氏族의 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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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는 양경문(楊敬文). 고려 때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를 지냈다. 송병순(宋秉珣)이 쓴 ‘구보(舊譜)’ 서문에 보면, 남원양씨(南原楊氏)는 고려조에 지군사(知郡事)를 지낸 양경문(楊敬文)으로부터 계대(系代)가 시작되었으나 그 뒤 소목(昭穆)을 빠뜨리게 되었는데, 9세 대제학공(大提學公) 양이시(楊以時)가 배출됨으로써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따라서 2세 이하 5세까지의 인물은 관직말고는 생존 연대 등 자세한 기록이 없어 공민왕 4년 문과에 올라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집현전(集賢殿) 대제학(大提學)에 이른 양이시(楊以時)를 중조(中祖)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 남원(南原)이 관향(貫鄕)이라는 뚜렷한 기록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 ‘제용재기(濟用財記)’에 양이시(楊以時)는 남원(南原)사람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보기이다. 이 이전까지는 남원(南原)에 여러 대에 걸쳐 세거해 와, 흔히 토착양씨(土着楊氏)라고 알려져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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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지 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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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고용군(古龍郡)이었던 남원(南原)은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영역이 되었고 신문왕 때는 소경(小京)을 두고 남원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 때 부(府)로 고치고 한때 대방군(帶方郡)이었다가 후에 다시 남원으로 고쳤다. 조선조에 이르러 도호부(都護府)가 되었고, 1896년 남원군이 되어 운봉군을 합하였고, 이후 시(市)로 승격하였다. 주요 성씨는 양(楊)ㆍ양(梁)ㆍ정(鄭)ㆍ진(晋)ㆍ병(甁)씨 등과 거령(居寧)의 백(白)ㆍ황(黃)ㆍ한(韓)ㆍ가(李)씨, 유곡(楡谷)의 장(張)ㆍ도(陶)ㆍ손(孫)씨, 남전(南田)의 임(林)씨 등이 있었다 |
파명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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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암공파(遯庵公派) 쌍매당공파(雙梅堂公派)-(종파(宗派)ㆍ중파(仲派)ㆍ도사공파(都事公派)ㆍ중산파(中山派)ㆍ장사랑공파(將仕郞公派)ㆍ재동공파(齋洞公派)) 익산파(益山派) 어은공파(漁隱公派)-(문학공파(文學公派)ㆍ낙하정공파(落霞亭公派)ㆍ참의공파(參議公派)ㆍ낙안공파(樂安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한림공파(翰林公派)-(종파(宗派)ㆍ중파(仲派)ㆍ수파(秀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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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세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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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양씨(南原楊氏)의 상계(上系)가 살았던 곳을 짐작하기 어려우나 9세 양이시(楊以時)와 그의 아들 양수생(楊首生)의 묘영(墓塋)이 황해도 개성(開城)에 있었던 사실이 ‘병술보(丙戌譜)’에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의 수도(首都) 개성(開城)에 경가(京家)가 살고 있었고 남원(南原)에는 향가(鄕家)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세 양사보(楊思輔)의 대 이래로 지금의 전북 순창(淳昌) 일대를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지키고 있는데, 고려 우왕 5년에 양사보(楊思輔)의 어머니 숙인이씨(淑人李氏)가 순창(淳昌)의 귀미(龜尾)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었다. 일부 자손들은 14세 양배(楊培)가 익산으로 장가든 후 그의 증손(曾孫) 양사헌(楊士獻)을 익산(益山)으로 분가시켜 익산파(益山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14세 양배(楊培)의 동생 양돈(楊墩)은 임실(任實)에 가서 터를 잡고 살았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남원양씨(南原楊氏)는 전북 순창군(淳昌郡) 금과면(金果面)ㆍ귀림면(龜林面)ㆍ팔덕면(八德面)ㆍ적성면(赤城面)ㆍ동계면(東溪面)ㆍ인계면(仁溪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특히 순창군(淳昌郡) 동계면(東溪面) 귀미리(龜尾里)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마을 전체 1백 50여 가구 7백여명이 모두 이 마을에 처음 남원양씨(南原楊氏)의 뿌리를 내린 11세 楊思輔(楊士輔)의 자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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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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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책에 처음 등장하는 양(楊)씨는 고구려(高句麗)의 명장 양만춘(楊萬春)과 양규(楊規)이다. 외침을 막아서 우리 민족을 지킨 위대한 인물들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 오래 전부터 양씨(楊氏)가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내의 양(楊)씨 가운데 이들 두 사람을 상계로 하는 후손이 없으니, 여기서도 단절과 인멸의 역사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양(楊)씨는 모두 47본, 이중 남원(南原)ㆍ청주(淸州)ㆍ중화(中和)ㆍ통주(通州) 등 4개본이 대종을 이룬다. 그중에도 남원(南原) 양씨(楊氏)는 다른 3본이 1240년 고려(高麗) 중엽 이후에 귀화한 성씨들인데 비해 자신들은 순수 한족(韓族) 혈통의 토착 성씨임을 주장한다. 양이시(楊以時)를 중시조로 한 것은 공민왕(恭愍王) 4년 문과에 급제한 양이시(楊以時)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5대조의 가계를 적은 과보(科譜)를 통해 전해진 것이다. 그나마 양이시(楊以時)의 며느리이며 오늘의 남원(南原) 양씨(楊氏)를 있게 한 숙인(淑人) 이씨(李氏)가 이를 가보로 간직해 전하지 않았다면 오늘에 이르러 남원(南原) 양씨(楊氏)의 상계는 더 아랫대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이(李)씨 부인은 하마터면 끊어져 버릴 뻔했던 남원양씨(南原楊氏) 가문을 이어준 열녀였다. 이(李)씨 부인은 고려말(高麗末) 우왕(禑王) 3년, 시아버지 양이시(楊以時)와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던 남편 양수생(楊首生)을 한 해 사이에 사별하는 불행을 당했다. 부자가 문과에 급제한 집안으로 출가,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한껏 부귀와 영화를 누릴 것으로 기대됐던 그녀의 일생은 신혼의 단꿈이 깨기도 전에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더욱이 이(李)씨 부인은 그때 임신중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기가 바쁘게 친정에서는 개가를 권했다. 뱃속의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李)씨 부인은 아기를 낳고 나면 개가를 하겠다고 말미를 구했다. 몇 달 뒤 아기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11세 양사보(楊思輔)다. 친정에서는 이젠 개가를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재촉이 성화같았다. 이(李)씨 부인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남편의 고향으로 낙향하기로 결심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습니다” 이(李)씨 부인은 친정집에 자신의 뜻을 밝힌 서찰을 남기고 천리길을 걸어 남원(南原) 교룡산(蛟龍山) 아래 남편의 옛집으로 내려왔다. 이(李)씨 부인이 남원(南原)에 내려온 지 얼마 안돼 난리가 터졌다.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운봉(雲峰)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남원(南原) 양씨(楊氏)의 일점 혈육 유복자를 품에 안은 이(李)씨 부인은 비홍산(飛鴻山)으로 피난했다. 그곳에서 바라본 순창(淳昌) 무량산(無量山)의 산세는 너무 아름다웠다. 저 아늑한 골짜기에 논밭을 일구면 두 식구 생계는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유복자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던 이(李)씨 부인은 서둘러 아주 이사를 했다. 재산이라곤 품에 안은 유복자 양사보(楊思輔), 시아버지 양이시(楊以時)와 남편 양수생(楊首生)의 문과 합격증인 양홍패(兩紅牌), 그리고 1세 양경문(楊敬文)에서 8세 양서령(楊瑞齡)까지의 가승보(家乘譜)가 전부(이 가보들은 오늘까지 전해져 그중 홍패(紅牌)는 81년 문공부가 보물 제725호로 지정했다)이다. 이때 이(李)씨 부인이 자리를 잡은 무량산(無量山) 아래 집터는 지금까지 6백여년간 23대에 걸쳐 대대로 종손이 지켜 오고 있다. 이 집터에는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무량산(無量山) 기슭에 도착한 이(李)씨 부인은 한 곳 명당을 발견했으나 그 자리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 집을 지어 살고 있었다. 몇 군데 좋은 자리가 있었지만 처음 그 자리 외에는 마음에 들지가 않아, 그 집에 방 한 칸을 얻어서라도 살 결심을 했다. 그런데 집주인은 자기가 집주인은 아니고, 집주인이 올 때까지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집주인은 누굽니까?” “집주인이 누군지를 모릅니다. 다만 양(楊)씨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인 이(李)씨 부인이 “내 등에 업힌 아기도 양(楊)씨이니 방 한 칸쯤 쓸 수 있겠군요”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니, 그 사람은 모자를 살펴보더니 “부인의 집입니다”하고는 어디론가 떠나가 버리고, 모자가 그 집에 눌러 살게 됐다는 것이다. 무량산(無量山) 아래 자리를 잡은 이(李)씨 부인은 농사에 밤낮 애쓰며 양사보(楊思輔)를 키웠다. 양사보(楊思輔)는 자라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가 함평(咸平) 현감을 지내는 등 가문을 일으켰다. 그의 후손에서 8명의 문과 급제, 10명의 무과 급제, 30명의 생원ㆍ진사가 대를 이어 남원(南原) 양씨(楊氏)는 탄탄한 가문의 터를 다졌다. 고려조에 양이시(楊以時)ㆍ양수생(楊首生)의 부자 문과 급제자를 배출, 명문으로 떠올랐다가 수생(首生)의 요절로 꺼져 버릴 뻔했던 가문을 한 여인의 ‘위대한 모성애’가 건져낸 것이다. 훗날 조선조 세조(世祖)는 1467년(年) 이(李)씨 부인에게 정려(旌閭)를 내려 후손들에게 그 정절을 기리도록 했다. 이(李)씨 부인의 정려(旌閭)는 조선조에 내린 정려(旌閭)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조선조에 들어 남원(南原) 양씨(楊氏)의 첫 문과 급제자는 양사보(楊思輔)의 손자(13세)인 양자유(楊子由)다. 세조(世祖) 14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성품이 곧아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했다고 한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수렴 청정을 받고 있는 성종(成宗)에게 성년이 된 뒤의 수렴청정의 부당함을 간하고 친정을 상소했다가 영의정으로 있던 한명회(韓明澮)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직상소를 올린 기골의 선비였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ㆍ금산군수(錦山郡守)를 역임했고 세조실록(世祖實錄)ㆍ예종실록(睿宗實錄) 찬수관(纂修官)을 지냈다. 양배(楊培)의 아들 양공준(楊公俊)은 24세 때 진사(進士)에 오르고 13년 뒤 문과에 급제, 조선조에 들어 두 번째 급제자가 됐으나 42세에 요절해 벼슬은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에 그쳤다. 그러나 그의 아들 양홍(楊洪)과 손자 사형(士衡), 증손 시진(時晋)까지 4대가 문과에 급제했고 양시진(楊時晋)의 사촌 양시우(楊時遇)ㆍ양시정(楊時鼎)도 모두 문과에 급제, 남원(南原) 양씨가(楊氏家)의 명망이 일세에 떨쳤다. 양시정(楊時鼎)의 5세손 양몽인(楊夢寅)도 대과에 올랐다. 양공준(楊公俊)의 아들 양홍(楊洪)은 중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홍문관(弘文館) 지제교전한(知製敎典翰), 청도군수(淸道郡守), 선산부사(善山府使)로 재임시에는 왜구정벌에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아들 양사형(楊士衡)은 선조조에 문과급제 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군량을 모아 일선에 조달하였고,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 선조를 호종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도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워 호종원종일등공신(扈從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양사형(楊士衡)의 아들 양시진(楊時晋)은 선조 3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이듬해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 때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으로 중국(中國)의 연경(燕京)(북경(北京))을 다녀와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에 올랐다가 광해군(光海君)의 혼정이 극에 달했던 때 당파 싸움에 휩쓸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좌천됐다. 그 후 다시 날조된 능창대군(綾昌大君) 역모 사건에 연루돼 함흥(咸興)으로 귀양을 가게 됐고, 귀양길에서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양시진(楊時晋)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무고함이 밝혀져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는데 그의 부인 도강(道康) 김씨(金氏)는 남편이 죽자 햇빛을 보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남원(南原) 양씨(楊氏) 문중에 1653년(年) 두 번째 정려(旌閭)를 내려 정정을 표창했다. 양사민(楊士敏)의 아들이자 양시진(楊時晋)의 종형인 양시정(楊時鼎)은 인조 2년 문과에 급제, 충청도사(忠淸都事)ㆍ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 등을 역임했고, 양시우(楊時遇)는 광해군 7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능창대군(綾昌大君)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갑산(甲山)에 귀양갔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안현감(禮安縣監)ㆍ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남원(南原) 양문(楊門)의 첫 무과 급제자는 18세손 양우춘(楊遇春)의 장남 양거흥(楊巨興)이다. 그의 아들 양윤화(楊允華)도 숙종 때 무과에 급제, 부자 무과 급제를 자랑한다. 양여규(楊汝珪)ㆍ여기(汝機)와 양오거(楊五擧)ㆍ원거(元擧)ㆍ화거(華擧)는 사촌간으로 모두 무과에 급제, 세상의 부러움을 샀다. 이밖에도 남원(南原) 양문(楊門)은 배(培)ㆍ돈(墩)ㆍ공말(公●)ㆍ사민(士敏)ㆍ사형(士衡)ㆍ시우(時遇)ㆍ여백(汝栢)ㆍ정기(鼎基)ㆍ회영(會榮)ㆍ진우(鎭禹)ㆍ응수(應秀) 등 유현(儒賢)과 시간(時幹)ㆍ우기(禹基)ㆍ춘태(春泰)ㆍ응조(應祖)ㆍ학태(學泰)ㆍ진호(鎭豪)ㆍ진갑(鎭甲)ㆍ원신(元臣)ㆍ치근(致根)ㆍ종갑(宗甲)ㆍ종을(宗乙)ㆍ득희(得熙)ㆍ규환(奎煥)ㆍ재홍(在鴻)ㆍ석종(錫宗)ㆍ석규(錫奎)ㆍ석원(錫源)ㆍ종린(鍾麟)ㆍ석모(錫謨)ㆍ석우(錫遇)ㆍ주영(週泳)ㆍ기영(璣永)ㆍ헌영(憲永)ㆍ건영(健永)ㆍ찬수(贊洙)ㆍ원영(瑗永)ㆍ인영(寅泳)ㆍ병용(秉鎔)ㆍ병기(秉錡)ㆍ병현(秉鉉)ㆍ병운(秉雲)ㆍ병익(秉益) 등 평생 벼슬길을 외면하고 학문에만 전념한 유자(儒者)들을 배출했다. 그 중 양배(楊培)는 학덕이 높아 남효온(南孝溫) 등과 도의로 사귀었으나 연산(燕山)의 혼정(昏政)을 보고 아우 돈(墩)과 함께 순창(淳昌)에 은거하였다. 조정에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제수했으나 끝내 불사하고 고기를 낚으며 여생을 마쳤다. 훗날 사람들이 그들 형제가 고기를 낚던 바위를 배암(培岩)ㆍ돈암(墩岩)이라 불러 흠모하였다 한다. 양돈(楊墩)의 아들 양공말(楊公●)은 김인후(金麟厚)ㆍ소세양(蘇世讓)ㆍ임억령(林億齡) 등과 도의로 사귀었고 순창(淳昌)의 적성강(赤城江)가에서 풍류를 즐기며 일생을 마친 학자이다. 양사민(楊士敏)은 양홍(楊洪)의 둘째 아들로 형과 두 동생이 있었으나 바로 아랫 동생은 이미 익산(益山)으로 분가했고, 그의 나이 34세 때 아버지와 형이 거의 동시에 세상을 떠나 막내 동생과 조카들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평생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동생과 조카들을 가르쳐 ‘사홍팔백(四紅八白)’을 배출했다. 사홍(四紅)은 동생 사형(士衡)과 아들 시정(時鼎), 조카 시진(時晋)ㆍ시우(時遇) 등 4명의 문과 급제자를 말하고 팔백(八白)은 동생 사헌(士獻)ㆍ사형(士衡)과 아들 시성(時省)ㆍ시정(時鼎)ㆍ시익(時益), 조카 시우(時遇)ㆍ시진(時晋)ㆍ시면(時冕) 등 팔사마(八司馬)를 말한다. 조정에서는 그의 덕행을 높이 사 익위사익위(翊衛司翊衛)를 제수하고 벼슬길에 나올 것을 권했지만 나가지 않았다. 훗날 유림들은 그를 현자(賢者)로 받들어 지계사(芝溪祠)에 배향했다. 양문(楊門) 유현(儒賢) 중에도 일세의 석학으로 꼽힌 양응수(楊應秀)는 9세 때 아버지를, 12세 때 어머니를 사별하는 불행을 당했다. 끼니가 어려운 가정에 위로 21세 큰 형 등 두 형이 있었다. 동생의 재주를 아낀 형의 도움으로 양응수(楊應秀)는 당시 호남(湖南)의 명유(名儒) 권화산(權華山)의 문하로 가 성리학을 배웠다. 학문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 20대에 이미 문명이 널리 알려져 가르침을 청하는 유생들이 전국에서 찾아들었다. 과거를 보라는 문중의 권유를 그는 “아직 학문이 멀었다”고 거절하고 당시 나라안에서 제일 가는 유현(儒賢)으로 알려진 이재(李縡)를 찾아 그의 수제자가 됐다. 이재(李縡)는 양응수(楊應秀)의 학문과 인품을 몹시 아껴 부자의 정으로 대하니 문하생들 누구 하나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나이 56세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대학자로 이름을 떨쳐, 나라에서는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제수했다가 다시 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을 제수하면서 벼슬길에 나서도록 했으나 받지 않았다. 부솔(副率)은 세자(世子)를 돕는 관직으로, 학행이 뛰어나지 않으면 제수되지 않는다. 68세에 세상을 떠나 지계사(芝溪祠)에 배향된 그는 ‘사례편람(四禮便覽)’을 저술했지만 스승 이재(李縡)의 이름으로 발표했고, 자신의 유고(遺稿)로는 ‘문답서간(問答書簡)’, ‘위학대요(爲學大要)’, ‘종주편(宗朱編)’등 17권이 전하고 있다. 양춘태(楊春泰)는 양응수(楊應秀)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다가 함께 이재(李縡)의 문하에 들어갔다. 평소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언제나 글공부가 끝나면 안암(鞍岩)이란 바위에 올라 소요하였으므로 안암(鞍岩)이라는 호를 얻었다. 양응수(楊應秀)를 친아버지처럼 공경했던 양춘태(楊春泰)는 양응수(楊應秀)의 집안이 가난해 어려움을 겪을 때 동문들과 계를 짜 땅을 사고 곡식을 모아 뒷바라지했다. 그 중시조 양이시(楊以時)와 양수생(楊首生)의 제사를 지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녹갈암(鹿渴岩) 아래에 단(壇)을 쌓음으로써 양이시(楊以時)ㆍ양수생(楊首生) 부자의 제사가 이때 비롯되었다. 한말(韓末)의 양춘영(楊春泳)은 민비(閔妃) 시해 사건이 있고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붙들려 대구(大邱) 형무소에서 사형당해 순국했다. 해방 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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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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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
양경문(楊敬文 지영월도사(知寧越都事)) 양유점(楊由漸 창정(倉正)) 양한점(楊漢占 중서사인(中書舍人)) 양직령(楊直令 산원(散員)) 양윤보(楊允保 군기소감(軍器少監)) 양서령(楊瑞齡 진사(進士)) 양이시(楊以時 대제학(大提學)) 양수생(楊首生 직제학(直提學))
▲조선조
양사보(楊思輔 태종조(太宗朝)·함평현감(咸平縣監)) 양연(양연 세조조(世祖朝)·진주판관(晋州判官)) 양자첨(楊子瞻 성종조(成宗朝)·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양배(楊培 연산조(燕山朝)·지계서원주벽(芝溪書院主壁)) 양돈(楊墩 연산조(燕山朝)·아계서원주벽(阿溪書院主壁)) 양공준(楊公俊 중중조(中宗朝)·병조좌랑(兵曹佐郞)) 양공말(楊公沫 중종조(中宗朝)·사산감역(四山監役)) 양홍(楊洪 명종조(明宗朝)·선산부사(善山府使)) 양사민(楊士敏 선조조(宣祖朝)·우위사익찬 지계서원배향(翊衛司翊贊 芝溪書院配享)) 양사위(楊士衛 선조조(宣祖朝)·영광군수(靈光郡守)·증도승지(贈都承旨)·화산서원배향(花山書院配享)) 양대중(楊大仲 선조조(宣祖朝) 내자봉사(內資奉事)) 양집중(楊執中 선조조(宣祖朝) 내자봉사(內資奉事)) 양희적(楊希迪 선조조(宣祖朝)·임진창의(壬辰倡義)·내선시판관(內膳寺判官)) 양시진(楊時晋 광해조(光海朝)·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조참의(吏曹參議)) 양시면(楊時冕 광해조(光海朝)·성균관장의유현(成均館掌議儒賢)) 양시정(楊時鼎 인조조(仁祖朝)·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양시익(楊時益 인조조(仁祖朝)·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 양여백(楊汝栢 인조조(仁祖朝)·우위사익찬(翊衛司翊贊)) 양시립(楊時立 인조조(仁祖朝)·강진현감(康津縣監)) 양시언(楊時彦 인조조(仁祖朝)·화순군수(和順郡守)) 양여매(楊汝梅 인조조(仁祖朝)·유현진사(儒賢進士)) 양여균(楊汝筠 인조조(仁祖朝)·병자창의(兵曹倡義)·호조참의(戶曹參議)) 양여장(楊汝樟 인조조(仁祖朝)·병자창의(兵曹倡義)·공조참의(工曹參議)) 양몽거(楊夢擧 숙종조(肅宗朝)·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양여두(楊汝杜 숙종조(肅宗朝)·낙안군수(樂安郡守)) 양오거(楊五擧 숙종조(肅宗朝)·곤양군수(昆陽郡守)) 양회영(楊會榮 영조조(英祖朝)·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 양진우(楊鎭禹 영조조(英祖朝)·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 양응수(楊應秀 영조조(英祖朝)·익위사부솔(翊衛司副率) 지계서원배향(芝溪書院配享)) 양몽인(楊夢寅 영조조(英祖朝)·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양정신(楊廷臣 영조조(英祖朝)·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양종해(楊宗楷 정조조(正祖朝)·동몽교관(童蒙敎官)) 양천수(楊天壽 정조조(正祖朝)·동몽교관(童蒙敎官)) 양재영(楊在榮 철종조(철종조)·감역(監役)) 양석룡(楊錫龍 철종조(철종조)·유현진사(儒賢進士)) 양석승(楊錫升 고종조(고종조)·참봉(參奉)) 양춘영(楊春泳 순종조(순종조)·의병대장건국공로훈장국민장(義兵大將建國功勞勳章國民章))
[등과인명(등과인명)]
▲고려조
문과(文科) 양이시(楊以時 공민왕조) 양수생(楊首生 우왕조)
▲조선조
문과(文科) 양자유(楊子由 집의(執義)) 양공준(楊公俊 호좌(戶佐)) 양홍(楊洪 부사(府使)) 양사형(楊士衡 병정(兵正)) 양시진(楊時晋 문학(文學)) 양시우(楊時遇 현감(縣監)) 양시정(楊時鼎 사예(司藝)) 양몽인(楊夢寅 사성(司成))
[조선조 급제자 정록]
자유(自由 세조(世祖)14년·춘장(春場)·병과(丙科)) 공준(公俊 중종(中宗)15년·별시(別試)·병과(丙科) 홍(洪 중종(中宗)35년 별시(別試)·병과(丙科) 사형(士衡 선조(宣祖)2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시진(時晋 선조(宣祖)39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시우(시우 광해(광해)6년·전주별시(全州別試)·병과(丙科)) 시정(時鼎 인조(仁祖)2년 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몽인(夢寅 영조(英祖)16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