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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춘하추동(제8호) 계간평 원고 통권 제8호
순수한 감성으로 그린 서정의 그림
김석철(한국시조시인협회 자문위원)
종합문예계간지 『문학 춘하추동』에서 이번 제8호부터 시조와 시부문의 ‘계간평’을 시작한다고 한다. 저는 평론가는 아니지만, 시조시인으로서 등단 40년여 년간 시조 연구와 창작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가끔씩 시조 부문 심사평과 월평, 계간평, 개인 시집과 시조집의 평설을 쓰게 되었다. 모두 내가 자청해서 한 일은 아니지만 남의 작품에 대하여 왈가왈부한다는 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나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지성과 영혼이 깃든 귀한 창작물이다. 부득이 이왕 맡게 되었으니 내 분수대로 내 능력껏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만 시조와 시를 공부하는 후진들에게라도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러면 『문학 춘하추동』 제7호에 실린 ‘시조’와 ‘시’부문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시조 창작의 멋’ 란에 삼십여 시조시인의 시조 작품이 각기 2편〜4편씩 실려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시조時調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시(겨레시, 우리시, 민족시, 국민시)를 일컫는다. 고려말에 완성된 3장 6구 12음보(소절)의 정형시에서 시작되어 드디어 2021년엔 문학진흥법의 개정으로 시조가 문학의 한 갈래(장르)가 되었다.
시조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정형시다.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우리의 언어와 가락(운율)으로 표현하고 있는 유일한 전통시이며 국민시가인 것이다. 세계의 나라마다 그 나라의 전통시가 있다. 중국에는 한시漢詩(絶句,律詩)가 있고, 일본에는 하이쿠가 있으며 서양에는 소네트(sonnet)가 있다. 현재 우리 시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시조를 국민 모두가 재인식하여 시조를 짓고 활용하여 그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폭포수 소리 뚫고 새 하늘 바라보며
목이 쉰 듯 맑은소리 한까지 흐드러져
임방울 심장의 소리 쑥대머리 뜨겁다.
- 김옥중,「득음」전문
김옥중 시인의 단시조 네 편 중에서 한 편 「득음」을 골라보았다. 이 작품은 시적 진정성과 예리한 감성이 자아올린 단수다. ‘득음得音’은 소리를 얻음이란 뜻으로, 자신의 목소리나 악기 소리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여 자유로이 노래하거나 연주할 수 있는 경지에 이름을 이르는 말이다.
이 작품의 표기 방식은 삼장 시조의 기본형을 잘 지켜내고 있으며 내용의 구성과 전개도 알맞게 되어 있다. 형식의 제약 때문에 진부하기 쉬운 작업인데도 오히려 구속이라는 형식을 통해 유려한 운율의 멋과 내용상의 심화가 이 작품을 독창적이고도 새롭게 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종장의 첫 소절에 ‘임방울’이라는 사람 이름을 내세우고 있으며, “심장의 소리 쑥대머리 뜨겁다.”라고 했다. ‘임방울’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국악인으로, 「춘향가」 가운데 ‘쑥대머리’를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으며 당시에 그야말로 득음의 경지를 누린 판소리의 최고 명창이었다. 이 ‘득음’은 ‘임방울’의 독보적인 상징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시퍼런 하늘 앞에 천왕봉 서석대 숲
새하얀 벙거지를 묵묵히 쓰고 앉아
새빨간 진달래 능선 피울 생각 중이다
- 김진호,「겨울 무등산」전문
이 시조 역시 시조의 본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자는 관찰자 시점에서 겨울 무등산을 바라보며 순수한 감성으로 서정의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
초장의 “시퍼런 하늘”, 중장의 “새하얀 벙거지”, 종장의 “새빨간 진달래” 등에서 시각적 심상의 관형어 사용이 자칫 안이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확연한 이미지의 강조 효과를 거두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특히 종장의 “진달래 능선 피울 생각 중이다”의 표현은 시상의 전환과 비약의 효과를 거두며 시심을 더욱 고조시키는 경지를 이루고 있다. 이 시를 찬찬히 음미해 보면 내적 조명을 통한 진솔한 시인의 설득력과 만나게 된다. 시적인 비유와 상징으로 이미지의 형상화가 일품이다.
낙일落日이 출렁거린 땅거미를 뒤적이며
바람의 계곡 섶이 지평선을 갈라놓아
눈길은 등받이 넘어 장단 타듯 너울댄다.
뒤엉킨 숫눈 위로 눈썹 털이 달라붙고
등이진 낮은 구름 벼랑 끝에 머무르면
발목은 한기에 쫓겨 엉거주춤 기어간다.
된서리 비척거린 빈 모퉁이 감아 돌아
깊숙한 개골창에 도사리는 시생始生의 맥脈
자연을 남포질하며 기암절벽 버텨 섰다,
- 송귀영,「산마루 오름」전문
이 작품은 관찰력과 탐색의 밀도가 높은 연시조다. 착상이 참신하고 “너울댄다”, “숫눈”, “비척거린”, “개골창” 등의 고유 시어의 배치와 부림이 익숙하며, 시조의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주제 심화에 이바지하고 있다. 특히 시상 전개가 순차적 구성으로 되어 있어 이미지의 형상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시조의 내용 구성에 주로 쓰이는 방법이, ’기-승-전-결(기-서-결)’ 이나 ‘선경후정법’, ‘수미쌍관법’, ‘원근법’, ‘분석법’, ‘연역법’, ‘귀납법’, ‘변증법’ 등도 있지만, ‘단계적 구성법’도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 단계적 구성법은 ‘시간적, 공간적, 순차적’ 구성 등을 포함해서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이 작품의 순차적 구성은 이 단계적 구성법의 범주에 포함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을 했지만 시조는 우리 문학 양식 가운데 가장 정통성을 지닌 고유의 민족시이며 우리시이다. 따라서 시조는 우리말의 토양에서 자생한 시의 형태이기에 우리의 정서를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 표현의 그릇이다. 시조야말로 시인의 개성과 기량에 따라 재창조될 수 있는 우리시의 정화精華이다. 누가 뭐래도 시조는 운문의 백미로서, 운율미, 간결미, 정제미, 균제미, 함축미, 완결미가 시조의 특성이며, 시조가 세계적이라는 자부심은 우리의 자랑이다.
당신의 마음눈에 외로움 눈물겹고
가슴을 저며오는 두려움 벗는 침묵
궁금이 까치발 딛고 골목길에 서있다.
- 안효만,「붓꽃이 필 때면」전문
안효만 시인의 단시조 네 편 중에서 「붓꽃이 필 때면」을 골라보았다. 시조의 율격도 잘 갖추어져 있으며 내용면으로도 기존의 생각과 개념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 보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종장의 “궁금이 까치발 딛고 골목길에 서있다.”에서는 그리움의 정서를 시적 허용으로 표현한 좋은 보기라고 본다. 군더더기 없이 잘 다듬어진 산뜻한 이 단시조가 그야말로 일출처럼 환하다. 미국의 대표적 낭만주의 시인 에드가 알렌 포우는 “서정시가 길어지면 불순물이 담긴다고 했다.
‘붓꽃’은 붓꽃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서 높이는 60cm 정도이고, 뿌리줄기가 옆으로 자라며 싹이 나온다고 하는데, 특히 5~6월에 짙은 보랏빛 꽃이 꽃줄기 끝에 두세 송이씩 달려 있는 예쁜 꽃이라고 한다. 촉촉한 비가 내린 후나 이른 아침 이슬을 머금고 싱싱하게 피어오를 때 가장 아름답다고 하며. 붓꽃의 꽃말은 비 온 뒤에 보는 무지개처럼 '기쁜 소식'이라고 하니, 붓꽃이 필 무렵이면 궁금이 까치발 딛고 골목길에 서 있을 만하다.
해마다 유월이면
떠오르는 우실 계곡
맑은 물 향기롭고
숲길마다 신비로워
온몸에 스미는 전율
에너지가 넘쳐났다.
계곡을 달군 희열
솔 내음 몸에 배고
꾀꼬리 짧은 리듬
춤추는 고산준령
비구름 천둥소리에
짙어지던 그 유월.
- 윤한익,「유월의 계곡」전문
윤한익 시인의 「유월의 계곡」은 해마다 유월이면 떠오르는 우실 계곡에 대한 추억을 연시조로 엮어놓고 있다. 연시조에서 지켜야 할 연결성, 통일성, 완결성을 잘 갖추고 있으며, 쉽게 읽히면서도 은근히 감동을 주는 매력이 있다. 자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운 정경을 다양한 심상으로 표현하여 자연친화의 시정신이 저절로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현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이런 우주의 섭리가 신비로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첫수에선 유월의 우실 계곡에 대한 소개 내용이 나타나 있고, 둘째 수에선 계곡에서의 실제 체험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을 살펴보면 두 수가 같은 표기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구별 배행의 6행 시조로 구성하고 있다. 사실 이런 표기 방식을 취함으로써 이미지의 형상화를 더욱 선명하게 그려놓고 있다. 시조의 표기 방식은 예전엔 주로 장별 배행으로 3장 형식을 취해 왔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3장의 장별 배행 외에 이렇게 구별 배행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에 있어서도 구별 배행을 취함으로써 운율적 효과와 아울러 작품의 의미도 더욱 드러내면서 이미지도 살려내는 효과를 거두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산이라 물이 좋아 왔노라 보고 싶어
파아란 녹색 하늘 동동대 구름 뜨고
향긋한
초록 내음에
향기들이 돋는다.
자르르 고향산천 오늘도 흐르는데
만나는 친구들은 어제가 옛날이요
떠들어
논밭에 놀던
아련함이 들린다.
- 이관수,「변하는 고향산천」전문
옛말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작품의 제목은 “변하는 고향산천”이어서 언뜻 산천이 변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 수에서 “자르르 고향산천 오늘도 흐르는데/ 만나는 친구들은 어제가 옛날이요”라고 하여 변하는 건 고향산천이 아니고 인간이라는 걸 확인시켜주고 있다. 여기에서 시적 자아는 고향의 외형적 변화가 아니고 내재적 의미의 변화를 역설적으로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이 작품은 두 수가 가지런히 각기 7행 시조로 되어 있다. 근래에 특히 많아지고 있는 표기 방식 중 하나인데 초장과 중장은 장별 배행으로 하고, 종장만은 첫 소절을 따로 내세워 3행으로 배열해 놓고 있다. 역시 종장의 특성을 살려 비약과 전환 및 운율적 효과와 아울러 의미도 더욱 강조하면서 아울러 이미지도 살려내는 효과를 거두고자 하는 의도라고 본다.
오늘도 어제처럼
아침을 맞습니다.
품 안에 지닌 밀지密旨
여직도 못 전하고
포위망
일월에 갇혀
또 석양을 봅니다.
- 장지성,「뉘엿뉘엿」전문
시조는 율격에 의한 시로서 그 기사 형식을 음률 구조에 따라 배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에 장 시인의 이 시조 역시 초장, 중장은 구별 배행하고 종장만은 첫 소절의 특성을 감안하여 분행 한 7행 시조의 표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장 시인의 제목 선정이 잘 되어 있다. 이 시조의 제목 '뉘엿뉘엿'은 해가 질 때 하늘에서 해가 천천히 기울어 사라져 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부사어이다. 해가 완전히 지지 않고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말인데, 이 '뉘엿뉘엿'의 제목은 사전적 의미보다는 시적으로 내포하여 함유하는 의미가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시조의 제목은 그 시조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시조의 내용과도 밀접해야 하는데, 주로 그 시조의 주제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으로 붙이거나 중심 제재를 제목으로 선정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최근에는 단조로운 명사형이나 체언구의 제목보다는 신선한 주제 문구나 부사어를 그대로 취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는 현상인데, 이 작품이 바로 제목을 부사어로 선정하여 제목과 내용, 주제와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시조는 구어체, 경어체의 구사가 자연스런 느낌을 주면서도 고도의 절제와 압축으로 간결하게 표현하여 행간의 숨은 뜻을 독자가 파악하게 하는 세련된 시조의 보법! 이 시조는 이렇게 그 형태 안에 율격, 비유, 상징, 의미 등 여러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이러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군더더기 없이 완성된 작품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무가 어우러져 울울창창 숲 이루고
빗방울 모여 모여 냇물 되어 노래하듯
내 일상 감사 쌓으면 한살이가 행복하다.
- 정순량,「감사 –골로새서 4 : 2」전문
정순량 시인의 이 단수는 성경 신약의 열두째 권 골로새서(Colossae 書)를 참조한 신앙심에서 연유된 작품이다. 정 시인은 요즈음 시의 모티브를 주로 신앙심에서 찾고 있으며, 작품의 주제의식도 한층 더 깊은 신앙심 안에서 여과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연륜이 묻어나는 이 잠언성의 교훈적인 작품, 더 이상 무슨 사족이 필요하겠는가. 평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슴이 따뜻한 시인이라는 걸 짐작하게 되는 이 시조에서도 정 시인이 그동안 쌓아온 오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긍정적인 인생철학을 읽을 수 있다.
시조는 시보다 더욱 운문적이라고 했다. 여기서 운문적이라는 말은 시조가 언단의장言短意長으로 함축과 내포의 매력을 담고 있으며 율격(음률)과 호흡, 박자의 율감을 조화해 가면서 의미와 비유 상징, 이미지 따위를 율격으로 이끌고 통일성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결국 시조는 이렇게 시상을 율격에 맞게 정제되어야 하고 함축의 미를 지니는 예술작품이어야 한다.
숲에서는 목 내밀고 구름만 봅니다
나비야 스쳐 가듯 무심히 난다해도
꿈인 듯 여름 한 철에 하얗게 웃습니다.
뛰어든 은빛 햇살 알몸으로 깔깔대도
혼자는 외로워서 무리 지어 삽니다
한 가닥 바람결에도 꿈꾸면서 삽니다
- 진길자,「망초꽃」전문
‘망초꽃’은 국화과에 속하는 식물로, 흔히 ‘개망초’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주로 들판이나 길가에서 쉽게 발견되며, 하얀 꽃잎과 노란 중심부를 가지고 있는 작고 예쁜 꽃이 특징이라고 한다. 망초는 생명력이 강해 쉽게 자라며, 종종 잡초로 분류되기도 한다는 꽃이다.
진 시인에게는 자기의 목소리가 있고 자기 스타일이 있음이 짐작된다. 독특한 개성이 있다는 말이다. 시의 세계는 이렇게 상상력에 의해 창조되는 공간이기 때문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일인데,진 시인은 의인화 수법으로 경어체 평서형 어미로 종결하여 시적 의미의 간절함을 더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진 시인은 매사에 비범한 눈을 가지고 사물을 인식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나간다. 둘째 수의 종장 “한 가닥 바람결에도 꿈꾸면서 삽니다”에선 언뜻 “꿈이 있는 한 인간은 젊다”는 사무엘 율만의 시가 떠오른다. 꿈꾸는 자는 멈추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만, 시조 속에서 꿈을 품은 화자의 긍정적 마음을 만날 수 있어 금세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단아한 정형의 틀에 곱고도 유려한 시어의 적재적소 배치, 내포와 함축을 통한 시적 미감 등을 그냥 가볍게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다음은 ‘시 창작의 기쁨’란에 실린 이십여 시인의 시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시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부분 시에 대해서 알고는 있으면서도 막상 질문을 받게 되면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 시의 정의에 대해서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견異見을 제시하여 그 정답을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동양에서는 공자(B.C 552〜479가 말한 “사무사思無邪”란 말이 있고, 서양에서는 포오(E⸳A⸳Poe, 1809〜1849)가 말한 “시는 미美의 운율적 창조다”라든가, 릴케(R⸳M⸳Rilke, 1875〜1926)의 “시는 체험이다”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시의 정의를 교과서적으로 쉽게 정리한 걸 보면 “시는 우리가 어떤 일을 체험했을 때 그것이 주는 생각이나 느낌을 운율 있는 언어로 압축 통일하여 나타낸 하나의 창작물을 말하며 이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운문韻文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요약하면 시는 생각이나 느낌을 운율(리듬)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나타낸 창작품이라는 것이다.
시내를 벗어나며
나는 잡다한 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고물상을 본다
쓸 만큼 쓴 것들
더 쓰고 싶지만 고장난 것들
시대를 쫓아가지 못한 것들이
초라한 모습으로 엉켜있다
시내를 들어오며
나는 다시 그 고물상을 보며
혀를 끌끌 차다가
구석에 후줄근한 모습으로
재활용되기를 기다리는 나를 본다
어느 쪽일까
다 쓴 것인지 고장난 것인지
어쩌면 시대를 쫓지 못한
나의 고집과 습관들인지
숙제 하나가 등에 척 달라붙는다.
- 고정현,「고물상」전문
고정현 시인의 시 「고물상」은 5연으로 구성된 자유시, 서정시다. 시나 시조는 다 운문이지만, 그 운율이 서로 다르다. 시조의 운율은 외형률이지만 시의 운율은 내재율이다. ‘고물’은 헐거나 낡은 물건을 뜻하며, ‘고물상’은 고물을 팔고 사는 가게를 말한다. 그렇다면 고물상엔 마땅히 다 쓴 물건이나 고장난 물건만이 있어야 할 것이지만, 어쩔 땐 아직 멀쩡하게 쓸만한 물건인데도 급변하는 시대에 뒤처져 효용 가치를 잃고 그만 고물상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고물상은 대개 도심을 벗어나 근교에 위치하고 있는데, 화자는 시내를 오가며 잡다한 고물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고물상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과연 고물들은 모두 수명이 다한 것들일까? 다시 활용하거나 가공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그러다가 불현듯 고물에서 발견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 금세 자신의 처지와 비교가 되는 고물들! 특히 마지막 연의 “숙제 하나가 등에 척 달라붙는다.”에 함유된 의미와 표현은 금상첨화로 느껴진다.
고 시인은 시의 대상을 인식하는 개성적 안목이 있고 소재를 다루는 솜씨도 범상치 않다. 하찮은 소재를 취택하여 문학성과 현대성을 이만큼 살려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유의 깊이가 시적 승화를 이루고 있는 시편이다. 사실 문학작품은 시대를 고발하기도 하고, 환경을 반영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건강한 시정신은 우리 사회를 정화시키는 기본이 될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
설악의 당단풍은
한여름 태양을 빨아들여
안으로 성숙했다.
곱게 분단장한
새색시의 얼굴이 이처럼 고울까
세상 근심 모르는
아이의 얼굴이 이처럼 예쁠까
색깔도 가지가지
발길이 멈춰진다.
사연이 있으면
단풍도 달라 보이는 법
저마다의 생각에 잠길
가을도 오래 남지 않았지만
가슴으로 들어온
설악의 가을은
먼 곳을 돌고 돈다.
- 권영호,「설악의 가을」전문
이 시는 4연으로 선경후정의 구성법을 취하고 있다. 시인의 눈, 시인의 마음으로 체험한 설악의 가을 정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순수한 감성으로 그린 한 폭의 그림이다. 설악산은 강원도 양양군과 인제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국립 공원이다. 인제군 쪽을 외설악이라 하고, 양양군 쪽을 내설악이라 하며, 주봉은 대청봉인데 무엇보다도 가을 단풍이 압권이다.
시는 이렇게 어떤 대상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또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1연에서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고 시상을 열면서, 이어서 “설악의 당단풍은/ 한여름 태양을 빨아들여/ 안으로 성숙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차원 높은 상상력이 돋보인다. 2연에서는 설의법 표현으로 단풍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고 있으며, 3연에서는 “사연이 있으면/ 단풍도 달라 보이는 법”이라고 하였으니, 사물을 대하는 심성이 긍정적이고 청정무구하며 그 인식 또한 순수 서정으로 발현되고 있다. 깊은 시적 감수성으로 메타언어에 의한 시적 진술을 새로운 어법의 발성으로 내보이고 있는 형국이다. 시는 역시 이처럼 순연한 영혼이 서식하는 진실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사랑으로 찾아온 당신
내 마음 다 보여드립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사랑합니다
시들지 않는 마음
당신 앞에 내립니다
아니 내 앞에 내려놓습니다
가슴 아프게 해도
사랑했던 마음 때문에
상처 낸 사랑도 용서합니다
- 윤외기,「용서」전문
윤외기 시인의 「용서」는 4연 시를 각 3행씩으로 가지런히 표기하여 시각적 효과를 도모하면서, 각 연의 종결을 “보여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내려놓습니다”, “용서합니다” 등으로 경어체 서술형을 써서, 제목과 주제를 더욱 드러나게 하는 표현의 기교를 적용하고 있다.
용서한다는 것은 때로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내적 자유와 성장을 가져다주는 강력한 힘을 가진 개념이다. 용서는 누군가의 잘못이나 상처를 이해하고 그것을 넘어가는 과정으로, 보복이나 원망을 멈추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개인 간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과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만 베푸는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고 평온을 찾는 중요한 행위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얘기다. 간절함과 절실함이 감동을 주는 이 시를 읽고 또 읽으며 잠시 나의 부끄러운 삶의 발자취를 되돌아본다. 독자들은 이렇게 긍정적인 주제를 심화시키는 순도 높은 작품에 감동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잎끝이 뾰족해진 산세베리아를 본다
첫 만남에 둥글었던 잎이
사춘기 소녀처럼
반항끼 가득 잎끝에 날 세운다
관심, 사랑 보여주지만
삐툴어진 마음 돌릴 길 없어
말없이 쓰다듬다
마음 거울을 본 듯
심장이 찔려 저려온다
- 임문주,「반려식물」전문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화와 함께 반려동물, 반려식물에 대한 관심도가 상승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이 반려 동식물들은 우리 인간과 함께 생활해가면서 은연중 정서 안정과 힐링의 효과를 주며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는 이런 반려식물 또한 반려동물 못지않게 양육하는 가정이 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다.
4연 구성의 이 시에선 화자가 반려식물로 산세베리아를 구해 기르면서 겪는 과정이 녹아 있다. 첫 연에선 “잎끝이 뾰족해진 산세베리아를 본다”라며 시상을 열고 있으며, 처음엔 둥글었던 잎이 점점 자라면서 잎끝이 뾰족해지는 현상을 보고, 둘째 연에서 “사춘기 소녀처럼/ 반항끼 가득 잎끝에 날 세운다”라고 내심 실망감을 술회하였고, 셋째 연에서는 계속 “관심, 사랑 보여주지만/ 삐툴어진 마음 돌릴 길 없어/ 말없이 쓰다듬다”라는 감회를 표출하고 있다. 특히 작품의 마지막 연에선 “마음 거울을 본 듯/ 심장이 찔려 저려온다”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애초에 반려식물에서 즐겁고 행복한 느낌을 받고자 했던 기대는 살짝 어긋나는 형국이다. 그렇다! 반려식물이라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 다르기 마련이다. 산세베리아는 원래 외떡잎식물로 공기 정화 능력과 관리가 쉬운 특성으로 인기가 많은 실내 식물이라고 한다. 이 식물은 길쭉하고 두꺼운 잎이 특징이며, 빛이 부족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고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돼서 가정이나 사무실에서 키우기에 적합한 식물로 알려져 있지만, 다만, 자라면서 그 잎의 끝부분이 너무 뾰족해지는 모양새라면 누구라도 오히려 경계심을 갖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아
넌 참 좋겠다
세상을 맘껏 날 수 있으니
구름아
너는 더 좋지
편안히 바람에 실려 다니니
바람과 구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이좋게 날며 흘러간다
때로는 흰 뭉게구름으로
세찬 바람에 검은 먹구름으로
저마다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
- 임하영,「바람과 구름」전문
임하영 시인의 「바람과 구름」은 언뜻 쉽게 읽히면서도 ‘관계’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보게 하는 작품이다. 바람과 구름의 관계는 기상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두 요소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대기의 움직임과 날씨에 큰 영향을 미친다.
바람과 구름은 “저마다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이좋게 날며 흘러간다”라고 노래한 이 시의 여운에 머물며 우리는 잠시 큰 교훈을 얻게 된다.
이처럼 '관계'는 개인과 사회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정서적, 심리적, 그리고 실질적인 지원을 얻는다. 사람은 가까운 사람들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통해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며, 사랑과 우정, 가족 간의 유대는 스트레스를 줄이고 행복감을 높이는 주요 요인이 아니던가.
이렇게 바람과 구름의 관계처럼 좋은 관계는 사회적 지지를 제공하여 어려운 상황에서 힘을 내게 하고, 감정적인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할 것이다.
이 시는 효과적인 표현법을 다양하게 잘 적용하고 있다. “바람아”, “구름아”는 돈호법, 활유, 의인법 표현으로 다정다감하게 친근감도 주고 있으며, 삶의 길목에서 느끼는 정감의 폭이 넓어서 좋다. 불어오는 바람에서조차 무한한 행복을 느끼는 긍정의 마음이 느껴진다.
나는 바람에 맞서지 않고
이리저리 쓰러지며 흐느껴 울었다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울음을 멈추고 일어나
유유히 흐르는 강의 소리*를 얻기 시작했다
쓰러지고
일어나고
다시 바람이 불면 쓰러져서
강에게서 얻은 소리로 흐느껴 우는 것이다
- 정순영,「갈대」전문
정순영 시인의 서정시 「갈대」는 다양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편이다. ‘갈대’는 흔히 물가나 습지에서 자라는 다년생 식물로, 주로 강가, 호수, 늪지대 등에서 자라며, 높게 자란 갈대의 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많은 시와 노래에서 자연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시인은 예리한 감성의 소유자다. 눈에 보이는 물상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게 시인이다. 이 시는 참신한 시적 감각으로 관찰하고, 사색하고, 사유하고, 통찰을 겨냥한 속 깊은 노력이 인지된다. 의인화와 감정이입으로 주체와 객체를 합치하여 생물에 언어를 부여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긍정적으로 사물을 새롭게 인식하는 참신성이 있으며 남기는 여운이 길어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하는 끌림이 있다.
학교서 돌아오는 들길은
가을이 노랗게 핀 들길 앉아서
조용히 가을 바람 잡고
산들산들 쉬고 있는데
가을 언덕 아래 가을 밭에서
노란 참외가 넝쿨 속에서
노란 얼굴 내밀고 있다
친구야, 우리 노랗게 익은
저 참외 서리하여 먹을까
가을이 노랗게 핀 들길에 앉으면
정다운 친구랑 같이
참외 서리하여 먹은
옛 추억이 생각난다
지금은 이농한 아빠 따라
도시로 전학 간 그 친구
참외 서리한 그리운 추억이
지금도 생각 생생 나고 있을까
- 최만조, 「가을이 노랗게 핀 들길」전문
최만조 시인의 전련시 「가을이 노랗게 핀 들길」은 순수한 감성으로 그린 서정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요 사색의 계절이라고 했다. 도심에서는 쉽게 느껴보기 어려운 정경이지만 웬만한 시골의 가을은 다양한 결실들이 익어가고 단풍까지 물들어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이 작품은 다분히 향토적 성격의 서정시로 화자는 가을이 노랗게 핀 들길에 깃든 옛 추억을 진지하게 더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가을을 배경으로 한 이미지의 형상화가 잘 드러나고 있으며, 행간마다 품고 있는 그리움의 정서가 차분하고도 잔잔하게 독자의 가슴으로 흐른다.
이상으로 『문학 춘하추동』 제7호의 ‘시조 창작의 멋’ 란에 실린 시조 중에서 9편, ‘시 창작의 기쁨’ 란에 실린 시 작품 중에서 7편을 골라 살펴보았는데 각기 나름대로 색깔이 다른 작품들이었다.
시조는 4음보격의 율격시로서 교착어(부착어)인 우리말의 특성상 잣수율로서의 음률 구성에 유의하여야 하는데, 대체로 잘 준수하고 있어서 좋았다. 시조의 율격은 결국 이미지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것인데, 좋은 시조란 순수한 미의식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음률과 깊은 사상성, 그리고 신선한 이미지가 감동적으로 전달되는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한편의 좋은 시조는 독자를 감동시키고 생활에 적용되어 삶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또 삶의 가치를 보다 더 상승시켜 주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역시 생각이나 느낌을 운율(리듬) 있는 언어로 압축하여 나타낸 창작품이란 면에서는 시조와 다를 게 없지만, 형식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건 다 아는 바이다. 사실 좋은 시란 독자가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깊은 공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을 말하며 주제, 언어의 아름다움, 형식의 독창성, 감정의 진정성이 모두 어우러져야 좋은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비유나 상징을 통해 독자가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하며 상투적인 표현을 지양하고,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담아내야 한다. 결국 좋은 시는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주며, 독자가 자신의 삶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