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조선후기의 사회변동
1. 군사제도의 개편
조선전기의 군사제도인 오위제도는 왜란 이전에 이미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왜란 당시에 관군의 참패를 가져왔다. 이에 전쟁 수행을 위해 왜란 중에 긴급히 삼수병을 조직하여 훈련도감에 예속시켰다. 그 뒤 호란을 거치면서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차례로 설치되어 조선후기에는 오군영체제가 확립되었다. 조선초기 중앙의 기간부대이던 오위체제가 무너진 후 이를 대신하여 조선후기 중앙군의 기간부대가 다시 재정비된 것이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8월에 임시기구로 설치되어 점차 상설기구로 변모한 뒤 1746년(영조 22)에 속대전에 올라 법전에 규정되었다. 조선전기의 양인의 의무군역을 바탕으로 한 중앙군사조직인 오위는 일찍부터 군인으로 복무하는 대신 포를 내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여러 모순을 드러내다가, 16세기 말부터는 그 조직이 허구화되었다. 이러한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에 대패하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창설되었던 것이다. 훈련도감은 명나라 장군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참고하여 군인을 포수․살수․사수의 삼수병으로 나누어 훈련시켰으며, 속오법에 의한 군사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삼수병은 급료병으로서 국가에서는 이들의 급료를 해결하기 위하여 전결을 대상으로 삼수미를 거두어 이를 재원으로 사용하였다. 이 훈련도감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날 때까지 존속되었다.
어영청은 인조 2년(1623) 인조반정으로 국내정세가 어수선하고 국제적으로 후금과의 관계가 위급해진 가운데 설치되었는데, 후금에 대하여 강경책을 표방한 인조가 친정(親征)을 대비하여 정예병 260여명을 선발하여 발족시킨 어영군이 모체가 되었다. 이 어영군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피난할 때 호위의 임무를 맡았다. 이 때 호위병력의 강화를 위해 포수 가운데 용맹한 자 600명을 선발하여 1,000명으로 증원하였다. 이로써 어영군은 당시 수도방어의 책임을 맡고 있던 훈련도감과 더불어 중앙군의 핵심을 이루었다. 어영군은 한 때 총융사에 소속되기도 하였으나, 정묘호란 직후인 인조 6년(1628년) 12월에는 경덕궁 서쪽에 본영을 두고 어영대장을 정점으로 하는 군영체제를 갖추었다. 어영군은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다시 증원되어 인조 13년(1635) 무렵에는 6,200명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효종 때에는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종래와는 전혀 다른 군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총융청은 이괄의 난 때 반군이 수도외곽인 경기도의 방어망을 쉽게 뚫고 서울을 점령하게 되는 취약성이 드러나자, 경기도 일대의 정군과 속오군을 조직화하여 설치하였다. 그러나 총융군은 처음부터 수도를 직접 방위하고 왕을 호위하는 군영은 아니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 대비하여 수도 외곽의 경비를 담당하여 간접적으로 수도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징병이 주로 어영군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이를 보강하기 위하여 인조 22년(1644) 총융사 구인기(具仁墍)가 장초군을 뽑아 도성에 입번하여 궁성 숙위의 임무를 가지게 되면서 중앙군의 테두리에 들게 되었다. 그후 영조 26년(1750)에는 경기병사가 총융사를 겸하도록 하고 본청을 북한산성에 출진의 형식으로 두게되었으며, 영조 33년(1757)에는 북한산성을 맡아 다스리던 경리청을 이관받아 북한산성 중심의 경기북부 수도의 외각방어를 담당하였다.
수어청은 인조 2년(1624)에 경기병사겸총융사 이서(李曙)로 하여금 남한산성을 수축하게 한 다음 인조 4년(1624)에 수어청을 설치하고 광주 등의 경기 진관의 군무를 관장하게 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후 인조 10년(1632) 무렵에 처음으로 수어사가 설치되었으며, 인조 14년(1636)에는 수어사 중심의 남한산성 방위체제가 확립되었다. 또 효종 7년(1656)에는 인근 지방의 군사들이 산성에 들어가 지키는 숙영체제의 윤곽이 갖추어졌다. 이어 숙종 9년(1683)에는 수어사를 폐지하고 광주부윤을 유수로 승격시켜 이를 영솔하게 하였다.
금위영은 숙종 8년(1682) 병조판서 김석주의 건의로 종전에 병조 소속이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 소속의 훈련별대를 합쳐 하나의 군영으로 탄생하였다. 이 군영은 훈련도감․어영청과 더불어 국왕호위와 수도방어의 핵심 군영의 하나로 그 임무가 막중하였기 때문에 병조판서가 그 대장직을 겸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속오군이 조직되어 있었다. 속오군은 임진왜란 중 기효신서의 속오법에 따라 양인․공사천인으로 조직된 혼성군인이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였던 선조 27년(1594)부터 조정은 무너진 지방군의 재건에 착수하면서 이미 중국에서 인정된 바 있는 속오법에 따라 황해도부터 시작하여 1596년 말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조직이 완성되었다. 이 속오군은 전란 와중의 편성과정에서 중앙과 지방관 사이에 군사지위권․조련권 등의 귀속문제로 혼선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조직이 완성되자 군사지휘권․조련권 등은 진관의 영장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 속오군은 쌀을 내고 역을 면하는 경우도 있으나, 고을에서 일정 기간 병역과 훈련을 쌓아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각 도에는 지방의 사정에 따라 몇 개의 영을 두었는데, 전라도에는 5개의 영이 두어졌다.
또한 군사적인 요충지에는 산성을 쌓고 영장을 파견하여 이를 지키게 하였다. 장성에는 입암산성이 수축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장성현감이 입암산성 수진관을 겸하면서 현에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장성군청 홈페이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