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자 박사가 '국학연구'에 기고한 글입니다.
16~19세기 풍산류씨 하회파의 혼반 경향을 다루었다. 혼반이란 중첩된 혼인관계를 대대로 계승하는 문중 집단으로 혼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파조 이후 특정 성씨와 4촌 이내에서 1회 이상의 혼인이 3~4대 지속되어야 한다.
하회파와 혼인을 한 성씨는 256개이지만 이 가운데 혼반을 형성한 성씨는 안동권씨를 비롯하여 진성이·의성김·안동김·광산김·영양남·순천김·인동장·풍산김·예안김·청주정·밀양박· 풍앙조·순흥안·전주이·아주신·예안이·진주강·경주이·함양박·선산김· 동래정·여강이·파평윤·김해김·평산신· 남양홍·인천채·영천이씨이다.
그러나 시기별로는 혼인의 경향이 조금씩 차이를 보였다. 16세기 중반까지는 하회파의 혼인에 관직과 경제적 기반 등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부터는 양상이 달라져 상대 가계에 퇴계문인의 존재 여부가 혼인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그렇지만 조식의 제자들과도 혼인이 이루어진 점으로 미루어, 전체적으로는 영남사림파 내에서 혼인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밖에 류성룡의 인간관계, 그리고 문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한 성씨들과도 혼인횟수가 다소 높았다.
17세기의 퇴계학파는 서애계와 학봉계로의 분화의 조짐이 보였다고 하지만 그것이 혼인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17세기 통혼권의 구심점은 여전히 퇴계의 문인이 많고 사족세가 강한 안동이다. 족세가 강한 파는 안동의 명문사족들과 중첩적인 혼인을 하면서 통혼권의 범위가 영남좌도까지 확대되었지만, 서파인 유천·겸근재파는 안동과의 혼인 집중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새거지인 예천· 문경을 비롯한 충청권으로 통혼권이 형성되었다.
18세기 혼인의 특징은 특정 성씨와의 지속적인 혼인을 통해 혼반이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18세기 향촌사회의 질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문중 기반의 확대였다. 서애 찰방공파가 18세기 하회파의 혼반 경향을 주도해 나갔으며 학계와도 족적 결합을 통해 유대를 형성하였다. 통혼권은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권이었지만 남인으로서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중앙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하고자 종친을 비롯한 근기남인과도 혼반을 형성하였다.
19세기에는 향촌사회가 병론과 호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이것이 혼반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병론에 속한 풍산의 예안이·풍산김·안동권씨, 예안 상계의 진성이씨, 그리고 상주 우천의 진양정씨 문경의 개성고씨. 경주의 여강이씨. 대구의 경주최씨와의 혼인 비중이 높았다. 19세기 들어 혼인 성씨는 더욱 많아졌지만 특정 성씨외의 혼인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그런 양상은 서애 찰방공파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으며, 그 다음이 낭천파, 겸암찰방공과 유천파, 우천과, 교관공파, 생물파, 겸근재파 순이다. 19세기 중앙정치가 벌열화된 것처럼 향촌사회도 특정 성씨와의 족적 결합을 더욱 높여 나갔다. 이것이 바로 혼반을 통한 생존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