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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 조디악 등반기
첫날. 2012.11.26.(월)
우리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한 건 11.26(월) 오전 11:30분이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후배와 10여 년 만에 재회하는 행운을 만났다. 성두가(이알 강사) 예약해둔 두 대의 렌터카에 나눠 탔다. 국제마트에 들러 고기 등 식품을 구입하고 요세미티로 향했다. 4시간 가까이 걸리는 먼 길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8도에 이르렀던 온도는 요세미티 공원을 1시간가량 앞 둔 마리포사 그로브 마을 언덕을 넘어서자 거짓말처럼 2도로 뚝 떨어졌다. 마리포사 마을의 카페와 길 가 건물에는 성탄과 새해를 축하하는 형형색색 전등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어 이방인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잠깐이라도 멈춰 작은 카페에서 차라도 한잔 하고 싶었으나 그냥 지나쳤다. 마을을 지나자마자 미처 매트리스를 구입하지 못한 걸 깨달은 우리는 서둘러 달렸으나, 캠프 4 장비점 마감시간을 넘기는 바람에 그날 밤은 매트 없이 그냥 자기로 했다. 어둠 속에 우뚝 선 엘 캐피탄을 지나쳐 왔는데 묵중한 질감이 느껴졌다.
캠프 4에 도착하니 밤 9시. 우리는 서둘러 주변의 나무들을 모아 불을 피웠다. 시즌이 지나서인지 야영장에는 텐트 두 개 정도가 있을 뿐, 조용했다. 하늘엔 보름달이 떠있었으나 별이 총총히 보일 만큼 맑지는 않았다. 날씨는 영상 5도 정도로 예상보다 따뜻했다. 모닥불에 소고기를 구워 술 한 잔씩 하고 이알학교에서 빌려온 커다란 돔 텐트로 들어가 잤다. 흥용이(이알26기)와 나는 커다란 나무 아래서 비박했다. 긴 여행 탓인지 이역異域의 낯섦 없이 곧장 잠들었다. 동욱(이알 31기)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날을 새는 것 같았다.
둘째 날, 11.27(화)
일찌감치 눈을 떴으나 아직 어두워 침낭 안에서 뒤척거렸다. 7시경 슬그머니 날이 밝아왔다. 나는 일어나 주변을 산책했다. 야영지 뒤쪽으로 높고 육중한 검은 바위 꼭대기 부분부터 노란 햇빛이 들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새벽 새들이 짖어댔다. 큼직한 바위들이 야영장 주변에 널려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야영지 관리 부스에 가니 일주일 날씨 예보가 창에 붙어있다. 내일부터 주간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였다. 30-40% 정도의 강우확률이라면 안 올 수도 있겠거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늘은 요세미티 지리에 익숙한 성두의 안내에 따라 주변 탐색을 하고 매트리스 등 장비를 구입하기로 했다. 엘캡이 한 눈에 보이는 뷰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노즈를 기준으로 좌우측에 등반길이 즐비했다. 우리가 오를 노즈와 조디악을 봤다. 노즈는 서양사람 콧등처럼 쭉 빠졌다. 미끄러운 바위가 느껴질 정도로 밋밋해 보였다. 성두의 설명을 따라 조디악을 보니 커다란 원, 서클 그레이가 보이고 그 안에 니플이 보였다. 저기에 반드시 올라타리라 맘먹었다. 그 위 서클 그레이를 막 벗어나서 마크오브조로가 정말 조로의 칼자국처럼 역Z자로 그어져있었다. 데블스 브로우, 피넛 릿지까지 본 나는 할 만하다는 자신감과 막상 붙으면 만만찮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동시에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배가 고파 뭘 먹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요세미티 바위 위에서 작은 물줄기가 곳곳에서 내려왔다. 그 중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요세미티 폴을 구경했다. 거리가 멀어 크기를 가늠할 수 없어서인지 크다는 느낌보다는 가느다랗게 엮인 긴 명주실 묶음 같았다. 공원 내 가장 볼 만하다는 글레이셔 포인트는 얼마 전 내린 눈 때문에 도로를 막아서 가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꽤나 섭섭해했지만, 요세미티가 내 땅 설악이 주는 감흥에 미치지 못함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나는 섭섭하지 않았다. 요세미티 정경에 대한 나의 감상은 등반을 마치고 떠나오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내내 나는 설악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커리 빌리지로 가서 장비점에 들렀다. 엘캡 등반을 가면 야영지인 캠프 4, 샤워실과 장비점, 마켓이 있는 커리 빌리지, 좀 더 큰 마켓이 있는 요세미티 빌리지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우리는 샤워실이 있는 커리 빌리지를 주로 이용했다. 캠프4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매트 등 각자 필요한 장비와 가스통 등을 구입한 뒤 마켓에 들러 고기와 위스키 같은 먹을 것을 산 뒤 돌아왔다. 오후가 되면서 비가 오락가락했다. 저녁에 술과 고기를 곁들여 등반논의를 했다. 마켓에서 구입한 장작(10불 정도로 제법 비싸다)은 너무 잘 타서 주변의 나무를 주워 태웠다.
가랑비를 맞으며 옹기종기 둘러앉아 저마다 의견을 제시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점점 비는 더 많이 내린다. 우천 시 포기할 것인가, 강행할 것인가, 분분하였다. 계획했던 노즈와 조디악, 2개 루트 등반을 접더라도, 조디악 등반만이라도 성공하는 쪽으로 계획을 잡기로 의견 일치하였다. 내일 비올 확률이 30%니까, 30% 확률에서 어느 정도 비가 오는지 확인한 뒤에 다시 의논하기로 했다.
셋째 날, 11.28(수)
어제 저녁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으나, 시차적응이 안돼서인지 밤 11시 30분경 다들 깨어났다. 때 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가랑비가 제법 쌀쌀한데 우리는 도수 높은 서양 위스키와 한국 위스키 소주를 마시며 동욱이와 흥용이가 쉬지 않고 해대는 음담을 들으며 키득거렸다. 어지간히 마시고 떠든 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흥용이와 함께 작은 텐트에서 잤다.
새벽에 눈을 떴다. 시계가 없는 나는 시간을 알 수 없다. 나와 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예보와 달리 날이 좋은 거 아닌가 하는, 그러면 등반이 가능한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야영지 주변을 서성이는데, 텐트 안에서 동욱이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잠을 잘 못 자고 밤새 모닥불을 피우며 비를 맞더니 감기가 들었나 싶어 걱정이 됐다. 종일 부실부실 비가 내렸다. 비는 텐트 안을 추적추적하게 하고 침낭을 축축하게 만들어 기분까지 찜찜했다. 그래도 30%의 강수확률에 이 정도 비면 내일은 20%대니 날씨가 비교적 좋을 거라고 짐작했다. 이후 날씨가 어떨지 모르지만, 하루라도 시간을 벌자는 계산으로, 내일은 조디악 1피치에 등반장비를 데포하기로 했다. 바위 상태나 상황을 잘 모르는 나는 계속하여 비가 온다는 예보 때문에 데포한 장비의 안전을 우려했으나, 경험 많은 성두의 의견에 따랐다. 우리들 머리 위 하늘에 떠있는 밝은 달에도 불구하고 가는 비는 끊임없이 내렸다.
넷째 날, 11.29(목)
새벽 5시에 일어나니 다행히 비가 그쳐있었다. 오랜만에 맑은 하늘을 보는 우리는 등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서둘러 장비를 챙겨 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조디악 입구로 갔다. 바위 하단까지는 약 1시간이 걸린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은 힘들었다. 그래도 등반 기대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중단을 오르면서 밝아오는 여명에 모습을 드러내는 안개에 휩싸인 요세미티 정경은 그 거대함이 새로웠다. 너무도 신선한 공기가 가슴으로 들어올 때는 일정한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아래 세상의 감상과 더불어 캠프에서 후줄근했던 마음마저 상쾌해졌다.
먼저 하단에 이른 나는 멀리 휘돌아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길, 어디서든 길을 보면 나는 나그네가 된다. 나는 무엇을 찾아 예까지 왔는가, 길과 앞에 드리운 산과 묵중한 바위들에게 물었으나 답이 없었다. 답을 찾기엔 일렀다. 아직 벽에 붙지 않았고 따라서 아직 벽을 모르는, 나는 아직 이 산과 바위와 아무 관계없는 상태인 것이다. 관계를 맺은 후, 다시 물어볼 것이다, 왜 나를 불렀느냐고. 뒤돌아 조디악을 올려다봤다. 위에 고인 빗물이 흘러내리는지 만만찮은 물줄기가 끊임없이 흩뿌렸다. 바위가 묵직하다고 느꼈으나 위압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다 올라왔을 때 날은 완전히 밝았다.
산에 오르다 보면 산 전체에 대한 조망이나 의미보다는 첫 피치나 마지막 피치 등반, 선등 여부 등 부수적인 어떤 것에 집착하여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등반을 일종의 게임으로 인식하거나 함께 오른다는 개념보다는 개인의 성취를 더 중요시하는 성향의 표출이거나, 산의 이런 저런 매력 다 겪은 끝에 더욱 흥미로운 등반형태를 좇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산이라면 그냥 가슴 설레는 나 같은 사람은 아무래도 좋다. 나와 한 팀을 이룰 동욱과 규태가(둘 다 이알 31기다) 지난 며칠 나누는 대화를 유심히 들은 결과, 이번 등반은 31기의 첫 원정등반으로써 동기간에 멋진 등반을 하였으면 하는 희망을 확인한 나는 31기 등반을 돕는 것으로 나의 입장을 정리한데다 원래 성향이 그런지라, 첫 피치건 뭐건 그리 상관이 없었다. 나는 벽 아래에서 두 사람에게, 우리 팀 등반은 31기 등반이니까 먼저 역할을 정하면 나는 뒤에서 돕겠다고 했다. 동욱이가 첫 피치 선등에 나서기로 했다. 결정한 후, 나와 성두를 제외한 사람들은 남은 짐을 가지러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오늘 데포를 위한 등반은 팀과 상관없이 이루어져도 무방하다.
성두가 나의 확보로 첫 피치 등반에 나섬으로 조디악 등반이 시작되었다. 원래 변형 길로 가기로 했으나 나는 성두에게 오리지널을 권했다. 조디악 루트에 몇 개의 변형 길이 있는데 대체로 오리지널보다 쉽고 짧다. 간편의 여부를 떠나 성두를 제외한 구성원들에게 엘캡 첫 등반이니만큼 정상적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루트 맵에는 캠훅을 주로 사용하라고 했으나, 초반에 캠 훅을 끼웠다 빠지는 바람에 살짝 추락한 성두는 이후 씨쓰리와 너트, 버드빅을 사용하였다. 중간 정도까지 지켜보다가 사람들은 짐을 가지러 내려갔다. 40분 정도 걸려 첫 피치를 마쳤다.
2피치는 횡단코스다. 어디서 본 듯한 길, 설악의 홍순파라다이스 횡단코스와 꼭 닮았다. 확보점에 매달려 뒤돌아본 풍경 또한 홍순과 너무 닮아서 여기가 거긴가, 착각을 일으킬 정도다. 서 너 번의 추락 끝에 홍순 길을 넘은 경험이 있는 나에게 2피치는 만만해 보였다. 성두는 적절한 캠을 끼우며 횡단했다. 확보물 사이가 너무 길어 “야, 회수 어려워. 짧게 끊어줘.”라는 나의 농담에 성두는 웃으며 “형, 맞는 데가 없어” 하더니 크랙 사이 박쥐들이 많다며 등반보다는 박쥐와 대화하는 게 재미있는지 “박쥐야, 미안해, 미안해” 하면서 등반을 이어갔다. 2피치를 마칠 즈음, 사람들이 짐을 가지고 올라왔다. 규태의 확보로 동욱이가 등반에 나섰다. 흥용이가 높은 목소리로 동욱의 등반에 추임새를 넣었다. 오가는 대화를 봐서는 처음 몇 동작에서 애를 먹으며 시간을 지체하는 듯했다. 나중에 들으니 이후로는 원만하게 등반을 마쳤다고 한다.
3피치까지 등반을 지켜본 나는 조디악이 결코 만만찮은 길이라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경험이 일천한 내가 역시 경험이 일천한 31기 두 사람과 함께 등반하면 특히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두도 그랬는지 3피치를 마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팀 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안전을 책임질 만큼 조디악을 모른다는 사실이 걱정이라고 했다. 경험이 있는 네가 판단을 내리면 따르겠다고 했다. 내려가서 결정하기로 했다. 두 번에 걸쳐 줄을 내려 하강했다.
동욱이도 무사히 1피치를 마치고 약간 흥분된 상태로 내려와 있었다. 동욱과 규태는 31기 엘캡 등반의 첫 발을 떼었다며 기쁨을 나눴고 우리 모두 축하해줬다. 1피치 점이 좁으나마 작은 지붕벽 아래 있어서 어지간한 비바람에도 젖거나 상할 염려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1피치 점에 두 팀의 짐을 끌어올린 후, 내려왔다. 일찌감치 해가 떨어지는 하산 길은 진작부터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자 비가 내렸다. 지금까지보다 굵은 빗줄기였다. 식사를 하면서 팀을 변경했다. 도상하, 연규태, 김성두 팀, 나머지 이동욱, 박흥용, 심현섭 팀으로 정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60M 로프 한 동을 더 구입해 안전에 대비하기로 했다. 간만의 등반에 피곤한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비를 피한다고 옮긴 작은 텐트에는 되려 비가 더 고여 바닥이 흥건했다. 침낭 커버가 부실한 나는 침낭으로 물이 들어와 발이 축축하게 젖어 꽤나 고생했다. 젊은 흥용이는 뭔 상관있냐는 듯 신나게 잤다.
다섯째 날, 11.30(금)
비가 때 아닌 장마처럼 쏟아졌다. 텐트 속에 있느니 시내구경이나 가자며 나섰다. 원래는 샌프란시스코에 가기로 했으나, 도중에 고속도로를 폐쇄하여 중간에 빠져 나왔는데 마데라라는 소도시였다. 중정과 굵은 기둥의 포치가 있는 일층짜리 벽돌 주택들 뜰에 우리 시골집처럼 야채를 심어놓은 걸 봐서 멕시칸 거주지역인 듯하다. 며칠째 내린 비로 인해 도로 곳곳에 물이 넘쳐 도로를 통제한 곳이 많아 이리저리 우회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디든 변방은 불편하다. 한국 식당을 헤맸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때를 놓친 우리는 마켓에 들어가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웃도어 매장 REI에서 장비 구경하고, 미국의 암장을 탐방하러 갔다. 성두와 상하는 온 김에 운동한다고 하여 남겨두고 나머지는 야영지로 돌아왔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나와 흥용이는 흠뻑 젖은 텐트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화장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잤다. 야영장에 사람이 많지 않아 가능한 일이었다.
엿새째, 12.01(토)
7시에 기상하여 나가보니 잔비가 내린다. 이후 비가 오락가락했다. 오늘 내일은 많은 비가 내린다는 예보다. 모두들 미스트 트레일 트레킹에 나섰으나 우리 팀은 남으라고 했다. 장비 세팅도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고, 계속된 비로 너무 난잡해진 텐트 안을 정리할 필요도 있었다. 무엇보다 임무를 같이 수행함으로 서로를 살피고 싶었다. 장비와 텐트 안을 정리한 뒤 우리는 샤워장으로 갔다. 미국에 온 후 처음으로 면도를 했다. 아무리 피하려 해도 처음 대하는 바위, 엘캡에 대한 두려움을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 두려움의 대부분은 팀원들의 안전하고 원활한 등반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 하는 나이 먹은 사람의 걱정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긴장한 빛으로 초췌했다.
두려움은 간혹 자아自我를 앗아간다.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이 나오거나, 잠재된 표현이 돌출되기도 한다. 조디악 등반을 앞두고 일주일간 우리 캠프에는 어떤 긴장감이 맴돌았다. 비가 오는 가운데 한정된 공간에서 등반할 날을 기다리는 시간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초조하게 했던 모양이다. 시간이 갈수록 절제력이 약화되어 불필요한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난감하게 하거나, 전체를 어려움에 빠뜨리는 일이 잦아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말과 행동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사라져갔으니, 은근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광목에 물들 듯 서서히 우리에게 번졌던 게 아닌가 싶다. 노파심에 밝히는데 이 반성은 어느 개인의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전체의 반성이며, 이후 등반의 진보를 위한 반추反芻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은 경험이 쌓이면서 개선될 여지가 있으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작 내가 안타까웠던 것은 두려움과 긴장, 혹은 개인의 어떤 성향 때문에 산 앞에서 우리가 간직해야 할 미덕美德인 겸손과 경외심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누구든지 언제 어디서든 산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자신의 성향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근거 없는 용기, 즉 객기와 자만의 물줄기를 타고 흐르도록 놔두면 안 된다. 산(자연)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그 과정이 힘겨운 우화羽化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산은 우리가 그토록 소망하는 저 너머 세상에 대한 믿음이며, 오늘 이 순간도 처연凄然하게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지 않은가. 겸손한 경외심만이 산과 동화同化할 수 있는 길이다. 이런 생각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곱째 날, 12.02(일)
밤새 많은 비가 내렸다. 화장실 천장에서 비가 떨어졌다. 화장실 안은 비에 젖은 침낭이며 우모복 등을 널어놓아 빨래터마냥 되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모노 레이크 구경 길을 나섰으나 길을 통제하는 바람에 근처 주유소에서 대기하다 돌아왔다. 번개에 커다란 나무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기도 한 우리는 겁도 났다. 오가는 길은 좋았다. 비 때문에 곳곳에 우뚝 선 바위 전체가 폭포가 되어 굵은 물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요세미티 고지 너른 평원에는 커다란 나무가 습한 이끼에 뒤덮인 채 연무 속에 즐비하였다.
캠프로 돌아온 우리는 텐트 안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등반 논의를 했다. 내일은 등반을 개시하기로 했다. 무작정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에는 이제 시간이 없다. 자칫하면 빈손으로 돌아갈 참이다. 다행히 날씨 예보는 월요일은 맑고 수, 목은 강우확률 40%에 기온은 대략 영상 5도이다. 이 정도면 괜찮다. 우리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의지를 다지며 등반을 위한 마지막 점검을 했다. 기상 5시, 출발은 식사 후 바로 떠나기로 했다.
논의를 마친 후, 나는 짙은 안개에 잠기는 야영지를 둘러봤다. 내일 등반을 떠난다고 하니 새삼 맘이 설렜다. 화장실 앞바닥에 매트를 깔고 드러누웠다. 붉은 던힐 한대를 피워 물었다. 당연히, 여자들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27기 동기들과 사람들이 스쳐갔다. 샌프란시스코 행 비행기 속에서 만난 후배가 떠오르기도 했다. 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부끄럽게 늙었다는 생각을 했다. 깊숙이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 운무 속으로 사라지는 담배연기, 불쑥 등반 중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들 또 어떠냐 했다. 여기 오기 직전, 유양리 등반 갔다가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쓰러졌던 여자애와, 그를 함께 들쳐 업고 구조대에 맡겼던 3월이면 덴마크로 떠난다는 대학생이 떠올랐다. 그것도 인연이라고 돌아가면 사진 한 장씩 보내야겠다는 꽤나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금방 죽음을 떠올렸다, 금방 또 삶의 어떤 계획을 모색하는 이중성, 그 부조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인간사라는 게 그 극단의 추錘에 달려 일정한 원을 그리며 돌고 도는 서커스인지 모른다. 모로 누운 나의 눈에는 길다란 나무 사이 가는 비가 선명하고 좁쌀만 한 새 한 마리, 가지를 넘나들었다. 한국의 슬픈 노래를 읊조렸다. 내일 산에 가는데 오늘 슬프다. 산 꾼 되긴 틀렸다.
늦은 밤, 화장실에 들어가 개인 짐을 펼쳐놓고 꼼꼼히 살폈다. 헤드램프, 건전지, 메모지와 펜, 옷가지. 끝으로 파란 색 바탕 27기 흑거무 깃발을 곱게 접어 챙겼다. 정성을 다해 벽에 붙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다짐하다 잠들었다 깨었다 다짐하다를 반복하며 새벽을 맞았다. 조디악 등반을 여는 첫 날, 2012.12.03. 월요일 새벽 04:20분,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덟째 날, 등반 첫날 12.03(월)
04:20분 기상. 보름 전후인지 달이 둥글고 밝다. 밖에 나가 하늘을 살펴본 후, 성두를 깨웠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깨어났다. 어젯밤 씻어 둔 쌀로 서둘러 밥을 지어 배를 채웠다. 채 날이 밝기 전, 05:30분. 차에 짐을 싣고 캠프를 떴다. 아직 몸과 정신이 온전히 깨어나지 않은 탓 때문인지 서로 말이 없었다. 진입로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짊어졌다. 질흙처럼 캄캄한 산길로 들어섰다. 달빛은 나뭇가지에 가려 길이 어둡다. 큼직한 돌들이 깔린 길은 불편했다. 헤드램프를 켰다지만 가시거리가 2-3미터 정도로 짧은 데다 불편을 피해 길을 잡다 보니 서로 갈라졌다. 나는 어쨌든 위를 향해 오르면 바위아래 이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가끔씩 들리는 서로를 부르는 소리와 무관하게 램프에 비치는 한 치 앞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앞서 올랐다.
며칠 전 짐을 데포하기 위해 올라갈 때와는 사뭇 기분이 다르다. 빗속의 캠프에서 온갖 잡념에 시달린 탓인지 모르겠다. 뭔가 짓눌리는 듯 답답함에 발걸음이 가뿐하지 않다.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등반에 대한 우려와 기대가 수없이 교차했다. 며칠 후 드러날 결과에 대한 타인의 평가가 떠오르기도 했다. 등반은 산과 나의 고독한 대화라고 믿는데, 외부의 시선에 자유롭지 못한 멍에와 같은 이런 의식은 언제나 벗어버릴는지, 긍정적인 부분이 있음을 알지만, 우선은 맘에 걸렸다. 요세미티의 거대한 어둠과 적막은 맘을 옥죄인다. 어서 날이 밝기를 바랐다.
먼저 하단에 다다랐다. 달이 노란 빛을 비추지만 다가오는 여명에 힘을 잃어서인지 아직 짙은 어둠에 싸인 엘캡은 육중한 검은 덩어리로만 보였다. 어줍지 않게 낭가파르파트 앞에 선 헤르만 불을 흉내 내어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은 이 산에 오르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고 생각했다. 바위 위에선 여전히 물을 뿌리고 있다. 다른 팀이 아마도 여름 시즌, 바위 밑에 남겨둔 물통을 열어 들이켰다. 눈이 좀 맑아졌다. 막 밝기 시작한 하늘, 노란 달이 하얗게 변해간다. 노즈의 실루엣이 막 열리는 잿빛 하늘에 금을 그었다. 사람들이 올라왔다. 팀 별로 등반준비를 했다. 막상 바위아래서 벨트와 기어랙을 착용하니 가져온 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둘러 여벌옷을 빼내 짐을 가볍게 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함께 비닐봉투에 담아 바위 밑에 넣어두었다.
08:00경, 성두 팀은 3피치까지 저깅하여 짐을 끌어올린 후 등반을 시작했다. 우리 팀은 지난 번 동욱이가 1피치를 마친 터라 1피치까지 저깅한 후 2피치부터 등반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흥용이에게 뒤에 남아 홀백을 마저 정리하여 올려 달라 부탁하고, 동욱이와 둘이 저깅을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제대로 힘을 쓰지 않은 근육과 심장은 35미터 정도 저깅을 힘겨워했다. 1피치에 오른 나는 거친 숨을 고르며 동욱이에게 확보를 맡기고 선등 채비를 했다. 동욱이는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해서인지 얼굴색이 좋지 않다. 확보 상태를 서로 체크한 후 출발했다.
바위가 단단하여 크랙 사이 설치한 캠은 확실했다. 세 번째 캠을 끼우고 사다리에 발을 올린 후 다음 확보점을 찾느라 몸을 기울이는 순간, 몸이 급격히 아래로 떨어졌다. 추락, 짧은 확보거리에 비해 한참 동안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7미터 정도 추락이다. 의아했지만 겨를이 없다. 다행히 장비가 떨어지진 않았다. 왜 빠졌지? 혼자 중얼거리면서 어센딩을 하려는데, 동욱이가 내가 떨어진 반동으로 바위에 머리를 부딪혔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올려다보니 동욱이가 이리저리 목 상태를 살피면서, 그리그리에 장갑이 끼었다고 했다. 머리충격에 약간 정신이 없는지 장갑을 빼내려고 급하게 그리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 동작이 불안해 보여 나는 소리쳤다. “동욱아, 괜찮으니까 그대로 있어.” 서로 진정된 후, 움직이지 말라고 몇 차례 주의하면서 조심스럽게 추락점에 올랐다. 올라서서 동욱에게 상태를 물으니, 내려가야겠다고 하여 그렇게 하라고 했다. 동욱이는 내려갔다.
흥용이가 올라오면서 한 사람이 빠진 만큼 짐을 빼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물1.5리터짜리 9통에서 3통을 빼낸 건,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흥용이 헤드램프 배터리가 없어서 하루 빼고는 오후 4시 이후로 등반이 불가능했고, 고만고만한 2인1조인데다 여유까지 부려 등반기간이 4박5일까지 늘어졌다. 그 바람에 물이 더 필요했다. 등반 중 물을 아끼고, 빗물을 받아 보충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좀 과장하면 필사적이었다. 또 하나, 촬영을 맡은 동욱이의 예기치 않은 하산에 미처 카메라를 챙기지 못해 사진을 못 찍어서 아쉽다면 아쉬웠다.
어쨌든 우리는 갑작스럽게, 이제껏 한 번도 함께 등반을 하지 않은 사람 둘이 조디악에 오르는 뜬금없는 등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동욱과도 유양리, 삼성산에서 두 차례 짧은 피치를 등반한 게 전부였으니 사실 이번 조디악 등반은 준비가 충분하지 않은 무모한 등반이었다. 산은 우리의 마음가짐과 준비상태에 나의 추락과 사고로 반응하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산(자연)의 반응은 언제나처럼 정직하고 엄정嚴淨했다. 그러나 이런 복기復碁는 등반을 마친 후의 일이고, 당시는 어떡하든 그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오기 섞인 치열함뿐이었다.
떨어질 자리가 아니었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흥용이는 “형님, 여기 박쥐 똥이 장난이 아니래요, 똥 때문에 캠이 미끄러진 거예요.”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며칠 전 성두가 2피치는 박쥐 똥을 조심하라고 한 말이 생각났다. 나의 부주의 탓이다. 설악 홍순 파라다이스 길과 흡사해 내심 만만히 봤던 나는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한 점 한 점, 정성껏 조금 깊숙이 캠을 설치했다. 지난 번 회수할 때는 못 봤는데 등반하면서 크랙을 깊이 들여다보니 박쥐들이 떼 지어 살고 있다. 캠을 넣을 때마다 찍찍거렸다. 횡단 끝, 직선 코스로 넘어서는 부분에서 약간 힘들었으나 무난히 횡단을 마쳤다. 이후 직선 코스는 일반적인 길이었는데 횡단을 넘어서면서 줄이 안 빠져 혼났다. 이후로도 줄 처리 문제는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등반을 난감하게 했다.
3피치는 초반부 크랙을 넘어, 말로만 듣던 팔다리 긴 미국사람들의 키에 맞춰 박혀있다는 볼트의 연속, 소위 볼트 따기다. 듣던 대로 볼트 거리가 길었지만 사다리 1단에 까치발을 딛고 서서 바짝 몸을 세워 퀵드로우를 걸어 나갔다. 장비 세팅하면서 동욱이가 만들어온 치타 스틱를 과감히 뺐는데 아마 있었다면 쓰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을 것이다. “형님, 이거 가져가면 폼 나겠어요? 빼요.”하고 한 톤 높은 강원도 사투리로 강력히 주장한 흥용이가 옳았다.
복병은 따로 있었다. 볼트 하나하나를 겨우겨우 넘어서는데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빗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위에 고인 물이 바위 골을 따라 줄곧 흘러내리는데 딱 거기에 걸린 모양이다. 속옷까지 흠뻑 젖고 신발 속이 물로 흥건했다. 등반 중에는 그래도 견딜 만했으나 등반을 마치고 후등자 확보에 들어서면서 몸이 심하게 떨렸다. 해라도 비추길 바랬으나, 짙은 구름에 가린 해는 나올 줄을 몰랐다. 이빨이 부딪혔다. 확보 중에도 틈나는 대로 손으로 몸을 비볐다. 여벌옷도 가져오지 않은 상태, 새 양말 한 짝도 없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거나 비가 뿌린다는 예보다. 4피치까지는 하강이 가능하다. 포기하고 싶었다. 흥용이가 올라오면 그만 내려가자고 할까, 어떻게 말을 꺼내지 하며 무심코 아래를 내려봤다. 멀리 요세미티 공원을 휘도는 흐릿한 길은 삭막하리만큼 움직임이 없다. 가끔 차들이 지나갔으나 벽 위에서 떨고 있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다른 세상에 속한 타자他者일 뿐이다. 생각 끝에 올라가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는 사이 흥용이가 회수를 마쳤다. 속에 받쳐 입은 셔츠를 벗어 물을 짜냈다. 흥용이에게 건네주며 마를 때까지 뒤에 매달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옷은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다음날 아침 홀백으로 들어갔다. 겉옷을 힘껏 뒤틀어 짜 젖은 몸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4피치는 별 어려움 없이 올랐다. 오후 5시경. 해는 이미 뉘엿뉘엿 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무전기로 연락하니 성두 팀은 야간등반을 감행해 8피치까지 간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하루를 마감했다. 흥용이 또한 옷이 젖었고, 오늘은 야간등반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포타릿지를 설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이 같이 쳐본 적이 없는데다, 흥용이는 아예 이알 교육 이후 처음이란다. 둘이 오르락내리락 애써 포타릿지와 천막을 설치했다. 천막 안에 들어가 따뜻한 대추차와 생강차를 두 잔씩 마셨다. 인스턴트 밥을 먹고 나니 살 것 같았다. 9시30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질기고 질긴 비, 미국 도착 첫 날을 빼고 하루도 빠짐없다. 우리는 하루씩 교대로 포타릿지 안팎에서 자기로 했다. 흥용이가 먼저 바깥쪽에서 잠들었다. 천막에 내리는 빗소리가 심란하다 하면서 나도 따라 스르르 잠들었다.
아홉째 날, 등반 둘째 날 12.04(화)
눈은 떴으나 피로한 육신은 침낭에서 나오질 못했다. 날이 밝으면 움직이기로 했다. “형님, 빨리 내려가면 뭐해요, 천천히 등반하고 내려가요.”하는 흥용의 말에 나는 공감했다. 저 아래 세상에 뭐 그리 급하고 신나는 일이 있겠는가, 벽에 붙어있을 때가 그래도 행복할 것 같았다. 6시쯤 몸을 빼내 인스턴트 밥과 커피를 마셨다. 8시경, 주변이 다 환해져서야 우리는 잠자리를 걷고 출발했다. 슬그머니 등반 욕심이 난 나는 내가 등반할께, 했다. 흥용이가 선뜻 “그러세요, 형님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하는데 표정에 섭섭함이 묻었다. 후딱 눈치 챈 나는, 아니다 하루씩 돌아가면서 하자고 수정 제안했다. 밝아지는 흥용이 얼굴을 보고 잘했다고 생각했다. 괜한 욕심을 부려 머쓱해진 나는 혼자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미국식으로다가.
5피치 하단 연속볼트 구간을 흥용이는 폴짝폴짝 뛰듯 잘도 넘어갔다. 어제 등반을 안 해서인지 거침없고 힘이 넘치는 쾌활한 동작이었다. 흥용이의 등반모습을 처음 본 나는 내심 안심했다. 상단 사선 크랙은 오리지널 길 대신 변형 길을 택했다. 변형 길로는 60m 로프로 6피치까지 한 번에 끊을 수 있다. 그런 사전 지식이 있었음에도 흥용이가 6피치에 도달했을 때까지 저나 나나 그 지점이 5피치 종료점인 줄만 알았다. 내가 회수를 마치고 같이 루트 맵을 확인한 후에야 어, 6피치까지 왔네, 하면서 함께 웃음을 지었다. 좌우로 이어지는 구간이어서 줄 처리 문제로 곤혹스러웠던 점 말고는 수월하게 등반을 마쳤다.
7피치는 성두가 조디악의 크럭스라고 말했던 구간이다. 흥용이는 몇 번 루트맵을 살피고 결연한 얼굴로 출발했다. 조디악은 전체적으로 뒤로 기울어져 있지만, 7피치부터 본격적으로 오버행에 가깝게 벽이 누웠다. 흥용이는 좀 전과 달리 더디게 나아갔다. 바위에 가려 등반 모습을 볼 수 없는 나는 줄의 당김과 늘어짐으로 그의 동작을 가늠할 수 밖에 없으나 줄 꺾임이 심하여 그리 정확하지는 않다. 바위 사이로 얼핏 흥용이가 보이는가 싶더니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나중에 들으니 마이크로 너트가 빠져 추락하였다고 한다. 흥용이는 그때 등을 세게 부딪쳐 큰 통증이 왔다고 했는데, 그걸 알지 못한 나는 맥없이 뒤집어지는 흥용이 모습과 평소 씩씩하던 모습이 겹쳐져 웃음이 나왔다. 이후로 흥용이는 어지간하면 너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해가 오락가락했다. 해가 비치면 몸이 좀 풀렸다가 해가 사라지면 싸늘하게 몸이 식어 떨리는 일이 종일 반복됐다. 7피치를 마치자, 해가 노즈 저편으로 기울어 어두워졌다.
야간등반을 하기로 했다. 7피치를 마치자 흥용이는 8피치 선등을 나에게 넘겼다. 솔직히 해도 지고 해서 그만 잠자리에 들었으면 바랬으나, 오늘 8피치를 마치지 못하면 이후 등반일정이 헷갈릴 것 같아 감행했다. 거기다가 흥용이가 “형님, 형님이 하세요.”하며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데는 울며 겨자 먹기지만 달리 수가 없었다. 재갈 물린 소 마냥 확보줄을 매고 장비를 주렁주렁 걸고 나서는데 영 기운이 돋지 않았다. 초반 20미터 정도는 횡단길인데 자유등반으로 넘어서야 했다. 헤드램프에 어두운 길을 비쳐 나가는데 사다리와 망치는 자꾸 바위에 걸리고 발에 밟히고 지그재그 길은 잘 보이지 않아 신경이 곤두섰다. 이어지는 구간이 바짝 서 있어 또 만만치 않다. 좌측으로 나의 등반 선을 따라 뻗은 노즈에 걸린 노란 달이 어깨동무해줘 고마웠다. 여기는 너트 작은 게 맞겠지? 이런 식으로 반달에게 종알거리며 한 점 한 점 이어갔다.
캠, 너트, 버드빅 등을 사용하였다. 망치 사용을 자제하려고 씨쓰리(블랙다이아몬드)를 가져갔는데 이상하게 잘 먹히지 않았다. 처음 써보는 장비라서인지 제대로 설치한다고 했는데도 막상 사다리에 발을 얹으면 빠지기 일쑤였다. 이후 나는 흥용이가 너트 사용을 망설였듯 씨쓰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7피치보다는 8피치가 더 힘들지 않나 싶다. 회수를 하고 올라온 흥용이도 이에 동감했고, 등반을 마친 후 성두와 이야기한 바로도 마찬가지였다. 전체적으로 조디악에 쉽고 만만한 코스는 없다. 굳이 따지자면 7-14피치가 어려운데 그 난이도는 비등比等하거나 높이에 비례한다.
8피치에 잠자리를 폈다. 식사를 마치니 9시경, 안쪽에서 흥용이가 먼저 잠들었다. 천막 지퍼를 빠꼼히 열었다. 하늘이 흐려졌나 보다, 어느새 달도 사라지고 별도 하나 없다. 천막으로 물방울이 흩어져 떨어지는데 다행히 비는 아닌 듯하다. 엘캡 오른편에서는 오늘 낮서부터 지금까지 물이 폭포수마냥 떨어진다. 저 아래 바위가 땅에 닿는 곳쯤 물은 Y자 계곡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밤에 그것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멀다.
언제였던가, 구릿빛 협곡으로 둘러싸인 대둔산 마대봉 벽에 매달려 산 벗과 더불어 이른 잠을 청할 때 멀리 작은 마을에서 비치던 아련했던 몇 점 등불이 떠올랐다. 연기처럼 아득히 솟아올라 가슴에 스며들던 따숩고 정겨웠던 고향의 불빛, 엘캡은 적요만이 닮았을 뿐 물로써 차다. 싸늘한 기운에 몸을 떨며 습기 찬 침낭 속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피곤이 몰려왔다.
열흘째 날, 등반 셋째날 12.05(수)
이틀이 지나면서 어느덧 높이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세 개, 혹은 두 개의 점에 매달린 포타릿지에 대한 예민한 거슬림이 없어졌다. 이런 무감각은 불쑥 깨달아진 것이어서 실제로는 언제부터였는지 모른다. 루비콘 강을 건너버린 심정으로 담담해진 데는 어제부터 무전기가 고장 나 성두팀과 소식이 단절된 것도 한 몫 했다. 어느 누구와도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없고, 기댈 곳 없는 단호한 단절斷絶이 주는 평안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대신 밥맛이 떨어졌다. 등반자만 밥을 먹고 회수자는 대추차나 생강차, 쵸코파이 같은 군것질로 아침을 때웠다. 특히 대추차와 생강차는 몸과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는데다, 입맛에 딱 맞아서 당분간은 이 차만 먹고 살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하산 후 캠프4에서 몇 잔 더 마신 게 다다.
아침 9시 30분경, 날이 흐리다. 순서에 따라 내가 선등에 나섰다. 9피치는 45미터 정도의 일직선 크랙이다. 작은 캠과 훅, 너트를 번갈아 사용하여 올랐다. 중간쯤 이미 설치되어 있는 두어 개의 헤드를 백업으로 사용할 수 있어 안정감을 주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는 직선 크랙이 지리하고 힘들었으나 큰 어려움 없이 피치를 마쳤다. 10피치는 8피치부터 들어섰던 서클 그레이를 벗어나는 경계구간이다. 멀리서 바라봤을 때 꼭 올라서마 다짐했던 니플이 있다. 설악 비너스의 풍만한 엉덩이에 입맞춤했듯 엘캡 니플에 입 한번 맞추겠다 생각했다.
9피치에서 어지간히 힘을 빼앗긴 나는 몸을 추슬렀다. 초반 볼트 구간을 지나면 비스듬한 우향 사선 크랙이다. 이게 만만치 않다. 작은 너트가 이어진다. 몸의 중심이 흔들릴 때마다 콩알만 한 너트가 빠지는 듯 삐걱거리는 느낌이다. 캠훅을 시도했으나 돌이 비틀어질 것 같아 포기했다. 씨쓰리 캠에 확신을 갖지 못한 나는 중간쯤 로스트애로우 한 개를 박아 추락에 대비했다. 바짝 긴장한 몸은 사다리를 딛고 일어서려 비틀 때마다 경직되기 일쑤였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고 되뇌며 오르는 나의 등줄기는 땀이 흥건했다. 사선 크랙 끝 부분, 몸을 틀어 올려다보니 작은 턱을 넘어서 니플을 마주보고 고정볼트가 있다. 거기에 퀵드로우를 걸면 이 난감함을 벗어날 수 있다. 팔다리를 최대한 벌려 클립을 시도했으나 역부족이다. 허공에 뜬 사다리에 디딘 왼쪽 다리 하나에 체중을 싣고 오른쪽 다리 또한 허공에 뜬 채 버둥거리기를 몇 차례, 아무래도 한 번 더 캠을 사용하여 길이를 줄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불안정한 자세로 바위 턱 안쪽에 맞는 캠을 찾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몇 번을 헤매다 바위 깊숙한 곳에 캐머롯 4인치인가를 겨우 끼웠다. 거기에 사다리를 걸고 딛고 일어서는데 깊은 만큼 몸은 뒤로 더 기울어졌다. 힘들다고 해야 하나, 더럽다고 해야 하나, 순간 입에서 욕이 나왔다. 씨팔, X같네. 조디악 등반 중 내가 뱉은 유일한 욕이었다. 내 욕을 들었는지 밑에서 흥용이가 형님, 힘내세요 응원했다. 응원에 힘입어 용을 써 몸을 일으키니 마침내 퀵드로우가 걸렸다.
이후 직선 크랙은 큰 캠을 사용했다. 피치를 마친 후 잠시 숨을 돌리고 몇 번을 쉬어가며 짐을 끌어올렸다. 안도의 긴 숨을 내쉬는데 입이 바짝 말랐다. 물이 부족하여 등반 중에는 물을 안 마실 작정으로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침을 삼키려 했으나 역시 바짝 마른 목젖에 거칠게 걸릴 뿐이다. 빗물이 옅게 흐르는 바위에 입을 모아 힘껏 빨았다. 물에서 비릿하고 신 바위 냄새가 났으나, 이른 아침 시골길을 걸을 때 바지를 적시던 새벽이슬처럼 상쾌했다. 배가 부를 정도로 물을 빨아 마시는데, 문득 니플에 입을 맞추지 못한 게 생각났다. 아쉬웠다.
흥용이도 어지간히 목이 말랐는지 뒤에 매단 물통이 비었다. 형님, 제가 다 마셨어요, 하면서 씩 웃는데 빗물을 배불리 마신 후라서인지 밉지 않았다. 둘이 번갈아 빗물을 빨아 마시며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맑게 웃으며 11피치에 올라가 자자는 등의 말로 서로 힘을 북돋았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2시를 넘어섰다.
개인적으로 11피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알랑 드롱이 떠오르는 마크오브조로 라는 멋진 이름의 역Z자 길을 넘어서야 하는 조디악 11피치에서 난 상당히 힘든 결정과 모험을 감행했다. 파트너의 응원과 빗물에 힘을 얻었다지만 기진맥진한 나의 등반 속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바위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을 적시고, 작은 확보물에 달린 몸이 허공에 흔들려도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정신만큼이나 육신의 영역도 무감각해졌다. 두 영역을 넘어선 어떤 차원에서 형성된 올라가야 한다는 단순한 목표만이 몸을 기계처럼 움직이게 했다.
마크오브조로 턱을 가까스로 넘어섰다. 해가 기울더니 어두워졌다. 헤드램프를 켰다. 턱을 넘으면서 줄 처리가 미흡했던지 줄을 당기는데 힘이 들었다. 사다리에 건 다리의 힘으로 줄을 끌어올렸다. 램프에 크랙을 비춰가며 한 점 한 점 올라갔다. 올려다보니 머리 없는 볼트 서너 개가 연속 박혀있다. 루트맵을 확인하지 않고 올라온 터라 이후 길이 어떤지 가늠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볼트에 올라서려는데 줄이 당겨지지 않았다. 별도 달도 없는 엘캡의 겨울밤은 무척이나 캄캄했다. 흥용이와 무전 연락도 안 되고 물소리 바람소리에 대화도 불가능하다. 줄 길이가 다 됐다고 판단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램프로 주변을 비추는데, 좌측 5-6미터 아래에 세 개의 고정볼트가 보였다. 평평한 테라스다. 앞뒤 생각 없이 저기다 싶었다. 문제는 어떻게 내려가느냐였다. 장비를 회수하며 내려갈 형편은 아니었다.
방법은 펜듈럼밖에 없다. 질흑같이 어둔 허공을 향해 줄을 달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들으니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늘어진 줄만으로 충분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줄을 힘껏 당겼다. 어디에 추의 중심을 둘 것인가 난감했다. 볼트 바로 아래로는 피톤이 박혀있고 그 아래는 버드빅, 다음은 너트다. 피톤까지 내려가면 좋겠으나 방법이 없다. 나는 머리 없는 볼트에 와이어 행거 두 개를 걸고 카라비너를 끼웠다. 와이어가 끊어지면 아래 피톤이 잡아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아래 돌출바위에 몸을 부딪혀 부상을 피할 수 없다. 피톤마저 버티지 못하면, 그 이후는 상상하기 싫었다. 카라비너에 줄을 넘겨 펜듈럼 준비를 했다.
나는 결정했다. 딱 10번만 진자를 하자, 두 개의 와이어가 10번의 흔들림 정도는 버텨줄 것이다. 10번 시도해서 실패하면 줄에 매달린 채 밤을 지새우자고 맘먹었다. 좌측 세 개의 볼트를 램프로 비추며 적당히 하강했다. 서서히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진자 운동을 따라 헤드램프의 불빛이 흔들거렸다. 한번, 두 번, 세 번쯤 흔들었을 때 손이 건너 바위에 닿았다. 그러나 짧은 순간 비치는 램프 빛으로 잡을 만한 데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와이어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만둘까 하다 계획대로 10번을 채우기로 했다. 집중하여 몸을 흔들었다. 여섯 번째 거짓말처럼 왼 손에 바위 턱이 잡혔다. 죽기 살기로 바위를 잡고 매달려 몸을 밀착한 채, 오른손에 걸리는 버드빅 하나를 꺼내 테라스 앵글에 끼우고 망치질을 했다. 사다리를 걸고 잡으니 살았다 싶었다. 다음날 흥용이가 올라가면서 확인하니 와이어 한 개가 너덜너덜해져 버렸다고 한다. 생각할수록 몸이 움츠려지는 순간이었다.
고정볼트에 확보를 하고 짐을 끌어올렸다. 흥용이는 헤드램프 배터리가 없어서 램프를 켜지 못한다고 했는데 회수를 어떻게 하는지 걱정됐으나 보이지 않는다. 한참 만에 흥용이가 보였다. 램프가 안 된다더니 희미하나마 빨간 불을 비추며 올라오고 있다. 불빛이 희미해서 더 가깝게 비치기 위해서인지 램프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날 밤 포타릿지에서 흥용이는 새로 산 헤드램프에 배터리가 닳으면 일종의 비상등처럼 일정기간 빨간 불이 켜지는 기능이 있다며, 역시 블랙다이아몬드라면서 신기해했다. 그러나 그나마 그날 밤으로 그 기능을 다했다. 흥용이는 불빛이 희미한데다 램프를 입에 문 자세가 불편했던지 피톤 아래 몇 개의 장비 회수를 다음 날로 미루고 올라왔다.
반가웠다. 야, 수고했다. 어서 와라, 하는데 흥용이 첫마디가 “형님, 길을 잘못 들었어요. 여기서 좀 더 가야 해요.”였다. 순간 맥이 빠졌으나, 미안한 맘이 더 들었다. 어, 여기가 아니야, 어떡하냐고 근심스럽게 말했다. 루트맵을 보면 마크오브조로 넘자마자 좌측으로 동그라미 쳐진 곳이 나오는데, 바로 거기를 끝점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다시 올라갈 힘은 없다.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마냥 흥용이를 바라봤다. 흥용이는 뭐 대수냐는 듯 “형님, 그냥 여기서 자요. 어차피 회수도 다 못했으니 잘 됐어요.”하며 활짝 웃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앞장 서 포타릿지를 설치한다고 내려갔다. 올라서보니 고정볼트와 테라스가 너무 가까워 포타릿지를 설치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게다가 빗물이 흐르는 자리였다. 최대한 물을 피한다고 고정로프를 길게 내려 설치했으나, 흘러내리는 물길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우리의 잠자리 벽면으로는 밤새 물이 흘렀다. 천막위로 물이 스며들지 않기만을 바랬다. 제대로 길을 찾아갔으면 이런 곤란함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미안했다. 그러나 흥용이는 전혀 개의치 않고 평소의 쾌활함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차를 끓이는 것이었다.
나는 이번 조디악 등반에서 파트너인 흥용이에게 빚진 바 크다. 처음 같이 등반하는 가운데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몸이 둔한 나를 챙기며 궂은일을 앞장 서 했다. 막힘없는 시원시원한 성격과 “형님, 올라가야죠.”라거나 “힘내세요.”하는 강원도 특유의 하이톤 말투와 어쭙잖은 사람을 선배라고 배려하는 마음은 피곤한 등반에 비타민과 같은 청량제였다. 말 나온 김에 4박5일 동안 함께 벽에 붙은 흥용이를 논하겠다.
박흥용, 이알 26기다. 27기 졸업등반 때 유양리 벌판에서 염소고기를 끓여 내놓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먹은 바 없는 나는 못내 섭섭했는지 정말 그랬어?를 연발했다. 흥용이는 야성野性이 살아있는 친구다. 유니섹스화되면서 모호해진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나름 확실하게 구분하는 구석이 있다. 세상의 서슬과 자기 비하 등에 주눅 들어 시들해진 마초기질이 아직 시퍼렇다. 남성우월주의 같은 부정적인 부분을 제하고 이를테면, 라 만차의 사람이 가졌던 거칠지만 순수한 저돌성과 무모함이 그 속에 날 것으로 비릿하다. 한 차례 총격전을 마치고 이제 그만 안주하기를 바라는 여인의 눈물을 신사답게 거절하고 또 다시 미지의 거친 황야를 향해 말을 타고 유유히 사라지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 저녁 노을의 쓸쓸한 서부 사나이의 짱짱함, 자기 이익보다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먼저 챙기는 의리와 그러다가 손해보고 나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는 어수룩함이 공존하는 캐릭터, 뭐 이런 고전적인 남아男兒 기질이 살아있다. 뒤가 깨끗한 성격에 행동거지가 구차하지 않다. 말수는 적지 않으나 말에 얽히고설키는 트릭이 없다.
이런 기질은 고향에서도 인정받았던 모양이다. 귀국 후, 몸보신 차 개구리를 잡았다며 고향 홍천으로 오라기에 가서 하룻밤 신세 졌다. 민물고기도 몸에 좋다고 하여 꽁꽁 얼어붙은 횡성 북한강에 가서 그물을 던지기도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함께 어울린 흥용이 친구가 부모님이 잡아둔 도루묵이 많다며 어머니한테 전화를 하더니 냉장고에 넣어둔 도루묵 한 묶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흥용이 주려고 한다니까 어머니는 흥용이라면 두 묶음 가져가라고 했다. 내게는 단순히 한 묶음 더 늘어난 게 아닌 다른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다음날 숙취에 깨어났을 때 흥용이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갈하게 도루묵찌개를 내놓았다. 아침 일찍부터 동네 선배들이 찾아와 흥용이의 귀향을 반기는데 고향이 그리운 나에게는 남다른 풍경이었다. 또 하나 에피소드, 흥용이가 소 키우며 농사지을 때 농기계 지원금을 횡령했다는 명목으로 동네 사람 몇 명과 함께 검찰 조사를 받았던 모양이다. 나도 농사 좀 지어봐서 알지만 사실 농기계 지원금이란 게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주먹구구여서 죄랄 것도 없는 것인데 액수가 좀 컸던지, 다른 사람들은 다 벌금형 등을 받았는데, “나, 죄 없어요.”하면서 들이대는 흥용이한테는 검사가 그래, 내가 졌다. 이 새끼야, 젊고 하니까 봐준다, 하면서 풀어주더란다. 젊어서 봐줬겠나, 흥용이 안에 있는 야성을 만만치 않게 여겼던 것일 게다. “수다쟁이 영장류 대신 내 안의 과묵한 늑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나, “해가 진다/ 내 소원 하나/ 살찐 보름달 아래 늑대 되리” 라고 읊은 시인의 고백이 어울리는 근래 보기 드문 총각이다. 나는 흥용이와 등반하면서 세속의 그물에 얽혀 야성을 잃어버린 나(수컷)의 정체성을 종종 생각했다. 좋은 여자 만나 자식 하나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소망이 꼭 이뤄지길 바란다. 정작 벽에서는 뭐 하러 결혼 하냐고 농처럼 툭 던졌지만.
10시경, 비가 오는지 천막에 빗소리가 듣는다. 여느 날처럼 흥용이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나는 작은 배낭을 베고 한참을 누워 있었다. 메모지를 꺼내 끄적거리기도 하다가 천막 지퍼를 열고 손을 내밀어 손등에 떨어지는 비에 괜히 화들짝 놀라기도 하다가 큰 인연도 없었던 여인들을 운명의 여인인 양 떠올리기도 하다가 좀 전의 진자 운동을 떠올리며 몸을 떨기도 하다가 엘캡 좌우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가 아득하구나 하면서 귀 기울이기도 하다가 몸과 맘이 가늘어 사랑스러운 어떤 여자를 그려보기도 하다가 슬며시 잠들었다. 바위에서 맞은 세 번째 밤이었다.
열 하루째 날, 등반 네째 날 12.6(목)
어제 밤 좌우 벽에 쏟아지는 물소리와 잡념 때문에 늦게야 잠들어 머리가 무거웠으나 전반적으로 컨디션이 나쁘진 않다. 손가락 살이 눈에 띄게 빠졌다. 물소리는 여전하고 비는 그쳤다. 천막 지퍼를 열었다. 잔별들이 희미하다. 꼼짝없이 누운 채 얼마나 지났을까, 막 밝아오는 하늘에서는 별들이 사라지면서 구름이 가로로 길게 갈라졌다. 밑에서 올라온 구름 안개는 우리 잠자리까지 올라와 습기로 흩어졌다. 이 모든 풍경은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누른 잿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는 누운 채, 이야기를 나눴다. “11피치니까 나머지는 이틀에 나눠서 하자고.” 어차피 헤드램프 배터리도 없는데다, 특히 벽에 붙어 고즈넉한 밤을 보내는 맛이 쏠쏠했던 나는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물이 문제인데, 13피치에 물 있겠지?” 그저께인가13피치에 물을 남겨두겠다는 마지막 무전교신 이후 성두 팀과 소식이 두절된 상태였다. “남겨뒀겠죠.” 흥용이의 긴가민가한 목소리였다. 그러는 사이 짙은 구름이 깔려 화창하진 않으나 그런대로 날이 밝았다.
차와 간식거리로 아침을 때우고 둘이 나란히 누워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밑이 아득했다. 아래 길은 여전히 인적이 뜸해 가끔씩 오가는 차가 낯설다. 위에서 흘러내리는 팔뚝만한 물줄기를 본 흥용이가 대뜸 말했다. “형님, 이 물 받아먹지요.” 어떻게 받아먹을까, 속으로 생각하는데 흥용이는 지체 없이 자기 에어 매트리스를 돌돌 말더니 물줄기에 갔다 댔다.
갑자기 천막 안이 부산해졌다. 가만히 보니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일정한 주기로 우리 앞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450미터 높이 가파른 벽에 설치한 포타릿지에서 후줄근한 두 사람이 바짝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내밀고 수선을 피우며 때 묻은 에어매트리스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받는 모습은 촬영이 필요한 장면이었으나 사진기가 없다. 차 끓일 물하고 1.5리터 물통 하나를 채우고 나서야 우리의 신나는 놀이는 끝났다.
9시가 넘었을 것이다. 흥용이가 어제 미처 회수를 못한 서 너 개의 장비를 회수하는 것으로 등반을 시작할 작정이다. 어제 밤 나처럼 펜듈럼으로 한 5미터 우측에 있는 확보점까지 가야 한다. 흥용이는 고정볼트에 중심을 잡고 힘차게 진자 운동을 했다. 나는 흥용이가 건너간 후, 버려도 될 만한 낡은 카라비너에 줄을 걸고 하강하여 확보 준비를 했다. 어제 후퇴한 자리를 살펴보니 11피치 끝 점을 불과 3점 앞두고 지난 밤, 그 난리를 쳤던 것이다.
루트를 정확히 파악하고 등반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나에게 그것은 종종 어렵다. 갈 길을 정확히 알고 가면 되레 불안할 때가 있다. 진짜 불안을 맞대하기 겁내는 심리의 표출이거나 첫 경험을 조작하여 기억에 각인의 영역을 넓히려는 의도이거나, 자학自虐기질인지 모르겠다. 이런 성향은 가령 북한산이나 설악산의 숱하게 다녀온 길도 기억에 남기지 않아 갈 때 마다 낯설고, 늘 처음 가는 사람마냥 길을 헤매는 것으로 나타난다. 산 다니는 사람으로서 좋은 버릇이 아닌 줄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우리는 11피치에서 일단락하고 12피치 등반을 이어나갔다. 날이 무척 좋아 등반 내내 햇살이 비쳤다. 등반자는 조금 덥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햇살이었으나 간간히 부는 바람이 오싹하여 땀을 식혔을 것이다. 12피치 끝 부분은 루나 이클립스 루트와 만나는 지점이다. 루나 이클립스는 2010년 5월, 성두가 27기 박명길, 임인수와 함께 올랐던 루트다. 당시 성두는 뛰어난 퍼포먼스로 성공적인 등반을 이끌어 요세미티 전문 사진가 톰으로부터 극찬을 들었다 한다.
12피치를 마치고 13피치에 들어서면서 운무가 일기 시작했다. 온갖 형상을 이루다 끝내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구름안개에 취한 나는 확보줄을 그리그리에 맡기고 물끄러미 안개를 바라보거나 멍하니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풍경이라도 습관적으로 한국 산들이 겹쳐 떠올랐다. 운무를 보면 용화의 육덕진 구름덩어리가, 석양이 지면 설악 적벽의 노을이, 바람이 불면 신선봉의 칼바람이, 밤의 적막이 사무치면 마대봉 협곡의 외로움이 떠올랐다. 운무에 주홍빛이 물들어 올 즈음 흥용이는 등반을 마쳤다. 4시 30분 이었다.
13피치 종료점에 이르니 성두팀이 남겨 둔 물 한 통이 가는 슬링에 걸려있었다. 여기는 피넛 리지로 일컫는 평평한 테라스가 있어 잠자리를 펴기에 알맞은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우리는 여기서 가장 큰 곤욕을 치렀다. 흥용이는 잠자리 펼만한 곳을 찾아 이리 저리 살폈다. 내가 보기에는 어디라도 좋겠는데 흥용이는 여기도 안 된다 저기도 안되겠다 하면서 두리번거리더니 “여기 테라스가 좋으니 그냥 비박해요.” 하는 게 아닌가. 힘든 등반을 마친데다 램프가 없다 보니 귀찮고 짜증이 나나 싶었다. 지금 생각이 그렇지 기온이 떨어지는 날씨에 비박하면 밤새 고생스러울 거라 예상한 나는 달래 듯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여기 치지? 그래도 흥용이는 비박을 고집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는 그럼 비박하지 뭐, 하면서 올라서는데, 말투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형님, 여기에 치지요.” 하면서 오른편 귀퉁이를 가리켰다. 나는 그냥 비박해도 되는데, 하면서 슬쩍 튕기는 척 하다 맘 바뀔까 봐 후딱 포타리지를 치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곁 봉지를 천막밖에 던져놨는데, 아까부터 우리 주변을 맴돌던 엄지 손가락만한 쥐가 달려들어 부스럭거렸다. 쥐를 쫓고 봉지를 들여 놓은 후, 침낭에 들어갔다. 좁은 천막 안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지친 다리는 경직되기 일쑤여서 흥용이와 나는 다리를 주무르며 인터넷 산악회가 어떻고, 수원 카바레 물이 어떻다는 둥 이런 저런 이야기를 속닥거리다 잠들었다.
어제 등반을 안 한데다 좀 일찍 잠들어서인지 새벽 1시20분 잠을 깼다. 선잠에 꿈을 꿨던 모양이다. 우측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물소리만 없다면 태초의 적막이었을 터, 물소리가 거슬렸다. 천막 지퍼를 열어 하늘을 봤다. 초저녁 희미했던 별들이 지금은 선명하다. 겨울 밤 추운 조각달은 맑게 하늘에 떠있다. 설악의 밤이 어른거렸다. 무섭도록 차가운 겨울, 계곡이 만든 동그란 하늘에 촘촘히 박혀 흐르던 밤하늘의 별들, 구름 사이 달, 은하수, 바람, 소주, 얼어붙은 물회, 담배연기, 이런 것들이 그리웠다.
별 하나가 떨어졌다. 어릴 적 시골 외갓집 마당에 떨어졌던 별이 떠올랐다. 할머니 음성이 들렸다. “아가, 누가 태어났나 보다, 저 별들도 다 사람들여, 저렇게 땅에 내려와 사람이 되었다가 죽으면 다시 하늘로 돌아가 별로 빛나는 거셔. 이 할미도 죽으면 별이 될랑게 할미 죽으면 어디 새 별이 생겼는지 잘 봐야헌다, 알겄냐 강아쟈?” 별이 총총했다. 저 별만큼 총총했던 시절이 내게 있었던가. 할머니 별을 찾아 헤맸으나 맑고 고운 눈을 잃어버린 나는 찾을 수 없다. 별을 헤아리는 눈이 흐릿해졌다.
열 이틀째 날, 등반 다섯째 날 12. 7(금)
새벽 녘 별을 보다 잠깐 잠들었나 보다. 일어나니 새벽 4시 30분. 계획대로라면 오늘 등반을 마치고 하산한다. 하산 길이 멀고 험하다니 일찍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맘뿐 우리는 여전히 해가 다 뜬 다음에야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14피치는 소위 돌려막기다. 캐머롯 4, 5인치 짜리를 넣다 뺐다 반복하며 올라가는 구간이다. 따라서 하나가 빠져 추락하면 긴 거리를 떨어지는데다 돌출바위가 있어 긴장의 연속이다. 동욱이가 여기를 대비해 캐머롯 큰 것을 세 개 준비한 덕분에 중간쯤에 하나를 고정시켜 놓을 수 있어서 심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동욱이는 나의 추락으로 인한 부상 때문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가져온 장비는 그가 애써 준비한 것이다. 어찌나 꼼꼼한 성격인지 차질이 없어 우리는 매우 안정된 상태로 등반에 임할 수 있었다.
돌려막기는 쉽지 않았다. 나중에 성두에게 들으니 돌려막기는 확보물 설치 동작을 몸통 앞에서 하면서 거리를 짧게 짧게 이어가는 게 유리하다는데 나는 조금이라도 멀리 확보물을 설치하려고 손을 최대한 뻗어가며 올랐다. 겨우 돌려막기 구간을 마치고 사람 상반신만한 삼각형 바위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바위에는 낡고 커다란 은색 너트 하나가 끼워있었다. 그 너트를 사용해 한 단 일어서면 좌측으로 캠을 끼울만한 크랙이 이어져 거기만 넘으면 14피치는 끝나는 셈이다.
기존 너트에 카라비너를 걸고 발을 걸려는데 낌새가 이상하다. 바위가 들썩거렸다. 딛고 일어서면 바위가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이걸 어떻게 딛고 넘어섰지? 선뜻 이해가 안됐다. 나중에 들으니 먼저 올라간 성두는 흔들리는 바위를 느끼지 못했다 한다. 굳건해 보이는 바위도 전조前兆없이 어느 한 순간에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다, 인간이 가끔 그렇듯.
삼각형 바위의 기존 너트를 포기하고 더 깊숙한 리스에 작은 캠을 끼웠다. 바위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몸이 스칠 때마다 흔들렸다. 바위가 떨어지면 밑에 있는 흥용이가 위험하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넘어섰다. 좌측 크랙에 캠을 설치하고 일어서니 어느 사인가 성두가 로프를 타고 내려왔다. 이틀 전 등반을 마치고, 마중 나온 것이다.
14피치 종료점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형, 쉽지 않죠?” “죽겠다, 야.” “어디가 제일 어렵던가요?” “쉬운 데가 하나도 없어.” “조디악이 만만치 않다니까요, 형 얼굴이 완전히 거지가 됐어요.”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래 흥용이가 바위가 흔들리는 삼각바위에 이르렀다. 같은 또래인 성두와 흥용이는 서로 친구야, 외치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낙석을 조심하라고 몇 번 주의를 줬다. 그러나 흥용이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머무는가 싶더니 갑자기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다. 쩍쩍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아래를 살피니 바위가 떨어졌다.
아래에 외국인 둘이 올라오고 있었다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밑의 사람을 치지 않은 대신 흥용이가 낙석에 맞아 잠깐 기절하였다. 낙석과 몸 사이가 짧아서 충격이 덜했으니 망정이지 멀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다. 성두와 나는 흥용이를 향해 괜찮은지를 반복해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올라온 흥용이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오래된 너트를 빼오려고 흔들었던 모양이다. 바위에 부딪쳐 붉은 피가 스민 흥용이 목덜미를 보면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흥용이는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상처는 아랑곳없이 빼내 온 너트를 전리품마냥 보여주며 환히 웃었다.
11시쯤 되었을까. 14피치에 셋이 모였다. 친구를 만난 흥용이는 갑자기 힘이 돋는지, 마지막 두 피치를 자신이 하겠다고 했다. 지친 나를 배려하는 맘과 함께 친구 앞에서 멋지게 등반을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흥용이는 친구 성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15피치 등반을 시작했다. 너트를 끼우라는 성두의 조언이 있었지만 캠과 버드빅을 사용하며 자기 방식으로 올라갔다. 이어서 핸드 트레버스 구간이다. 흥용이는 500미터 높이에서 이런 등반을 해본 사람이 몇 이나 있겠냐며 지체 없이 홀드를 잡더니 그야말로 날다람쥐처럼 뛰다시피 건너는데 우습기도 하고 처절하기도 했다. 팔을 늘어뜨리고 발을 웅크린 채 건너는 동작이 우스꽝스러운데다 등반을 거의 마쳤다는 안도감이 섞여 큰 웃음을 터트렸다.
회수하려고 트레버스에서 첫 확보물을 뺐는데 끝에까지 몸이 날랐다. 폼 나게 몸을 띄우는 연습을 더 했어야 했다. 자세가 영 아닌데, 하며 성두는 농을 던졌다. 흥용이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곧추 선 바위를 오르는 멋진 장면을 연출하며 16피치까지 올랐다. 대기하고 있던 동료들이 건넨 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을 것이다. 마지막 홀링은 성두가 대신 해줬다. 흥용이의 등반완료를 축하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회수를 마치고 엘캡 종료 점에 섰다. 성두가 건넨 맥주와 사람들과 어울려 기쁨을 나눴으나, 이 또한 스쳐가는 산의 일부분이며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것과 같은 삶의 한 순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분이 이상했는데 이제와 보니 좀 허탈한 것이었다.
지난 과정은 단숨에 잊힌 듯 전혀 떠오르지 않았고, 올라오긴 올라왔구나 하는 생각, 4박5일이 후딱 지났다는 생각, 큰 사고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 27기 깃발을 들고 사진 찍어야지 하는 생각, 오른 쪽 무릎이 시큰하다는 정도의 생각이 교차했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은, 어떤 바람도 후회도 없는 무심한 상태로 장비를 정리하였고 담담히 짐을 짊어지고 내려왔다. 이것으로 12일에 걸친 여행이 끝났다. 2012년 12월 7일, 금요일, 13시 40분이었다.
다음날 오전, 나는 캠프4 건너 편 너른 들판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완전히 갠 하늘은 청명했다. 멀리 보이는 요세미티 폭포는 무지갯빛 찬란하게 커다란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었고, 발아래 갈색 풀은 마른 채 바짝 드러누워 있다. 둔덕아래 강물이 굽이져 흘렀다. 잔잔했다. 강가엔 커다란 나무들이 가지를 늘어뜨렸다. 바위산들이 맑은 강에 검게 비쳤다. 젊은 연인이 그 강물에 돌을 던지며 화들짝 웃었다. 물 속 바위산이 파문波紋 따라 살며시 일렁거렸고 연인은 폴짝거리며 사라졌다. 햇살도 바람도 따뜻했다. 모든 게 충만했다. 평온했다. 무엇을 찾아 예까지 왔는가, 왜 나를 불렀느냐는 마음 속 질문에 대한 엘캡의 성실한 답이었다.
첫댓글 멋진 등반기 잘 읽엇습니다 올해는 꼭 원정 나가야 하는데 30년이 흘렀네 간다고 한지가........ 나두 원정기를 올릴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