이어 연초제조창, 노동부사무소, 영림서, 직업훈련원(지금의 한국폴리텍대학)등이 차례로 영주에 들어왔다. 1955년 12월 30일 영암선이 개통되어 번영을 거듭하던 영주가 1975년 12월 5일 제 2산업철도인 태백선이 개통되면서 영암선의 물동량이 급격히 떨어졌다. 1973년 12월 23일, 이미 영주역은 신영주에 신축한 새 영주역사로 이전을 하였었다.
태백선은 영암선보다 강원도 탄전지대와 동해안이 가깝기 때문에 무연탄과 해산물 수송은 거의 태백선을 이용했다. 만 20년간 영암선과 영주는 조국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 하였고, 영주역 역시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이 컸었다.
이성가(李成佳) 장군은 신축년(1961년) 영주대수해가 일어났을 때 영주수해복구 통제관으로 부임한 분이다. 5.16 군사혁명이 일어 난지 불과 56일 만에 일어난 수해사건에 혁명정부는 복구와 민생안정에 신속하게 지원하였다. 이성가(李成佳)장군은 1922년생으로 만주에서 출생하여 중국남경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서 근무하였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27세에 연대장으로 여수, 순천반란사건을 진압하고, 1949년~1950년까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태백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으로 근무를 했다. 이때 이성가장군은 영주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29세에 육군 제8사단장으로 영천전투에서 역사에 빛나는 승전의 공을 세웠다. 뒤에 정보참모부장, 제5군단장을 거쳐서 40세에 육군대학총장에 재직 중인 1961년 7월 영주수해복구통제관으로 부임하였다.
수해복구공사 중, 신영주 꽃동산에서 예천방향으로 서천을 건너는 가흥교(可興橋)건설공사가 있었다. 이 다리를 건설할 때 수해복구통제관인 이성가(李成佳)장군의 업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교량이름을 가흥교(佳興橋)라고 기록하여 세웠다. 원래 가흥교는 <가(可)>자를 써야 맞지만 <가(佳)>자를 써서 이성가(李成佳)장군의 업적을 찬양하고자 함이었다고 하니, 역시 선비의 고장답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교량이 개통되고 세월이 흐른 뒤에 주민들의 뜻으로 다시 가흥교(可興橋)로 고쳤다고 하니, 뒷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성가(李成佳)장군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을 하여 멕시코, 터키,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하고 제 9대 국회의원을 지났다. 그가 영주와 관련된 업적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있다.
태백건설국이 강원도 영월에 설치가 거의 확실시 된 것을 1962년 영주로 유치를 하였다. 이로 인해 영주가 태백지구의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내륙거점도시로 기반을 다졌다. 한편 영주의 오랜 숙원이던 봉화의 내성세무서를 영주로 이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영주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이성가(李成佳)장군은 1975년 12월 고혈압으로 한창 활동할 수 있는 54세를 일기로 별세를 하였다. 그의 공덕비가 구성공원 한 모퉁이에서 영주 시가지를 내려다 보고 있다. 그는 영주를 제2의 고향이라고 하였지만 가족과 함께 영주에서 몸을 담고 살아보지는 못했다.
영주수해복구공사는 영주시민들의 기대를 훨씬 넘어서는 차원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첫째, 서천을 서편 외곽으로 돌리기 위해 한절마을(가흥동)뒤 구수산자락을 절단하여 수해로부터 영구히 벗어나게 하였으며, 둘째, 남산들을 개발하여 본래의 영주 시가지보다 더 큰 신도시를 조성하여 명실 공히 경북북부지방의 거점도시로 규모를 갖추었고, 셋째, 서천의 물길이 지나가던 자리는 모두 도로가 되고 상가와 택지가 되어 새로운 영주시가지를 조성하였다.
그밖에 주택건설과 보수, 도로정비, 교량가설, 제방축조, 사방공사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었다.
한편 아쉬움으로 남는 일도 있다. 이번 수해로 영주는 완전 삼등분이 되고 말았다. 영주역이 신영주로 내려가면서 영암선선로와 중앙선 선로가 삼각형을 형성하면서 <삼각지>라는 특수한지역이 생겨났다. <삼각지>는 외부와 고립된 작은 동네로 남았다.
따라서 영주시가지 전체가 동(東)은 휴천3동 일부, 하망동 일부, 휴천1동, 남산초등, 대영학교 부근이고 서(西)는 신영주일원이며, 북(北)은 옛 영주시가지와 구성공원부근으로서 완전히 3지역으로 분리가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도시발전의 저해와 주민생활이 불편하게 되었다. 수해복구 작업을 할 때 중앙선과 영암선을 안정부근에서 완전히 외곽지역으로 옮길 것을 여러 번 건의 하였으나 성사를 시키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개 큰일을 하다가보면 덕(德)을 보는 곳이 있고 해(害)를 보는 곳이 있게 마련인 것 같다.
이번 영주수해복구 공사를 마치고나서 영주도 양면성이 나타났다. 한절마을(가흥동)뒤 구수산자락을 절단하고 서천을 돌리는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이 한절마을(가흥동)청도김씨(淸道金氏)집성촌이다.
먼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이 모두 새로 물길을 내는 하천바닥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음은 마을 한가운데 큰 호수가 생겨서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주민들이 생활하는데 여러모로 피해를 주었다.
한때는 유원지가 되어서 보트를 타고 뱃놀이를 즐기며 행락객을 불러 모으는 유원지가 되어서 시끌벅적했던 시절이 있었고, 한때는 이 호수가 낚시터가 되어서 태공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특히 밤낚시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도 젊은 시절에 이곳에서 대어의 꿈을 꾸던 곳이다.
이 마을은 청도김씨 병산(병山) 김난상(金鸞詳)선생 후손들의 집성촌으로 삼백 여 년을 지켜온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병산 선생은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국정을 어지럽히는 권신들을 멀리하였고 우국충정으로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 후손들이 선조(宣祖)무렵에 영천 휴천(休川)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옮긴 지는 인조(仁祖)무렵인 듯하다.
동네 가운데 있던 호수는 매립돼 아파트가 들어섰다. 반세기 동안 영주의 모습도 많이 변했다.
넷째, 동구대의 문제를 어찌하면 좋을까? 동구대 거북머리 앞으로 중앙선 철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요란하게 달리고 있다. 영주의 상징인 귀산(구성공원)은 거북이의 몸통이고, 동구대는 거북이의 머리로 서천은 거북이가 마시는 생명수였는데, 물길을 돌린 지 반세기가 넘었다. 거북이는 58년 동안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했다. 그렇게도 활기 넘치던 영주가 지금은 기진맥진하여 걸음을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지칠 대로 지친 거북이는 더 이상 영주를 끌어갈 힘이 없다. 아득한 옛날부터 귀산(구성공원)은 영주를 굳건히 지켜왔고,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을 함께 하였다. 이제는 수해 당시를 알고 있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신축년(1961년)에 내가 19살이었는데 어느덧 76살이다. 오늘도 거북이는 물 한 목음을 애타게 기다린다.
5.16군사혁명이 일어 난지 불과 56일 만에 수해가 일어났다. 혁명정부에서는 신속하게 대응하여 치밀한 계획으로 기대이상의 수해복구를 완성하고 새 영주건설도 이루어 내었다. 국군장병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
신축년(1961년) 영주대수해사건은 영주가 생긴 이래 두 번째로 큰 사건이다. 첫 번째 사건은 1457년의 순흥의 정축지변(丁丑之變)이다. 정축지변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부사 이보흠(李甫欽)이 주도한 단종(端宗)복위의거다.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자 금성대군과 부사 이보흠은 사사되었고, 순흥 백성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으며 부(府)는 혁파시켜버렸다. 그로부터 226년 뒤, 1682년(숙종8)순흥부가 복설되었다.
영주는 이 땅에서 억울하게 죽은 순흥 백성들을 위하여 사당(祠堂)한 칸 마련하지도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1453년(단종2. 계유년)에 일어난 계유정난과 1456년(세조2) 사육신 단종복위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세조의 정권에 반대하여 조정의 많은 절신(節臣)들이 이곳 영주로 모여들었다.
그 이유는 금성대군이 순흥에 유배를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절신 후손 이십 여명이 한자리에 모여서 그 옛날 선조님의 숭고하신 정신을 상기하고, 오늘의 현실을 토론하면서 늦었지만 후손들만이라도 최소한의 예(禮)를 갖추어 보자고 의미깊은 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나 몇 년 못가서 한계를 넘지 못했다. 뒷받침이 없으면 어떤 일이든지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영주대수해사건은 영주역사에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나 영주사(榮州史)어디에서도 이 기록을 소상하게 밝힌 곳을 보지를 못했다. 이 글을 남기기 위하여 선배님과 친구들을 수시로 찾아다니면서 당시의 사태를 하나하나 뒤돌아 살펴보고 의논하며 정리했다.
여기에 도와주신 고마운 분의 이름을 적어둔다. 송창환님, 이세호님, 박회웅님, 김창수님, 박유서님, 우경달님, 김백님, 김상훈님 외 여러분이다. 이제 당시를 살던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끝>
영주시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