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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수넴 여인
By Dr. Peter S. Ruckman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던 어느 날, 거기에 한 훌륭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그에게 음식을 들라고 권유하므로 그가 지나갈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곳에 들르더라”(왕하 4:8).
성경이 독특한 책인 이유 중 하나는 성경은 거기 나오는 대단한 인물들을 익명 처리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께서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주께 도시락을 내어드린 그 “소년”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요 6:9). 누구도 그 소년의 이름을 모른다. 성경은 예수께서 승리의 입성을 하실 때 타신 그 나귀를 내어드린 나귀 주인의 이름도 말하지 않는다(막 11:4-6). 그 사람은 익명 처리되어 있다. 여러분들이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 해도 하늘에서는 그들이 유명 인사일 것이다.
왕하 4장에 나오는 이 여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 호의 때문에 주께서는 그녀를 “훌륭한 여인”이라 부르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훌륭한 여인”(great woman)이라 부르신 여인은 그녀가 유일하다. 주께서는 주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카톨릭이 “하나님의 어머니”, 또 “하늘의 여왕”이라 부르는 여인에 대해 대단한 결례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훌륭하다”라고 하신다면 그것은 대단한 찬사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걱정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지 염려해 본 적 있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생을 보신다면 훌륭하다라는 말을 하시겠는가?
하나님의 책에서 말씀하는 훌륭함(또는 위대함)의 기준은 세상 기준과 다르다.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파라오, 카이사, 교황들, 클린턴 부부, 부시(아버지, 아들), 오바마 등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주 하찮은 자들이다. 주께서는 그들 대다수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왕하 4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 여인을 위대하다고 하셨는지 살펴보려 한다.
그녀는 영적 분별력을 갖춘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항상 우리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나이다”(왕하 4:9). 그녀는 종교 사기꾼과 “하나님의 사람”을 분간할 줄 알았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여인들, 특히 크리스찬 여인들에게 영적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브에게 영적 분별력이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세상과 같은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욥의 아내는 영적 분별력이 전혀 없는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셨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라고 말한 것이다(욥 2:9).
폰티오 빌라도의 아내는 영적 분별력이 약간은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당신과 그 의로운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게 하소서. 내가 오늘 꿈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것으로 고통을 받았나이다”(마 27:19). 빌라도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면 빌라도는 지금처럼 역사에서 비난 받는 악인으로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로버트 틸튼, 베니 힌, 짐 베이커, 팻 로버트슨, 그리고 지미 스와거트 같은 자들이 크리스찬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미국의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최소 절반 이상이 돌아버린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이 “TV 고정 출연멤버 목사들”을 후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인들이 아닐까 추정해 왔다. 나는 정상적인 남성 크리스찬이 TV에 나오는 그런 돌대가리 목사들을 쳐다보면서 그 자들을 제대로 된 목사나 성경교사로 오해할 만큼 멍청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눈먼 모기 눈알만큼도 분별력이 없는 추종자들이 있어서 그 자들의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금전적으로 후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이 훌륭한 까닭은 그녀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영적인 미혹에 더 쉽게 넘어간다(딤전 2:14). 수넴 여인은 종교 사기꾼들과 거짓말쟁이들에게 속지 않았고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자 곧장 알아보았다.
그녀는 영적 분별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넉넉히 베풀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선지자가 묵을 수 있는 작은 방을 마련하고 거기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놓았다(왕하 4:10).
이 본문을 읽는 여러분 크리스찬 자매들은 후하게 베풀 줄 아는가? 관대한 여인은 돈이 있거나 없거나 남을 돕는다. 그녀가 돈이 없다면 다른 수단으로라도 돕게 마련이다. 행 9장에서 도르카는 과부들을 위해 옷을 지었다(행 9:39). 잠 31장의 “현숙한 여인”은 어렵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베풀었다(잠 31:20).
여러 해 전 크리스마스 시즌에 뉴욕에서 있었던 일인데 어떤 크리스찬 숙녀가 거리에서 다 낡은 옷을 입고 신문 배달을 하는 소년을 보았다. 그녀는 그가 추운 날씨에 맨발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소년을 가까이 불러서 그를 백화점으로 데리고 들어가 털가죽을 댄 따뜻한 부츠와 울스웨터를 사서 선물했다. 그 소년은 뜻밖의 친절에 놀라고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내인가요?” 당연히 그녀가 개인적으로 그렇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속한 지체였고(엡 5:30-32) 그녀의 행동은 “어린양의 아내”(계 21:9)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나는 여러분이 자선을 베푸는 데 있어서도 신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안다. 많은 노숙자들이 돈이 필요하다는 글을 쓴 보드판을 들고 교차로에 서서 구걸하지만 사실 그들 중 대부분이 일하기 싫어서 거기 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하는 것보다 구걸이 편하다고 생각해서 그러고 있는 것이고 그들이 구걸로 모으는 돈은 옷, 음식, 숙소보다 상당부분 마약과 술을 구하는 데 쓰인다. 내가 사는 이곳에는 거지들 앞에서 “음식이 필요하면 일하라”라는 표지판을 들어 보이면서 그들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아침 8시에 슬레지 해머, 도끼, 삽 같은 것들을 픽업 트럭 짐칸에 싣고 몰고 나간다. 그는 거지들 옆에 차를 세우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 나하고 같이 가지. 내게 개간해야 할 땅이 좀 있는데 가서 내 일을 도와주면 현찰로 최저 시급을 맞춰 주겠어.” 그러면 갑자기 그 걸인들은 전혀 배고프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어떤 거지가 그의 제의를 거절하면 그는 자기 사업체 직원에게 수고비를 준 다음 “내가 이 사람에게 일거리를 제안했는데 그가 거절했습니다.”라는 표지판을 들고 그 거지를 따라다니라고 시킨다.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이렇게 명령하신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 여러분은 경우에 따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때로는 친절과 관대함이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어떤 이의 인생을 구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 어떤 주정꾼이 그런 친절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는데 그는 나중에 유명한 법무상이 되었다. 그 때는 가마솥처럼 끓는 시카고의 어느 여름 날이었는데 그 사람은 취한 채 배수로에 널부러져 있었다. 길을 가던 어떤 상류 사회 여인이 쓰러져 있는 그를 보고 동정심이 발동했다. 그녀는 레이스 달린 고급 손수건을 꺼내서 그의 얼굴이 햇볕에 익지 않도록 덮어주었다.
조금 있다가 경찰이 와서 그를 주정뱅이 보호소에 보냈는데 그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손수건의 출처를 물었고 그는 그 상류 사회 여인이 자기에게 친절을 베푼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크게 감동받아서 그 손수건을 소중히 간직했다. 나중에 그가 법무상이 되었을 때 그 여인을 수소문해서 찾은 다음 이렇게 말했다. “그 늙은 부랑자에게 친절을 베푼 것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을 훌륭하다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그녀의 겸손에 있다. 엘리사가 게하시를 보내어 그녀의 친절을 보상해 주기 위해 이스라엘의 “높으신 분들”과 다리를 놓아줄까 말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내 백성 가운데 거하나이다”(왕하 4:13). 그녀는 명성이나 영예를 얻기 위해 엘리사를 후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평범하게 사는 것에 만족해 했다.
빅토리아 여왕도 당대의 가장 위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통치자였음에도 수넴 여인처럼 소박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내 왕좌와 왕관을 주께 넘겨드릴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다이애나 왕세자비나 재키 케네디,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 같은 여인들은 겸손의 미덕에 있어 빅토리아 여왕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저런 여인들에게는 내 주방청소 일도 맡기고 싶지 않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들의 신분을 격상시켜 준다고 해서 그들이 미천할 때 가졌던 천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어떤 여인을 백악관이나 버킹엄 궁전에 집어넣는다 해서 그녀가 자동으로 “숙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여인이 부랑자로 살아 왔다면 사는 곳이 바뀌어도 생활이 달라지지 않고, 레즈비언은 환경이 바뀐다 해도 계속 레즈비언으로 산다. 사는 장소가 바뀐다 해서 그 사람의 성품이 바뀌지는 않는다.
여러분은 세상이 여러분을 하찮게 평가할까 염려하고 사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니라”(눅 16:15).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높이고 칭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서 나는 악취를 맡으실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에 세상이 여러분의 악취를 맡을 것이다(고후 2:16).
다음으로, 이 여인이 훌륭했던 이유는 그녀가 절제력 있는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쉽게 화내는 성품이 아니었다. 왕하 4장에 보면 그녀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돌봐주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여인에게 아들을 주신다. 그 아이가 자랐는데 그가 어느 날 들판에서 아버지와 일하던 중에 그만 열사병에 걸려 죽고 만다. 그 여인은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죽은 아들의 시체를 들고 엘리사의 빈 침실로 가서 침상에 눕혀놓는다. 그녀는 쓸데없이 “분노를 폭발시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정도로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여인이라면 훌륭하다고 말씀하실 만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는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했기에 훌륭한 여인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해서 엘리사를 찾아간다.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말씀에 기갈을 느끼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마 5:6; 요 6:35, 63). “마르다는 접대하는 일이 많아서 경황이 없더라”(눅 10:4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녀의 동생에 대해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못하리라”(눅 10:42)라고 하셨는데 이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눅 10:39).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는지 아는가? 누가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그 외 “여러 다른 여인”이 있었다고 말한다(눅 8:1-3). 여인들은 예수께서 그녀들의 마음의 소원에 대한 답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은 구주께서 하신 것만큼 여인들을 돌봐 주지 않았다.
여러분 숙녀들 가운데 “에큐메니칼”에 너무 심취한 이가 있다면 이슬람에서 여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알아볼 것을 권한다. 모슬렘 남자들에게 여인들은 단지 성적 유희의 대상일 뿐이다. 모슬렘 여인들은 법정에서 남성의 절반만큼의 증언 효력만 갖고 있다. 모슬렘 여인들은 남편이나 아버지의 허락 없이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고 배운다. 게다가 그 여인들이 낙원에 간다 해도 남편들이 72명의 초자연적 “처녀들”과 음행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마호메트는 여인들에게는 종교성(그의 종교를 말한다)이 심히 부족하기에 지옥에 있는 죄인들의 대부분이 여자들이라고 말했다. 여러분이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우리 교회 서점에서 “어떤 알라가 진짜 알라인가?”라는 책을 사서 보라.
불교, 힌두교, 그리고 신도교에는 여자들에 대한 구원 계획이 없다. 불교에서는 여성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여기 미국에서는 어떤 돌팔이 중들이 그들의 여성 신도에게 “여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녀와 음행하기 위한 아첨일 뿐이다. 인도, 중국, 일본의 원조 불교도들은 여성들을 높이는 말 자체를 하지 않는다.
힌두교와 신도교 또한 이하동문이다. 크리스찬 선교사들이 인도에 가보니 힌두교도들이 과부를 죽은 남편과 함께 불사르는 광경들을 볼 수 있었다. 어떤 불신자들이 여러분에게 종교는 여자를 “소유물”처럼 여긴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교도들에 해당하는 말이지(이슬람, 힌두교, 불교 등) 구약 성경의 유대교나 기독교와는 무관한 것을 알라. 성경에서는 이교도 사회의 여인들이 갖지 못한 권리와 특권들을 믿는 여인들에게 부여한다.
수넴 여인이 훌륭한 여인이라 불린 또 다른 이유는 그녀가 끈질긴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엘리사는 그의 종 게하시에게 자기 지팡이를 들려 자신보다 앞서 보냈는데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그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지시했다(왕하 4:29). 그 뜻은 엘리사 자신은 그 아이에게 갈 뜻이 없었고 게하시가 지팡이를 소년 위에 놓아 살리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넴 여인은 자기 요청이 수락될 때까지 엘리사를 떠나지 않고 계속 매달렸다(왕하 4:30). 이것이 그녀의 집요함이다.
끈질김이란 어떤 일을 시작했으면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끌고 가는 자세를 말한다. 성경에서는 기도와 관련해서 이것을 “끈질긴 간청”(눅 11:8)이라 부른다.
끈질김에 대한 좋은 예화가 하나 있는데 해적들이 바다를 누비던 전성기 때의 이야기이다. 어떤 해적선이 바다 한복판에서 침몰했는데 물에 빠진 선원들이 구명 보트들을 향해 헤엄쳐 몰려들었고 보트들이 더 인원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가득 찼을 때였다. 물에 빠진 해적들 중 하나가 구명선 한 척에 손을 뻗어 측면을 붙들었다. 그때 구명선에 탔던 한 사람이 칼을 뽑아 그 친구가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한 손을 잘라 버렸다. 한 손이 잘린 해적은 다른 손으로 배를 붙들었는데 그 손도 마저 잘려 버렸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치면서 자기 이빨로 보트 난간을 물었다. 그러자 동료 해적들은 그의 끈덕짐을 보고 놀라 그를 끌어올려 배에 태웠다. 그들은 그가 살려줄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수넴 여인은 자신의 기도가 관철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작정했고 행동에 옮겼다. 미국 남부에 살던 어떤 크리스찬 여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는데 그녀는 남편을 사별한 후 다섯 아들을 혼자 키웠다. 그들 모두는 건실하게 성장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묻자 여인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마귀가 그 아이들을 채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굳게 결심했었습니다.”
그 자매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매일 오전 10시가 되면 그녀는 가장 큰 아이에게 동생들을 돌보라고 시킨 다음 이웃집의 크리스찬 자매에게로 갔다. 그녀들은 마귀가 자신들의 아이들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하자고 약속한 사이였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30분 동안 서로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십오 년 동안이나 기도 모임을 계속했다. 그들의 기도가 주효했기에 마귀는 그들의 아이들을 건드리지 못했던 것이다.
신약에 와서는 한 수로페니키아 여인이 수넴 여인 같은 끈질김을 보여주었다(마 15:22-28). 그녀에게는 마귀 들린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는 딸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수락될 때까지 주와 제자들을 떠나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녀를 암캐라고 암시하는 듯한 말로 짐짓 모욕하셨는데도 그녀는 그런 수모까지 감내했고 결국 그녀의 간구는 응답되었다. 인격 모독조차도 그녀를 포기시키지는 못했다.
수넴 여인이 훌륭한 이유는 끈질김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는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아들을 주겠노라 약속하셨고, 아들을 주셨는데 이제 그 아들이 죽어버렸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씀드리지 아니하더이까?”(왕하 4:28)라고 말한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었기 때문에 엘리사를 떠나려 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지 않는 여인은 주의 눈에 훌륭한 여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약속들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히 11:6). 이 여인은 끈질기게 간구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히 붙들었다.
마지막으로, 수넴 여인이 훌륭한 이유는 그녀가 감사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왕하 4:37에 보면 아들이 되살아나자 그녀는 엘리사의 “발 앞에 엎드려 땅에 대고 절”한다. 이것은 경배와 감사의 표시이다.
밥 존스 시니어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사람의 마음 속에 감사가 실종되면 그는 거의 구제불능인 인간이 된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라고 썼다. 하나님께서 그 이방인들을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 두시”(롬 1:28)기 전에 그들은 감사하지 않는 죄를 지었다(롬 1:21).
그 훌륭한 수넴 여인은 가진 것에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은 왕하 4:13에서 확인된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하지 않는 마음에서 불만족이 싹트게 된다.
하만은 페르시아 왕국에서 2인자가 되는 영예를 누렸다. 한 사람(모르드캐)을 제외하고 모든 이가 그에게 와서 절하는데 하만은 모르드캐에게 복수하려고 그의 민족을 몰살시키려 한다. 감사할 줄 모르면 불만족이 나오게 되어 있다.
아합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많은 땅과 궁전들을 소유하고 있었는데도 한 사람(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지 못해서 속을 끓였다. 그는 자기 아내가 그 친구를 제거하도록 허락했다. 감사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가? 성경은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 훌륭한 남자나 훌륭한 여자라고 칭찬하실 만큼 여러분은 충분히 감사하고 있는가?
19세기의 오스트리아 비엔나 사람들은 오페라 매니아였다. 그곳에는 아멜리아 슈타이닝거라는 이름난 오페라 가수가 있었다. 그녀는 차츰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는데 결국 그녀는 헨리에테 존탁이라는 여가수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했다. 처음 존탁이 아멜리아를 대신해서 무대에 섰을 때 아멜리아의 열성 팬이던 청중들은 그녀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퇴장시켰다. 아멜리아 슈타이닝거는 계속 노래를 부르다가 결국 목소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얼마나 울었던지 그녀는 문자 그대로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엉엉 울었고” 진짜로 장님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극빈자로 전락했고 딸의 손에 이끌려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오페라 가수로서 최고의 명성을 얻은 존탁 여사가 마차를 타고 베를린 거리를 지나다가 어떤 눈먼 여인이 소녀의 인도를 받으며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마차꾼에게 잠시 멈추라고 한 다음 소녀를 불렀다. 가까이서 보니 그 소녀가 데리고 다니는 눈먼 여인은 그녀의 과거 적수인 아멜리아 슈타이닝거였다. 존탁 부인은 그녀를 위해 자선 콘서트를 열고 의사에게 데려가서 눈을 낫게 할 수 없는지 보도록 했다. 의사가 그녀가 시력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자 존탁 부인은 자기 적을 집에 데려갔고 그들 모녀를 평생 돌봐주었다.
알겠지만 존탁 부인은 하나님께서 그녀를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 만들어주신 것에 감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처럼(마 5:44) 자신의 적을 돌봐줌으로써 감사를 표현했다. 그것이 위대한 여인의 증거인 것이다.
숙녀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도 훌륭하다, 위대하다라고 말씀하시겠는가? 신사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대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실 것 같은가?
훌륭한 수넴 여인(By Dr. Peter S. Ruckman).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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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읽었습니다.
럭크만 목사님께서 하늘나라에서 많은 것을 누리고 계시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