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두규 시인의 시세계 숲에서 건져 올린 필연적 사유들 <시인.문학평론가> 박철영
1. 일물 일어의 문장
시인은 시적 사물이나 대상에 대하여 독특한 관점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자아를 통한 또 다른 내부에 존재하는 타자의 눈으로 바라본 지점이자 세계를 말한다. 찰나지만, 시선과 접점이 발생되는 지점에서 확장이나 깊은 성찰을 불러온다. 그 타자는 시인의 내부자로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실체를 갖고 있다. 그 실체는 시적 사유의 집중된 응시에서 이루어진 도그마로서 비판이나 존재에 대한 증명이 굳이 필요치 않는 교조주의적 숙주를 갖고 있다. 하지만, 시라는 구조에 편입된 언어는 문학성을 띤 언어를 기본으로 한다. 시적 언어는 고도의 은유로 거듭 변용되고 형상화에 이른다. 은유라는 언어의 실체는 굳이 형식주의의 주의 주장을 빌지 않아도 이미 우리가 습관적으로 발화하는 문학적 요소이자 시적 언어로 구체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시적 언어는 곧 유사성이나 동일성의 근사치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두규의 시적 언어는 매우 유일적이며 정적이고 고도의 집중과 응시에서 이루어진 형태로 발화된 문장이다. 산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듯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의 진입을 통해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려는 정신 의지로 진력해온 것을 시로써 보여준다. 시라는 정제된 문장으로 추출해낸 시적 사유는 일정한 틀 속에서 변전한다. 이어 시어 속 일말 일어로 축성한 시 세계는 유일적 신앙으로 나아가는 주어로 또다시 변주된다. 특히 시어가 갖는 속성상 은유라는 개념 속에 은연중 내재한 유사성에는 이질성을 동일성으로 은근하게 흡입해서 이성적 자아와 물성이 이내 일체를 이루게 한다. 우리가 아는 문학 속의 시라는 속성은 매우 복잡한 언어의 소요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박두규 시인의 문장 속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어가 소요를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시로 구조하고 있는 문장의 나열과 다의성에 기초하여 시로 표현하려는 시적 위의威儀가 어느 지점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여주는 시의 중심은 항상 자연을 향한 정신적 영역으로 구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당연하게 시적 소요를 유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의 문장 속에서 존재하는 타자의 다변적인 상상력으로 작용하는 이미지는 정신 구도의 일 방향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자아와 동일한 사유로 일체를 이룬다. 그 징후는 복잡한 현대 사회 속에서 다양하게 욕구를 도발하는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상업성에 있다. 그 폐해로 원인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자아의 각성은 그러한 시류에 적응하며 살아가려는 다항적 갈등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물질적 유혹을 극복하려는 박두규 시인의 시에서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시의 근원은 자연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다. 그런 경향은 자연으로의 강한 귀소 의식을 들 수 있으며 궁극에 닿고자 하는 곳은 자연 질서에 순응하는 사랑이며 고도의 정신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시인만의 매우 인간적인 성향으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시로서 보여준다. 자연 속 정신적인 구도를 향한 근원에 다가가겠다는 의지는 정신적 사유가 더 깊어지는 가역성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박두규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의 세계는 매우 정적이며 시가 장악하고 있는 주체는 다의성에 기초한 소요를 고요로 변주시키는 심리적인 진정 효과를 갖는다. 언제나 시적 세계에서 추구하는 방향은 자연을 향하여 열려 있고 그 내면은 정신적인 수도修道의 경계를 자연 질서에 즈음하여 순응하듯 기교나 수사적인 언어를 지향하지 않는다. 그래서 순수하거나 담백한 시어는 잘 단련되지 않는 본래의 육체처럼 군더더기 없는 자연을 모방한다. 그런 자체가 되레 군더더기 없는 시의 전형으로 독자에게 다가와 시선을 해찰할 수 없도록 한다. 시인이 의도하였던 아니면 의도하지 않았던 독자는 사물적 대상에 대한 공감을 오래도록 시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시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박두규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모악출판사)가 발간되었다. 이번 기회에 더 많은 사유로 농익어진 시인의 시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시는 읽어 눈이 편해야 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서를 갖춰야 한다. 그게 가독성이며 공감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2. 무위無爲의 삶과 사랑
난해하지 않은 시의 명징성은 투명성을 동일한 속성으로 갖고 있음을 <세상이 경이로운 건>에서 잘 보여준다. “푸른 버들치 떼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저 자유로움도 스스로의 맑고 투명한 속에서 왔겠지.// 세상을 경이롭다고 말할 수 있는 건// 나무나 물고기 같은 여린 목숨들이// 아무런 원망도 없이 순순히 죽어가기 때문일 거야.// 그토록 모든 것이 사랑이고// 그 사랑은 아랑곳없이 그저 주는 것일 뿐인데// 우리가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마저도/ 사실은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가.// 그대를 사랑하는 일 또한// 스스로의 맑고 투명한 그 자리를 찾아감이니.” 사람이나 미물이나 생명의 유지를 위한 유동은 궁극으로 지향하는 사랑의 행위임을 시인은 알려준다. 그 사랑은 통속적인 이성에 대한 사랑이 아닌 자연 속에서 일체로 이루어진 고귀한 생명 반응으로 한결같음을 말해준다. 또한 ‘푸른 버들치’처럼 몰려다니는 속성은 명징과 투명성을 지향하는 자유 행위이고 그 과정은 사람의 일생과 다를 바 없음을 간파하게 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세속世俗이라 치자 그렇다면 그 바깥의 세상은 정신적 신비주의 세계까지를 함의할 수 있다. 시인이 갈망하는 세계는 복잡한 사회관계를 벗어난 자연 질서로의 회귀를 통해 이뤄낸다. 그 경계 안을 딱히 자연이라 구획하지 않아도 이미 시인의 내면에는 철저하게 구현된 자연이 존재한다. 간혹 그 실체에 대한 기다림은 경건함으로 때로는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사랑은 홀로 어둠의 숲을 헤매고>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어둠이 오고// 바람 속 휘파람 소리에 한껏 고적해진 넋은// 어둠의 구석지에 쪼그려 앉아// 칠흑의 어둠 속 어둠에게 묻는다.// 고요의 뿌리는 어디쯤에 있는가.// 그대는 어디서 아침을 깨워 데려오는가.”라며 묻고 또 묻는다. 이런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이뤄지는 생명 현상에 대한 신비성과 일관된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으로 그것은 초월적인 대상에 대한 현현까지를 의미하며 그것에 대한 성스러움 곧 히에로파니(hierophanie)를 상상하게 한다. 그 체험적 사유는 인간이 구분한 시간까지 초월함을 알 수 있다. 시의 대상으로 다가온 <축시丑時의 숲>은 언어가 함의하고 있는 박명마저 사라지고 난 후에야 가능한 사유의 세계다. 그곳은 언어를 초과한 온통 칠흑과 고요로 충만한 밤의 세계이고 정신적 깨달음으로 상징되는 성聖스러운 장소로 탈바꿈된다. 그 속에 갇힌 “숲의 어둠 속, 소리 없이 흐르는 고요를 본다.// 이 고요, 결코 붙잡지 말고// 반딧불이의 느린 유영처럼 따라 흘러야 한다.// 축시에 이르러 숲길의 풀들은 온통 이슬로 촉촉하니// 수천수만의 내가 잠에서 깨어 홀가분하다.// 파편처럼 박혀 있던 외로움도 회한도 황홀했던 시간도// 모두 투명한 침묵이 되어 풀잎에 매달려 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이토록 나의 몽상夢想을 깨운다.// 축시의 숲, 이 찰나의 어디쯤에서// 그대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라며 시인은 진정한 자유에 도달하려는 좌망적坐忘的 사유에서 추수된 시적 지향을 잘 보여준다.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은 단순한 어둠 속의 숲이 아니다.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숲에서 보이지 않는 신성神聖 즉 영성靈性을 갈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수천수만의 내가 잠에서 깨어 홀가분”한 것처럼 비로소 조금씩 내면에 잠재된 신성에 다가갈 수 있는 감각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갖는 생명 자체에 신성神聖을 간직하고 있다고 볼 때 인간성에 대한 확신은 생명 존엄에 대한 인식과 다르지 않다. 그런 확신은 자연 질서 속에서 나약한 인간이 갖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지금껏 이루어진 종교적인 근원도 인간이 갖고 있는 정신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무한한 정신성은 비로소 ‘축시의 숲’에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그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자신(타자) 즉 신성神性으로 현현된다. <눈부신 어둠>에서 보이기 시작한 내면의 타자로 존재하는 “나는 꽃도 그늘도 너무 쉽게 얻었다.” 어둠이라는 자연 질서 속에서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그 신성은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로 또다시 각성된다. 사실 여기에서 지시하는 어둠은 자연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는 정신세계 까지를 영역하고 있다. 그것은 <어느 봄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무 화려한 세상에 와 있다”는 자의식은 정신적 개안開眼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한 결과는 하루아침에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오고 있었다.
BC 2500 년 전 인더스의 어느 협곡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잘 가던 길을 잃었고 또 돌아갈 길마저 잃었다. 처절한 울음 한 가닥이 역류했고 그 울음, 그 소란스 러움이 심해서 스스로 신뢰할 수 없었다. 드라비다족의 문장文章을 발견하지 않 았다면 나는 바로 협곡을 떠났을 것이다. 그 지점 또한 종착역에 이르기 위한 분 기점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온종일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체념한 듯 눈을 감으니 내 앞에 있었다. 그 문장文章 속에는 흩어져 있던 나의 모든 시간들이 집결하여 우 주의 질서로 편입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답正答이라고 해도 나는 정답을 발견한 것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돌이켜보면 정답이 선이라 해도 그 선은 위선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오답 誤答이 악이라 해도 그게 더 순수에 가깝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우리는 이 두려 움 때문에 한 生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갈증은 물 한 모금을 적시던 목젖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던가.
-<경전을 읽고 난 어느 날씨 좋은 날> 부분
여행이란 단순한 지역을 벗어나는 것 이상이 될 수 있다. 시간을 초월해 기원전 2500 년 전 신들의 땅 인더스의 하랍파나 모헨조다로의 어느 협곡으로 시인은 찾아든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을까?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자기 성찰의 마지막 단계쯤에서 더 절실해진 ‘나’에 대한 회의懷疑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가던 길을 잃었고 또 돌아갈 길마저 잃”어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찾아들어가 길을 잃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일컫는 길은 일반적인 길을 말하고 있을까? 그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 곧 인간이 생명을 영위하면서 가져야 할 정신적 출구를 잃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적 존재로써의 길을 잃고 보니 막막해져 “처절한 울음 한 가닥이 역류”한다. 시인이 인더스 협곡에서 쏟아낸 울음소리는 인류 문명의 시원지가 갖는 신성한 정신에 부합하는 언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태초의 사람들과 같은 울음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린 세속적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지금까지 쏟아냈던 시인의 말이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이곳에 와서야 처절하게 깨닫고 있다. 그마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신탁神託과도 같은 신神의 문장文章인 “드라비다족의 문장文章”을 본 순간 그 이유는 더 절실해진다. 인간에게 가장 명징한 언어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체념을 해버리고 난 후 눈을 감으니 내 앞에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세속적 생각을 버려야만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지금껏 살아온 생애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는가를 알게 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너무도 하찮은 것이며 자연의 질서 곧 우주의 질서 안에서는 먼지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인식의 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 상황에서 바라본 선과 악 시비의 결과도 어느 하나 맞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단지 “어쩌면 우리는 이 두려움 때문에 한 生을 견디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며 이 세상 모든 관념적 사고를 거부할 때 비로소 일물 일어의 자연 질서에 충실해지는 언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반백이 넘도록 섬겨온 나와 나의 詩를 부정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박두규 시인은 매번 그런 내면적 갈등을 고도의 정신성으로 극복해낸다. 아래 두 편의 시에서 바다는 세계를 지향하지만, 궁극에 도달하는 정신적 위의는 동일 지점을 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낚시 바늘에 입술이 꿰인 채 수면 위로 올라온 순간
경이로운 하늘과 잠깐 눈을 마주친 그 찰나의 기억
나는 그 기억의 바다를 헤엄치는 한 마리 물고기다.
-<나> 전문 《사람의 깊이, 18호》
무엇이 깊은 잠의 나를 깨웠을까. 머리도 하얗게 세어 이승의 외로움이 깊은데 아직도 떠나지 못한 무엇이 있어 당신을 호명 하게 했을까. 이슬 내린 바닷가 풀숲을 걸으며 아련한 안개 속 수평의 경계를 더듬는다. 오랜 기억들이 스쳐지나가고 다시 또 당신을 만나면 통속할 수는 있는 것인가.
-<무엇이 깊은 잠의 나를 깨웠을까> 부분
시인은 <나> 《사람의 깊이, 18호》에서 인간의 모습을 고승의 선시처럼 들려주고 있다. 물속 고기가 바깥의 세상을 목도한 순간 도달할 수 없는 신성까지를 생각하게 한다. 수면 아래는 인간의 퇴화된 기능으로만 볼 수 있는 영역이라면 수면 바깥의 세계는 고도한 수련으로 가능한 정신세계를 의미할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도는 바다가 수평선을 뚫고 나왔을 때 우주 질서로 편입되는 짧은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그 환희와 절정의 시간도 역시 찰나일 수밖에 없다. ‘낚시 바늘’은 수면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도구이자 기회다. 그 자체마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닌 전지적인 힘이 작용했음을 말해준다. 살아가며 알 수 없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느낄 때처럼 초월적인 힘에 의해 그 경지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시집 속으로 돌아와 <무엇이 깊은 잠의 나를 깨웠을까>를 살펴보자. 시인은 시詩를 생각하기 전 생生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지고 있다. 그 생 속에서 보편적 생의 의미를 찾아가기보다 인간 본성에 잠재된 정신적인 영혼을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일상을 초월한 정신적 구도를 지향할 때만이 가능한 사유思惟`임은 당연하다. “거친 바람의 정처를 꿈꾸던 시절과 그 어리석음과 당신의 숨소리마저 잊고 살아온 지난 세월이 아련하다”는 ‘수평의 경계’를 더듬으며 잠재된 ‘기억’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려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서도‘수면 위’ 바다를 헤엄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찾아가려는 세상과 만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두 편의 시에서 ‘바다’는 박두규 시인의 시적 세계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공간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세속적 삶보다 우위에 있는 초자연적인 정신세계를 지시하고 있다. 그 바탕은 자연에서 근원하고 끝없이 사유를 규정짓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방외方外를 생각하다>에서 정의하고 있다. “전에 어떤 선사가 날아가는 기러기의 그림자가 호수 위에 비친 것을 보고, 저 그림자는 기러기가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수가 일부러 비추려고 그런 것도 아니라고 말했단다. 方外를 꿈꾸는 일 또한 그럴 것이다.”라며 그마저 자연스런 현상임을 말해준다. 시인은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섬진강가 백운천에 살고 있다. 인간 중심적 세속을 떠나 산을 바라보며 강물과 지리산을 통해 무위無爲의 일상을 닮아 가고 있다. 方外라는 의미가 보편적인 삶의 정서와 멀다고 볼 때 시인은 방외적인 일상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 삶에서 반복되는 세월은 매번 다른 일상이며 회한으로 다가온다. <어느 초겨울의 저녁>은 “그냥 두어도 청승맞”다는 자기 고백으로 시작된다. 중년의 사내가 홀로 밥을 짓고 김치를 꺼내 밥상에 올리기 위해 저녁을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정적과는 멀다. 하지만, “창밖의 석류나무 잔가지에 눈발이라도 날려/ 이 궁색한 정적을 깨도 좋으련만”이라며 되레 “사는 일이 아득한 꿈처럼/ 초저녁 별들이 하나 둘 돋아”나 고요를 깨우고 있다는 백운천의 풍경을 느낄 수 있다. 적막 안으로 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떠오르는 살아온 내력마저 “그 따스함이 주는 생기로/ 한 때의 젊은 날들이 바람처럼 스쳐”왔다. 그 기억 속에 누구나 있을 법한 그녀의 안부도 궁금해졌다. 또다시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근원이자 일상으로 다가온 하루가 간다는 중얼거림은 <하루라는 시간_백운천 일기 2>에서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바라보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며 그 ‘하루’라는 시간을 통해 할머니의 일상을 생애로 환산하고 죽음까지 이른 시간도 ‘하루’로 정의한다. 결국 하루라는 시간은 전생에서부터 흘러온 억겁의 세월로 변주를 거듭한다. 그 하루는 저무는 해를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는 자연만의 질서임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은 무엇 하나 그냥 홀로 되는 법이 없다. <보쌈_백운천 일기 4> 그 골짜기에 맨 처음 들어온 사람을 상상한다. 군데군데 적막을 지붕처럼 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골짜기로 걸어 들어간다. 산 그림자에 놀란 개가 짖는 소리가 그 사람들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방편일지 몰라도 시인은 그것마저 불편해한다. 따지고 보면 사람을 위해 개가 짖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로워 내는 소리임을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그 또한 개와 다를 바 없는 사람임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나는 외로움을 선택한 개다. 아직도 나는 스스로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짖는 개 같은 외로움이다.”라며 그 외로움의 훼손을 우려하고 있다. 그 안에서도 예외는 있다. 스스로 사유의 숲을 이뤄 살아가는 시인의 집 마당으로 <고라니 한 마리가 황급히 지나갔다_백운천 일기 5>며 “그녀가 건들고 간 배롱나무 잔가지가 아직도 흔들리고, 종일토록 나는 떠나버린 그녀를 생각했다.”는 긴장된 순간을 시적 의미로 발현해냈다.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고라니처럼 인간도 언제 닥칠지 모를 존재에 대한 위기를 예감했을 것이다. 위기에 대한 두려움처럼 그 두텁나루 숲으로 “어둠을 몰고 포수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 순간 또 다른 사유를 강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3. 시적 사유의 숲
그 영역은 인간이 느낄 수 없는 물리적인 공간 속의 <틈>이 아닌 정신적인 영역에 존재하는 곳임을 알려준다.
물과 물고기의 틈에는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
생각과 생각의 틈에는 어떤 고요가 숨어 있을까.
들숨과 날숨의 틈에는 어떤 영혼이 살고 있을까.
그 틈으로 들어가고 싶다.
그 틈에서 밭을 일구고
읍내로 가는 노선버스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만나 파장 술 한 잔을 마시고 싶다
그 틈새에서,
-<틈> 전문
에서 ‘틈’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각적인 좁은 틈새가 아닌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자연은 장자가 말하는 자연과는 사뭇 다르다. 자연이 스스로 다름을 분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별 그 자체가 사람에 의한 인위이고 자연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궁극에는 장자의 자연을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의 눈으로 구분한 틈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물과 물고기의 틈에는 어떤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라는 강한 의문을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시인은 우리가 익히 보고 만난 시인이 아닌 부단한 성찰로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의지가 아닌 모든 것이 대 자연의 부분으로 존재함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소망은 크고 거대한 것이 아닌 너무 하찮은 일상을 염원할 뿐이다. “그 틈에서 밭을 일구고” 싶다는 소망 정도다. 여기서 “읍내로 가는 노선버스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만나 파장 술 한 잔을 마시고 싶다”는 시인도 어쩔 수 없는 인간임을 긍정한다. 시인은 구례 장날 어느 선술집에서 몸에 덕지덕지 붙은 세상 허물을 벗어버리고 무위無爲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무위적인 삶도 기껏해야 우리가 염원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세상이 틀림없다. 시집 속 시편들이 개별적 의미소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전체 맥락 안에서 본다면, 삶은 정신적인 영역의 고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들 대단한 삶을 영위하는 것 같지만 ‘나’를 들여다본다면 너무도 작은 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랬을 때 스스로의 자각만이 삶의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득 그의 말이 떠올랐다>에서 “아무리 읽어도 읽을 수 없는 시들은 일단 호불호를 떠나 우주의 쓰레기처럼 떠돈다.”며 시적 위의를 훼손하는 무개념을 경계하고 있다. 시를 대하는 마음이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일 것이다. 시인은 매번 어둠 속에서 미명 같은 진리를 갈구하듯 “‘우리는 신을 알 수 없다. 신이 될 수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 자연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고백할 때는 인간이 갖는 나약함에 애틋해질 수밖에 없다. <푸르샤여 나의 푸르샤여>를 통해 시인의 정신적 자유 속에서 길어내는 사유를 공감할 수 있다. “히어리꽃 눈부신 봄 숲길을 걸으며/ 사랑하는 그대를 생각합니다./ 어디쯤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나는 그대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발길 머무는 곳마다/ 눈길 가는 곳마다 그대 있으니/ 아무런 걱정 없이 모두가 나의 길이지요.// 하지만 그대 생각만 벗어나면/ 오랜 슬픔은 다시 나를 찾아오고/ 나는 그대를 잃고 숲속의 미아가 됩니다./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종일토록 울면서 보냅니다./ 푸르샤여, 나의 푸르샤여/ 어디에 있나이까./ 나를 온통 채우고 있던 그대여.// 두려움과 죽음이 내려앉은 적막의 숲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의 광휘를 기다립니다./ 다시금 그대의 나를 떠올립니다./ 푸르샤여, 그대를 기다립니다./ 어둠 속 고요에 떠오른 나의 주검이/ 긴 호흡에 실려 흘러가는 것을/ 조용히 바라봅니다./ 고요의 바다에 소리 없이 파문이 일고/ 빛의 몸, 가득한 사랑입니다.” 박두규 시인의 시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대상은 자연에서 틈입한 정신적 사유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매 일상을 살며 자신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참다운 내면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임을 시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고단한 길을 스스로 자처하여 찾아든 자연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자연 본래의 모습을 인간이 변화 시킬 수 없는 진리를 보여준다. 자연의 이치에 충실한 박두규 시인은 삶과 문학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자연이 들려주는 고요한 말(시)을 받아 실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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