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숙성 돈황지구는
북흉노[두만,모돈,노상선우계>단선비 단석괴>전진의부견>고려의 광개토/장수왕(북부여)>북위의 탁발규]
세력을 피하여 중원으로 들어가는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서역 실크로드 비단길과 동유럽 초원의 길에서
들어오는 번외거래지구인 영하성회족자치구[영주], 산서성 대동시 용성지구, 하북성 연경(북경)지구,
요녕성 조양, 심양지구로 내몽고자치구 사라선맹(시라선맹)지구 파단[단파]길림사막 (사반)지방을 통해
들어가는 번외루트였다.
원래 고구려가 백제,신라를 막고 실크로드를 통해 내몽고자치구 사막지방을 통해 들어오는 직교역무역과
중원을 거쳐 들어오는 간접상업무역을 독점하기 위하여
모두 차단하고 중간이득을 취하려고 하였는데, 백제가 해상무역로를 건설하여
중원과의 직교역을 하게 되자 백제의 남한강유역을 확보하여 신라무역만이라도 독점하려 하였고,
백제 역시 중원에서 손해본 비용만큼 신라만이라도 막아놓고 신라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고구려에 빼앗긴 남한강유역을 회복하려 하였던 것이다.
대량(양나라),백제,신라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청해,섬서북부,산서서부 고구려가 발해만에서
대련반도 요녕성 조양, 심양으로 밀려난 낙랑국을 장악하고 북경동부지방을 점령한데 이어
서진, 동진(익산, 여수, 순천, 사천),양나라망인[경기인],가야,백제,신라를 따라 한반도로 진출한 것이며,
이는 기원전부터 돈황지구[비단길].청해지구[초원의길]를 장악했던 국가들이
실크로드 무역품을 팔아 먹을 민족과 국가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였고,
서진, 동진, 양나라,백제,가야,신라가 서역,동유럽과 직교역하지 못하도록 막아놓고 중간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고려말 몽골(쿠빌라이)역시 함경남도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열고 실크로드문물을 사가라고 강매한다.
값비싼 사치품을 강매하고 필요한 전투마,수달피,직물,곡물,공녀등으로 다량 교환해가서 고려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한다]
고구려,백제가 지친틈을 이용하여 신라가 한산주[여주,이천,광주]를 점령하며 후일 양평 당남리를 차지하고
남한강 한복판에 있는 뭍에 당항을 설치하여 당나라와의 직교역을 하게 되는 것이며
고구려,백제가 이를 차단하자 나당연합을 결성하고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역사였다.
또한 백제는 왜로 이주한 나라백제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신라의 질투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기때문에 신라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금관가야[김해,거제]가 가야,백제의 왜 이주루트권을 확보하여 큰 돈을 벌자,
신라의 법흥왕이 금관가야를 공격하여 김구해왕이 거제로 천도하고 나서도
지속적인 가야,백제인의 왜이주루트 항구로 사용하면서 큰재산을 형성하게 되니
법흥왕은 수륙양동작전을 벌여 김구해를 항복시키게 만들고 금관가야를 병합하는
역사적 사실과 동일하다.
그래서 가야,백제가 대왜[일본]무역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는 구주[큐슈]로 이주한 부여족,전기가야인,내몽고 시라선맹인,나라백제,오월인과의 무역을
가야,백제로부터 빼앗아 대왜[일본]무역마저 독차지하기 위해서 나당연합을 결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중국 기원전 후초를 건국하는 항우시대에 한나라의 신하 한신등에 의하여 "고담"이
안휘성 서화지방의 기자조선을 토벌하여 내몽고자치구 시라선맹지구와 한반도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bc 200년대 진시황 전후시대,위촉오 삼국시대,5호20국시대 전후 이주한다.
중원 남부의 오월인들이 승문[조몬]제도를 거쳐 대거 구주로 이주하여
일본 중부로 들어가 기원전 200여년전 오국,월국등을 세웠고 나라[내량/나랑]백제는 이들을 기반으로
아스카(비조)문화시대를 개막시킨다.
내몽고자치구 서남부 대판[大板]인들은 요녕성 대판[大板]을거쳐 일본 대판[大阪/오사카]으로 들어가
대화국[大和國/야마토]의 주역이된다.
고령 본가야 우수주에서 거창대가야로 팽창하였다가 백제,금관가야의 아마테라스 연합군에 패하여
영일만 근기국을 거쳐 일본으로 도해한 우두천황[스사노오 노미코토]이 대화국[오사카]으로 들어가
야요이 문명을 일구고, 금관가야에서 넘어온 아마테라스의 손자[야마토정권]에게 빼앗기자,
백제에서 넘어간 구태세력(위구태백제,위덕왕,무왕,의자왕의 제1왕후계)이 나라백제로 들어가
동성왕,무령왕,성왕의 제2왕후 황극천황/제명여왕(사이메이) 이잔계를 밀어내고
일본정국을 주도하면서 아스카 문화시대를 꽃피운다.
663년 이잔계 성왕의 제2왕후 제명여왕계 부여풍은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고 나서 왜로 돌아가
672년 유신정변을 단행하여 임신의 란을 일으켜 신라계를 모두 도륙시킨다.
중원 대륙계 위덕왕,무왕,의자왕으로 이어지는 제1왕후계의 아들인 중대형황자(천지천황)가
황권을 차지하려고 신라계와 결탁하여 성왕의 제2왕후계 제명여왕(황극천황)을 후쿠오카(福岡/복강)
군선제작소에 조창궁에 가둬 불태워 죽이고 군선을 1년후에 출병시켜 백제부흥군의 동력을 떨어뜨려
사비백제 백강전투에서 패전하고 만다.
가야,백제가 오월에 수출하기위한 가마터가 호남 동부지방에서 다수 발견되는 것은
중국 강소성 남경시[난징]의 오나라,절강성 소주시의 월나라에서 전국시대 말기시대,삼국시대,
5호20국시대 전후,군웅할거시대를 피해 한반도와 일본 구주>중부 교토등으로 이주해간 오월인들에게
도기,청자등을 수출하기 위하여 만든 가마터로 청자등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청자는 고려시대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때 부터 우르-대가야지방에서 무색청자가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으며,후백제,고려시대를 거치며 청아한 색상을 넣어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주류 사학계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르-대가야지방 전북 진안(난진아) 성수면 도통리 중평에서 발견된 청자 가마터는
중국 강소성,절강성 오월지방으로 청자를 수출하기 위한 가마터가 아니라,
일본 구주[큐슈],대판[오사카],중부 경도[교토]지방등으로 이주한 전기가야인,
내몽고자치구 시라선맹[사라선맹]지구인,오월국에 청자를 수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가마터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해야 할것이다.
김해 금관가야가 광개토군에게 대항할때도 구주로 이주한 전기가야인들을 동원하여
대마도에 전쟁물자를 쌓아놓고 대항하게 되는데, 이때 구주가야[전기가야인]는
중원에서 구주로 이주한 오월인들을 동원하여 광개토군에 대항하다가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고구려 기마군5만에 패하고 만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하는 12가야가 구주가야[전기가야]를 제후로 두고 있었던 이유도
실크로드 번외무역과 중원무역로에서 12가야지방을 거처 금관가야에서 물자를 선공급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한[익산 금마연립마한국],전나국[전라연맹마한체,무진주포함],침미다례국[나주~여수,사천]
가야,백제,신라,고구려시대때 부터 무색청자는 이미 대가야지방에서 생산되고 있었으며,
후백제시대를 거치면서 푸른색을 넣은 청자가 만들어지게 된다.
대가야시대에는 국제정세가 불안정한 시대였으므로 무색청자가 주로 발견되는 것이고,
이때 이미 청화백자의 선조격인 고려청자가 생산되었으나 일본으로 이주한 중원세력에게
대량공급으로 수출하기 위하여 무색청자가 다량 발견되는 것이다.
진안 성수면 도통리 중평 청자가마터가 월요(越窯)가마터와 유사성이 있고,
당나라 말기의 가마터와 유사성을 찾는 것은 핵심을 잘못짚은 것이라 판단된다.
전주를 중심으로하는 전나국/전라연맹체마한이 한반도 주인으로서 소도역활을 하여,
낙랑,가야,백제,신라로 부터 침공을 당하지 않았고,우르가야의 진안웅치가 전나국[전라국/전라연맹체]과의
국경이었으며,직산[천안] 중마한을잇는 익산금마 연립마한국[하한]을거쳐 백제로 부터 중원문물을
수월하게 받아들이고,이들 국가에게도 도자기류를 역수출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에
진안이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가장 값나가는 청자를 굽는 가마터를 진안 성수면 도통리에 세운것은 국제정세 급변시 소도지역으로
탈출하기 용이하도록 전주 국경지방에 세웠던 것이다.
대가야인은 우륵[우르]6가야인으로
이라크 남부 우르국에서 힛타이트>아무르[아모르/아모리]제국이후 마지막으로 동방으로 돌아오는 세력이며,
알렉산더의 셀레우코스왕조[그리스 마케도니아]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점령하여
비단길,초원의길무역이 단절되자 대월지가 거병하여 사마르칸트를 점령할때
우르국에서 동방으로 회귀하면서 사마르칸트로 들어간다.
힛타이트문명도 이라크 바빌론문명을 영국 앙골계[앵글계의 선조]의 페니키아 문명이 점령하고
bc 668년 신바빌론을 세워 서역의 비단길, 동유럽의 초원의 길 무역이 차단당하여
내몽고자치구 시라선맹[사라선맹]지구의 후리인[구리인/구려인],
아무르[감숙성 흑하 압수인/아모르/아모리제국건설],모압인[감숙성 흑하 압수지류인],
내몽고자치구 사라선맹지구에서 실크로드무역을 위해 머물렀던 아랍의 사라센인과 함께 거병하여
신바빌론 문명을 멸망시키고 힛타이트제국을 재건설하며 이집트로 들어가 상이집트를 지배하면서
실크로드무역로를 다시 확장시킨다.
이후 동방인이 혈통이 지나치게 희석되는 것을 막기 위해 bc525년 사라센인(아케메네스제국)들에게
바턴터치하고 동양으로 돌아가자, bc336년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거병하여
아랍과 이집트를 지배하던 아케메네스제국을 멸망시키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비단길,초원의길 물류 중간기착지]를 장악하며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자,
실크로드 무역이 다시 단절되어 대월지가 거병하여 점령한다.
대월지세력이 불어나고 실크로드중간 교통로를 모두 차지하여 중간세금으로 부를 형성하자
내전이 발발하고 귀상족이 통일하여 다시 중원, 중인도로 남하하였다가 쿠샨왕조를 세운후
혈통이 희석되는 것을 싫어한 대월지가 초원의 길 루트를 개척하며 중원 사천성 성도,보주로 들어오면서
신나라 무역을 독점한다.
그래서 실크로드무역을 독점했던 감숙성 돈황지구 북흉노,감숙성 평양시,청해성 청구지구 북부여,
산서성 태원시의 맹주 유수장군등이 하남성 낙양의 신나라를 침공하여 멸망당하고
한반도로 피신해 들어오게 된다.
신나라망후 귀주성으로 귀상족 비주류가 들어가서 현재에 이른다.
우르인[우륵인]들은 사마르칸트에 가장 오래 남아있다가 북월지가 되어
신강성 서북부,감숙성 서북부,내몽고 서북부를 거쳐,단파[파단]길림사막 사반지방을 통하여
실크로드 번외거래를 활성화시킨다.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사탁지방,점탁지방으로 실크로드 물류를 가지고 돈황지구의 북흉노를 피해 들어와
백잔과 실크로드무역을 주도하면서 융합하여 이잔으로 분화하고 이잔이 북월지[카라>가라>가나>가야,왜]와
융합하면서 혼혈이 되어 가야, 왜로 분화한다.
중원으로 들어오기전 감숙성 동부6군과 내몽고 시라선맹[사라선맹]지구에서 분화할때 카라>가라로
선분화하였다.
오월은 전국시대말기 기원전 300여년전 부여족이 반도루트를 통하여 구주로 이주하기 시작하자,
후발주자로 구주로 이주한다.
이후 기원전 200년전후 진시황때부터 구주로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였다.
오월인은 한반도로도 유입해 들어온다.
그후 중원 위촉오 삼국시대때 구주를 통하여 한반도로도 유입해 들어온다.
오월인이 한반도로 유입된것은 기원전 300여년전 부여족이 한반도,구주로 이주하기 시작할때부터
일부세력이 같이 이주하기 시작한다.
중원 남부 절강성 소주시의 월나라가 강소성 남경시의 오나라를 점령하자,
오나라인들이 구주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월나라가 초나라의 강서성 중서부를 점령하고 호남성 동부지방까지 초나라[사천성]영토를 유린하자
초나라인들이 호남성 동부지방에서 세력을 키워 절강성 월나라를 침공하여 멸망시킨다.
여기에서 오월동주라는 유명한 말이 태어난다.
월나라가 초나라에 멸망당할 처지가 되자 강소성 남경시 오나라인들에게 오월동주를 나눠주며
같이 싸우자고 독려하였으나 오나라인의 비협조로 절강성 소주시의 월나라는 멸망당하고 만다.
이때 오월인들이 대만 조어도를 거쳐 살남제도[사쓰난제도],유구해구[류큐해구],
첨각열도[센카쿠열도]를거쳐 구주로 이주하였다.
구주[큐슈]를 장악하고 있었던 서복,한종의 후예는 구야한국의 일원으로서 구주한국을 이끌고 있었는데,
비단길무역과 초원의길 번외무역과 중원 본무역로에서 혜택을 받기 위하여 구야한국의 일원으로서
한반도 12가야문명[개별6가야,우륵/우르6가야]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12가야문명이 김해금관가야의 동쪽인 부산 동래항 부근에서 대마도를 거쳐 구주로 이주하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나라를 세운게 임나가라이며,신라의 침공으로 김해로 옮겼다가
신라 법흥왕때 거제도 견내량으로 옮겼다.
법흥왕의 수륙양동작전으로 항복하게 되고 신라가 차지하여 일본 이주권을 차지하였다.
후기 대가야의 동맹이었던 무왕,의자왕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대가야지방 100여성을 회복하여
대가야를 구원해주며 왜 이주루트를 지속적으로 확보하며 마산포를 이용하게 된다.
왜로 이주하였던 전기가야인이 금관가야를 주축으로 하는 대가야의 소환으로
광개토군을 상대하기 위하여 김해로 들어왔다가 패하여 반도 서남단으로 피신하였다.
이후 고령 본가야지방으로 북상하여 세력이 늘어나자 대가야로 성장하여
대가야,백제가 왜이주루트를 확보하자, 이들을 통하여 왜로 이주한 전기가야,나라백제,내몽고 사라선맹인,
오월국에 물자를 수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청자 가마터였다.
즉,일본까지 실크로드 교통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였던 것이다.
중국과의 직항로가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중국 오월로 수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마터가 아니고 왜로 이주한 가야,나라백제,오월에 수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가마터라는 이야기이다.
또한 웅치를 넘어가면 바로 전주의 전나국 전라연맹체마한과 익산 금마 연립마한,
그리고 나주 이남의 침미다례국,백제로도 수출하기 용이한 수출요충지로서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 각 제국과 일본을 연결하여 동시에 수출하기 용이한 무역교통로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백제 무왕,의자왕으로부터 대가야를 회복한 빚을 갚는데, 청자는 최단기간내에 빚을 갚는 수단이었다.
이시기에 가장 값나가는 청자를 굽는 가마터를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 세운 것은 국제정세 급변시
소도지역으로 탈출하기 용이한 전주 국경지방에 세웠던 것이며, 신라의 침공을 당하자
무주,진안,장수의 무진주인들이 전라연맹체마한[전주/원주민 보호구역]까지 침공당할것을 예상하고
진안군 마령면,임실군을 거쳐 서남하하여 광주로 피신해 들어가는 이유였다.
국제정세가 요동치고 있었으므로 소도의 기능은 쇠퇴되어 악화일로에 있었다.
기원후 562년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당할때 정읍 태인,칠보,순창 강천산 동부산악,
고창 선운산 동부산악지방,화순 동부지방까지 피신하여 우르가야 문화가 발견되고 있다.
이것은 대가야인들이 장삿술에 밝아 각 제국무역을 독점하여 신라의 침공을 받게되자 급히 몸을 피하여
전라연맹체 마한지방으로 피신해 들어왔다는 사실을 뜻한다.(무진주 장수 본가야)
또한 무주,진안,장수의 무진주인들이 광주 호남지방으로 급히 피신하여 660년 백제멸망기때
무진주로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신라는 울산 달천등 노천에 흔하던 철발견으로 철을 대량생산하면서 강해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청자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가 없는 외래기술이었다.
호남동부지방으로 들어온 우륵[우르]6가야세력이 이라크남부 우르국에서부터 사마르칸트를 거쳐
북월지가 되어 내몽고 시라선맹지구와 산서성 진성시,고평시 진평2군과 장치시 장사지방,사탁지방,
점탁지방에서,비단길,초원의길 무역을 하면서 습득한 선진기술이었다.
청자기술은 훗날 조선 선조시기 정유재란때 왜군이 남원성을 점령하고 남원도공들이
1만명의 포로와 함께 집단으로 끌려가는 것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그래서 가야인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전전승법의 역사를 가지고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륵6가야인은 실크로드 상업무역 세력이기 때문에 순장문화가 발견되지 않아 개별6가야문명과 구별된다.
남원에서 발견되는 초기 순장문화는 전기가야인 문화로 오손,오게,정령,오환족 문화다.
남원에서만 초기 개별가야 문화와 후기 우르가야 문화가 동시에 발견되고 있다.
오월인은 키가작고 아담한 사이즈의 일본인들이 오월의 후예다.
특히 일본 젊은 여성들중 키가 작으면서 골격비율이 잘갖추어진 아담한 사이즈의 젊은 여성을 보면
오월의 후예라는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인중에서도 키가 작으면서도 몸매 비율이 잘갖추어진 남방계의 아담한 사이즈의 사람들이
오월의 후예다.
백제가 왜로 이주한 나라백제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우륵6가야는 전기가야인들이 상당수가 왜로 넘어가서 삼국에 비해 세력이 약해 왜로 이주한 전기가야인과
오월을 상대로 번외무역으로 손해본 비용을 충당하여 왜로 이주하려 하였다.
오월이 중국남부 절강성,강소성에서 이주한 세력이라 상대적으로 순한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부여족은 키가 중키 이상이고 돌궐계와의 융합으로 머리가 조금 크고 북방계의 강골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는게 특징이며, 원래 안휘성 서화지방의 기자조선에서 실크로드요충지 감숙성 돈황지구와
번외거래 지구였던 내몽고 시라선맹[사라선맹,아라선맹,아랍답맹,오라선맹]지구로 북상하여
만들어지는 종족이 부여족이었다.
bc300여년전부터 부여족은 한반도와 왜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즉,서역,동유럽에서 돈황지구를 거쳐 한반도,왜로 이어지는 실크로드 교통로에 도자기터를 지어
일본까지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하고,한반도 주변국과 필요한 문물교류를 하여 실익을 취하려 하였으며,
반도에 남아있는 가야세력과 고구려 광개토군을 치기위해 반도로 들어왔다가 패하여 대가야로 성장하자,
대가야세력이 다시 구주[큐슈]로 돌아가기 위함이었고, 구주가야인[전기가야]과 오월족을
왜로 이주시키기 위해서는 뱃삯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가장 최단기간에 필요한 물품과 배, 뱃삯을 구하기 위해서 도자기터를 지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가야가 당시 최고급 기술이었던 도자기 선진기술을 풀어 짓게 된 것이다."
전기가야,백제의 초기 이주루트는 남한강>남한강 상류를 거쳐 충주>조령[문경새재]을 넘어
낙동강 연안을 타고 배로 짐을 옮기면서 금관가야를 거점으로 대마도를 거쳐 구주로 이주하며,
후기대가야, 백제는 남한강상류,하류를 상실하자,웅진 공주에서 금산 이치,무주 라제통문 라인과
진안 웅치,장수 장계면 육십령을 넘어 경호강(남강)을 이용하다가 신라에 밀려나 섬진강을 이용하여
수로로 짐을 옮기며, 거제 견내량, 마산포를 이용하여 구주로 이주한다.
[장수(우평현/백제시대)]가 진안에서 장수군 천천면 사이에 위치해 있었고 장계면 육십령을 통해 이주)
전라연맹체마한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은 정치,군사적으로 패하였을때
전나국[전주]소도지역으로 급히 피할곳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당시에는 양심철학이 지구철학의 중심이었음].
하한이 대륙에서 넘어와 백제왕위로 오른 위덕왕에게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였다가
위덕왕의 침공을 받게 되자,마한부흥을위해 신라의 진지왕에게도 조공과 세금을 요구하였다가
진지왕의 침공을 받게 된다.
익산금마연립마한[하한]의 수도 금성[알야산성(금성산성)]에서 신라의 진지왕과 싸울때
굶어 죽을때까지 싸우며,이 일로 왕궁리에 천형 환자촌이 만들어지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하한의 사택부세력과 동족인 여수,사천의 사탁부출신 진평세력이 신라 진흥왕의 팽창기때
신라의 사탁부로 들어갔다가 금성으로 들어가 진지왕을 4년이 되기전에 몰아내고 진평왕에 오른후,
딸이었던 선화공주때문에 하한을 백제 위덕왕>무왕에게 돌려주게 되는 것이며,
무왕은 익산 왕궁리로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미륵사와 왕궁을 건설한다.
침미다례국[탐미다례/심미다례]은 나주이남~여수,사천,통영지방까지였으며,
탐라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고,탐라는 침미다례,백제,동진,신라에 차례로 조공하였다.
[강소성 남경(난징)의 동진이 멸망한 이후에는, 하한(익산 금마 연립마한)과 반도 침미다례로 남하하여
낙랑을 아우른 후동진에 조공하는 것을 말함]
김춘추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1년에 백제부흥군을 치러 충남계룡,연무로 남진하며
익산 금마 금성으로 들어가 금마저에서 우물물을 마셨다가 비명횡사를 하고 만다.
조부 진지왕이 익산금마연립마한국[하한]을 점령했다가 진평계에게 폐위되었기 때문에
한번은 이곳에 반드시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p/s
내몽고 시라선맹지구[실크로드무역 번외거래 도매지구]
시라선맹- 혁거세.
사라선맹-석탈해.
아라선맹-북부여,고려[고구려]
아랍답맹-백제.
오라선맹-중국,북위,동위>북제,서위>북주,수,당이 지명으로 사용함.
개별가야-경기동부,충북,경북서북부,강원영월[양광도지역].
우르(우륵)가야-경북중서남부,호남동부,경남서남부지방.
금관가야-부산 동래,김해,거제 견내량지방.
직전신장[織田信長/오다 노부나가]은 경도[교토]의 가야계를 치고 가나가와(奈川)의
도자기 주요생산지를 장악하면서,일본 전국시대 실력자로 급부상하는 인물이며,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주군이었으나,
몽고의 뭉케,쿠빌라이에게 쫓겨 일본으로 달아나는 여진계가 아닌 가야,삼국시대때 이주한 현지출신이었다.
숙여진계 덕천가강군에게 죽을때 자신은 사무라이가 아니라며 자기몸에 아무도 손을 못대게 하고
목을 메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가야계는 전국시대전 나라/경도백제계에 이어 일본정국을 장악하여 족리존씨(이시카가 다카우지)막부시대를
경도[교토]에서 이어가다가,직전신장[織田信長]에게 멸망당하고,동경[도쿄]을장악한
덕천가강[德川家康]군에 의해 경도[교토] 가나가와[내천현/奈川/나라천]에서
일본 동경남부 요코하마시 가나가와현[신내천현/神奈川]과 그 서쪽지방인 가마쿠라[겸창]시로
집단 강제이주를 당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가나가와현과 겸창시[가마쿠라]는 일본에서 가장중요한 도자기를 굽는 집산지였다.
"전국통일시대때까지도 왜[倭]에서 도자기터를 장악한자가 쉽게 일본 정국을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이게 풍신수길이 교토[경도]에서 가야계를 밀어내고 에도[강호]막부를 두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