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기적도 찾는 자에게 온다 Date 2014.3.2 Text Mk10,46-52
(46)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1. “일본, 이대로 가면 전 세계적으로 고립” 나카쓰카 아키라 명예교수가 한 말입니다. 세계 2차 대전의 두 전범국 독일과 일본의 행보는 너무도 달라서 놀랍습니다. 독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철저히 나치 독일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하여 사죄하고, 다시는 인류에 대하여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려고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더욱 철저하게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독일은 직접 피해를 입었던 나라와 민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의 위상 또한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과거 자신들의 범죄를 부정하고 전범자들을 미화하며 애국자로 존경할 것을 교과서를 통해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직접 피해 당사국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일본은 욕을 얻어먹고 있습니다. 경제 때문에 일본과 교류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 ‘나쁜 놈들’이라고 욕을 하고 있는 형편이니.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일본은 곧 세계적 왕따가 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3.1운동은 러시아와 싸워 이기고 중국과도 싸워 이긴 막강한 일본의 군사력 앞에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긴지 10년이 되는 해에 일어났습니다. 쇠약한 국력으로는 일본에 대항하여 싸울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일어난 비폭력적 만세운동은 꺼져가던 민족정신의 불씨를 살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에서 독립을 선언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거의 1년간이나 계속된 만세운동은 1천524회의 집회에 1천만명이 넘는 수자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삼일만세운동은 일제에 적극 협력하던 친일파들의 뺀 전 국민을 독립운동에 나서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7천500여명이 살해당했으며, 1만5천900여명이 부상당했고, 4만6천900여명이 체포, 투옥되었으며, 47개의 교회당과 2개의 학교, 그리고 715채의 한국인 민가가 소각당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마침내 1945년 해방이 되는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 삼일만세운동입니다.
누적관객수 1,136만7,698명을 기록한 영화 변호인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지만 계란은 부화하여 바위를 타고 넘는다.’ 전혀 될 것 같지 않던 독립이요, 국가 수복이었지만 바위 같은 일제의 힘에 계란 같던 삼일만세운동이 부화하여 타고 넘어가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아멘.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독립선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했는데 정말 명문입니다. 여러분도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면합니다. 33인에 불과한 지도자들이 서명 날인한 독립선언서 한 장이 잠들어 있던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포기하고 있었던 독립에의 희망을 겨레의 가슴마다 품게 하는 기적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은 기적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할 도리를 다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불씨로 삼아 기적의 불꽃을 일으킵니다.
2. 제가 가끔 인용하는 성구이지요. 잠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성도는 단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기적은 곧 일어납니다.
요6장에 보면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 얘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에 반찬으로 생선 다섯 마리가 든 도시락 하나로 어른 남자만 5천명 이상이 먹고 열 두 광주리에 풍성하게 남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의 불씨는 한 어린 아이의 도시락 하나였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꿈, 믿음, 희망, 사랑, 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기적의 씨앗들입니다.(조정민, ‘사람이 선물이다’) 꿈은 꿈을 부르고 믿음은 믿음을 더하고, 희망은 희망을 낳으며, 사랑은 허물을 덮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적을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만 기적의 불씨는 될 수 있습니다. 기적의 불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바디매오를 만납니다. 그는 거리에 앉아 구걸하면서 오고가는 사람들로부터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예수님이 바로 자기가 지금 있는 여기를 지나간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소리지르며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호소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꾸짖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하는 그들 어머니의 말끝에, 섬기는 자로 오신 자신을 설명하면서, 너희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여전히 억눌린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섬김의 뜻을 이해 못합니다.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더욱 열심히 소리지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부르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겉옷까지 내어 버리고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이불이며 전 재산입니다. 주님 만날 기회를 붙잡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또 바디매오는 뛰어 일어났습니다. 앞도 안 보이는 사람이 어찌 그리 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의 노력이 육체의 질병과 영혼의 질병이 모두 처치되는 기적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무엇이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멈추어 서신 예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게 하였습니까? 주님을 '멈추어 서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머물러 서신 그 분은 무엇을 하셨는지 살펴보면서 그 은혜와 복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간절함입니다. 그는 가난한 소경 거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자는 바로 디매오의 아들로 소경이며 거지인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길에 앉아 구걸을 하는 가난한 자로서 아주 비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천한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의 삶에는 소망과 용기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육신적으로는 소경이 아니고, 부유하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바디매오보다 더 가난한 소경의 상태는 아닙니까? 그분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가난과 병으로 애쓰며, 슬픔과 상처로 인해 고통당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절박함입니다. 가장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는 바디매오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부나 명예나 권력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원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허황된 욕심으로 잘못 구했던 요한과 야고보 (막10:37)와는 달리 가장 근본적이며 합당하고 절실한 문제를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떠 보게 되는 것이나, 죄인이 용서함을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성도가 가지기에 합당한 소원을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셋째, ‘부르짖음’입니다. 문제 해결을 휘하여 긍휼을 부르짖는 그에게 (47절) 많은 사람들은 꾸짖음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에 개의치 않고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마침내 그 소리가 예수의 귀에 들려지게 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절한 소망을 가진 자는 세상적인 어떤 방해나 꾸짖음에 수치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무익한 환경이나 장애에 쉽게 지배를 받는 자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넷째, 큰 믿음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옵니다. (롬10:17) 바디매오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으나 들음으로써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이 부르실 때에 지금까지는 자신에게 꼭 필요했지만 다시넌 필요치 않는 겉옷, 즉 예수께로 가까이 접근하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미련없이 벗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감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주님의 은혜를 보겠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어 서셨습니다. 예수는 무리 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위하여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셨던 주님은 말씀듣기를 기다리는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의 간구에 관심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긍휼을 간구하는 자의 소원을 외면치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갈급함을 주님께 아뢰기에 주저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소원을 물으십니다. 머물러 서신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51절)그의 소원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의 확실한 믿음의 고백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십니다. 또한 그것을 이루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진실한 신앙의 고백과 간절한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에 대답할 합당한 소원을 간직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의 소원을 들으신 주님은 그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바디매오를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환란으로 인해 절망 중에 있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늘도 그 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짐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기꺼이 그의 뒤를 좇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