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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강북제일미
영춘객잔의 뒤채 별관의 방 하나가 담백과 제갈혜를 위한 임시거처로 정해졌다. 담백은 이노인과 함께 기거하면 되었지만 갈혜가 문제였다.
방 하나라도 아껴 장사를 하려는 영춘의 부루퉁한 입이 담백이 내민 금덩이에 쏙 들어갔다. 그리고 그 천하에서 가장 도도하고 무서운 일꾼이 영춘에게 물었다.
“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 되느냐?”
영춘은 자신도 모르게 ‘그냥 살려만 주세요.’라고 대답할 뻔 하였다.
“그냥…이곳으로 나오지만 않으시면…,”
영춘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백이 차갑게 돌아서 들어가 버렸다.
“휴.”
요즘 들어 하루에 십년씩 늙어가는 영춘이었다.
제갈혜는 당분간 별채를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공사 중인 객잔으로 나갔다가는 한바탕 소동 끝에 모두들 일손을 놓아 버릴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제갈혜를 담백은 특별히 감시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만약 그러한 짓을 했다가 담백이 제갈가를 방문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호 사대세가의 하나이자 영춘객잔보다 그 인원이나 규모가 수백 수천 배 큰 제갈가였지만 그 후원에서 장작을 패는 사람 중에는 담백의 공격을 검막으로 막아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제갈혜는 영춘객잔 내의 자유로운 포로였다.
담백과 이노인이 나무하는 것을 핑계로 선안사로 출발하자 구석에 숨어 있던 흑오와 종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 짜리몽땅한 영감이 그렇게 강합니까?”
종대가 담백이 저 멀리 사라졌음에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밤새 흑오에게 세뇌 당하다시피 담백의 무서움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까불면 바로 죽는다.”
흑오가 한마디로 담백을 정의 내렸고 종대가 목을 움켜쥐며 말했다.
“사부보다 더 강할까요?”
“더 강할 것 같은데.”
“헉. 설마요?”
“적어도 우리 사부는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잖아? 근데 저 영감은 달라. 지나가다가도 그냥 콱!”
흑오가 두 손가락을 구부려 종대의 눈을 찌르려했고 종대가 기겁을 하며 피했다.
“어서 빨리 무공을 배워야겠어요.”
“그래야겠다.”
“경공(輕功)부터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어요. 여차하면 튀어야죠.”
종대의 말에 흑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던 것이었다.
흑오와 종대가 어떻게 하면 담백 눈을 피해 한시라도 빨리 절세의 무공을 배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있을 때 그런 그들을 보며 또 다른 작은 작전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바로 복대와 아평이었다.
흑오와 종대가 담백을 보며 기겁을 하듯이 복대와 아평이 두려워하는 상대는 바로 흑오와 종대였다.
복대와 아평에게 담백은 그저 이노인의 친구정도로 여겨졌고 실제로 도 그러했다. 아무리 담백의 성격이 차갑고 잔인해도 이노인이 일하는 객잔의 조무래기 점소이들에게 손 쓸 담백이 아니었다.
결국 실질적인 무서움의 정도는 흑오와 종대가 훨씬 더 컸다. 천리 밖 호랑이보다 눈앞의 살쾡이가 더 무서운 법이었다.
“사부님이 저 아저씨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줄까?”
아평이 혹시라도 말소리가 그들에게로 새어 나갈까 숨까지 죽여 가며 물었다.
“글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과연 저들까지 무공을 배우게 된다면 모두들 사형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흑오사형?’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형, 무서워.”
“괜찮아. 내가 있잖아.”
전혀 위안이 못되는 복대의 큰소리에 아평이 여전히 두려운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사부님의 무공을 독차지하려고…우리를?”
아평이 말을 채 끝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도 생각만 해도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그 말에 지켜주겠다는 복대의 손이 더 떨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춘객잔 내의 보이지 않는 암투가 한참 벌어지고 있던 그때 아연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 * *
찰나의 순간, 아연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렸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네 살 무렵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방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시고 나면 어린 시절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
다시 시간이 조금 지났고 어린 동생을 업고 부모님이 일하시는 밭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일곱 살 무렵이었다.
시간은 다시 흘렀다.
이번에는 엄마 일을 도와 뒤에서 수레를 미는 아홉 살 모습이 보였다. 우연히 보게 된, 무인에게 열병을 앓던 열네 살 사춘기의 모습도 보였다.
시간은 계속 흘러 드디어 우이를 보는 순간이 되었다.
주방에 고개를 들이밀던 우이와 시선이 마주치던 그. 순간 그에게서 어떤 운명을 느꼈다. 열네 살 두근거림이 백배는 커져서 다시 그녀의 심장을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슈우우욱!
그에게 떨어지던 새파랗게 날이 선 도끼날이 그녀의 머리위로 날아온다고 느끼는 순간! 시간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덮치는 거대한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잠시 전.
객잔수리가 이제 막 끝나고, 몰려드는 피곤함에 아연은 객잔 앞 의자에 앉아 나른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의 도움으로 일은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았다. 적어도 오늘 저녁이나 늦어도 내일은 문을 열수 있을 것 같았다. 영춘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두두두두
그때 시장통을 휘젓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귀를 찢는 비명소리.
-아악!
아연이 고개를 돌렸을 때 객잔 앞에서 팥죽을 파는 오씨 할머니의 여섯 살 난 손자 아용(兒龍)을 거대한 사두마차가 덮치고 있었던 것이다.
본능적으로 아연이 몸을 날렸다.
이미 구하기는 늦었다고 생각되었지만 눈앞에서 여섯 살 난 아이가 짓눌려 죽게 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아용을 감싸 안으면서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순간적으로 모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순간 그녀는 자신이 죽는다는 두려움보다 우이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이 앞섰다.
이제 막 시작한 사랑이었다. 제대로 사랑다운 사랑한번 못해보고 이렇게 끝이 난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내서 하늘이 벌을 주는 거구나.’
-휘익.
그 순간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붕 하고 날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용을 품안에 안은 채 그녀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누군가 자신을 안아서 날아올랐던 것이다.
자신의 발아래로 새하얀 말의 갈기가 휘날리며 지나갔다.
다시 마차의 지붕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나비처럼 사뿐히 땅바닥에 내려섰다.
그녀의 품에서 아용이 내려섰다.
“아용아!”
오씨가 미친 듯이 손자를 부르며 달려왔다,
아용은 할머니가 왜 눈물을 흘리는지, 왜 이리 아프도록 힘껏 안아주는지 이유도 모른 채 여전히 방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몇 몇 시장 상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연이 고개를 돌리자 우이가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아, 당신이.”
그녀가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우이가 그녀의 몸을 받쳐 주었다.
아연은 그의 가슴이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우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만약에 자신이 이 자리에 없었다거나 한발 늦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태연하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우이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참고 있었다.
“고맙네. 고마워.”
오씨가 달려와서 아연의 손을 잡고 우이를 부둥켜안았다.
그녀의 짙은 주름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이 죽고 며느리와 사는 오씨였다. 효심 가득한 며느리와 칠십 평생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안한 오씨의 유일한 낙이 마차에 짓이겨질 뻔 했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네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죽은 아들이 마흔 넘어 본 늦둥이를 눈앞에서 보낸다면 오씨는 결코 남은 생을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히이잉.
마차가 저 만치에서 멈춰 섰다.
마부석에 앉아있던 사내가 뛰어내려 이쪽으로 달려왔다.
시장골목에서 마구 마차를 몰았던 자라면, 게다가 어린 생명을 죽일 뻔한 자라면 당연히 지어야할 미안한 표정 대신 분노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네 년 때문에 말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했느냐! 저게 한 마리에 얼마짜리인줄 알기나 하냐?”
-세에에엑!
그의 손에 들린 채찍이 신경질적으로 날아들었다.
목표는 바로 아연이었다.
아마 아연이 없었다면 어린 아용에게 날아갔을 지도 모를 채찍질이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채찍의 끝을 우이가 무서운 표정으로 쥐고 있었던 것이다.
“이놈이! 죽고 싶은 게냐?”
오씨가 달려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손자를 구하기 위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우이나 아연이 봉변을 당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를 보니 보통 집안이 아니었다. 이런 경우 분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결과는 보나마나 좋지 않을 것이다. 백 번을 싸우고, 천 번을 하소연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칠십 평생 지겹게 보아온 그녀였다.
“나으리, 죄송합니다요.”
늙은 노파의 안타까운 몸짓은 사내의 발길질에 채여 뒤로 넘어졌다.
우이의 짙은 두 눈썹이 꿈틀거리는 순간 누군가 그 사내를 덮쳐갔다.
“이런 개호로 새끼!”
욕설이 채 사내의 귀속에 박히기도 전에 사내의 얼굴이 떡이 되서 날아갔다. 누군가 맹렬히 달려와 그의 얼굴에 박치기를 한 것이다.
종대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바깥을 내다보던 종대가 대충 돌아가던 사정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는 미래의 사부님 앞에서 개과천선한 자신의 의협심을 보여줄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마부사내가 마차에 부딪혀 쓰러졌다.
-끼이익.
드디어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개호로 새끼’의 주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종대의 입이 떡 벌어졌다.
* * *
미녀(美女)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남자에게 있어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대상이 강북제일미(江北第一美) 단목혜(端木慧)라면 그 기쁨은 백배가 될 것이다.
강남에 강남제일화(江南第一花) 제갈혜가 있다면 강북에는 강북제일미 단목혜가 있었다.
그녀들의 분위기는 서로 상반되었다.
제갈혜가 도도하고 고귀한 분위기라면 단목혜는 단아하고 수수한 분위기였다.
강북의 미를 대표하는 자존심답게 그녀는 가히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면사로 얼굴의 반이나 가리고 있었지만 작은 천 조각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야방은 참으로 행복한 사내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 사흘간 단목혜와 같은 마차를 탈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옆에 앉은 암살쾡이만 없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검게 탄 얼굴에 거친 피부라니. 게다가 자신을 마치 단목혜를 호시탐탐 노리는 색마(色魔)인양, 무섭게 노려보는 저 찢어진 눈이라니.
그녀는 바로 태숙아(太叔芽)라 불리는 단목혜의 호위무사였다.
그녀 때문에 단목예에게 수작다운 수작 한번 못 걸어 본 그였기에 그녀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공야방은 산 좋고 물 좋은 무당산에서 칠 년이나 수련을 하고도 별 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한 백이문의 망나니 둘째였다.
그는 속가(俗家)임에도 특별하게 무당 내에서도 장로급에 해당하는 무천(無天)진인을 사부로 모실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인 백이문주가 막대한 금력(金力)을 쏟아 부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을 알 법도 한데, 공야방은 무당에서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무천진인의 제자로 칠년간의 무공수련을 마치고 이제 하산(下山)하는 길이었다.
자신의 사부인 무천진인과 단목혜의 아버지인 단목(端木)대협은 절친한 사이였다.
마침 무천진인을 만나러 무당에 들른 단목혜의 하산길이 바로 태호였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공야방은 자신의 하산일정을 일주일이나 당기면서까지 동행하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물론 호위를 핑계 삼아서였다.
“피곤하지 않으시오?”
은근한 공야방의 말에 단목혜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말을 아끼는 여인이었다.
“태호에는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어렸을 때 몇 번 왔습니다.”
청아한 그녀의 목소리에 공야방은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이제 곧 저희 집에 도착할 겁니다. 예까지 오셨으니 며칠 쉬시다 가시지요.”
공야방의 말에, 단목혜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희는 그냥 객잔에서 묵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요, 사부님의 얼굴을 봐서도 그렇게는 안 되지요. 제 집이 태호에 있는 이상 제가 대접을 해드리는 게 당연한 도리지요.”
사부에 도리까지 들먹이기 시작한 공야방이었다.
단목혜의 얼굴에 난처함이 깃들었다.
단목혜는 사실 공야방이 부담스러웠다.
무천진인의 제자였기에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그러나 동행하는 동안 느낀 그의 눈빛은 수양을 중요시하는 무당의 청명(淸明)한 눈빛이 아니었다.
단목혜 역시 어려서부터 많은 사내들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 여인이었다. 그녀가 가진 재주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은 아미(峨嵋)의 정유(鄭幽)사태에게 전수받은 이미 칠성(七成)까지 이른 소청기공(小淸氣功)도 아니었고, 일곱 살 때부터 어려운 경전(經典)들을 읽어낸 명석한 두뇌도 아니었다. 바로 상대의 눈빛에서 탐욕(貪慾)과 순수를 구분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히도 공야방의 눈빛은 전자(前者)에 속했다.
그러나 사부의 이름까지 들먹이는데 거절하기도 곤란해 난감한 표정만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덜컹.
마차가 크게 흔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곧이어 마차가 멈춰 섰고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공야방은 인상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중요한 순간이 아니던가?
다된 밥에 코 빠뜨리는 순간이었지만 그러나 이런 때 일수록 침착하고 대범해야 멋있게 보인다는 것을 잘 아는 공야방이었다.
공야방은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기회다 싶어 단목혜와 태숙아가 따라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공야방은 인상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었다.
일단 마부는 얼굴을 감싸 쥐고는 마차 옆에 쓰러져 있었다.
그 앞으로 웬 얼뜨기 같은 놈이 자신을 따라 내리는 단목혜를 보며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늙다리 노파가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서 꼬마 놈이 빽빽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웬 젊은 년 놈이 무서운 눈초리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칠년 만에 돌아오는 집이다. 게다가 천하제일의 미녀까지 동행해서 온 길이었다.
이 더러운 시장통에서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원래 성격 같았으면 벌써 주먹이 날아가고 발길질이 날아갔을 것이다. 무당도사들이 칠년간 가르치고도 교화해내지 못한 그 더러운 성격을 사흘 전에 만난 단목혜의 미모가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공야방이 최대한 점잖게 말했다.
그러나 얼뜨기는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단목혜만 쳐다보았고, 젊은 년 놈은 들은 척도 않고 노파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공야방의 속이 다시 뒤집어졌다.
“저것들이 갑자기 뛰어드는 바람에….”
그때 마부가 얼굴을 감싸 쥐며 일어나서 말했다.
“이런 개-”
다시 종대가 욕설을 퍼부으며 달려 나가려고 했고 놀란 마부가 공야방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이가 다칠 뻔 했소. 앞으로 조심해 주시오.”
공야방을 보며 우이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이는 최대한의 인내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아연을 영원히 못 볼 뻔 했다는 생각에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말에 공야방의 안색도 덩달아 굳어졌다.
우이의 말은 다른 사람의 귀에는 정중한 부탁으로 들렸지만, 공야방의 귀에는 훈계로 들렸던 것이다.
“이런 건방진 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홧김에 말을 해놓고 단목혜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뜨끔했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당신이 누구요?”
우이가 담담하게 물었다.
‘감히 내가’라는 말을 쓰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사람치고 알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본적이 없던 우이였다.
반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올 줄 몰랐던 공야방이었다.
“엥?”
백이문의 소공자라고 말하기도 무당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씩씩대며 기껏 공야방이 생각해 낸 말은 바로 ‘그럼 넌 누구냐?’ 였다.
“난 여기 일하는 사람이오.”
우이의 손가락 끝에는‘영춘객잔’이라는 네 글자가 붉은천 안에서 바람을 맞으며 신나게 헤엄치고 있었다.
“뭐야? 그럼 점소이?”
공야방이 결국 주먹을 휘두르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 결정은 미녀도 잃고 매도 맞는 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 * *
백이문주 공야무는 또 다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바로 살귀삼웅이 얻어터지고 들어온 날이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얼굴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 그날의 그 황당한 표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이 그때보다 더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다.
무공을 배우러 갔던 둘째 아들놈이 돌아 온 것까지는 좋았다. 편하게 돌아오라고 마차까지 마중 보냈었다.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아끼고 아끼던 아들이었다. 무당파 제자로 만들기 위해 기둥뿌리가 흔들렸던 아들이었다.
이제 드디어 그 결실을 보게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얼굴이 피 떡이 되서 돌아온 것이다.
공야방의 볼에 난 시커먼 손바닥 자국을 보며 공야무가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공야방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객잔에서 일하는 놈이랑 시비가 붙어 이렇게 되었다는 소리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공야방이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신도방 놈들에게 기습을 당한 것이냐?”
그 말에 공야방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렇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자신이 무당산으로 떠날 때도 그랬고 신도방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는 백이문이었다.
공야방의 그런 표정을 보며 공야무가 부랴부랴 살귀삼웅을 불러들였다.
아직도 얼굴에 멍자국이 가시지 않은 그들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병든 닭 모양 비실대는 것이 이제 그들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들에게 패배는 죽음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었고, 살귀삼웅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어쨌든 여차여차 눈코 입을 만들어 붙이고 볼에 남은 손자국 크기를 맞춰보는 등, 결국 양쪽의 가해자(加害者)가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었다.
“신도방 이놈들!”
공야무가 대청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신도방에서 파견한 그 고수에게 자신의 아들도 당한 것이다.
신도방주가 지금쯤 얼마나 비웃고 있을까를 생각하니 머리로 올라오는 모든 혈도(穴道)가 동시에 막혀 쓰러질 것만 같았다.
한편 공야방의 안색은 풀어졌다.
듣고 보니 그자는 신도방에서 고용한 고수였던 것이다.
공야방의 나름대로 냉철한 분석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마차를 멈추게 했다. 그 과정에서 노파와 아이까지 동원해 자신을 방심하게 만들기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상대 살수는 자신이 객잔에서 일하는 점소이라고 격장지계를 써서 자신을 흥분시켰던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난 무당파의 무공을 사용할 생각을 못했지. 그깟 놈 정도야 한주먹거리도 안되니까. 방심을 한 사이 순식간에 멱살을 잡혔고.’
그러나 멱살이 잡혔을 때,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왜였을까?
‘아! 그렇지, 독(毒)! 난 이미 독에 중독이 되어 있었던 거야. 아, 그 마부 옆에 서 있던 놈! 생김새가 더러운 게, 독공(毒功)의 고수였구나.’
모든 게 착착 들어맞았다. 주눅 들었던 공야방의 표정이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그럼 그렇지.’
공야방이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마차에 실려 백이문에 도착한 이후였고, 단목혜는 내리고 없었던 것이었다.
아마 자신이 얻어맞는 것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오해를 풀어야 해’
공야방은 다급해졌다.
그에게 있어 아름다운 여인에게 오해를 받는 것만큼 초조한 일은 세상에 없었다.
아들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며 공야무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어떤 놈일까?”
살귀삼웅과 자식 놈을 이렇게 만들 정도면, 분명 대단한 놈임에 틀림없었다.
그쪽에서 고수를 쓴다면, 이쪽에서도 그에 걸 맞는 고수를 동원해야 한다. 물론 백이문에는 살귀삼웅을 능가하는 고수들이 여럿 있었다.
이제 그들이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들 중 누가 적당할까를 고민하는 공야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복잡한 생각을 뒤로 미루려는 듯, 고개를 젓던 공야무가 불현듯 물었다.
“참, 패아는 어디 있느냐?”
공야패를 말하는 것이었다.
“대공자님은 아침 일찍 나가셨습니다.”
옆을 지키고 섰던 무인하나가 정중하게 대답했다.
“쯔쯔, 그래도 동생이 오는 날인데.”
‘흥!’
어려서부터 공야패에게 당하고만 자라온 공야방이었다.
잔머리 굴리는 데는 공야패를 따라갈 수가 없었고, 못된 짓을 함께하더라도 형인 공야패는 귀신처럼 빠져나갔다. 덕분에 모든 책임과 꾸중은 항상 자신의 몫이었다.
‘이제는 쉽지 않을 걸?’
제 아무리 잔머리를 잘 굴린다지만, 무당제자인 자신에게는 이제 안 통할 것이다. 강호는 뭐니 뭐니 해도 힘 센 놈이 최고가 아닌가?
이제 바야흐로 자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공야방은 기분이 좋아져서 한껏 웃었지만 이내 비명을 질러야 했다.
온통 멍투성이의 얼굴은 그에게 웃음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듀고-보쟈.”
자신의 시대가 열리는 첫날부터 공야방의 발음은 새고 있었다.
* * *
태숙아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느물거리던 공야방을 호쾌하게 두들겨 패준 사내, 그 순간 태숙아는 십년 간 목구멍을 간질 던 가시가 뽑히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단목혜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무당파 제자인 공야방을 혼내줄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내.
게다가 허름한 객잔에서 일하고 있는 알 수 없는 신비함.
충분히 호기심이 생길만 했다.
그러나 태숙아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는 여기까지였다.
단목혜가 상촌의 일류 객잔을 놔두고 구태여 이 낡고 허름한 객잔에서 식사를 하고자 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단목혜가 누구인가?
바로 강북제일미라 불리는 강호 최고의 미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마차에서 내려 그를 본 순간부터 단목혜는 이상해졌다.
공야방이 두들겨 맞고 마차에 실려 떠나자, 단목혜가 영춘객잔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객잔은 이제 막 공사가 끝나 영춘은 내일부터 영업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단목혜가 식사가 되냐고 물었을 때 영춘의 고개는 자연 끄덕여지고 있었고 발걸음은 이미 주방을 향하고 있었다.
흑오와 종대, 담백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제갈혜에 이어 천하제일의 미녀를 보게 되는 호사(好事)가 마치 영춘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찾아 든 것이다.
복대와 아평은 벌써부터 난리였다.
제갈혜가 더 아름다운가 단목혜가 더 아름다운가로 입씨름이 벌어졌다. 귀 얇고 줏대 없는 우리의 복대는 순식간에 제갈혜를 배신하고 단목혜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린나이지만 아평은 그래도 제갈혜가 훨씬 더 예쁘다면서 일편단심을 보였다.
복대와 아평은 서로 심부름을 하려 앞장섰고 달오는 주방 커튼사이로 눈을 빼곡히 내놓고 있었다.
그런 시선들은 이미 익숙한 듯, 그녀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막 내부수리를 마친 가게 안은 나무향기가 진하게 베여있었다.
탁자를 내려보던 단목혜의 시선에 이채가 감돌았다.
단목혜는 손을 뻗어 탁자를 천천히 만졌다.
태숙아는 그녀가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아주 신중하게 탁자의 결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은 뭘 드릴까?”
영춘은 부러운 눈으로 탁자를 내려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담백과 함께 왔던 그 여인에 비해 지금의 여인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얼굴을 반쯤 가린 면사가 궁금증을 자극해서 그녀를 더욱 신비롭고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소고기 볶음이랑과 만두, 그리고 술 한 병 주세요.”
이미 주방에서는 소고기를 볶기 시작했을 것이다.
아까부터 이곳만 훔쳐보던 달오는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실력을 다 동원해서 요리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혹여 자신의 간이라도 빼서 넣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열성이었다.
돌아서 가려는 영춘을 단목혜가 불러 세웠다.
“뭐 좀 여쭤 봐도 될까요?”
“뭐든 물어보시구려.”
“이 탁자에 쓰인 나무, 어디서 난거죠?”
영춘은 예상 못한 물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엥? 그건 왜 물으시나?”
순간 태숙아의 인상이 일그러졌고 놀란 영춘이 황급히 대답했다.
“우이가 구해왔으니 그에게 물어보면 알거요.”
“우이? 방금 우이라고 했나요?”
단목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때 별채 쪽 입구에서 우이가 들어왔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구려. 불러드릴까?”
“됐어요.”
우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단목혜가 넋 나간 사람처럼 말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태숙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아는 단목혜는 결코 쓸데없는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탁자를 만져 보았을 때 그녀는 무엇인가를 알아낸 것이다.
“오늘 저녁은 시장 분들을 초대하는 게 어떨까요? 그동안 고생한 분들에게 대접은 해야지요.”
객잔으로 들어서며 우이가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 모두 불러야지.”
영춘은 신이 나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런 영춘을 보며 우이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면사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의 호흡이 빨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방쪽으로 가려는 우이에게 단목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호위님?”
단목혜의 작고 귀여운 입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덜컥
순간 우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이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호위님 맞죠?”
단목혜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였다.
잠시 단목혜를 멍하니 보던 우이의 머릿속에서는 오래전 과거의 한 조각 기억이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팔년 전 자신을 유난히 따랐던 전전대(前前代)무림맹주 권왕의 외손녀. 이름이 단목혜였던가? 별처럼 눈이 반짝이던 그 아이는 그때도 면사 쓰는 것을 좋아했었다.
“오라버니!”
단목혜가 울면서 우이의 품에 안겼다.
영춘과 객잔식구들의 입에서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모를 괴성이 터져 나왔다.
주방을 나오던 아연이 그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접시가 미끄러져 내렸다.
접시는 산산이 부서졌지만 단목혜는 우이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태숙아는 단목혜를 호위한지 오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그것도 단 한 차례도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남자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릴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강북제일미의 눈물은 실로 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한사람에게만은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단목혜를 무심히 보고 있는 우이였다.
단목혜가 자신을 알아보자 우이는 무척이나 놀랐다.
더구나 ‘우호위’라는 호칭을 듣는 순간 놀란 가슴은 아직까지 뛰고 있었다. 영춘객잔에 온지 두 달여 만에 드디어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과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네가 이렇게 아름답게 자라다니.”
“피, 어렸을 때는 더 예뻤어요.”
우이의 말에 단목혜가 혀를 내밀며 말했다. 물론 그녀의 면사에 가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태숙아는 기절하지 않은 게 다행인 만큼 놀라고 있었다.
단목혜에게 저런 모습이 숨어 있었던가?
언제나 단정하고 지적인 모습만을 보여 오던 단목혜였다. 저러한 애교 섞인 말은 한 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만약 단목혜를 열렬히 사모하는 사천당문(四川唐門)의 소가주(小家主) 당철(唐哲)이 저 모습을 보았다면 당가의 모든 극독(劇毒)을 우이가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여기에?”
단목혜의 물음에 우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담담하게 우이가 말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우이의 표정에서 그녀는 그동안 그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단목혜를 보고 있자니 자연 우이는 그 호방(豪放)하고 시원스러운 성격의 권왕이 떠올랐다.
맨주먹 하나로 강호를 무릎 꿇린 남자.
‘크하하, 자네는 정말 멋진 친구야.’
언제나 우이를 좋은 친구라고 말해 주던 그였다.
퇴임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권왕이 불쑥 말했다.
“우호위.”
“네.”
“우리 의형제 맺을까?”
“안 됩니다.”
“배분이니 예의니 다 따지고 보면 부질없는 거네. 강호는 뭐고 강호인은 또 뭔가? 의(義)와 협(俠)? 좋아, 좋다구.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하지만 적어도 난 아니네. 상식(常識)이 깨어지고 불가능(不可能)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내가 생각하는 강호란 바로 그러한 자유 그 자체라네. 크하하.”
권왕이 그 큰 주먹을 휘두르며 호탕하게 말했다.
우이는 미소만 지었고 권왕이 다시 애처럼 졸라댔다.
“이건 명령이야.”
“그래도 안 됩니다.”
“자네 이러긴가? 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네.”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 아닙니다.”
“흐음? 그럼 무엇 때문인가?”
“제가 손해라서 안하겠다는 겁니다.”
우이의 표정에는 이미 장난기가 가득했다.
“엥, 그건 무슨 말인가?”
“이렇게 젊은 동생을 얻는 것과, 늙은 형을 얻는 것이 어찌 같겠습니까? 제가 손해지요. 그래서 싫습니다.”
“크하하, 옳은 소리야.”
언제나 호탕한 그였고 그랬기에 그를 모신 지난 오년이 아깝지 않았다. 무림맹주로서 정치적으로는 실패한 그였지만 그런 건 우이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문득 그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라버니?”
단목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응?”
“아까 그 분….”
그녀는 아연에 대해 묻고 있었다.
여자들은 여자끼리 통하는 직감이라는 게 있고 어지간히 둔한 여자가 아닌 이상, 대부분 그것은 정확하기 마련이다.
단목혜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는 아연이 우이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느낌을 확인하고 있는 단목혜였다.
“아연이?”
“예쁜 이름이군요.”
“마음도 착하지.”
우이의 말에 단목혜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혹시 오라버니께서 좋아하시는 분인가요?”
우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밝은 표정에서 단목혜는 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아리하게 쓰려왔다.
어린 시절, 그녀는 친구가 없었다.
무림맹주의 외손녀라는 제약은 그녀에게서 진정한 친구란 것을 빼앗아 갔다. 언제나 조심스런 삶이었다. 그런 그녀가 외할아버지를 만나러 무림맹에 찾았을 때 그곳에서 우이를 보게 되었다.
따뜻하고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번쩍 안아주던 그는 어린 단목혜에게 오빠이자 친구였고, 그리고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게 된 그녀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가 맹주를 퇴임하고 난 뒤 우이를 볼 기회가 거의 없게 되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차에서 내려 처음 우이를 보았을 때 그녀는 정말로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처음에는 잘못 본 게 아닐까 했다. 비슷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했다.
우이가 저런 차림으로 이곳에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춘객잔의 탁자를 보는 순간, 그가 바로 우이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탁자는 초절정의 고수의 검에 의해 잘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아까 보았던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우이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단목혜는 우이를 정면으로 볼 수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우이는 그저 팔년 전 어린 동생을 보는 그 눈빛 그대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참, 태호에는 왜 온 거냐?”
우이의 물음에 단목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 우이는 그녀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누구를 만나기로 했어요.”
힘없는 단목혜의 말에 우이는 그녀가 무엇인가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참, 아까 그자와는?”
공야방을 말하는 것이었다.
단목혜의 아미가 찡그려졌다.
“우연히 동행하게 됐을 뿐,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그 말에 우이가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혹시라도 단목혜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저…일을 마칠 때까지 여기서 묵어도 되죠?”
단목혜가 살짝 볼이 붉어지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정작 우이는 그저 ‘그래’라고 대답했을 뿐이지만, 그들의 대화를 질투에 가득 찬 눈으로 훔쳐보고 있던 사람들, 즉 영춘객잔의 남자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모두 여섯이었다.
과거였다면 저 여인을 어디로 팔아넘길까를 고민했을 전직 불한당 둘과 천하제일고수를 꿈꾸는 어린 점소이 둘, 이번에야 말로 노총각 신세를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푼 꿈 많은 중년의 숙수였다. 그리고 그들 속에는 단지 미녀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젊어지고 있다는 기분에 덩달아 만세를 부른 영춘도 슬그머니 끼어 있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