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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에 있는 ‘잎새에 이는 바람’은 무슨 뜻일까? 나는 이 시구를 ‘모든 죽어가는 것에 부는 성령의 바람’으로 해석하는데,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먼저 나는 이 해석만이 유일하게 절대적으로 옳은 해석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가능성이 높은 해석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서시」는 윤동주 시인이 직접 가려 뽑은 자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맨 앞에 실린 시로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이다. 나도 고등학교에서 이 시를 배우면서 외운 후로 지금도 가끔 하늘을 보며 암송하곤 한다. 이 시는 우리나라를 넘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사랑받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시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이 시를 한번 읽어보자.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해가 1917년이므로, 지난 2017년은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 해에 나는 평소 윤동주 시인과 「서시」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윤동주 시인에 대한 세 권의 평전들과 그가 쓴 시들에 대한 수십 편의 논문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연구를 했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초점을 맞춘 것은 바로 오늘 설교의 제목인 ‘잎새에 이는 바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였다.
이 서시를 쓴 날짜는 1941년 11월 20일이다. 11월 20일이면 늦가을이다. 이 늦가을에 잎새가 바람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이 서시를 지었다. 그러므로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잎새를 떨어뜨리는 바람이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좀 더 살펴보겠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서 ‘잎새’라는 단어는 ‘잎사귀’와 같은 뜻으로 잎사귀라는 단어 대신 사용되었는데, 잎사귀는 ‘낱낱의 잎’이라는 뜻이다. 그럼 윤동주 시인은 왜 ‘잎사귀’라는 단어가 아니라 ‘잎새’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잎사귀’보다는 ‘잎새’라는 단어가 문학 작품에 흔히 사용되는 문학적 단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의 시나 소설이나 수필과 같은 문학 작품에서는 잎사귀라는 단어와 잎새라는 단어가 모두 사용되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한국근현대잡지자료에서 검색한 결과, <동광>이나 <삼천리>같은 일제강점기의 문학잡지에서, 잎사귀라는 단어도 14번, 잎새라는 단어도 14번 사용되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문학작품에서 잎사귀와 잎새라는 단어는 똑같은 숫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윤동주 시인이 잎새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잎사귀보다는 잎새가 문학 작품에 사용되는 문학적 단어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윤동주 시인이 잎새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 그가 미국의 단편 소설 작가인 오 헨리가 쓰고 양주동 선생이 번역한 단편소설 「마즈막 잎새」를 읽고 그 소설에 나오는 ‘잎새’라는 단어를 자신의 시에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오 헨리는 식민지 시기부터 비교적 많은 작품이 번역된 작가”였는데, 그가 1905년에 발표한 단편 소설 「The Last Leaf」는, 양주동 선생이 1939년 5월에 「마즈막 잎새」라는 제목으로 문장 제4집에 번역하여 게재하였다(이정안, 183쪽). 그런데 양주동 선생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935년에, 윤동주 시인은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숭실중학교 재학시절, 윤동주 시인의 서가에 꽂힌 책들 가운데는 양주동 선생이 쓴 책, 『조선의 맥박』도 있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1935년 10월에 발간된 「숭실 활천(崇實 活泉)」 제15호에 자신의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때 양주동 선생의 글도 함께 게재되었다. 또한 윤동주 시인은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재학 중이던 1939년에는 이미 「소년(少年)」이라는 문학잡지에 시를 발표한 등단 시인이었는데, 바로 이 해에 양주동 선생이 오 헨리의 단편 소설을 번역하여 「마즈막 잎새」라는 제목으로 문장 이라는 문학잡지에 게재한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종합해 보건대 윤동주 시인은 양주동 선생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가 번역한 「마즈막 잎새」도 등단 시인이자 문학도로서 문학잡지인 문장에서 읽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939년에 양주동 선생이 번역하여 문장 이라는 문학잡지에 게재한 「마즈막 잎새」 가운데 존시가 처음에 말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다.
“「잎새 말이지. 상춘등 넝쿨에 있는. 저 마즈막 잎새가 떠러지면 나도 갈 테야. 사흘 전부터 그리 될 줄로 생각하였서. 의사가 언니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어?」”(O. Henry, 174쪽).
이처럼 폐렴에 걸린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잎새에 투사한다. 나는 윤동주 시인이 이 소설에서 영감을 받고 잎새라는 시어를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잎새라는 시어는 6행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상징하는 시어이다.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잎새라는 시어에 투사한 것이다.
그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서 바람은 무슨 뜻일까? 바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실존적인 차원에서는 시적 자아를 타락하게 만드는 유혹의 바람으로 이해하거나 역사적인 차원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키는 전쟁의 바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충북대학교 국어교육과의 박노균 교수는 “윤동주의 <서시>론”이란 논문에서, 바람이란 시어가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강조한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바람을 긍정적 이미지로 해석하게 하는 단서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윤동주가 그의 자선시집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붙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첫 시집 제목 속에 들어있는 이들 네 개의 시어는 윤동주에게 있어서 매우 가치 있고 소중한 언어들임에 분명하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하늘’과 ‘별’과 ‘시’가 고귀한 대상들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의 경우는 어떠한가. 바람이 그가 사랑한 언어들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은 바람을 그가 좋아하고 사랑한 시어라고 보게 한다. 그렇지 않고 바람을 부정적 이미지로 파악할 경우 그가 자선시집의 제목 속에 이 말을 사용하고자 한 까닭이 설명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서 바람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긍정적 대상으로 이해되는 것이다.”(박노균, 233-234쪽).
가톨릭대학교의 류양선 교수도 “윤동주의 「서시」 연구”라는 논문에서 바람이라는 시어에 대해 긍정적인 의미라고 강조하면서, 그 바람이라는 시어를 그리스도교의 의미에서 통찰한다. 주요 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주지하다시피,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시인이다. 그러기에 그의 시세계를 탐색함에 있어서, 기독교 신앙은 특히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된다.”(류양선, 297쪽).
“윤동주로부터 육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부를 증정 받아 보관해낸 정병욱에 따르면, 윤동주는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한 다음 그 한 부를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서시’를 보이면서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서시」를 쓰기 전에는 시집의 제목을 ‘병원’이라고 붙일까 했었다는 것이다. 이 회고는 “「서시」라는 작품이 시집의 표제명을 바꾸게 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동시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의 제목이 다름 아닌 「서시」에서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이로 미루어, 「서시」의 원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으리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도 있다.
적어도 시집의 제목에 들어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은 「서시」에 나오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옮겨놓은 것이라는 점, 따라서 이 시집의 제목이 「서시」와 같은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류양선, 304쪽).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윤동주는 육필 자선시집의 제목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함으로써, ‘하늘’과 ‘바람’과 ‘별’이라는 시어가 이 시집에서 특별한 위상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시」에 나타난 ‘하늘’과 ‘바람’과 ‘별’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서시」를 해석하는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이 시집 전체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으로, 「서시」 또는 시집 제목의 ‘하늘’과 ‘바람’과 ‘별’의 상징적 의미 역시 이 시집에 실린 다른 시편들에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의 상징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의 인용에서 보듯, 「서시」에는 ‘하늘’이라는 시어가 한 번, ‘바람’이라는 시어가 두 번, ‘별’이라는 시어가 두 번 나온다. 하지만 「서시」 말고도, 육필 자선시집에 실린 다른 시편들에도 ‘하늘’과 ‘바람’과 ‘별’이라는 시어들이 빈번히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이 시집의 제목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점에 비추어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들을 모두 살펴보면, ‘하늘’이라는 시어가11번, ‘바람’이라는 시어가 11번, ‘별’이라는 시어가 15번 등장한다.”(류양선, 305쪽).
이어서 류양선 교수는 서시가 담긴 시집의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하늘’은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고, ‘별’은 모든 죽어가는 것이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며 이를 논증한다. 그럼 ‘바람’은 무엇을 상징할까?
“하지만, 앞서 논의했듯, 육필 자선시집의 제목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서시」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서시」의 ‘바람’이라는 시어를 부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볼 수는 없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의 제목을 볼 때, 여기 나열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모두 긍정적이고 고귀한 의미를 지닌 그런 시어들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집의 제목에 보이는 단어들 넷 중에서, 유독 ‘바람’만을 부정적 의미를 지닌 단어로 본다면, 나머지 세 단어와의 관계가 너무나 이상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집 제목에서의 단어들의 나열은 참으로 부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보면, 「서시」에 나오는 ‘바람’이라는 시어는 ‘하늘’ 또는 ‘별’과 관련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이 시집에 수록된 19편의 작품들에 ‘바람’이라는 시어가 모두 11번 등장한다고 했거니와, 이 중 ‘바람’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시어로 사용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으니, 이는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당연한 현상인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유독 「서시」에서만 ‘바람’이라는 시어가 부정적 의미를 지닌 상징 시어로 쓰였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시」에 나오는 ‘바람’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에서 살핀 ‘하늘’과 ‘별’이라는 시어가 지닌 의미와 관련되는 어떤 것이리라. 「서시」를 다시 읽어보면, 홀수행인 1, 3, 5행에 ‘하늘’과 ‘바람’과 ‘별’이 차례대로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바람’은 ‘하늘’과 ‘별’에 연결된, 달리말해 ‘하늘’과 ‘별’을 이어주는 어떤 움직임을 나타내는 상징 시어인 것이다. 단 한 줄로 쓰인 이 시의 제2연을 보더라도 밤하늘에서 별이 바람에 스치우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시인은 여기서 그의 기독교 신앙을 정결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육필 자선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에서는 ‘바람’이라는 시어가 어떤 의미를 머금고 있는지 살펴보자. 일례로 「바람이 불어」를 읽어보면, 시인은 제1연에서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하고 말하는데, 이것은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8절까지의 내용 즉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따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시인은 제5연에 가서, “바람이 자꾸 부는데 /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하고 말함으로써,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신앙이 굳건해졌음을 토로한다. ‘반석’은 흔들림 없는 신앙을 의미하는 기독교적 상징인 것이다. 이로써 「바람이 불어」에 등장하는 ‘바람’은 ‘성령’(하느님의 영)의 의미를 머금고 있는 시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인은 「또 다른 고향」에서도,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하고 말하는데, 이 역시 ‘바람’이라는 시어를 자연의 바람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성령의 의미가 다분히 포함된 것으로 쓰고 있는 예이다. 뿐만이 아니다. 「또 태초의 아침」 제1연에서 시인은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 전신주가 잉잉 울어 /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하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바람’이라는 시어가 없으나 오히려 바람 소리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 제2연의 “무슨 계시일까.” 하는, 기독교적 의미가 뚜렷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류양선, 308-310쪽).
이처럼 「서시」에서 ‘바람’이라는 시어는 성령을 상징한다. 따라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서 잎새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상징하므로,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모든 죽어가는 것에 부는 성령의 바람인 것이다. 그런데 이 ‘잎새에 이는 바람’은, 늦가을에 잎새를 마르게 하고 시들게 하여 낙엽으로 떨어뜨리는 바람이다. 이사야 40:6-8에 나오는 여호와의 바람과 일맥상통한다.
이사야 40:6-8,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소리가 이르되 외치라, 콜 오메르 케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영, 루아흐)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영이 그 위에 불기 때문인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마르는 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을 마르게 하신다는 것이다.
“비의 계절이 오기 전 오월에 아라비아의 뜨겁고도 메마른 지역으로부터 오는 함신(Hamsin) 혹은 시로코(Sirocco)가 팔레스틴에 불어온다. 그것은 치명적인 바람이며 자주 여러 달 동안 끊임없이 불어서, 환경을 미세한 먼지로 채우며 무덥고도 답답하게 만든다. 아마도 선지자가 여호와의 기운(루아흐)에 대해서 말하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이 바람일 것이며, 그 이유는 바람이 여호와의 숨결의 기본적인 표명이기 때문이다.”(Edward. J. Young, 41쪽).
“하나님의 말씀에는 영속적 성격이 있다. 시들고 사라지는 인간의 육체와는 달리 그것은 영원히 서 있다. (중략: 인용자) 사멸하는 성격을 가진 모든 육체와 대조되어 하나님의 말씀은 사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속한다.”(Edward. J. Young, 42쪽).
7절에 의하면, 성령님의 사역 가운데에는 불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마르게 하시는 사역이 있다. 고신대 신학대학원의 박영돈 교수는 성령론을 전공한 신학자인데 그가 한국 교회를 위해 쓴 『성령 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라는 책에 이사야 본문과 관련하여 이런 내용이 나온다.
“교회가 성령의 잔잔한 순풍에 순응하지 않으면 성령의 거센 역풍을 만난다. 성령의 뜻을 따라 살면 ‘풍성케 하는’ 성령의 은혜를 맛보지만,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면 ‘시들게 하는’ 성령의 사역을 체험하게 된다.”(박영돈, 21쪽).
“이 말씀에서 여호와의 기운은 성령의 호흡, 바람을 의미한다. (중략: 인용자) 칼빈(Calvin)은 이 대목을 주해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적으로 새롭게 하실 때 하나님을 대적해서 높아진 육신의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시들게 하고 쇠퇴케 한다”고 했다. 세기의 설교자 스펄젼(Charles H. Spurgeon)은 이 말씀을 본문으로 ‘시들게 하는 성령의 사역(The Withering Work of the Spirit)’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했다. 이 설교에서 스펄젼은 오래 대망하던 구원과 회복의 역사가 이스라엘에게 임하기 전에 육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시들게 하는 성령의 사역이 있다는 본문의 메시지에 근거하여, 지금도 성령은 우리를 영적으로 풍성케 하기 전에 육적으로 쇠퇴케 한다고 설파했다.”(박영돈, 23쪽).
요컨대, 「서시(序詩)」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이란 모든 죽어가는 것에 부는 성령님의 바람이다. 윤동주 시인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그의 예민한 실존적 자아는 정직하게 자기 내면을 성찰할 때 그 안에 깃든 죄와 허물을 발견하고 ‘하늘’ 앞에 ‘부끄럼’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고 고백한다. 그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에서 왜 마지막에 ‘도’라는 보조사를 붙였을까? 그것은 자신의 실존을 성찰할 때 ‘하늘’ 앞의 ‘부끄럼’으로 괴로웠을 뿐만 아니라, ‘잎새’로 표상되는 교회와 민족의 현실을 볼 때‘도’ 괴로웠기 때문이다.
곧 시인은 자기 내면에만 갇히지 않고 교회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했다. 이 시를 쓴 1941년 11월은 이미 몇 해 동안 대다수 교회들이 신사참배를 자행하던 시기이며, 또한 민족의 현실 역시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중일전쟁이 고조되어 그 다음 달에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게 될 만큼 우리 민족에 대한 압제가 극심해지면서 신사참배를 비롯한 온갖 친일 부역 행위들이 일상화되었던 시기이다.
그럼 시인은 왜 괴로워했을까? 그것은 ‘잎새’ 곧 교회와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에 굴종하며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이 비록 궁극적으로는 ‘잎새’를 살리기 위해서 이는 것이었지만 당장은 시들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이 느끼기에 잎새를 죽어가게 하는 것으로 느낄 만큼 혹심한 고난의 채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서 시인은 ‘잎새’ 곧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리라 결단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실존적 자아의 ‘부끄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민족의 부끄러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리라 고백한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리라 고백한다. 시인의 이 고백은 오늘 우리에게 큰 감명과 교훈을 준다. 자기 실존의 ‘부끄럼’에 매여 있지 말고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아야 하고, 교회와 민족의 부끄러운 현실을 비난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시대의 어두운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민족을 사랑해야 한다.
‘시들게 하는’ 성령님의 바람은 육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시들게 하는데, 그 목적은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이다. 지금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산 결과, ‘시들게 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아프게 경험하고 있다.
생명의 길은 단 하나이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깊은 수렁에서 건져 주실 것이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우실 것이다. 고난 가운데 있는 겨레의 희망으로 세우실 것이다.
참고문헌
柳楊善, “尹東柱의 「序詩」 硏究”, 「어문연구」 40(4),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2. 12.
박노균, “윤동주의 <서시>론”, 「개신어문연구」 11권, 개신어문학회, 1994. 12.
박영돈 지음, 『성령 충만, 실패한 이들을 위한 은혜』, SFC 출판부, 2010.
이정안, “고등학교 국어교과서 소재 외국문학 연구 - 제1∼4차 교육과정을 중심으로”, 「개념과 소통」 16권, 한림과학원, 2015. 12.
Edward. J. Young, 장도선·정일오 옮김, 『이사야서 주석(Ⅲ)』, 사)기독교문서선교회, 2008.
O. Henry, 梁柱東 옮김, 「近古文選 東西奇文譯鈔 - 마즈막 잎새」, 文章 제1권 제4집, 文章社, 193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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