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이 없는 존재
여기서부터 우리의 삶과 가장 밀접한 네 분의 보살님에 대한 애경이 나옵니다. 보살은 보디Bodhi와 사트바Sattva의 음역입니다. 보리란 깨달음, 각覺, 도 道의 의미이며 살타는 유정有情, 중생의 뜻입니다. 직역하면 '불법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이以佛道化衆生'입니다.
대품반야경 삼의품을 보면 '보살은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 중생들을 열반으로 이끄는 영웅'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체 중생을 이끄시고 제도해 주시면서도 그와같이 좋은 일을 했다는 상相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대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살마하살로 부른다고 소품반야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육바라밀을 통해 일체 지혜로써 일체법과 무량한 지혜문을 통달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의 마음을 대심大心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진리, 영원 속에 있으면서도 이를 분별하지 않고 초월합니다. 다른 법을 말하는 것을 들어도 의심도 미혹도하지 않고 시비를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은 여如, 영원, 진리와 통해 있음을 확고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또 부처님의 법 따라 끊임없이 정진하는 존재입니다. 부처님은 무량한 지혜의 작용에 의해 모든 존재를 이미 여실히 알고 깨달음을 얻으신 분입니다. 이 점이 보살과 부처님의 다른 점입니다.
보살에는 출가보살과 재가보살이 있습니다. 출가보살은 재가보살들에게 8만 4천 대장경을 가르치고 죄를 범하는 것에 따라 깨우쳐 참회케 하며 일체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화엄경에서는 재가보살들에게 '처자와 함께 있더라도 잠시도 보리심을 여의치 말고 정념으로 부처님의 경계를 생각하여 자기를 건지고 남을 건지려는 곧은 마음으로 수행하라. 비록 처자 권속과 함께 있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행行, 주佐, 좌座, 와臥의 경우에도 신, 구, 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여 근을 조복하여 안정시켜야 된다'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유정들을 성숙시켜 삼보를 간직하고 대겁해 大劫海를 건너가는데 네가지 원을 세워 수행토록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사홍서원 四弘誓願입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衆生無邊 誓願度
번뇌를 다 끊으로리다 煩惱無盡 誓願斷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法門無量 誓願學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佛道無上 誓願成
지혜의 상징 문수보살
대지 문수사리보살님은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님입니다. 그래서 큰 지혜[大智]를 붙입니다.
범어로는 만주스리Manjusri, 즉 만수시리, 문수사리 등으로 음역됩니다. 문수는 묘妙하다는 뜻이며 사리는 으뜸[頭], 길상吉祥 등의 의미를 갖고 있어 한자로는 묘길상妙吉祥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지혜의 공덕이 출중한 보살입니다.
만주滿洲 Mabchuria라는 북쪽 대륙의 이름도 '만수사리'보살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문수보살님의 명호를 들으면 살도음망殺盜淫妄, 살생, 도적질, 사음, 망어의 4대 중죄가 소멸된다는 문수신앙이 옛만주지역에서 크게 일어났던 적이 있습니다.
현재 북방의 상희세계 常喜世界에 있는 '환희장마니보적불'이라고도 하며 미래에 성불할 보살이라 하여 '보견여래普見如來'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또한 문수보살님은 동자를 붙이는 유일한 보살님이십니다. 화엄경에는 문수보살님이 선재동자의 스승으로서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문수보살상을 보면 사자를 타고 계신 모습입니다. 이는 나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지혜를 갖추면 동물의 왕인 사자도 능히 부릴 수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문수보살님은 또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보처로서 지혜를 맡고 있으며 우보처이며 행원을 맡고 있는 보현보살님과 함께 부처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문수보살은 직심直心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직심이란 우주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보는 마음입니다. 헛된 것을 헛되게 보고 참된 것을 참되게 보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보고 구분하고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지혜의 힘으로 허상과 실상을 똑바로 보는 마음이라 하여 문수보살의 마음을 직심이라고 합니다.
실천의 상징 보현보살
대행 보현보살님은 행동 즉 실천을 상징하는 보살님이십니다. 배운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가르쳐 주십니다. 특히 보현보살님은 모든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시는 분입니다. 자신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즉 나라고 하는 한계를 넘어 보다 크고 넓은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순간만을 위해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광대심이라고 하며 보현보살님을 광대심의 상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코끼리를 타고 계신 보현보살상의 모습입니다. 기계문명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무거운 짐은 크레인으로 올립니다. 또 청소는 진공청소기로 합니다. 크레인 의 팔이나 진공청소기의 호스 연결 부분을 보면 모두 코끼리의 긴 코를 연상케 합니다. 그 옛날 기계가 없었던 시절 코끼리의 긴 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이미 2천5백 년 전에 불가에서는 남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보살님의 상징으로서 코끼리를 등장시켜 대행보살님과 연계시킨 지혜를 생각하면 놀라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보현보살은 사람들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덕을 지녔다 하여 보현연명보살 또는 연명보살이라고도 부릅니다. 또 화엄경에서는 선재동자의 스승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보살님이 실천을 통해 불佛보리를 구하는 일과 중생을 교화하는 내용을 찬탄하는 '보현행원품'은 불자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공덕을 내세우시지 않을 뿐 아니라 지으신 공덕을 모든 사람들과 진리에 회향한다는 공덕의 나눔 마저 실천하시는 보살님은 공경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할 중요한 사실은 문수보살님과 보현 보살님은 항상 함께 행동하며 중생을 교화하신다는 점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의 유명한 고승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의 출현을 문수보살님의 화현으로 보는 것도 이들 두 보살님이 항상 행동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문수보살님의 지혜와 보현보살님의 실천적 행동의 화합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봅니다. 하나의 인간도 문文과 무武가 균형있게 갖춰 있을 때 이상적인 인간상이 될 수 있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 즉 아이디어 집단과 행동, 즉 행동적이고 개척자적인 업무를 맡는 집단과 조화를 이룰 때 그 조직의 힘은 막강해지는 법입니다. 군대의 조직도 크게 볼 때 전방의 전투부대와 후방의 참모부대로 짜여집니다. 가정도 집안의 살림살이를 맡는 아내와 밖의 일을 처리하는 남편의 역할이 조화를 이룰 때 평안이 유지됩니다. 지혜가 없는 행동은 공허한 것이며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지혜란 결국 무가치한 것이 됩니다. 지혜와 함께하는 행동이 가장 이상적인 조화이며 대우주의 질서입니다
자비의 상징 관세음보살
대비 관세음보살님은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는, 현세의 우리 인간들에게 가장 가까이 계신 보살님이십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정토신앙의 대상인 아미타 부처님보다 더 많이 신앙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관세음보살님이야말로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중생들을 포용하시고 현세의 이익을 많이 베푸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일체의 두려움이 없는 마음을 베푼다 하여 시무외자施無畏者, 자비를 베푸신다 하여 대비성자大悲聖者, 세상을 구제하신다 하여 구세대사救世大士라고도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데 있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33응신으로 나타나시는 것을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말합니다. 천수경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염송하기에 앞서 나오는 13분의 보살마하살 가운데 대세지보살님을 제외한 나머지 천수 여의륜 대륜보살님 등은 모두 관세음보살님의 별호입니다. 천 수경에 소개된 10가지 이름 외에도 더 많은 이름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만도 33가지에 이릅니다. 이는 곧 관세음보살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나타나시는 범위가 그만큼 넓다는 듯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대개 여성의 몸으로 나타나시며 늘 흰옷을 입고 계신데 이는 보살의 고결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음력으로 매달24일을 관음재일이라 하여 모든 사찰에서 관음기도가 열리고 있습니다.
내세의 안내자 지장보살
이 지구상의 모든 종교가 쓰는 말가운데 가장 공통적인 것 중의 하나가 지옥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순간만이 전부이고 죽고 난 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탄생한 이래 사후의 가계를 부정한 민족이나 종교는 없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장례 의식을 엄숙하게 치루고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현세를 떠 난 존재들에게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중한 예의를 취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승을 등진 영혼들을 어느 종교 못지않게 중요시합니다. 그 이유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듯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도 둘이 아니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을 떠난 영혼의 대부분이 환경이 나쁜 곳으로 흘러간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지구에 사는 사람 가운데 10명 중 9명은 지옥으로 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온갖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의 질과 양에 따라 136곳에 이르는 천차만별의 지옥세계로 흘러가 무한한 세월을 고통으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옥 가운데는 비록 공통은 당하지만 시간을 느낄 수 있는 유간有間지옥이 있는가하면 고통이 하도 심하여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찰나적 시간조차 헤아릴 수 없는 무간無間지옥이 있습니다.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극에 달하면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법입니다. 무간지옥은 그 고통의 극이 천년 만년 억겁을 두고 계속되는 곳입니다.
지옥에 관한 얘기는 종교서적뿐 아니라 일반서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레이몬드 무디는 <잠깐 보고 온 사후의 세계>라는 책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흑인이 지옥에 다녀온 얘기를 쓰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에는 키가 큰 자가 끓는 콜탈과 같은 액체가 가득한 가마솥 속에 사람들을 넣었다가 꺼내는 행위를 반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지옥에 관한 얘기는 전설의 고향에서나 보는 상상이 결코 아닙니다. 사후의 세계가 엄연히 있고 지옥도 엄존합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목격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임종하는 순간 왜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숨을 거두겠습니까. 왜 비명을 지르는 듯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떨구겠습니까. 그들은 그 순간 무엇을 보았을까요.
저승의 관리들
이승과 저승은 둘이 아니고 하나 입니다. 이승에서는 각양각색의 벼슬을 가진 여러 형태의 관리들이 사람들의 생활을 규율하고 다스립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저승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생전에 사후세계와 권속들을 유념하라는 내용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충격적인 얘기입니다. 우리들은 현세의 삶에 너무도 취해 저승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인들은 슬기를 모아 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윤달을 기해 저승을 생각하게 배려했던 것입니다.
명부를 관장하시는 성인들과 권속들을 경전에 등장하는 대로 살펴보면 지장보살님을 필두로 하늘의 법을 관장하시는 여섯 분의 저 세상 법조인이 계십니다. 육대천조六大天曺,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은 지장보살의 일을 측면에서 돕는 귀왕들이고, 명부십대왕은 저숭에 들어오는 모든 죄인들을 판결하는 열 분의 염라세계 임금님들입니다. 그 밖에 26판관, 3원장군, 선악동자 등 많은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그 밖에도 경전에 등장하는 저 세상의 권속들은 37귀왕, 감찰, 직부, 호법, 정신, 토지영관 등으로 불리는 57위와 십대왕의 배속관료로 불리는 162위의 관속 등 모두 259위의 관료 등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어떤 경에는 이에 덧붙여 272위의 저승 명부의 관리들의 직제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저 세상체제 역시 대단히 엄정한 체제로 되어 있고, 저 세상의 징벌양상은 이 세상과는 달리 대단히 엄정하고 체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살아 생전 저 세상의 엄청난 구조와 체재에 대해 깨우친 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좀더 건실하고 성실하게 펼쳐 나가는 데 커다란 교훈이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 생전 닦는 예수재의 의미는 산 자나 죽은 자에게 거대한 의의를 지니는 대작불사라 하겠습니다.
지옥세계에서 중생들을 제도하시는 분이 바로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이십니다. 지옥의 문앞에 계시면서 지옥으로 끌려오는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장보살님을 '지옥세계의 부처님'이라고 공경합니다. 또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 때문에 지장보살님의 눈에서는 눈물 마를 날이 없다고 합니다. 특히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는 죄많은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시고,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한 명도 없을 때까지 부처님이 되시지 않겠다고 원願을 세우신 분입니다.
이와같이 커다란 원을 세우셨다 하여 대원본존 지장보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장보살님의 진언은 '멸정업진언滅定業眞言'이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들이 현세에서 지은 업(定業)까지 멸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미륵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천상 아수라 인간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 중생들을 구제하고 고통에서 건져 낼 것을 부처님께서 위촉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승을 떠난 영가靈駕들을 위해 한 달에 한 번,매 달 음력 18일 지장보살님께 제사를 올리고 천도재를 지낼 때 지장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지장보살님은 또 영가천도 외에 부사의한 신통력으로 남녀노소 백천 가지의 몸으로 나타나시어 죄많은 중생들을 빈곤 재앙 재난 질병 등 모든 고초로부터 구해 주십니다.
나아가 모든 현세 중생에게도 행복과 평화, 부귀와 안온, 수명과 총명 등 온갖 소원을 충족시켜 준다고 지장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부처님께서는 '미래세의 중생이 매달음력 1일, 8일, 14일, 15일, 18일, 23일, 24일, 28일, 29일, 30일 등 10재일에 부처님과 보살님들 앞에서 지장경을 한번 읽으면 모든 재앙이 소멸할 뿐 아니라 현세의 재앙 횡액 질병이 소 멸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현세와 내세 및 백천세에 걸쳐 영원히 악도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삶과 대단히 가까우시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과 함께 중국, 일본, 우리 나라에서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님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은 현세에서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대자대비하신 마음으로 들어주시고 지장보살님은 중생들의 미래세를 보살펴 주십니다.
중생들을 위해 현세와 내세를 분담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란분재의 중요성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을 지닌 영체靈體들이기 때문에 저승의 존재들과 마음과 마음으로 항상 이어져 있습니다. 죽음 너머의 존재들과의 소통 양식 은 바로 꿈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승을 살다가 떠난 뒤 평안한 상태로 계실 경우 그들의 표정은 밝고 기쁨에 차 있을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 그들의 표정은 대단히 어둡고 괴로움에 시달린 표정일 것입니다.
살아 생전의 마음자세가 죽음 저 너머의 세계에까지 결정적으로 영향을 행사하는 법입니다. 특히 비명에 간 사람들의 경우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형상이 대단히 흉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임종 당시의 일념 一念이 중요하다는 부처님 말씀대로 마음을 잘 닦아 평안히 죽는 것은 커다란 복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우란분재를 올리는 근 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을 등진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세상을 등졌음에도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지 못한 채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영혼들을 제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살아 생전에 전혀 죽음 이후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공부해 보지 않은 채 함부로 살다가 떠난 영혼들의 경우는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괴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는 영혼들은 자신의 고통을 자손들에게 알리고 그들의 도움으로 어떠한 형태로든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역삼동 어느 아파트에 사시는 보살님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보살님께서는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님을 모시고 법회 때마다 동참하셨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자꾸만 꿈속에 나타나 서글픈 얼굴을 하시더랍니다. 그 할머니의 아들딸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얘기하였더니 자기들에게는 전혀 꿈에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할머니의 아들 부부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가정이었답니다. 보살님께서 찾아오셔서 자꾸만 꿈에 할머니가 나타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생에는 보살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같이 생각되시겠지만 전생 어느 때엔가 대단히 가까운 인연이었던 것이 분명할 터이니 어려우시더라도 제사를 모셔드리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무런 인척관계도 아닌 할머님을 절에 모시고 다녔다는 인연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께서 꿈속에 나타나시어 대단히 고맙다,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하시더라는 겁니다. 그 후부터는 그 할머니가 꿈에 보이기만 하면 꼭 좋은 일이 생기곤 하였답니다.
꿈은 현실과 영원을 이어주는 가교이며 이승과 저승을 연결시켜 주는 통로입니다. 현실세계에서는 전화·전신 등으로 상대방과 의사소통이 되지만 현실과 죽음 저 너머의 세계와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악령의 선조들을 위한 제사
우란분재는 영혼들의 천도를 위해 참으로 중요한 행사입니다. 영혼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삶의 자세를 깨우치고 죽음은 영혼의 탄생이며 현생의 생활은 영계靈界에 가기까지의 준비기간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줌으로써 영혼들의 마음은 차츰 열려질 것입니다. 영혼들의 이승에 대한 집착과 애착이 크면 클수록 현실을 사는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가 참으로 많습니다. 왜냐하면 살아 생전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세척하고 공덕을 짓고 지혜를 닦으며 포용력을 길러 나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을 등진 영혼들의 행동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선조들 가운데 선령善靈이 된 선조들보다 악령惡靈이 된 선조들이 더 많은지도 모릅니다. 부정적인 상태에 떨어져 있는 영혼들이 자녀들의 꿈에 끊임없이 출몰한다면 이것 역시 별로 기분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꿈속에서의 암시를 통해 부정적인 의식들을 끊임없이 자손들에게 심어 놓는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人間 대부분의 존재가 영혼들과의 밀접한 연관성 속에서 성립된다' 하는 얘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는 항상 함께 하기 때문에 영혼들을 다스리지 않고, 영계에서 보내오는 꿈속에서의 통신들을 전혀 무시하고 인간의 사고만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을 다스리고 저급령들을 다스리는 것은 영혼들의 세계가 정화되고 깨끗해지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것이 그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어두운 상념을 가진 저급령들이 우글거리는 우리들의 주변이라면 우리들의 삶 역시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세계 속에서 얘기하는 텔레파시 등은 사실상 영혼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정화하는 우란분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또한 우란분재는 우리들에게 살아 생전에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를 분명히 얘기해 줍니다.
죽음에는 선심사善心死와 악심사惡心死가 있다고 하듯이 살아 생전에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죽음은 전 혀 고통과 괴로움에 시달리지 않는 평안함이 가득합니다.
요즘 교통사고니 암이니 하여 각양각색의 사고로 요절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왜 그와 같은 재앙이 덮쳐드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비시사의 원인
부처님께서는 제명에 죽지 못하는 경우를 비시사非時死라 하셨는데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경우에 비시사가 초래된다고 합니다.
첫째, 수명을 유지할 만한 선업善業이 부족할 때.
우리들의 인생은 이 땅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기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삶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해악만을 초래한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성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둘째, 복력과 공덕의 힘이 다했을 때.
이 세상에 우리가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우리들에게는 몇 십 년이라는 수명이 주어집니다. 60년, 70년, 80년 등의 수명이 주어지는데, 이 같은 수명은 그 기간 동안 우리들이 먹고 살 만한 공덕과 복력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음식을 낭비한다든가 공덕과 복력이 모자라든가 하면 삶의 지속성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셋째, 상대방의 생명이나 모든 생명들을 함부로 해서 자신의 수명으로 갚아야 되는 업(業·捨壽業)이 발생했을 때.
산 생명들은 이 세상에 자신들의 생명을 누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명을 함부로 할 경우에 스스로의 목숨으로 탕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넷째, 개인 및 집단의 업장으로 인한 횡액을 만났을 때.
우리들의 삶 가운데 짓게 되는 업은 개인의 업이 크지만 집단의 소속원으로 피치못하게 받아야만 되는 업이 있습니다. 그러한 업을 집단의 업이라 부르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재앙을 만나게 될 경우, 즉 비행기를 타고 있다가 참변을 당하거나 산사태 등으로 참변을 당하게 되는 경우 등은 모두가 그곳 그 상황에 있어야만 되는 집단의 업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은 집단, 좋은 장소, 좋은 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섯째, 음행을 많이 하고 청정덕행을 닦지 않았을 때.
음행을 많이 하면 수명이 감퇴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함부로 아무렇게나 살면 몸을 보전할 수가 없습니다.
여섯째, 먹을 음식과 양곡이 부족하고 부적합할 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지은 바 복업이 약하면 재앙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곱째, 의술을 이용하지 못할 때.
여덟째, 영혼들에 의한 액난을 만나야만 되는 인연일 때.
이상 여덟 가지의 경우에는 재앙을 만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맞게 된다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노력과 공덕이 가득한 세계로 이끌어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생전 예수재의 의미
매 3년마다 한차례씩 드는 윤달을 기해 베풀어지는 예수재란 돌아가신 선망부모의 왕생극락을 발원함과 동시에 본인의 숙세의 모든 죄업을 소멸하고 명부의 10대왕과 사자들에게 왕생극락을 발원하는 것으로 불자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불사佛事이자 일대 행사입니다.
예수재에 관해서는 불설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 佛論灌頂隨願往生十方淨土經 등에 자세히 밝혀져 있습니다. 이 경에 보면 부처님께 보광보살이 '저희들이 임종을 당하여 시방국토에 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그리고 이미 죽은 지 오래 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위해 생전에 복업을 닦아주면 원에 따라 시방정토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나장자의 부모님께서 죄업이 가득해 아귀도에 떨어져 있는 것을, 사나장자가 스님들을 초청해 이 경을 읽어 드리고 공양공덕을 쌓은 끝에 왕생케 하였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 생전 끊임없이 악업만을 증장시키며 살아가고 있기에 악도에 떨어질 것은 정한 일치입니다. 살아 있을 때 스스로가 자신의 예수재豫修齋를 닦으면 죄업이 녹아내리고 복업이 증장하여 해탈자재의 경계를 얻게 됩니다. 입종을 맞는 사람들 역시 그 권속들이 정성을 다해 예수재를 받들어 드리면 그 공덕으로 반드시 해탈케 된다 하였습니다.
특히 부처님 당시의 빔비사라왕이 오랜 세월 동안 예수재를 베풀었고, 중국에서는 양나라 무제가 일생을 두고 예수재를 실천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불교는 현실과 영원이 둘이 아니요, 이승과 저승이 둘이 아닌 종교이기에 살아 생전에 닦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부처님께서는 누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의 복업을 닦는 데 게으르고 인색한 나머지 삶을 참으로 어리석게 보내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사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해탈의 대도를 열어가게 하는 데 예수재의 참뜻이 들어 있다 하겠습니다.
특히 예수재는 이승과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는 저승세계의 모든 존재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참으로 큰 의미를 지닌 의식이라 하겠습니다. 명도전冥道傳에 등장하는 저승세계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명부의 권속들
명도전은 부처님 당시 빔비사라왕의 행적을 기록한 내용으로, 빔비사라왕은 15세에 왕위에 올라 살아 생전 예수시왕칠재豫修十王七齋, 즉 예수재를 49회나 올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빔비사라왕이 직접 명부에 이끌려 들어갔던 체험을 바탕으로 예수재를 지내게 된 연원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명부에서 보낸 푸른 옷을 입은 사자와 노란 옷을 입은 저승사자가 갑자기 왕궁에 들어와 왕을 강제로 저승으로 끌고 갔습니다.
왕은 놀라 정신을 잃은 끝에 명부의 사자에 이끌려 저승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길가에 흰 산이 있는데 풀과 나무는 나지 않고 마치 흰눈이 쌓인 설산과 같았습니다. 왕은 이상스레 생각하여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명부의 사자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저 먼 과거로부터 남염부제 사람들이 스승, 부모, 형제자매들을 위해 돌아가신 날 망령을 돕기 위해 올린 공양금이나 예수재를 베풀 때 올린 헌금 가운데 정성이 깃들지 않은 돈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성이 깃들지 않고 법답게 올리지 않아 명부대왕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갖다 버린 것이 저렇게 산을 이루었다 대답하였습니다.
대왕은 이 같은 얘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다가 저승의 사자들과 길을 재촉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길을 걸으며 좌우를 살펴보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귀신들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귀신들의 형상과 모양은 참으로 입에 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였습니다. 날카롭기가 송곳보다 더한 이를 드러내고 비명을 지르는 귀신, 입에서 피를 홀리는 귀신, 눈이 셋·넷 달린 괴기한 귀신 등 백천의 악한 형상을 한 귀신들이 가득하여 온몸이 떨리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 같은 고통으로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명부의 옥졸이 나타나 대왕을 잡아 가두려 하였습니다. 대왕이 명부의 옥졸에게 '나는 즉위 이 후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악업을 짓지 아니하고 오로지 선업만을 행하였는데 무슨 죄가 있기에 이 같은 고통을 주는가?' 하고 큰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러자 명부의 옥졸이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명부의 시왕께는 공양을 여러 차례 올렸으나 종관권속들은 한번도 받지 못해 공덕이 모자란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왕은 이에 '세상에는 명부의 옥졸이라든가 종관권속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데 어찌 죄가 되겠는가? 그것은 죄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명부의 종관들께서 나를 어여삐 여겨 기회를 준다면 세상에 나가 널리 전하겠노라.
그렇게 하면 중생들도 널리 제도될 것이고 나와 같은 죄인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모든 중생들이 살아 생전 낱낱이 명부 종관권속들에게 공양예배하여 그들을 쉽게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생전 몸과 마음을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며, 저승 생각하기를 골수에 사무칠 것이다. 명命을 마치고 난 다음의 두려움으로 명부의 대왕들 못지않게 그대들을 생각하리라'고 얘기하였습니다. 그 결과 방면되어 나온 뒤 예수재를 정성스레 베풀고 법대로 이를 알리고 모든 명부권속들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았습니다.
빔비사라왕은 그 후 예수경豫修經을 의지하여 끊임없이 정진한 끝에 세상을 등질 때 도솔천에 올라 미륵보살을 뵙고 법문을 들어 성인의 과果를 증득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생전에 명부의 여러 권속 등에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공양을 올리고 받들어 모신다는 생전예수재의 의의는, 살아 생전 죽음 저 너머의 세계를 마음 가득히 생각하므로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증적으로 펼쳐보이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사후의 생을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예수재는 영원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케 하는 거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