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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적연 2) 청학동 3) 퉁두란 |
1) 화적연
화적연(禾積淵)은 임진강 상류, 영북면(永北面) 자일리(自逸里)와 관인면(官仁面) 사정리(射亭里) 사이에 있는 못이다. 마치 볏 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이어서 화적(禾積)이라고 한다.
어느 때에 삼년 가물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자, 늙은 농부가 화적연 가에서 “하늘도 무심하지, 용도 3년을 두고 낮잠만 자는가!”하고 탄식했더니, 갑자기 수면으로부터 용이 나와 하늘로 비상하고 다음날부터 비가 내려 그 해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가뭄이 들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 앞에서는 지명 풀이를 간략하게 했다. 뒤에서는 사람의 말이 초자연적인 힘을 지녔다고 했다.
2) 청학동
지금의 영중면(永中面) 금주리(金珠里)에 살던 어떤 가난한 사람이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 지고 매장을 하기 위하여 자리를 잡고 땅을 파니 청학 한 마리가 슬프게 울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기서 산소 쓰기를 단념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 구전되고 있다. 그 자리를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 신이로운 내력을 가진 지명 설명이다.
3) 퉁두란
포천시 창수면 추동 2리 청해사(靑海祠)에 퉁두란을 모시고 있다. 퉁두란은 여진인 장수이다. 성은 퉁[佟], 이름은 두란[쿠룬투란티무르; 古倫豆蘭帖木兒]인데, 나중에는 이름을 이지란(李之蘭)으로 바꾸었다. 아버지의 직위를 물려받아 천호가 된 후 1371년(공양왕 20) 고려에 귀화하여 이씨 성과 청해(靑海)[북청]라는 본관을 하사받았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결의형제를 맺었고, 이성계의 편장으로 왜구를 무찔렀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참가했다. 그 후에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었고, 1, 2차 왕자의 난에도 공을 세웠다. 태조가 영흥으로 은퇴하자 풍양으로 물러나 은거하고 불교에 귀의했다. 퉁두란과 이성계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퉁두란과 이성계에 얽힌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이성계와 퉁두란이 길을 가다가 점쟁이가 있어서 같이 점을 치기로 했다. 복채가 상당히 비쌌다. 먼저 이성계가 점을 치기로 하여 점쟁이에게 가니 “글자를 짚어라.”라는 말에 이성계는 ‘물을 문(問) 자’를 집었다. 그것을 보고 점쟁이가 풀기를 “우군 좌군이다. 왼쪽으로 봐도 임금이고 바른쪽으로 봐도 임금이구나. 당신은 다음에 임금이 되겠소.”라고 했다.
퉁두란이 그 소리를 듣고는 이성계보다 값을 두 배를 주고 같은 자를 짚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퉁두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문중 문이라, 문 앞에 입이 있으니 문아구니! 이 빌어먹을 것아. 천생 얻어먹을 복 타고났다”고 했다.
같은 글자를 짚었는데 한 사람은 임금이 된다 하고, 한 사람은 거지가 된다고 하니 퉁두란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점쟁이의 책을 빼앗아 찢으면서 죽이겠다고 덤벼들었다. 이때 이성계가 퉁두란을 말리면서 “그러지 말아. 그럼 우리 앞으로 더욱 친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의형제를 맺자”고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의형제를 맺었다.
퉁두란이 생각하기에 자기가 매번 이성계에게 밑지는 생각이 들던 중 하루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이성계가 보리밭에 가서 똥을 누려고 앉아 있었다. 퉁두란이 “기회는 이때다”라고 하는 생각에 이성계를 활로 쏘았다. 이성계가 똥을 누다 보니 별안간 “쓔욱” 하고 화살 소리가 나서 손을 내밀어 화살을 잡았다. 이 장면을 본 퉁두란은 이성계 앞으로 나가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고 한다. 결국 둘은 손을 잡고 나라를 건국하여 퉁두란은 개국 공신이 되었다.
=> 첫 대목에서는 역사적 인물 퉁두란을 설명했다. 둘째 대목에서는 이성계와 퉁두란은 타고난 운수가 다르다고 했다. 셋째 대목에서는 이성계와 퉁두란은 술법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사실에서 전설로 나아가는 단계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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