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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마음공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 저마다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시인 볜즈린은 “달팽이처럼 집을 등에 업고 살고 있다”고 했다. 집뿐만 아니라 일, 책임, 명예, 부, 사랑, 미움, 권력 등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이 집, 일, 부, 권력, 사랑, 미움 등 수많은 것들로 이루어진 단단한 틀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사는 것이 감옥살이 같다. 수갑과 족쇄를 차고 춤을 춘다. 누구나 이 감옥에서 도망치고 싶어 족쇄를 풀 열쇠를 찾고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반야심경이 내놓은 해답은 이것이다
“해답은 없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은 오직 하나 “해답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해답이 있다고 믿고 그 해답을 찾아 헤매느라 고통받고 있다.
반야심경은 이런 우리에게 생각을 바꾸라고 말한다. 어딘가에 의지하려 하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바로 이 순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라고 말이다.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똑바로 볼 수 있어야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진정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다
반야심경이 훌륭한 이유는 바로 단 260자만으로 중생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답한다는 점에 있다.
부탄의 라마승인 종사르 켄체 린포체는 기계가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윤회이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반야심경은 중생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기본적인 방법은 바로 ‘어지럽히는 것’이다. 반야심경 중 유명한 구절인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바로 어지럽히는 것, 즉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를 순식간에 깨뜨리는 것이다. 모든 유형의 사물, 만질 수 있는 모든 사물,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사물이 한마디로 인해서 갑자기 의심스러워진다.
‘공’을 ‘없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다’라는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우리 머릿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는 인식이 뒤엎어진다. 사물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깊이 들어가면 ‘공’을 ‘없다’ 또는 ‘텅 비다’로 해석하는 것이 부처의 본래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색즉시공의 ‘공’은 없다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사물이 그저 인연에 따라 만나고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어서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주식이 ‘공’이라고 하면 주식은 존재하지만 인연에 따라 모이는 존재라는 의미다. 결혼, 사랑, 일 등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3D영화를 볼 때 특수 안경을 쓰면 영화 속 배우들이 내 눈앞으로 달려드는 것 같지만 손을 뻗어 보면 만져지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특별한 관점에서 해답을 제시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그 문제에 끌려가다가 점점 늪에 빠져 자유롭게 걸을 수 없게 된다. 주식 투자를 할 때도 주식이 사람을 끌고 가고, 직장을 구할 때도 일자리가 우리를 끌고 간다
그런데 이때 반야심경에서 주식도 일자리도 모두 공이라고 일깨워주면,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시야에서 주식과 일자리를 바라보게 된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주식과 일자리를 바라보면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나라 때 협산선회 선사는 “중생은 색(色만) 보고 심(心)은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심의 경지에 도달하면 그저 마음 하나만 바꿀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진다
한산의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마음은 가을 달 같고 푸른 연못은 티 없이 맑구나. 어느 것도 비교할 수 없는데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은 번화하면서도 또 황량하다. 가을 달처럼 맑은 사람들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또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진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온종일 허영심에 가득 차 속세에서 말하는 성공과 행복을 좇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실패하고 불행해진다
반야심경은 이른바 게임의 규칙, 더 나아가 이 세상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이 아니며, 대부분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의식 속에 가라앉은 습성일 뿐임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언제든 그것을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그 속에 매몰되어 있음을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현실이란 우리의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눈앞에 맞닥뜨린 현실은 바로 자신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밖에 강하고 큰 ‘현실’이 있다고 착각하고 성장을 ‘현실’과 타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이 번뇌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생들을 수없이 만들어낸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단지 진정한 자기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여정에 들어서야만 우리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고, 승패의 올가미에서 벗아나고 고락의 순환을 뛰어넘어 평정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사라자’에게 어떻게 하면 반야(오묘한 지혜)를 이용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여”, “비추어 보고”,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게 된” 후에, 마지막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는 주문을 암송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바로 고통을 벗어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반야심경은 260자밖에 되지 않지만, 600권에 달하는 반야바라밀경의 핵심을 응축해서 담고 있다. 반야심경은 깨달음을 얻고 최고의 지혜에 오를 수 있는 필수적인 방법이자 속세의 고통을 초월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길이다
(반야심경 전문)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無罣碍故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해석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보고 고통과 액운이 넘어서게 된다
사리자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다
사리자여, 모든 법은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고, 집, 멸, 도도 없고, 지혜도 얻음도 없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하고 밝은 주문이며, 위가 없는 주문이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반야바라밀다주를 말할 것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1장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반야심경의 지혜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인생이 편안해지는 6가지 길
“현실을 직시해”
우리가 자라면서 수없이 듣는 이 말이 아름다운 인생을 짓밟고 아름다운 것들을 망가뜨린다.
어떻게 해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떠나는 것이다. 복잡한 인간관계를 떠나 드높은 대자연 속으로 숨어 버리는 것이다. 예츠의 시처럼 말이다
중국의 도연명과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모두 이런 마음으로 생활했다. 그들은 사회의 현실이 자신의 존엄과 본성을 해치는 것을 거부하며 관직을 버리고 도시를 떠나 전원에 홀로 파묻혀 자연적인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처는 이런 은거나 고행을 해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탈은 일상생활 속에서 해탈하는 것이다. “번뇌가 곧 보리”라고 했다. 이것은 불교 사상의 적극적인 면을 부여주는 개념이다
인생의 고통과 재앙을 회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맞서서 관찰하고 그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깨달아 해탈한다는 것이다
현장법사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라고만 했을 뿐 구체적인 장소를 밝히지 않았다. 관세음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하는 장소와 시간이 특정하게 정해지지 않으므로 이른 아침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켜 줄 때가 될 수도 있고, 바이어와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때가 될 수도 있다.
때와 장소가 어디든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즉시 현실을 초월하고 모든 고통과 액운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라는 심오한 방법을 수행할 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해탈했다는 뜻이다
우선‘행하다(行)’라는 의미를 보자. ‘행하다’란 ‘수행’을 뜻한다. 인생을 수행으로 여겨야만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을 수행으로 보면 우리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현실에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다
관자재보살을 보라. 현실 속에 똑바로 앉아서 깊은 수행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현실의 구속을 뛰어넘지 않았는가. 몸은 현실 속에 있지만 마음은 현실을 벗어났다
‘깊다(深)’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gambbiran이라고 하는데, ‘심오하다’는 뜻도 있고 여자의 질과 탯줄 사이 부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부위는 생명을 잉태하는 곳으로 근본, 처음을 상징한다. 또 반야의 수행이 깊은 것과 얕은 것 두 가지가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떨치고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알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얕은 차원의 반야이고,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리의 본체를 발견하여 자신도 깨달음을 얻고 남도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은 깊은 차원의 반야이다.
또 ‘깊다’는 말은 관자재보살이 수행한 반야바라밀다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을 근본으로 안내하는 철저한 수행임을 뜻하기도 한다. 철저한 수행을 해야만 진정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들이 “출가가 곧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출가란 바로 우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 즉 우리의 진실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우리가 이 환상을 꿰뚫어보려면 반야바라밀다를 이용해야 한다. 당나라 때 법장법사는 반야바라밀다를 이렇게 해석했다
“반야는 지혜라는 뜻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정신적인 깨달음이자 사물 본연에 대한 비범한 깨달음이다. 바라밀다는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기묘한 반야의 지혜로 생사를 초월해 진실한 공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반야는 체(體)이고 바라밀다는 용(用)이다”
초기 불교에서의 반야의 수행은 계(戒), 정(定), 혜(慧)였다. 계, 정, 혜 세 가지 방법을 통해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 해탈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반야의 육도로 확대되었고, 이를 피안에 도달할 수 있는 6가지 방법이라고 하여 ‘육바라밀’이라고 불렀다
반야바라밀은 육도 중 6번째다. 따라서 반야심경 첫 구절에서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라고 한 것은 육도의 수행을 통해 현실의 환상에서 벗어나 오온의 공함을 비추어 볼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2. ‘보시’로 들여다보는 타인의 슬픔
달마는 보시를 수행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마음의 때를 없애고 중생을 도울 수 있으며, 모습(相)을 취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보시에는 재보시, 법보시, 무외보시가 있다. 재보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자기 재물을 주는 것이고, 법보시는 불법을 전파하는 것이며, 무외보시는 남에게 용기를 주고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보시라는 행위가 우리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생 동안 우리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하지만 보시를 하면 자신이 아닌 타인이 중심이 되어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3. 나쁜 일은 하지 말고 좋은 일을 하라는 ‘지계’
지계(持戒)는 간단히 말해서 나쁜 일을 하나도 하지 않고 좋은 일은 많이 하는 것이다. 불교에 오계가 있는데, 살생하지 말 것, 도둑질 하지 말 것, 음탕함을 행하지 말 것, 헛된 말을 하지 말 것, 술을 마시지 말 것이다
(증일아함경)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살계:살인하지 마라
-불투도계:도적질하지 마라
-불사음계:음란하지 마라
-불망어계:거짓말하지 마라
-불음주계:술마시지 마라
이 오계가 나중에 ‘십계(十戒)’로 늘어났다. 이를 ‘십선업(十善業)’이라고도 부른다
1)살생하지 마라
2)도둑질하지 마라
3)음란하지 마라
4)헛된 말을 하지 마라
5)이간질 하지 마라
6)험한 말을 하지 마라
7)아첨하지 않는 것
8)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
9)화내지 않는 것
10)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몸’의 범주에 들어간다.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는 ‘입’에 관한 것이다. 여덟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계는 몸과 입,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몸과 입, 마음이 깨끗하면 현실도 깨끗해진다.
불교의 수행에서 계는 기본 바탕이며, 계가 없으면 다른 수행은 무의미해진다. 부처가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계의 수행은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한다. 우리 자신이 계율을 엄수하면 자기도 모르게 현실도 바뀌게 된다. 설사 아주 작은 계율이라도 예상치 못한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4. 어떤 순간에도 분노하지 않는 ‘인욕’의 자세
인욕(忍辱)이란 무엇인가? (대지도론)제6권을 보면 “중생들이 갖가지 사악한 마음을 가해도 성내지 않고 갖가지로 공경하고 공양해도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인욕의 핵심은 ‘참는 것’이 아니라 ‘모욕’이 닥쳤을 때 ‘분노와 증오가 생기지 않는 것’에 있다.
어떤 이가 부처를 욕했다. 하지만 부처는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한 어투로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상대가 받지 않는다면 그 선물은 누구의 것인가?”
그가 대답했다
“물론 내 것이지요”
부처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 그대가 내게 한 욕을 내가 받지 않는다면 그 역시 그대의 것이네”
부처는 누가 자신을 욕하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다. 자신을 욕한 사람에게 남을 욕하면 악한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음을 가르쳐 주며 업을 짓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다
5. 더 나은 나로 안내하는 ‘정진’
정(精)은 ‘순수하다’는 뜻이고, 진(進)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쉼 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정진은 위로 향하는 힘, 좋아지려는 힘을 의미한다. 그 반대는 나태함, 게으름, 타락이다
정진의 의미는 잡념을 없애는 데 있다. 인생은 짧아서 생명을 순수하게 하는 데 시간을 쏟기에도 부족하다. 생명을 순수하게 하는 것은 바로 집중이다. 집중하면 현실의 잡념을 막아낼 수 있다
일본의 무사도가 근본적인 목적은 불법과 완전히 다르지만 정진하는 방법은 불교와 매우 비슷하다. 무사도의 핵심은 오로지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만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어떻게 살 것인지 생각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정반대다) 이로 인해 극단적인 인생관이 생겨났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수양서인 (히가쿠레 기키가키)를 보면 “일념이 모여서 사람의 일생이 된다. 이 점을 안다면 온종일 다른 일로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고 마음으로 다른 것을 추구하지도 않게 된다. 마음에 다른 생각을 두지 않고 오로지 자기 본심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보내면 된다”
6. 마음을 조절해 도를 이루는 ‘선정’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dhyana를 음역한 것으로 ‘차분히 생각한다’라는 뜻이고, 정(定)은 산스크리트어의 samadhi를 음역한 것으로 산만하지 않고 하나에만 집중한다는 의미다.
선은 어떤 사물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이고, 정은 깊은 생각을 거쳐 도달하는 순수한 상태를 뜻한다. 한마디로 선정이란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부처는 선정의 상태에서 도를 이루었다. 경서의 기록에 따르면, 부처가 왕궁을 떠나 곳곳을 떠돌며 해탈의 방법을 구하던 중 니련강 기슭의 한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의 자세로 앉아 “궁극적인 해탈의 지혜를 깨달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노라”라고 말했다
부처는 선정을 통해 성불했다. 선정에는 일정한 형식이 있는데 가장 흔한 것이 참선 또는 좌선이다.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선이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정이다. 선을 통해 수행하려는 것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갖가지 현실에서 벗어나는 법이고, 정을 통해 수행하려는 것은 자기 마음을 안정시켜 어지럽지 않게 하는 법이다
“외부의 모습에 집착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외부의 모습을 없애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7. 고통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지혜 ‘반야’
반야는 지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혜가 아니라 속세를 벗어난 지혜다. (중니가야)에서 부처가 선정한 후에 제1선, 제2선, 제3선, 제4선에 들은 뒤‘삼지(三智)’로 들어갔다고 했는데, 이 삼지가 바로 반야이며 속세를 벗어난 지혜이자 번뇌를 철저히 떨쳐낸 지혜다
지금까지 소개한 육도의 방법이 생각의 전환을 유도할 수 있다. 생각을 바꾸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과 현실의 관계가 바뀐다. 우선 ‘현실을 바꾸고 싶다’는 헛된 생각에서 빠져나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현실이 우리 몸 밖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의 투사된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의 현실은 그저 각자의 생각과 행동, 감정 등이 종합적으로 투사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다.
나를 둘러싼 현실을 외부의 힘으로 여기면 현실을 바꾸려고 몸부림치다가 오히려 자신이 바뀐다. 반면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정말로 현실을 변화시키게 된다
2장 단단한 마음을 위해 꼭 알아야 할 진실
“사라지여,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 상, 행, 식도 그러하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5가지 단서
세상 모든 것,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뛰쳐나와야 한다.
이때 가장 기본이 되는 철학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이다
이 세 가지 문제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첫 번째 “나는 누구인가?”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 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이 바로 자신이고,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 역시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따라 분주하게 뛰어다니기도 하고 남의 감정에 끌려 뛰어다니기도 한다
부처는 ‘아집’을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자아’의 의식에 집착하지 말고, ‘타인’과 대립되는 자아의식에 집착하지 말며, 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자아의식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발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
이 말은 생각하고 관찰하고 진지하게 수행할수록 불변의 자아는 없으며, 시시각각 바뀌고 있고, 또 실재하는 사물도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본다는 것은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매우 특별한 방식이다. 부처는 이 방식이 사람을 진정으로 해탈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5가지 집합으로 생명과 자아를 해석하다
오온이란? 오온의 온(蘊)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모임’, ‘집합’을 의미하고 ‘줄기’라는 뜻도 있다.
부처는 오온이라는 개념을 통해 ‘생명’의 상태를 분석하고 ‘자아’가 어떻게 운행하는지 분석했다. 부처는 생명이나 인류의 자아는 5가지 집합일뿐이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나’를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누었다. 본능은 배고픔, 성욕 같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이며 쾌락의 원칙을 따른다. 자아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현실의 원칙을 따른다. 초자아는 이상적인 자아이며 도덕 원칙을 따른다.
프로이트는 자아가 욕망의 나, 현실의 나, 도덕의 나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세 가지 사이에 균형이 깨지면 스트레스가 생겨나고 이것이 정신병이나 심리적인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부처의 ‘집합’에는 그보다 더 깊고 넓은 의미가 있다. 부처는 5가지 집합을 통해 우리의 생명과 자아를 해석했다
첫 번째 집합, 색온
두 번째 집합, 수온(受蘊)
세 번째 집합, 상온(想蘊)
네 번째 집합, 행온(行蘊)
다섯 번째 집합, 식온(識蘊)
생명의 모든 것이 이런 모습이기도 하고 저런 모습이기도 한 것은 이 5가지 요소의 집합 때문이다. 부처의 진정한 통찰력은 이 5가지 요소의 집합 가운데 고정되어 변치 않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5가지 요소가 다 모이면 ‘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데 있다
‘공’은 불교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다. 출가를 ‘공문(空門)’으로 들어간다고 표현하곤 한다. 공은 불교의 핵심이다
‘공’은 무엇일까? 초기 불경에서는 아무도 없고 한적한 곳에 가서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곳을 ‘아란야’라고 한다.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장소, 텅 빈 방을 뜻하며 사람의 영혼이 오염되지 않은 것을 상징한다
공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무아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비롯해 모든 생명이 실제로 존재하는 주체가 없으며 인연에 따라 생겼다가 인연에 따라 사라진다는 것이다.
2.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라
오온 중 첫 번째는 ‘색온’이다. 원시불교에서 오온의 색은 우리 자신의 몸을 의미했다. 세월이 흐르며 범위가 확대되어 사람의 육신 전체, 즉 눈, 코, 귀, 혀, 내장 등을 모두 색이라고 하게 되었다
색의 기본적인 의미는 눈, 귀, 코, 혀, 몸 이 5개의 기본적인 신체 기관, 그리고 5개의 신체 기관에 대응되는 오진, 즉 색, 소리, 냄새, 맛, 촉감이다. 이것들이 색온의 기본요소다.
(잡아함경)을 보면 부처는 색온을 ‘사대(四大)’가 인연에 따라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대란 물, 바람, 불, 흙이다
지금은 색의 개념이 더 확대되어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물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커다란 환상이 있다. 첫째, 자기 몸이 자신이라는 것이고, 둘째, 눈에 보이는 사물은 진실한 존재라는 것이다.
자기 몸을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목적은 이 몸을 안락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 되고, 눈에 보이는 사물을 진실한 존재로 여기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세상 전부라고 믿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이 대부분 자기 몸과 환경 안에 갇혀 있게 된다
우리가 겪는 수많은 고통과 몸부림, 속박은 모두 이런 환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반야심경은 “색은 공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다. 부처는 우리가 제 육신의 안락을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우리 귓가에 대고 “이것은 너희 몸이 아니다!”라고 일갈한다
부처는 이 몸이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면 이 몸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할 리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시시때때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이 몸이 어떻게 자신일 수 있겠는가? 나 자신이 어떻게 나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 몸은 시시각각 노쇠해 가고 있다. 이 몸은 수많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세포가 각각 하나의 세계다. 세포가 분해되면 전자가 된다. 전자와 전자의 거리는 우리의 우주와 다른 우주 사이의 거리와 같다고 한다. 몸속에 수많은 우주가 들어있는 것이다
이 몸 중 어떤 부분이 나일까? 이 몸은 그저 인연에 따라 조합된 것이고, 수시로 변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죽어서 먼지가 되어 흙 속에 묻히거나 공기 중에서 흩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순전한 환상이다. 이 몸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색은 끊임없이 변화하다가 결국에는 죽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또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미인에게 정신이 팔려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부처가 우리 귓가에 대고 “저것은 미인이 아니라 해골이다!”라고 호통을 치고, 우리가 명예나 지위에 도취되어 있을 때 부처가 우리 귓가에 대고 “이것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가 눈앞에 있는 형형색색의 것들에 푹 빠져 끌려가고 있을 때 부처가 한마디 호통으로 우리를 잡아당겨 멈추게 하고 습관적으로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부처가 말한 색즉시공이란 우리를 향해 눈에 보이는 것에 미혹되지 말라고 외치는 경고다. 존재는 눈에 보이는 사물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도 있다. 아인슈타인도 “눈에 보이는 것은 환상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진실한 세계다”라고 했다
부처의 심오한 통찰력은 그가 보이는 상태와 보이지 않는 상태를 별개가 아닌 동일한 상태라고 생각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관자재보살의 입을 통해 사라자에게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색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색이 공 이외의 다른 사물이 아니고, 공도 색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 다음 부처는 반야심경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도 중요한 말을 했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존재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 무한하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아주 많다. 손, 발, 아파트, 나무, 강 등 수없이 많은 것들이 있다. 부처는 이것들을 색이라고 했다. 이 색은 물질이 아니다
부처의 논리에 따르면, 물질과 정신도 별개가 아니다. 부처는 색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만 했다. 우리는 오온을 괴롭힐 대로 괴롭히고 난 뒤에야 색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물질도 정신도 아니고 바로 오온이다
부처가 말한 색즉시공이란 눈에 보이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눈앞의 것들을 보면서 그것이 수시로 바뀐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는 것이다
색즉시공이라는 부처의 일갈을 귀담아 듣는다면, 우리는 자아의 비좁은 세상 속에 얽매여 있지 않을 수 있다
3. 고통도 즐거움도 순간순간 변한다
오온 중 두 번째는 ‘수온’이다
수(受)는 감각이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아픈 것처럼 외부에 대한 몸의 감각이 바로 수다. 부처는 수온을 고통스러운 것, 즐거운 것, 고통스럽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 세 가지로 나누었다
숨을 쉬고 살아가는 매 순간에 우리의 눈, 코, 귀, 혀, 몸은 시시각각 외부세계를 느끼고 괴로움과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감정이 계속 순환된다
우리는 이렇게 고통이나 즐거움이나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수가 공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 말은 우리가 빠져 있는 환상을 깨뜨려준다.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착각한다. 지금 이 순간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내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관자재보살의 말은 내가 느끼기 때문에 비로소 그 시원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합 때문에 그 시원함이 생겨난 것이라는 의미다
에어컨이 없거나 고장이 났거나 아니면 바깥에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지 않는다면, 에어컨이 있는 방 안에 있는 내가 마침 감기에 걸렸다면, ‘나’가 느끼는 시원함은 곧 사라질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감정은 ‘나’라는 주체로 인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떤 인연의 조합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이 조합에 변화가 생기면, 설사 아주 작고 사소한 변화라고 해도 그 느낌이 사라져버린다
사실 인연의 조합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그러므로 느낌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불변하는 것도 아니다. 단 1초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몸과 외부 세계의 상태가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는 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어떤 느낌이든 생겨났다가 곧 사라지기 때문에 거의 생겨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인연의 조합이 변하면 한 가지 느낌이 사라지고 또 다른 느낌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공은 수와 다르지 않다. 인연이 생겨나면 수도 생겨나므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무언가 일어난 것과 같다
수가 공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가 무언가를 느낄 때 그것이 불변의 느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고 있다. 또 공도 수와 다르지 않다는 말은 우리에게 생겨난 느낌이 헛된 것이며 그것이 인연에 따라 시시각각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일깨워주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발생한 것도 발생하지 않은 것이고 발생하지 않은 것도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느낌은 진짜도 가짜도 아니고 존재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의 표현법으로 말하자면 “수는 곧 공이요, 공은 곧 수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치를 안다면 어떤 느낌이 들더라도 그 느낌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4. 모든 개념을 의심하고 의심하라
오온 중 세 번째는 상온이다.
상(想)이란 느끼는 대상에 대해 형성되는 개념이다. 미녀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수다. 그 느낌에 뒤이어 “저 여자는 미인이다”라는 판단이 생겨난다. 이런 개념이 바로 상이 된다. 햇볕 아래에서 덥다고 느끼는 것은 수다. 그런 다음“여름이 왔구나”라고 생각한다. 덥다는 느낌으로 여름이 왔다는 판단이 생기는 것, 이것이 바로 상이다
상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첫째, 우리가 외부의 사물을 느낀 다음에 개념이 생겨난다. 바람을 예로 들면, 처음에는 움직이는 무언가가 우리 몸으로 불어오는 느낌뿐이지만 거기서 개념이 생겨나고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둘째, 우리에게 먼저 개념이 생겨난 뒤에 현실에서 그것이 증명된다. 도시의 아이들은 양이라는 개념이 먼저 생긴 뒤에 어느 날 실제로 양을 보고 그것이 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몸(색)이 있으면 시시각각 수가 생겨나고 또 시시각각 상이 생겨난다. 우리는 이처럼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가 바로 ‘나’라고 믿어 의심치않는다
반야심경에서는 상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도 상과 다르지 않으며, 상은 곧 공이고 공은 곧 상이라고 했다. 상온에서 생겨난 개념도 인연의 조합이 변함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어떤 개념이든 존재의 풍부함과 복잡함을 온전히 내포할 수는 없다
개념에 집착하면 자신을 어떤 인위적인 환영 속에 가두게 된다. 부처는 우리에게 모든 개념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개념에 매몰되지 말며 존재를 향해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말했다
개념은 그저 기호에 불과하다. 이정표나 방향 표지판처럼 그저 어떤 쪽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 앞에서 멈춰 서 있으면 목적지에 닿을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기호에 미혹되어 있다.
5.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통제하라
오온 중 네 번째는 행온이다. 행(行)이란 걷는다는 뜻이 아니고 행동한다는 뜻과도 조금은 다르다. 간단히 말하면, 행온이란 업을 지을 때의 심리적 활동이다. 이것에 반드시 행위가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누가 실수로 내 발을 밟았을 때 마음속에서 분노가 생긴다면 그것도 이미 행이다. 화가 나는 것만으로도 업을 짓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타인의 불행을 보고 마음속에 연민이 생긴다면 그것도 역시 행이다. 연민이 선업을 짓기 때문이다
미인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수이고, 속으로 ‘와, 아름답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이며, 그런 뒤에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말을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면 그것이 행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행이란 ‘아직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행은 지금까지 쌓아온 업력을 의미한다. 행온의 작용은 업을 짓는 것이다
업력은 불교의 기본 개념이다. 업력은 산스크리트어로 karma이고, karma중 kar는 ‘하다, 행하다’라는 뜻이다. 업력의 개념은 인과응보 관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운명에 관한 불교의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학설이다
우선 업력은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어떤 마음과 행위일까? 바로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다. 신업이란 주로 죽이고 훔치고 음탕함을 행하는 것이고, 구업이란 이간질, 거짓말, 아첨이고, 의업이란 욕심, 분노, 어리석음이다
인과의 순환과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신정(身淨), 구정(口淨), 의정(意淨)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 말, 생각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업력에는 공업(共業)과 불공업(不共業)이 있다. 불공업을 별업(別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공업은 집단의 행위가 집단 전체에 공동의 결과를 초래한 것을 뜻한다. 지구상의 생물 전체는 공동의 업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지구에 함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불공업은 개체 단독의 업력이다. 어째서 사람의 생김새는 각기 다를까? 어째서 사람의 운명은 천차만별일까? 그것은 모두 각자의 업력 때문이다
업력은 업의 힘을 뜻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행온의 힘이다. 업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일을 하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동력이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일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행온을 영어로 ‘충동’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행온을 쇼펜하우어가 말한 욕망과 나란히 놓기도 한다. 모두 행온에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때 무언가를 하려는 그 사람을 ‘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사실 실재하는 ‘나’가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억겁을 거쳐 쌓인 업력이 모여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6. 분별하려는 마음을 경계하라
오온 중 마지막은 ‘식온’이다. 식온은 팔식(八識)으로 나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이다.
팔식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심(心)이다. 이것들이 모이면 여러 현상을 일으키고 인지와 판단을 만들어낸다. 둘째는 의(意)다. 의는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생기면 의는 한 가지 ‘나’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을 의라고 한다. 셋째는 식(識)이다. 이것은 외부 환경을 분별하고 지각할 수 있는 마음이다
반야심경에서 “식은 공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관자재보살은 이 말을 통해 우리의 환상을 깨뜨리려고 했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그 ‘나’가 바로 자신이라는 환상 말이다
관자재보살은 현재 움직이고 있는 의식은 자신의 두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아주 복잡한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부처는 이 인연의 시작이 우주가 처음 생겨난 그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우주의 형성도 어떤 인연이 조합된 것일 뿐이다. 시시각각 하나의 우주가 사라지고 또 다른 우주가 탄생한다
식은 곧 공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식이 생겨나는 순간 이 의식을 만들어 낸 인연을 생각하고, 그 인연에 아주 작은 변화라도 있으면 이 의식이 곧 사라질 것임을 알아야 한다.
7. 오온의 깨달음으로 진정한 자아를 만나다
인도의 아주 오래된 철학서 (우파니샤드)에서부터 현대의 심리학까지 모두 자아의 진정한 정의를 찾고자 했다.
(우파니샤드)를 보면 오장설(五臟設)이 나온다. 자아의 생명을 5가지로 나눈 것으로, 첫째는 음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나이고, 둘째는 생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나, 셋째는 지각하는 나, 넷째는 이성을 가진 나, 다섯째는 즐거워하는 나이다. 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 층층이 차원이 올라가 마지막에 있는 즐거워하는 나가 바로 진정한 나라고 했다
부처는 오온 속에서는 ‘나’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나의 존재란 오온의 인연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며 고정된 주체가 움직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저 갖가지 원인과 인연이 서로 작용한 것이다
부처는 우리가 괴로워하고 번민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오온’을 실제 사물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들이 실제로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몸이 실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몸에 집착하고, 또 의식이 실제로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갖가지 의식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이른바 ‘자아’는 끊임없이 노쇠해 가고 있는 몸과 수시로 바뀌는 의식에 복종한다. 이런 ‘자아’는 헛된 것이다
부처는 오온에 집착하는 자아는 환상이자 가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종교나 철학처럼 진실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부처는 “오온은 모두 공이다”라는 분석을 통해 우리에게 실제로 존재하는 ‘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연에 따라 운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은 인연 때문이다. 이 인연은 지금 조합되어 나타난 것이기도 하고, 오래 쌓여서 만들어진 업력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며, 또 깊이 숨어 있는 잠재의식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다
부처는 자아에 관한 해답을 추구하지 말라고 일깨워주었다. “자아란 무엇인가?”는 영원히 해답이 없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자신을 그저 각자(覺者), 즉 ‘깨달은 자’일뿐이라고 했다
“오온은 모두 공이다”라는 개념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온이 모두 공이라는 말은 주재자가 없고, 운명으로 정해진 것도 없으며, 신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것인 인연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인연에 대해 아는 것이다
“누구든 진정으로 해야 하는 일은 오직 하나, 바로 자아를 찾는 것이다. 진정한 자아가 시인인지 미치광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기 운명을 찾은 다음 마음속으로 평생 그것을 자키며 살아야 한다. 그 외의 다른 길은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외의 다른 길은 모두 인간의 도피 방식이다”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불변의 실체를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인연에 대한 지각을 통해 자기 운명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이 세상에 오면 저마다 독특한 인연을 갖게 되고, 자기만의 독특한 길을 걷게 된다
부처가 “어째서 자신을 찾지 않는가?”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자신’이란 자신의 독특한 운명과 독특한 길을 의미한다.
부처는 오온에 대한 분석을 통해 실제로 존재하는 주체가 없으며, 단지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것뿐임을 설명했다. 인연의 이어짐은 원래 있던 요소가 연속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원래의 요소들이 조합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한다
흔히들 불가의 생활 태도를 인연에 따라 산다고 말한다. 인연에 따른다는 것은 저항하지도 순종하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저 인연이 찾아오면 담담하게 맞이하고 인연의 생겨남과 사라짐에 따라 관찰하고 지각하며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3장 인생의 비밀은 일찍 알수록 좋다
유한한 육체로 무한한 세계를 인식하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에 나오는 “오온이 모두 공이다”라는 말은 자아와 인류의 관점에서 오온의 공성을 분석한 것이다
“모든 법은 공하여 생겨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색이 없고,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
이 구절에서는 다시 관점을 바꾸어 우주의 관점에서 인류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인간을 우주 한 가운데 놓고 관찰한 것이다
우리에게 눈과 코가 분명히 있는데 부처는 어째서 사실은 우리에게 눈도 코도 없다고 했을까? 이 6개가 없으면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이 뒤집히게 된다.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모든 것은 무엇일까?
2. 보이는 곳 너머 광활한 ‘무’의 세계
우리가 진실한 세계라고 믿고 있는 것은 모두 십팔계 속의 갖가지 요소가 상호작용한 것이며, 이 요소 중 어느 하나라도 바뀌면 우리가 진실하다고 믿고 있는 세계도 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한하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우주의 진실임을 오늘날의 과학이 점점 증명해내고 있다
3. 인생 혹은 우주의 비밀
생겨남과 사라짐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며 인간이 시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다. 가장 흔한 것은 생사다.
사람이 어리석으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을 거부하고 오로지 ‘생겨남’에만 집착하고 ‘사라짐’을 거부한다. 연애를 할 때 그 사랑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집착하기도 한다. 일단 만나면 헤어지지 않으려 한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사라진다는 것을 보지 못하거나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된 꿈속에 살면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잡으려고 애를 쓴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하면 무한한 번뇌에 빠질 뿐이다
무한의 차원에서 유한한 존재를 바라보면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고,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다
4. 어떻게 차이를 넘어 온전히 살 것인가
태어남과 죽음 중에서 태어남에 집착하는가?
즐거움과 고통 중에서 즐거움에 집착하는가?
인생이 고통스럽고 짧다고 우울해하지 말고 지금 당장 즐기라
전체 안에서 매 순간을 살아가라
5. ‘그게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다
온전한 전체 안에서 살아라. 이 말은 전체를 바라보고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길을 보라는 뜻이다.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비좁은 공간에 가둔다. 온전한 전체를 두 가지로 분리하고 그중 하나에만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생겨난다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므로 자기 마음을 움직여 행복을 느끼며 살 수는 있다.
우리는 수많은 관념 속에 살고 있다. 인생의 여정은 곧 관념의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을 어떤 관념의 틀 안에 가두고 그 관념을 세상 전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관념을 좋음과 나쁨, 성공과 실패 두 가지 세계로 나눈다. 우리는 수많은 관념 속에 갇혀 이분화된 세계, 이게 아니면 안 되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개념,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이게 아니면 안 되는’이분법적인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정신적인 문제를 일으키며 곤경에 빠뜨린다.
막다른 길에 가로막혔다는 생각이 들 때, 관점을 바꾸어 바라보면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관념 바깥에 수많은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6. 삶을 옭아매는 ‘명분’에서 해방되라
많은 이들이 명분 속에 갇혀 살고 있다.
어떤 명분이든 환상에 불과하다
남들이 우리에게 꼬리표를 붙여 이런 저런 울타리에 가두려 한다. 하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것은 남들의 일일 뿐 우리 자신과는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자신에게 꼬리표를 붙여 어떤 울타리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남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나도 다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부처는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우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무한한 우주가 들어 있는 것이다
나를 부르는 명칭이 무엇이든 그것은 내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살면서 붙여진 모든 이름을 다 합쳐도 다채롭고 오묘한 인생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7. ‘비교’의 장벽을 깨뜨리고 넘어서야 한다
진정으로 즐거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을 온전한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누려야 한다. 맑은 날에는 햇볕을 누리고 비오는 날에는 비바람을 누린다면 불행함도 사라질 것이다
4장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대처하는 법
나의 운명을 달라질 수 있을까?
‘원천우인(怨天尤人)’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한다는 뜻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운명 앞에서 인과를 떠올리고, 인과의 생각으로 인생의 갖가지 현상을 바라본다. 아무 원인도 없이 병이 났을 리 없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에게 불운이 닥쳤을 리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과경)에서 “지금의 결과를 보면 과거의 원인을 알 수 있고, 현재 만들어내는 원인을 보면 미래의 결과도 내다볼 수 있다”
(열반경)에서도 “착한 일이나 악한 일에 대한 결과는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반드시 오기 마련이고 과거, 현재, 미래의 인과는 계속 순환한다”고 했다
인과의 개념은 한마디로 모든 일에는 원인과 인연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야 하고,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그 속에 숨겨진 원인과 인연을 알아야 한다.
2. 12가지 인연을 따라 흐르는 운명의 비밀
십이인연 중 첫 번째는 무명(無明)이다. 사전적인 의미만 보면 빛이 없다는 것이다. 빛이 없으면 보이지 않거나 흐릿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잘 모른다는 뜻이다. 부처의 표현대로 하자면, 무명은 궁극의 이치를 모르는 것이다. 무상의 이치를 모르고 윤회의 이치를 모르고 공의 이치를 모른다. 이것은 사물 본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렷하게 볼 수 없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헛된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무명이다
부처나 깨달음을 얻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우리처럼 평범한 속인들은 무명의 상태에 살고 있다. 개인의 문제, 국가의 문제, 인류 전체의 문제, 지구의 문제가 모두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고, 우리가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꿰뚫어 보지 못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명의 생각이 수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일념무명(一念無明)이란 세상의 각종 혼란이 처음의 한 가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란 무명의 생각을 끊지 못하면 세상의 혼란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계속된다는 뜻이다
십이인연 중 두 번째는 행(行)이다. 여기서 행이란 ‘가다, 걷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과도 조금 다르다. 무명으로 인해 집착이 생기는데, 집착에 빠져 행동하는 것을 불교에서 업을 짓는다고 한다.
질투와 분노 때문에 마음속으로 남의 불운을 바라는 것은 의업이고, 남에게 악담을 하는 것은 구업이며, 직접 남을 때려서 상해를 가하는 것을 신업이라고 한다
어째서 업을 지을까? 무명의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무아의 이치를 모르고 ‘나’에만 집착해 번뇌가 끊이지 않고,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른 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집착해 끝없이 고통을 받는다.
불교에서는 업을 선업, 악업, 무기업(無記業) 세 가지로 나눈다. 선한 행동은 선한 업을 짓고 선한 과보를 낳으며, 악한 행동은 악한 업을 짓고 악한 과보를 가져온다. 선악을 초월한 행동은 무기업을 짓는데, 무기업은 과보를 불러오지 않고 우리를 온전한 해탈로 인도한다
불교에서는 업을 지으면 반드시 그에 대한 과보가 뒤따른다고 믿는다. 그 과보가 일찍 나타나느냐 늦게 나타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어떤 행동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다
3. 운명에 휘둘릴 때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
미혹이 생기면 업을 짓게 되고, 업을 지으면 그에 대한 과보가 나타나는데, 이 과정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쳐 계속 윤회된다.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미혹에서 벗어나고 무명을 떨쳐 내는 것이다
십이인연은 윤회의 비밀과 생명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외부의 조물주는 없으며 인간을 창조한 것은 인간 자신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창조한 것도 바로 인간 자신이다
인류가 있고 대자연이 생기고 인류 안에서도 수많은 차이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이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속에서 지은 갖가지 업에서 비롯된다. 외부의 조물주가 없는데도 이 세상이 생겨나고 인간이 생겨났다. 우리 자신의 업이 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었다. 운명이나 신령한 힘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행동이 뿌린 씨앗이 자라나서 맺은 열매다.
불운이 닥치면 우리는 대부분 자신을 불운으로 터뜨린 사람이나 일을 증오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집중한다.
5장 굴곡많은 세상사에 의연해지는 법
어찌하여 마음이 지치고 고통스러운가
반야심경에서 십이인연이 없다고 한 후에 곧바로 뒤를 이어서 “고, 집, 멸, 도도 없다”고 했다. 사체(四諦)라고 불리는 고, 집, 멸, 도는 석가모니가 가장 처음 주장한 불법이자, 불법 가운데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고체(苦諦)’는 고통의 진리다. 이것은 부처가 말하는 불법의 전체로, 사는 것이 곧 고통이라는 것이다
‘집체(集諦)’는 고통의 원인이다. 왜 고통스러운가? 바로 욕망 때문이다
‘멸체(滅諦)’는 고통이 사라지는 진리다. 고통은 없앨 수 있다
‘도체(道諦)’는 성불의 진리이자 고통을 없애는 방법이다
고는 속세의 결과이고, 집은 속세가 고통스러운 원인이며, 멸은 속세를 초월한 결과이고, 도는 속세를 초월한 원인이다. 이 사체는 가장 기본적인 불법으로, 불교의 세계관을 대표하며 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부처는 그리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다.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긍정의 에너지를 주는 말이나, 이른바‘힐링’이 되는 따뜻한 위로의 말도 하지 않는다. 신을 어떻게 섬겨야 부자가 될 수 있다거나 어떤 특별한 비법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부처는 그저 인간은 모두 반드시 병들고 죽고 실패하고 잃고 고통받게 된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론과 방법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부처는 “세상에 사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말하고 고통의 원인을 찾으라고 했다. 고통의 뿌리는 오온의 결합이다.
부처는 뒤이어 멸체와 도체를 제시했다. 고통은 없앨 수 있다. 육도와 반야의 지혜를 통해 속세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고체와 집체는 이 세상을 부정하고, 멸체와 도체는 이 세상을 초월했다. 부처는 이 세상을 부정한 후에 이 세상을 초월하라고 했다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없고, 색, 소리, 향기, 맛, 촉감, 법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다”는 관자재보살의 말에서 ‘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초월을 의미한다
관자재보살의 말은 우리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이루어진 인간의 경험 세계를 초월해야 한다는 뜻이다. 눈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을 초월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넓은 곳을 느낄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높은 곳에서 인간을 굽어보아야만 인간의 문제가 무엇이고 인간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감각기관과 마음으로 경험한 세계를 초월해야만 이 세계에 미혹되지 않고 형형색색의 세계에 끌려다니는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
2.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는 힘
관자재보살은 “무명도 무명이 다함까지도 없고,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다. 고, 집, 멸, 도도 없고, 지혜도 얻음도 없다”고 했다. 부처의 세 가지 교리인 십이인연, 사체, 육도를 단숨에 부정한 것이다
부처는 이 세계에 떠도는 수많은 이론과 교파 중 그 무엇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부처는 매우 특별하다. 그는 이 세계의 어떤 논리에도 미혹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했다. 물론 부처의 자신의 논리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도 역시 헛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반야심경을 보면 ‘무’라는 글자 6개로 부처가 일생 동안 설파한 교리가 단순에 ‘무’로 변했다. 물론 이 무는 역시 초월을 의미한다
부처가 “고, 집, 멸, 도가 없다”고 한 것은 사체의 방법을 맹신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체는 그저 수단일 뿐이며, 어떤 수단이든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 부처의 주장이다
또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다”는 말은 반야의 지혜를 초월하고 성불하겠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존재의 본질은 공이고,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부처는 이 세상을 철저히 부정하고,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를 부정했으며, 자신의 이론을 포함해 이 세계에 관한 모든 이론을 부정했다
아마도 부처는 인류의 사상사에서 유일하게 해답을 내놓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부처는 우리에게 그저 생각의 방향을 가리켜 주며 이 길로 가면 진실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다
세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세계를 떠난다는 뜻이 아니라 세계에 끌려가거나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세계가 시시각각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육조단경)에서 “참으로 움직이지 않음을 본다면 움직임 위에 움직이지 않음이 있다”고 했다. 진정한 부동(不動)과 진정한 초월은 죽은 생명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별의 현상을 꿰뚫어본다는 뜻이고, 궁극의 차원에서 ‘부동’을 행하는 것은 갖가지 현상을 분별할 줄 알고 분별심 없이 그것들을 대한다는 뜻이다
3. 즐거움도 괴로움도 내 삶의 일부다
부처는 고통이 곧 진리라고 했다. 부처는 생고, 노고, 병고, 사고, 원증회고, 애별리고, 구부득고, 오온성고를 합쳐 팔고라고 했다
생고는 태어날 때의 고통이다.
노고는 시간이 주는 고통이다. 일단 세상에 나오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늙는다
병고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다
사고는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다
원증회고는 싫어하고 원망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이다.
반대로 애별리고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고통이다
구부득고는 갖고 싶은 것을 얻을 수 없는 고통이다
오온성고는 오온을 통해서 느끼는 고통이다
팔고에는 우리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들을 피할 수 없으므로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것들에 매몰되지 않을 수는 있다
이 세계를 초월한다는 것을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그것이 삶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수많은 경험들 중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다
4. 차분함을 잃지 않고 지속해야 한다
한 가지를 이루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한 가지 일을 이루고 나서 그것이 삶에서 겪는 여러 경험 중 하나임을 안다면,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둬도 이성을 잃고 방종할 정도로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거나 사회가 우리에게 어떤 기회를 줄 때,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일까?”
5. 칭찬도 비난도 호숫가 풍경 바라보듯 보라
남이 나를 칭찬하는 이유가 뭘까? 대부분은 내가 가진 권력이나 지위 때문이다. 그것은 칭찬이 아니라 아첨이다. 그러므로 남이 나를 치켜세우면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
바깥세상이 변할 때마다 마음도 시시각각 바뀐다. 잘나갈 때는 희희낙락하고 일이 잘 안풀리면 절망한다. 바깥세상이 아무리 시시각각 변해도 자기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굳게 자리를 지켜야 한다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자신의 세계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세계를 의미한다. 내 안에 마음이 있다면 오직 하나‘안정’뿐이어야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이 풍경이라고 여기면, 자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꽃이 피었다가 떨어지고 해가 떳다가 지고 바람이 불고 기러기가 날아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달리기 경주로 여기면, 자아의식이 강해져 모든 일에 연연하고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남을 원망한다
삶이란 원래 번잡한 것이다. 참고 또 참으며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호숫가 풍경을 감상한다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를 바라보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음으로 인생의 다양한 일을 맞이한다면, 번잡한 인생도 전원시처럼 아늑하고 평온해지지 않을까?
6장 생활 속 근심 걱정 다스리는 법
마음속 두려움을 없애는 7가지 길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
이 단락이 바로 반야심경의 전체 결론이며 맨 앞부분과 서로 호응한다. 얻은 것이 없으므로 보살은 피안의 지혜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할 때 마음속에 아무런 장애가 없고, 장애가 없으므로 두려울 것도 없다. 또 이 거꾸로 된 세상과 마음속 헛된 생각에서 멀리 떠나 번뇌가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 세계를 부정하고 초월했으므로 잃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무소유’의 마음으로 반야의 지혜를 수행하면 마음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무독사망(巫毒死亡)’이라는 것이 있다. 원시시대에 무당이 뼈를 손에 들고 누군가를 가리키며 어떤 주술을 쓰면 그 사람이 정말로 죽었다. 이것을 무독사망이라고 하는데, 그 뼈가 어떤 영험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라 무당에게 지목 당한 사람이 지레 겁을 먹고 까무러쳐 죽은 것이다
외부의 무언가가 우리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공포가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죽이는 일이 많다
우리가 번뇌를 안고 사는 것은 두려움과 헛된 꿈이다.
내 마음속에 장애물이 없으면 현실에서도 장애물이 사라진다
2. “나는 생각할 수 있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3. “나는 보고 들을 수 있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관세음보살은 소리를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격을 잊고, 계약도 잊고, 방관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세상의 소리와 모습을 멀리서 관조하라. 이런 관조가 평온함과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4. “나는 자아를 벗어날 수 있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눈이 있기에 세상을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눈이 사물에 대한 관찰을 제한하기도 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진실하다고 믿는다.
5. “나는 비결을 믿지 않는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6. “나의 세계가 있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지만 자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자가 그것을 알고 자로에게 물었다.
“너는 어찌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는 한 번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기쁠 때는 모든 근심을 잊으며 나이 먹는 것도 잊는다’라고 대답하지 않았느냐?”
한 번 분발하면 밥 먹는 것도 잊고 기쁠 때는 모든 근심을 잊는다. 별 것 아닌 듯하지만, 사실 이 별 것 아닌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암기했던 영어 단어를 잊어버리고, 어릴 적 친구의 이름도 잊어버리고, 남에게 도움 받았던 일도 쉽게 잊는다. 하지만 남이 자신을 험담했던 일이나 월급날, 명예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등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공자가 끊임없이 좌절하고 조롱당하고 오해받으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의 즐거움을 잃지 않았던 것은 세상을 초월해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계에서는 자신의 주인이므로 속세의 영합함과 빈부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영혼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공자는 집중하면 먹고 마시는 것도 잊고 근심 걱정도 잊을 수 있었다. 잡다한 일은 다 잊었으므로 그의 생각을 구속을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었다. 자기만의 세계에서 진정한 안락함을 느꼈으므로 시간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그래서 나이든 노화든 그에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7. “나는 버릇을 잘 안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사람은 나이가 들고 독서를 많이 할수록 강처럼 점점 넓고 자유로워지며 바다와 하나가 되듯 하늘과 땅 사이에 장애물이 없어진다”
-철학자 러셀
8. “나는 상식의 함정을 안다” 고로 장애물이 없다
7장 현재를 사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고요한 이 순간을 살라
수행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사체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성문승이고, 십이인연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연각승, 육도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보살승이다
성문승과 연각승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고, 보살승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그래서 성문승과 연각승은 소승, 보살승은 대승으로 부르기도 한다
수행의 결과에 따라 구분하면, 사체를 깨달아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난 이를 아라한이라고 하고, 반야바라밀다로 수행해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고 번뇌를 끊고 중생을 구제하는 이를 보살이라고 하며, 반야바라밀다로 수행해 자각(自覺), 각타(覺他, 불법을 전파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함), 각만(覺滿, 깨달음을 원만하게 행함)의 경지에 도달한 이를 부처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라는 구절은 보살의 경지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므로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라고 하여 부처의 경지를 설명하고 있다. 삼세란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한다
불교에는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이 있다. 부처가 세상에 있을 때 부처는 현재불이고, 미륵은 미래불이며, 가섭은 과거불이었다. 또 지난 세상에 출현했던 7부처를 과거칠불이라고 하는데,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 석가모니불이다
모든 부처는 반야바라밀다로 수행해 무상정등정각(이보다 더 높을 수 없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한 것으로, 아누다라는 ‘위가 없는, 초월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고, 삼먁은 ‘철저하게, 정확하게’, 삼보리는‘지혜를 깨우치다’는 뜻이다. 이 모든 의미를 합치면 ‘무상정등정각’이 되며 자각, 각타, 각만의 경지로 해석할 수도 있다
흔히들 “현재를 살라”고 말한다. 불교의 관점에서 “현재를 살라”는 말은 그때그때 즐기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모습을 깨닫고 즉시 멈추라는 의미다. 버릇과 욕망을 멈추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아 자기 본성대로 살라는 것이다
2. 마음을 다해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누군가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라”고 말했다. 모든 만남이 마지막 만남일 수 있음을 생각하면 풀지 못할 감정은 없다. 지금이 마지막이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겪는 하루 일분일초는 모두 단 한 번뿐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이것이 단 한 번뿐이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온 마음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만 그 순간을 초월해 무한하게 이어질 수 있다
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바쟁은 “나는 새로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마다 내가 그 원고를 완성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 책이 어쩌면 나의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장이 끝날 때까지 이런 마음가짐을 유지했다. 나는 아이들과 작별할 때마다 아이들이 한없이 소중하고 애틋했다. 다시는 아이들을 볼 수 없을 것처럼 말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만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느낄 수 있다.
과거는 돌아오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했다
미래의 것은 모두 망상이다. 자신이 내일도 살아있을 수 있다고 100%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실한 것은 지금 내가 살아있는 이 순간뿐이다. 지금 책을 읽고, 창밖을 쳐다보고 있고,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를 맡고 있는 이 순간만이 진실하다. 지나간 시간과 앞으로 찾아올 시간은 모두 나의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모든 생명의 목표는 죽음이다”라고 했다. 그들은 죽음이 언제 어디서든 닥칠 수 있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인생의 순간마다 최선을 다한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생각으로 살아보라. 그러면 인생이 소중해지고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관적으로 살라는 뜻도 아니고, 허무주의를 의미하지도 않으며, 본성을 잃고 쾌락과 방종을 일삼으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당장 내일 죽는다는 마음이란 생명의 본질에 대한 담담한 관조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인식이다. 죽음의 필연성과 숙명성이 생명에 의의를 부여한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어째서 꼭 무언가를 기다린 뒤에야 그걸 하려고 하지 마라. 인생의 가치와 의의, 행복은 오로지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 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모든 명예와 비판, 득실, 옳고 그름은 아주 사소해진다
한 철학자가 자다가 한밤중에 문득 눈을 떴는데 마침 그의 신발을 훔쳐가려는 좀도둑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가 큰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도둑을 저지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도둑이 놀라 물었다.
“어째서 나를 붙잡지 않습니까?”
철학자가 대답했다.
“내가 내일 아침에 살아서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신발 한 켤레 따위에 연연해서 무엇 하겠소?”
다소 과장된 이야기지만, 이런 담담한 태도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든다. 이렇게 유연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또 지금도 계속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불교의 유명한 선사들은 항상 “내려놓으라”라고 가르쳤다
3. 불완전한 세상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라
근본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다. 보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고,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마음으로 보는 모든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그 영화로움의 뒤편에서 황량함을 보고, 황량함의 뒤편에서 영화로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복과 화가 기묘하게 바뀌는 이치도 알 수 있다.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눈앞의 형과 색에 미혹되지 않고, 당장의 얻음에 기뻐하지도, 당장의 잃음에 슬퍼하지도 않을 수 있다. 영혼이 그 형과 색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 가장 깊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그 공을 보았다면 모든 것을 다 본 것이다
8장 반야심경을 외우면 마음이 강해진다
인생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주문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동한 때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후 당나라 때까지 불경을 가지러 인도에 간 중국 승려들이 많았다. 불경을 가지러 인도에 간 승려들을 구법승(求法僧)이라고 불렀는데,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인도까지 멀고 험한 길을 가려면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진리를 향한 승려들의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때 의정율사가 구법승을 칭송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송에서부터 제, 양, 진, 당에 이르기까지 고승들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장안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네. 떠난 이는 수없이 많은데 돌아온 이는 열 명도 되지 않는구나. 후대 사람들이 앞 사람의 어려움을 어찌 알겠는가. 길은 멀고 날은 추우며 모래 바람이 불어와 해를 가리니 지치고 힘이 드네. 훗날 불법을 배우는 이들은 이 어려움을 모르고 불경을 쉽게 읽는다 생각하겠구나”
629년 현장이 조정의 동의를 얻지 못한 채 몰래 국경을 넘어 혼자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602년 중국 허난 천류에서 태어난 천씨 성을 가진 이 남자는 13세에 출가한 뒤 진리 탐구에 평생을 바쳤다. 국경을 넘으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는 “천축(天竺, 예전에 중국에서 인도를 이르던 말)에 가지 못하면 동쪽으로 단 한 걸음도 돌아가지 않겠노라”라고 맹세했다
현장을, 아니 수많은 구법승들을 그토록 강렬하게 천축으로 이끈 것은 무엇일까? 물론 석유도 보석도, 미녀도 황금도 아니다. 바로 불법, 즉 부처가 말한 최고의 진리다. 그중에서도 현장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긴 것은 (유가사지론)이었다
서역행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현장은 두 가지 방법으로 두려움과 맞서 싸웠다. 하나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읊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반야심경을 읊는 것이었다.
현장은 반야심경을 읊을 때마다 감응을 받아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현장의 제자 혜립이 쓴(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현장이 사막에서 악귀들을 만났을 때 관음보살의 명호를 읊어도 길을 막으려는 악귀들을 쫓아낼 수 없었지만 반야심경을 읊자 악귀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서역행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 바로 유명한 서유기(西遊記)다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에 오온이 공함을 비추어 보게 되고 고통과 액운을 넘어서게 된다”
(반야심경)의 첫구절이다. 이 불경의 주인공은 ‘관자재보살’이라는 보살이다. 보살은 팔리어로 bodhisatta이고 산스크리트이며 ‘보리살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 뜻은 ‘깨달음을 얻은 중생’
누구든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 보살인 것이다. 보살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편견을 바꾸는 데만 수십 년, 심지어 수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 때문에 보살은 극소수밖에 되지 않는다
원시불교시대(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하고 그 제자들이 전승하던 시대)에는 보살이 두 명밖에 없었다. 바로 성불하기 전의 석가모니와 미륵보살이다. 대승불교(수많은 중생들을 피안으로 데려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불교)시대에는 보살이 50여 명 있었다. 그중 유명한 보살이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등이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관자재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이다.
티베트인들은 송찬간포(당 초기인 7세기에 티베트 일대를 통치하던 왕)와 달라이 라마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생각한다.
법화경 중 (관세음보살보문품)을 보면 수많은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가 온 마음을 다해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읊자 관세음보살이 그 소리를 듣고 중생들을 고통에서 해탈시켜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듣고 세상으로 와서 중생을 구제해주는’자비의 상징이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한다. 이른바 관세음 신앙이란 자비를 통해 해탈을 얻는 것을 뜻한다
관세음이라는 명칭 자체가 자비를 통해 성불하는 방법을 의미하고 있다. 몇몇 불교 경전의 기록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아주 오래 전에 성불했으며 그의 법호는 ‘정법명열래’이고 석가모니가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가볍게 여겨 보살의 신분으로 세상에 다시 내려와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은 어떻게 하면 반야를 이용해 모든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있다
반야심경에는 청자가 사리자 단 한 사람뿐이다. 사리자는 사리불이라고도 부르며, 부처의 대제자로 지혜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사리’란 추로(두루미와 해오라기)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