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덟 번째 간 곳
● 명 동 성 당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이며 순교자 유해가 모셔진 곳
명동 성당은 서울대 교구 주교좌성당이며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수표교의 이웃이자 여러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며, 명례방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다.명동 성당이 설정된 것은 1882년경으로 알려졌지만 이곳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0여 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해 초겨울부터 수표교(현 종로구 수표동)의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현재 명동 부근인 명례방 소재 중국어 역관 김범우(金範禹, 1751~1786?, 토마스)의 집(현재의 명동 성당 일대)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정약전,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부자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열었는데 이로써 처음으로 조선 교회를 창설하였다.
명동 성당 건립은 1883년 무렵 김 가밀로의 명의로 종현 일대의 대지를 구입하며 시작되었다, 당시의 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1884~1890, 요한) 주교는 우선 신학생 교육을 위한 종현 학당(인현학교, 한한 학교 등으로도 불림)을 설립, 운영하였으며, 이후 풍수지리설과 관련하여 한국 정부와 토지 분쟁이 있었으나, 1890년 이를 마무리 지었다. 블랑 주교의 뒤를 이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1892년 8월 5일 기공식을 갖고 한국 교회를 위해 일했던 주교와 선교사, 은인의 명단을 머릿돌 밑에 묻고 머릿돌을 축성하여 고정시켰다.성당의 설계와 공사의 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아 진행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프와넬 신부가 업무를 이어받아 성당 건축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대축일에 성당 축성식을 갖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명동 성당이 준공된 후 그 지하 묘역에는 기해·병인박해 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안치해 왔다. 지하 성당은 성당 제대 하부에 위치하여 예배 장소와 성해 안치실로 쓰이는 곳으로, 성당 건립 초기에는 9개의 제대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현재 명동 지하 성당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와 성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 성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의 유해 일부와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고 1984년에 시성된 성 김성우(金星禹, 禹集, 1795~1841, 안토니오), 성 최경환(崔京煥, 보명 永訥, 1805~1839,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1830~1866, 가롤로) 신부 및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德老, 1828~1866, 미카엘) 신부의 유해와 1839년에 순교한 무명 순교자 2명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그리하여 이곳 지하 성당은 모두 5명의 성인과 4명의 순교자를 모시고 있다.
아홉 번째 간 곳
● 광 희 문
박해 당시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내던져 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
광희문(光熙門)은 박해 당시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체포된 수많은 교우들이 서울 도성 안으로 끌려 들어와서 가혹한 고문과 형벌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치명의 길을 가야 했던 이름 모를 수많은 치명 순교자들의 시신이 이곳 문밖으로 내던져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 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으며, 그때마다 문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가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그러나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대로 버려진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1846년 병오박해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김임이 데레사, 우술임 수산나, 정철염 가타리나 성녀의 시신은 광희문 밖에 버려진 후 신자들이 거두어 매장하였다. 1867년에 포도청에서 순교한 송백돌 베드로의 시신 역시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서울 성곽은 조선 시대 축성 기술의 변천 과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조상들의 호국 정신이 깃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태조 이성계가 건국과 함께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궁궐과 종묘를 지은 뒤 재위 4년만인 1395년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도성 둘레에 성곽을 쌓아 이듬해 서울 성곽의 원형을 완성했다.서울 성곽은 총연장 18㎞에 이르는 대형급 성곽으로 동서남북에 4대문을 두고, 그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다. 광희문은 서울 중구 광희동에 있는 조선의 사소문(四小門) 중의 하나다. 광희문은 시구문(屍軀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때 묘소 관리 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즉 사람이 죽으면 서울 성곽 안에는 묘를 쓸 수 없도록 하는 제도가 있어서, 일단 그 시신을 서울 성곽 밖으로 이전시켜 묘를 장만하여야 했다. 그리고 시신을 내보낼 때는 서소문과 광희문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광희문을 시구문, 즉 시신을 내어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불렀다.광희문은 1396년(태조 5년)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몇 차례 개축을 거쳐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915년경에 문루가 자연 붕괴된 이래 홍예만 남아 있었는데 1966년에는 문 북쪽의 성곽 일부를 철거하고 도로를 확장하였다. 그 후 1975년 서울 성곽을 다시 옛 모습대로 수축할 때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여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당시 퇴계로 확장 공사로 원래 위치보다 15m 남측으로 밀렸다.
◆ 사소문(四小門)
조선시대 서울 도성에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배치하고 그 사이에 사소문을 배치하였다. 사대문은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그리고 북쪽에 숙정문이다. 사소문은 사대문 사이에 나 있던 소문(小門)을 말한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 : 東小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 水口門), 서남쪽에 소덕문(昭德門 : 西小門),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을 세웠다. 그중 동소문은 1484년(성종 15)에 창경궁을 건축하고 그 동문을 홍화문이라 하였으며 1511년(중종 6)에 혜화문으로 개칭하였다. 그 뒤 1816년(순조 16)에 중수하고 1869년(고종 6)에 보수하였으며, 1928년에는 문루를 헐고 석문만 남겨 두었는데 그 후 전차를 부설하면서 석문마저 철거하여 지금은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수구문은 1711년(숙종 37) 새로이 석문만 건축하고 9년 후인 1720년에는 문루를 지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고, 1975년 도성 복원 공사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광희문 이외에 1457년(세조 3) 지금의 장충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따로 남소문을 축조하였으나 1469년(예종 1)에 풍수지리설에 따라 폐쇄되었다. 서소문은 1738년(영조 14)에 석문을 개축하고 1744년 문루를 건축한 뒤 소의문으로 개칭하였으나 1914년 도시 계획 때 철거되었다. 창의문은 1413년(태종 13)에 폐쇄되었으나, 1741년(영조 17) 성문을 다시 고쳐 짓고 인조반정 공신의 명단을 걸게 하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으며 자하문이라고도 한다.
열 번째 간 곳
● 카톨릭 대학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를 모신 사제 성소의 요람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있는 성신교정은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신학연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성직자들을 배출한 예비 사제들의 사제 성소 요람이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신 성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가 제대에 모셔져 있고,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했던 곳이기도 하다.1855년 충북 배론의 교우 촌에서 성 요셉 신학교로 출발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은 이후 한국 근대사와 역사를 같이하며 박해와 일제 강점, 전쟁의 소용돌이 등 격변의 세월을 거쳐 왔다.
경기도 여주의 부엉 골에서 설립되었던 예수 성심 신학교는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예과 4년과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과정,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과정을 설정하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였다.1947년에는 성신대학(聖神大學)으로, 1959년 2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92년 7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에서 ‘가톨릭대학교’로 개칭하고 동시에 신 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하고, 1995년도부터 가톨릭대학교와 성심여자대학교 측이 통합하여 가톨릭대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성신교정에 신학대학이 있으며, 서초구 반포동 성의교정에 의과대학과 간호대학이, 경기도 부천시 성심교정에 인문·사회·자연·공학·예능 계열의 학과가 배치되어 있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 지 40일 만에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후 한국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자, 1901년 5월 21일에는 무덤을 발굴하여 그 유해를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 안치하였고, 10월 17일 이를 다시 신학교 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60년 7월 5일에 그 유해가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성당으로 옮겨지면서 하악골만은 미리내 경당으로, 치아는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분리 안치되었다.김대건 신부는 일찍이 마카오 신학교 시절에 온갖 난관을 인내와 용기로서 극복하고 마침내 1845년 8월 17일 한국 교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로 서품됨으로써,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모든 신학생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성신교정 성당은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셔 놓은 거룩한 곳이며, 또한 1984년 5월 3일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해 미사를 봉헌했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발전
한국 가톨릭 신학교의 발전은 두 가지 관점으로 그 기원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먼저 한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 교육을 언제 시도했느냐 하는 관점과 또 하나는 언제 가톨릭 신학교를 설립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느냐 하는 관점이다.
최초의 신학 교육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 이후, 우선 국내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 교육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기원은 1839년 기해박해로 순교한 3명의 프랑스 성직자와 신학생으로 선발된 정하상(丁夏祥, 1795~1839, 바오로), 이재의(李在誼, 1808~1868, 토마스)와 그들의 동료 2명에게까지 소급될 수 있다. 또한 한국 교회 설립 이후 한국인으로서 국외에서 최초의 가톨릭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은 1836년 마카오에서 수업을 받았던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과출,1821~1837,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고, 이중에서 김대건과 최양업은 신품성사를 받고 귀국하여 사제로 활동하였다. 1850년 무렵부터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eol,高, 1808~1853, 요셉) 주교의 지시로 처음에는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신부가 용인 손골과 진천 배티에서, 후에 최양업 신부가 배티 등에서 몇몇의 신학생들에게 라틴어와 한문을 가르쳤던 일, 1854년 메스트르(Maistre, 李, 1808~1857, 요셉) 신부가 배티 신학교의 신학생 3명을 모두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일 등도 모두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려는 신학 교육의 일환이었다.
한편 2005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설립 150주년 기념 화보집으로 제작한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1855~2005》에 의하면, 1855년 충청도 제천에 세워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당에 현재의 가톨릭대학교의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근대적 서구 문물과 함께 도입된 서구식 신학 교육의 출발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885년 10월 28일 강원도 원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설립된 예수 성심 신학교에 그 기원을 둘 수 있다. 부엉골 신학교는 교명, 교수진, 학생, 설립 이념 등을 감안할 때 현재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고 있다. 1886년 한불 조약 체결 이후이 신학교는 1887년 3월 서울 용산(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으로 이전하였다. 중등과 3년, 철학과 2년, 신학과 3년 과정으로 철학, 신학뿐만 아니라 라틴어, 한문, 역사, 지리, 천문 등을 가르쳤으며,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리우빌(Liouville, 柳達榮, 1855~1893, 아나톨)신부가 초대 교장직을 맡았었다.
지방 신학대학의 설립
1911년 4월 대구대목구의 설정과 함께 1914년 10월 대구에도 성 유스티노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27년 베네딕도 수도회에 의해 함경도 덕원에 대신학교가 설립되어 덕원, 서울, 대구에서 각각 한국의 북부, 중부, 남부의 대신학교 교육을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1929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로 개칭하고 전 문부 3년과 대학부 4년을 두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 서울의 예수 성심 신학교는 폐교되었다가, 1945년 2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로 개칭하고 설립 인가를 받아 예과 4년과 고등과 2년의 중등 교육과정, 본과 4년과 연구과 2년의 고등 교육과정을 설정하였다. 이러한 교육과정을 갖추고 해방 후 혜화동에서 정식으로 개교하여 남한 출신의 신학생들과 덕원 신학교에서 피난 온 신학생들과 해외 유학에서 돌아온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종합대학교로의 발전
1947년 성신대학으로, 1959년 2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으로 변경하여 인가를 받았고, 신학부와 의학부의 편제를 두게 되었다. 1972년부터 성직 희망자가 아니더라도 가톨릭 신학을 전공할 수 있도록 수도자와 평신도에게 입학이 허가되었고, 여학생에게도 입학이 허가되는 남녀 공학으로 학제를 개편하였다. 1992년 7월에는 교명을 가톨릭대학에서 가톨릭대학교로 개칭하고 동시에 신 학부를 신학대학으로, 의학부를 의과대학으로 재편하고, 1986년부터 제기되어온 성심여자대학교와의 통합을 통한 종합대학교로 전환하는 데 노력하여, 1993년 12월 양측이 통합에 정식으로 합의함으로써 1995년도부터 가톨릭대학교는 명실상부한 가톨릭계 종합대학교로 부상하게 되었다.
2번째
순례의 향기의 소감의 글은 내 개인 생각은 접어두고
순례지의 특징, 역사중요성, 순교자의 생애의 글을 중점으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여기에 쓴 글과 사진들은 내개인 사진과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 및 ‘굿 뉴스 ’에서 따온 글임을 밝히면서 많은 ‘청주교구 사도성 야고보 순례단 ’ 회원님들의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런 형식의 글을 쓰려고
노력을 할 것 입니다.
2016. 1. 9. 서울성지순례를 마치며
김홍숙 혜레나
|
첫댓글 두번째 서울순례 체험기 - 둘째 글
서울대교구 성지를 순례하시고 다녀오신 발자취를 이해하기 쉽게 기술, 카페에 게시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 특히 가톨릭 신학교 발전과정을 여러 문헌을 보시고 정리하여 잘 이해 하였습니다.
야고보 순례단 회원님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