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후반
설명을 할수 없는 자리에서, (설명을 하자면, 너무 길어서)... 김성윤 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사람도 김고 출신으로, 고려 대학 철학과 졸업반 이었다. 인상은, 좀 여성 스럽다 할까...
어떠한 일 때문에, 여러번 만났다. 그래도, 잠깐씩의 시간이 있을때 나에게 일본 노래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던 어느날, 그에게 Feel 이 딱 꽂혔다.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가슴도 뛰었다. 그랬었다는 이야기 밖에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은, 그후 서울로 올라 왔기 때문이다.
몇달후 대학 입시 관계로, 김천의 친구가 올라와 우리 고모 댁에서, 나와 한방에 누어있던 어느날 밤에 그 친구가 느닷없이 " 너 김성윤이 좋아 한다메?"... 나는 깜짝 놀랐다. 순간 가슴은 쿵 하고 떨어졌다. 나는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했더니, 친구는 "김성윤이 카드라. 네가 지 좋아 한다꼬"...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밤이라 안보여 그렇지 아마 나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화가 나서 못 견디면서도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에게 기분 나쁜 감정을 내 비췰수도 없고... "일본 노래를 가르쳐 주니 좋더라. 그리고는 고만이지"... 이젠 잊어 버렸다는 표현을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좋은 감정 없이 지나고 있던 어느날, 우리 큰언니가 'Love letter' 라는 영화의 표를 두장 주면서 김성윤씨와 같이 가라고 했다. 표 한장을 전해주고, 내일 영화를 같이 본다는 사실에 흥분을 했나 그밤에 잠을 설쳤나?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는데, 웬 잠이 쏟아지는지 혼났다.퍼붓는 잠을 어찌 할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가뜩이나 예쁘지도 않은 여자가 영화는 안보고 잠만 자고 있다니'... 있던 매력도 달아날 판인데, 하물며... Nothing 이다. '그래... 나도 Nothing 이다'...
몇년후..... 나는 결혼을 했고, 모 국회의원의 딸의 결혼식에 갔다. 명동 YWCA 강당에 가니 그사람이 접수를 받고 있다. 순간 나는 속으로 " 주님 감사 합니다. 우리 남편과 결혼 시켜 주셔서"...
세월은 흘러 흘러, '80년 대 초에, 뉴욕에 있는 나에게 전화가 왔다. 그사람의 후배이고, 나와도 친한 사람인데 "김성윤씨가 나에게 '을지로 2가 사무실'에 전화를 부탁 한다고 하더라면서 번호를 일러준다. 그 사람은 내가 혼자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고, 아직도 자기를 좋아 한다고 생각 하는가 보다. " 그사람은 어떻게 지나고 있나요?" 물었다... 그사람의 대답 " 내가 알기로 두번 이혼 하고, 아이가 둘이 있다 캅디다"... " 아이 골치 아프네요. 전화 안하겠어요"... 골치는 그사람이 아프겠다. 철학과를 나와서 철학적으로 살지 못했구나 그리 복잡한것 보니... 마음이 안됬다...
이야기 셋..... '56년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국무원 사무국 고시과에 내가 출근 하게 됨은, 봉급은 보잘것 없으나... '대한민국' 의 12부 4처. 정부 기관의 3급 이상 '전형시험'을 담당하는 전형계와 고등고시를 관장하는 고시계가 있는 중요한 부서이다.
당시 나는 전형계의 말단 이지만, 홍일점으로 사무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직원들은 조선 팔도에서 하나씩 뽑힌 사람처럼 각도의 사람이 다,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전형 위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과 자리에 계신 분들로서 한주에 한번씩 회의를 하러 오시는데, 그분들을 뵙는다는 일이 무척 좋았다. 서울대 총장 윤일선 박사님. 법무장관 이 인 씨등등...
각설 하고... 더, 좋았던 것은, 공보처에서 매주 '외화 시사회' 를 할때 출입할수 있는 특권이 너무 좋았다. 잊을수 없는 영화 '사브리나' 를 보고 나온 다음날 몇달간의 기회를 찾던 키다리 Mr Kim 이 용기를 내어 나에게 Date 신청을 함으로 약 20년간의 역사가 이루어진 사건은 나의 운명 이었고, 숙명 이었다. 그분과의 일들은, 2년전에 이 홈에 '프로포즈' 란 제목으로 썼었다.
이렇게 몇달간의 짝사랑 으로 결혼에 '꼴 인'을 하는데, 사람마다 집집마다 풍습과 분위기와 인격에 따라 별 별 일이 다, 생기던 시절이었다. 나는 다행히 평양의 산정현 교회의 장로님 가정으로, 신실한 믿음 생활을 하시는 시부모님 덕분으로 부족한 흉.허물을 다, 덮어 주시고 맏며느리로서 그 위상을 높여 주셔서 감사하다.
유난히 자랑 거리가 많은 시댁이었고, 아무것도 자랑 할것이 없는 친정 이었다... 살면서, 나의 약점은 한마디도 않고, 그저 무조건 사랑으로 일관해 준 남편의 사랑의 여운으로 오늘도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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