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에서 칠보쪽으로 약 13km 정도 큰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으로 축현리 입구에 「동학농민군 영솔장 최경선지묘」라는 도로표지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약 5km 정도 더 가면 동학농민군 영솔장 최경선 장군의 실묘가 나온다.
최경선(1859~1895)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김덕명과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 혹은 敬善·慶善)이다. 동학 접주로 전봉준·손화중·김개남·김덕명 등과 교유하면서 조선왕조의 체제변혁을 꾀했다.
1893년 11월 동학 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고부에서 농민봉기를 계획할 때 전봉준·손여옥 등과 함께 사발통문에 서명했다.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 때 고부군아를 습격하여 장악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동학농민혁명 발발 이후에는 영솔장(領率將)이 되어 선봉에서 활약했다. 5월 7일(양력 6. 10) 전주화약이 맺어져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자 전봉준과 함께 장성·담양·순창·옥과·남원·창평·순천 등지를 두루 다니며 집강소 설치를 독려했다. 나주목사 민종렬(閔鍾烈)이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자 7월초 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의 동학 접주 오권선(吳權善)과 연합하여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8월 13일 전봉준이 민종렬과 담판하여 집강소가 설치되자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했다.
일본군의 침략에 반대하여 일어난 재봉기 때는 태인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참여했다. 그해 9월 일본군이 해로를 통해 전라도 해안을 공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광주에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농민군 주력부대가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자 이에 합류하기 위해 11월 1일 손화중과 함께 원평·태인으로 북상했다. 태인에서 농민군을 수습하여 11월 23일 나주를 공략했으나 실패했으며, 다시 남평을 공격했으나 역시 패하여 승주로 이동했다. 11월 27일 손화중과 함께 정부군에 의해 점령된 광주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나 부대를 해산했다. 12월 3일 동복에서 체포되어 나주의 초토영(招討營)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듬해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김덕명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에는 교수형에 처해지면 시체를 수습하기 어려웠는데, 다른 농민군지도자와 달리 그의 시신은 다행스럽게 수습되었다.
최경선의 묘역은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읍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동학농민군 영솔장 최경선 묘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최경선 장군 순국 101주년이 되는 1996년 9월 8일 최경선의 후손인 최명언씨와 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가 주관하여 그 윗쪽에 위치했던 묘를 이장하고 주변 묘역을 정비하였다. 이때 비문과 안내판, 조형물 등이 조성되었다. 조형물의 구조는 최경선 장군 묘를 중심으로 그 뒷면에 병풍처럼 11개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무명 농민군들의 영혼이 땅속에서 그림자로 연결된다.
그림자가 다시 농민군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최경선을 호위하는 형태로 제작되어 동학농민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역사이며 오늘날 우리가 이어가야하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임을 알리고 있다. 봉분 오른편에는 “동학농민군영솔장최경선지묘(東學農民軍領率將崔景善之墓)”라고 쓴 묘비가 서 있으며, 봉분 앞 아래쪽에는 화강암에 사발통문의 서명자 명단이 사발통문과 동일한 양식으로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종합지식정보시스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