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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의 비밀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고개를 갸웃뚱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점원은 주칠칠이 두려운 듯 그녀를 한 번 더 힐끔거리더니 슬금슬금 그
방에서 나가버렸다.
편지를 받아 든 심랑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 삼 경(三更)에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주칠칠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중요한 일? 그리고 또 뭐라고 씌워 있어요?
그것 뿐이오. 편지에는 이 몇 자 밖에 씌여 있지 않소.
주칠칠이 말했다.
누가 보내온거죠?
누가 보냈는지 서명이 되어 있지 않소. 그리고 필적도 상당히 낯설군요.
주칠칠이 중얼거렸다.
그것 참 이상한데요? 누가 보내온 걸까요?
그녀는 화를 내는 것도 빠르고 화를 삭히는 것도 빠른 여자였다. 그녀는
이미 심랑에게 앙탈을 부리던 일을 잊어버리고 심랑 가까이에 몸을 기대어
심랑과 같이 그 편지를 살피고 있었다.
그 편지를 쓴 종이는 매우 조잡한 것이었고, 먹물은 매우 희미했으며,
글자는 벌레가 기어간 듯 매우 어지럽게 씌여져 있었다. 얼핏 보기에
길거리에서 남에게 종이와 붓을 빌려서 급하게 쓴 편지인 듯해 보였다.
주칠칠은 눈썹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이 글자는 진짜 벌레가 기어간듯 듯 매우 어지럽게 씌여져 있군요.
발로도 이보다는 더 잘 쓸수 있을 것 같아요.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볼때,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틀림없이 보잘 것 없는 촌부일 거예요.
그녀는 그녀 자신도 이제 조그마한 일로부터 사건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게 대견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부듯한 마음으로
심랑이 몇 마디라도 그녀에게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심랑이
도리어 엉뚱한 말을 할 줄이야......!
촌부라고?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소.
주칠칠은 심랑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구요? 그렇다면 글공부를 한 사람이 이렇게 벌레가
기어가듯 엉망인 글씨를 써보냈다는 말인가요?
심랑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글자체는 비록 너저분 하지만 하고자 하는 얘기는 아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소. 만약, 조금도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결코
이처럼 자기의 의사를 정확하게 남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글을 쓸 수가
없었을 것이오. 그리고 또 자세히 살펴보시오. 이 글자체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소?
주칠칠은 정신을 집중하여 그 글자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이상한 점이 없는데요? 아, 그래요! 있어요!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상태예요. 마치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바람에 휩쓸려서 금방 쓰러질 듯한 그러한 모습이에요.
심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렇소!
주칠칠은 다시 고개를 갸웃뚱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또 왜 그런거죠?
이것은 바로 그 사람이 편지를 쓸 때 왼손으로 썼다는거요. 보통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글을 쓰는데, 오른손으로 글을 쓸 때는 필적이 약간
다르게 나타날수도 있소. 그러나 왼손으로 글을 쓸 때는 어떤 사람이
쓴다해도 그 필적이 비슷비슷해지게 되는거요.
주칠칠은 고개를 숙이고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말했다.
그 사람이 왼손으로 편지를 썼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필적을 알아내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이겠죠. 또 장님에게 편지를 전해 주라고 시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하게 만들
속셈이었겠죠.
여기까지 말하던 그녀는 다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이어서 말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일 거예요.
아울러 우리가 그 사람의 얼굴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필적까지도
아는 사람일 거예요.
심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그렇지만...... 그렇지만 삼 경 무렵 그 사람이 이곳으로 우리를 만나러
오겠다고 말하면서 왜 하필 자신이 누군지 알아내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을까요?
거기에는 틀림없이 다른 원인이 있을 것이오.
주칠칠이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맞아요. 이것은 틀림없이 동쪽에서 소리를 치고 서쪽을 공격하는 그러한
방법이에요. 아마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이 편지를 보내서 우리를 여기에
꼼짝 못 하고 기다리게 묶어놓은 다음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일을 하려
했던 것이겠죠.
심랑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말했다.
그 사람이 이 편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해도 우리는 오늘밤 여기서 묶을
뿐, 다른 데로 가지 않았을 것이오. 그 사람이 이러한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은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짓이 되지
않겠소? 그것은 필요없는 짓일거요.
주칠칠은 그 말을 듣고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그건 그래요. 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요?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도 이제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조목조목 지적을 해내니 제가 관찰한 게 전부 틀린 것 같이
보이는군요.
심랑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해서 그 원인을 찾아낸다는 것은 별로 어렵다고 할
수 없소. 그렇지만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조그마한 단서를
가지고 장차 발생할 일을 추측해 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오.
조그만 오차라도 아주 크게 일을 그르칠수가 있는 법이오.
그렇지만 당신도 그 사람이 이 편지를 보낸 데는 틀림없이 다른 원인이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모든 일은 반드시 여러 각도에서 생각을 해보아야 하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구해야 하는 법이오. 그리고 확실한 증거가 나타나기 전에는
누구도 어떠한 생각이 틀림없으리라는 단정은 할 수가 없소.
그렇다면 당신은 저와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다는 건가요?
크게 다르다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당신과 약간 생각을 달리해 보면 이
편지를 통해서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오. 어쩌면, 이
사람은 지금 적에게 추적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그래서 깊은 밤이
아니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오. 그리고 또
어쩌면, 그의 오른손은 이미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왼손으로 글을
썼어야만 했을지도 모르는 것이오.
심랑의 말을 듣고 주칠칠은 다시 깜짝 놀란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더니
실소하면서 말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은 꿈에도
생각해내지 못할 일을 당신은 남보다 한 발 앞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이렇게 조급하게 편지를 써서 보낸 점에서 미루어
볼때 어쩌면 삼 경이 되기 전에 그 사람이 찾아올지도 모르오. 그래서 그
사람은 삼 경이 되기 전이라도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 편지를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에서 꼼짝말고 기다리도록 만든 것일 거요. 그렇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무슨 까닭으로 우리를 찾아오는지는 지금 이순간은
단정할 수가 없소.
알 수 없는 일로 더이상 골머리 썩힐 필요는 없겠지요. 잠시 쉬기로
해요.
이때 김무망이 창쪽을 주시하면서 차갑게 말했다.
삼 경이 멀지 않은 것 같소.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겨울밤은 더욱 더디게 지나가는 듯했다. 김무망은
시종 꼼짝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창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며 주칠칠은 마음 속으로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조바심이 일어나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창밖에서 휙 하는 소리가 일어나며, 이어서 그들이 앉아있던 방의
창이 순식간에 불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날름거리는 속에서
창밖에는 마치 몇 개의 인영이 서 있는 듯했다. 불길이 일어나자마자
심랑이 쌍장을 동시에 쳐내었으며 장풍과 더불어 불에 타오르던 창은
그대로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김무망이 재빨리 침대에 널려 있던 이불자락을 집고 번쩍 몸을 날려
밖으로 뛰쳐나가 즉각 불길을 꺼버렸다. 이러한 일은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금도 당황해 하지 않고 소리 한
마디 내지 않은 채 순식간에 모든 일을 해치웠던 것이다.
심랑은 주칠칠을 바라보며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칠칠, 당신은 여기서 백비비를 지키고 있으시오. 내가 김 형과 더불어
적을 쫓아가겠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은 이미 창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주칠칠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주칠칠은 발을 구르며
원망스러운 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백비비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백비비를 잊지 못하는군. 그렇게 큰
사람을 내가 뭐하러 지킨다는거지? 그렇다면 나는 누가 지켜주지?
이때, 멀리서 이 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불길이 일어났을 때,
창밖 어둠 속에는 하나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러나 심랑과 김무망이
창밖으로 뛰쳐 나갔을 때 그 인영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심랑이 말했다.
대단히 빠른 신법이군.
김무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쫓아갑시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밖으로 뛰쳐 나갔다. 어두운 밤이라 두
사람은 상대방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도 없었으며, 눈위에 찍힌 상대방의
발자국을 자세히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상대방은 경공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미 그들을 찾아올 때 도망갈 길을 자세히 살펴둔 듯했다.
심랑이 전력을 다해 쫓아갔으나, 상대방의 뒷모습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김무망이 그를 쫓아왔을 때 심랑은 갑자기 뛰어가던 발을 멈추더니
한손으로 그를 잡고 크게 말했다.
이 사람이 우리를 찾아온 의도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우리가 손해를 본
것은 아니지 않소? 애써 쫓아갈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말을 마친 그는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쪽에서 소리지르고 서쪽을 공격하는 계책에 주의해 주시기 바라오.
김무망의 눈빛이 번쩍하더니 그도 큰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렇소. 돌아가도록 합시다.
말을 마친 후 그도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돌아가서 그녀들을 보살피겠소. 당신은 계속 쫓아가시오.
심랑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어깨를 으쓱하는 순간, 그의 몸은 길
옆에 서 있던 큰 나무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김무망도 고의로 뭐라고 중얼거리며 큰 걸음걸이로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차가운 바람이 살이 에이듯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으며 주위는 적막에 쌓여
있었다.
심랑은 숨소리를 죽이고 나뭇잎 속에 몸을 숨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상대방의 신법이 이처럼 빠르리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틀림없이 상대방은 이미 자신이 숨을만한 곳을 알아 두었다가 그 속으로
숨어들어간 듯했다.
적은 어두운 곳에 숨어있고, 나는 밝은 곳에 나와 있는 이상, 심랑이
이리저리 상대방을 찾아 헤멘다 해도 상대방을 찾아내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수시로 상대방의 암습에 대비해 하는 두 가지의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랑은 스스로 먼저 나무 속에 숨고, 상대방이 더이상
참지 못하고 나타나기를 기다리려고 했던 것이다. 심랑의 계책이
뛰어났으나, 상대방도 그렇게 우둔하지 않을줄 누가 알았으랴. 상대방은
심랑의 계책에 걸려들지 않았다.
심랑이 약 한 시진 이상을 기다렸으나 끝내 상대방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김무망이 객잔에 돌아왔을 때 객잔은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오직 그들이
묶었던 방 앞의 정원만이 환히 등불에 드러나 있었다.
주칠칠은 이때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눈사람은
아미타불처럼 뚱뚱하게 만드는 것인데 주칠칠이 만든 눈사람은 비쩍
마르고 키가 훌쩍 컸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추위에 사과처럼 발갛게 얼어붙어 있었으나 두 손은
쉬지않고 눈사람의 머리와 얼굴 모습을 계속 만들어 나갔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놀리면서 입으로는 중얼중얼 욕지꺼리를 퍼붓고 있었다.
양심도 없는 인간, 멍청한 사람 ! 다른 사람만 언제나 생각해 주고.
김무망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으나, 그녀는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입으로는 계속 욕지꺼리를 퍼부어 대고 손은 계속 눈사람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길에 따라 눈사람의 눈과 코와 입의 모습이
나타났다. 눈사람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그녀의 입가에 가벼운 웃음이
떠올랐다. 이때 김무망이 가볍게 마른 기침을 하면서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주칠칠은 깜짝 놀랐으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타난 사람이 김무망임을
확인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이었군요. 깜짝 놀랐잖아요.
그녀는 눈을 꿈벅거리며 뒤쪽을 돌아보고 이어서 말했다.
언제 돌아오셨죠? 그리고 그 사람은요?
심 형은 여전히 상대방을 뒤쫓고 있소.
주칠칠이 말했다.
틀렸어요. 그 사람은 이미 돌아왔어요.
말을 마친 그녀가 피식 웃더니 자신이 만든 눈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보세요, 이미 이 앞에 서 있지 않아요?
그녀는 한참을 뚫어질 듯 눈사람을 쳐다보더니 사과처럼 빨간 얼굴에
떠올랐던 웃음이 점점 사라지며 고개를 떨어뜨리고 가볍게 탄식을 했다.
김무망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일말의 연민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냉랭하게 주칠칠에게 말을 건넸다.
이곳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소?
주칠칠은 고개를 쳐들고 되려 반문했다.
무슨 일이 있다니오? 아무일도 없었어요.
김무망이 말했다.
내가 당신의 곁에까지 다가갔는데도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소.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다해도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을것이오. 당신은
왜 방 안에 있지 않고 밖에 나와있소?
주칠칠은 눈을 크게 치뜨면서 말했다.
방 안에서 뭘 하라는 거죠? 그렇다면 당신의 말은 내가 백비비의 계집종
노릇이라도 하라는 건가요? 백비비의 침대 머리맡에 지켜 서서 그녀가
잠자는 모습을 살피라는 건가요? 그녀의 이불이나 잘 덮어주고 춥지
않을까, 덥지 않을까 그거나 살펴보라는 건가요?
김무망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주칠칠은 그러한 김무망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당신은 왜 이렇게 저에게 사납게 대하시는 거죠? 그날...... 그날 일
때문에......? 어떻든 죄송해요.
김무망은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몸을 날려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주칠칠은 여전히 눈 위에 서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김무망의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주칠칠이 만들어 놓은 눈사람이
옆으로 쓰러졌다. 주칠칠의 눈에서는 두 줄기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때 갑자기 집안에서 김무망의 실성한 소리가 들려왔다.
큰일났소.
주칠칠도 깜짝 놀라 몸을 번쩍 날려 집안으로 뛰쳐 들어가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
김무망은 한 손으로 백비비가 잠을 자고 있던 조그만 방의 문을 열어젖힌
채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방 안을 똑바로 주시하며 한 자 한 자
신중하게 말했다.
당신이 보도록 하시오.
백비비가 잠을 자던 그 조그만 방의 침대에는 이불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으며, 침대 곁에 있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창문을 통해 일진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닥쳐 침대옆 조그만 탁자 위에
올려놓은 촛불을 끄려는 듯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이불자락의 한쪽 끝은 침대 옆에 있던 불화로에 닿아 타고 있었으며,
한쌍의 부젓가락이 화로옆에 떨어져 있었다.
백비비 그녀는......?
주칠칠이 실성한 음성으로 외쳤다.
백비비는?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간거죠?
김무망이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질문은 내가 해야 될 것 같소.
주칠칠은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망할 년, 도대체 어디로 간거지? 뭐하러 나간거지? 나한테 한마디 하고
나갔어야 되는데...... 백비비! 백비비!
김무망이 말했다.
불러도 소용없을 것이오.
주칠칠이 말했다.
제가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 혹시.......
김무망이 차가운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속이겠다는 거요? 아니면 당신 자신을 속이고 싶은거요?
보시오! 열려진 창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이불, 침대. 그녀가 혼자 스스로
이 방에서 빠져 나간 것 같소?
주칠칠은 한달음에 침대 앞으로 달려가 침대의 모습을 살피더니 털썩하고
침대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그래요. 그녀는 스스로 이 방을 빠져 나간 게 아니에요. 틀림없이,
틀림없이 납치를 당한 거예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누가 그녀를 납치해간
거죠? 왜 그녀를 납치해간 거죠?
김무망은 말을 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을 들어 사방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촛불빛은 비록 어두컴컴했으나 그가 사방을 살피기에는 충분한 밝기였다.
주칠칠은 침대에 걸터 앉은 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좋죠? 어떻게 하면 좋죠? 그렇게 약한 여자가 다른 사람에게
납치가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죠?
김무망이 말했다.
그렇게 조급해 할 사람이 평시에 왜 그녀에게 조금 더 잘 대해주지
못하였소?
주칠칠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왜 그랬는지. 평상시에는 그녀를 보기만 하면 화가
나요. 그렇지만 지금은...... 지금은.......
김무망은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천천히 말했다.
내가 이미 당신에게 말했던 적이 있소. 당신은 원래 선량한 여자요.
다만.......
그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방을 쉬지않고 살펴보고 있었다. 이때 그가
갑자기 한달음에 침대머리로 달려더니 침대에서 한가지 물건을
집어올렸다.
주칠칠이 물었다.
무슨 물건이죠?
김무망은 주칠칠의 물음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손 안에 쥐어져 있는
물건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김무망의 얼굴색이
공포스럽게 일그러져 갔으며,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더니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바로 그 놈이야!
주칠칠은 깜짝 놀라 다시 질문했다.
그놈이라뇨? 도대체 누구죠?
김무망은 입술을 깨물며 짤막하게 세 글자를 뱉어냈다.
김 불 환
주칠칠은 앉았던 자리에서 펄쩍 뛰어 일어나며 얼굴색이 변한 채 물었다.
김불환이라구요?
김무망은 움켜쥔 주먹을 주칠칠의 면전으로 뻗어 천천히 다섯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그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조그만 갈색의 옷조각이었다.
그 옷조각을 살피던 주칠칠도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바로 그 놈이군요! 이 옷조각은 바로 그 녀석이 입고 다니던
옷의 한조각이에요. 틀림없이 백비비가 몸부림칠 때 찢어져 내린 조각일
거예요.
김무망은 뚫어질 듯 창밖을 주시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는 푸른 힘줄이 울퉁불퉁 뛰쳐 올랐으며, 두 눈은 튀어나올 듯
붉어져 올랐다. 꽉 다문 이에서는 부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주칠칠은 그에게 몇 마디 더 물어볼 게 있었으나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김무망의 자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내 잘못이오. 내가 그 녀석의 목숨을 살려주지만 않았어도 이러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주칠칠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밖에만 나가지 않았어도.......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김무망이 노갈을 터뜨렸다.
더이상 말하지 마시오!
그러나 한참이 지나서 주칠칠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조급해 하지 마세요. 심랑이 돌아오고 난 다음에 다시
대책을 강구하도록 해요.
김무망이 날카롭게 말했다.
이 일은 나 김무망의 일이오. 왜 심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거요. 당신이 심 형에게 몇 마디 전해주시오. 삼 일 내에 내가 그 녀석을
찾아내서 갈갈이 찢어 죽이지 않는다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창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김무망이
창밖으로 뛰쳐 나간 후, 한참을 망연자실하여 하던 주칠칠은 크게
부르짖으며 창밖으로 쫓아 달려갔다.
기다리세요, 돌아오세요.
그러나 그녀가 창밖으로 뛰쳐 나왔을 때, 김무망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칠칠은 김무망이 사라진 쪽을 향해 미친 듯 달려나갔다. 한참을 달리던
그녀는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방향을 바꾸어 심랑이 쫓아간 쪽으로
뛰어가며 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심랑, 심랑...... 어디 있어요, 빨리 나타나세요!
이때 심랑은 나뭇가지 속에 몸을 숨긴 채 주위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한참을 이러한 자세로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는 조금도 조급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끝까지 참아내지 못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때 주칠칠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심랑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으나 곧 다시 태연한 모습으로
숨어있던 나무 속에서 뛰쳐 나와 어둠을 향해 신중하게 말했다.
좋소, 친구. 오늘은 당신이 운이 좋았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당신이
누구든 이처럼 대단한 참을성이 있다는 것에 나 심낭은 탄복하는 바이오.
주칠칠의 그를 부르는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심랑은 가볍게 탄식을 하고 주칠칠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려
뛰어갔다.
주칠칠이 심랑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심랑이 주칠칠을 찾기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주칠칠이 심랑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는 미친 듯 심랑의 가슴 속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아무 일 없었군요, 당신이 돌아와서 안심이에요.
심랑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소?
김불한, 김불한 그 녀석이...... 그 녀석이.......
심랑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 녀석이 어떻다는 거요? 혹시.......
그 녀석이 백비비를 납치해 갔어요.
심랑의 얼굴색이 변하더니 조급하게 말했다.
김무망은? 왜 김무망이 그 녀석을 막지 않았지?
백비비가 납치됐을 때 김무망 그 사람은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어요.
심랑은 가슴에 안겨 있던 주칠칠을 힘껏 밀어내며 날카롭게 추궁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김불한이 백비비를 납치해 가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가만히 있었단 말이오?
심랑이 힘껏 밀어내자 주칠칠은 뒤로 비틀비틀 몇 걸음 물러서더니 역시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저는 몰라요. 저는 알지도 못했어요. 제가 백비비가 자는 옆에서 그녀를
지킬 수는 없잖아요? 저는...... 저는 계속 정원에 있었던거예요.
심랑은 오른발을 들어 힘껏 땅바닥을 내려 밟더니, 몸을 돌려 나는 듯
객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주칠칠은 그의 뒤를 울면서 쫓아갔다.
그들이 객점에 돌아왔을 때 심랑은 백비비가 자고 있던 방 안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김무망은 김불한 그 녀석을 쫓아간거요?
그래요.
무슨 말을 남기지 않았소?
김무망 그 사람이 삼 일 내에 반드시 김불한 그 녀석을 찾아서 갈갈이
찢어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심랑이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삼 일? 어떻게 삼 일이나 기다린단 말이오?
심랑은 김무망의 무공이 김불한보다 훨씬 뛰어났으나, 간사한 계책으로
논하면 결코 김불한을 쫓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김불한을 그가 쫓아간 점에 대해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쫓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아마도.......
심랑이 그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김 형은 어느 쪽으로 갔소?
주칠칠은 심랑을 그 작은 방의 창쪽으로 데려가 손가락으로 김무망이
사라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이쪽으로.......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하나의 인영이 나는 듯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인영의 경공은 비록 무림의 일류
고수라고 할 수 있었으나, 결코 김무망은 아닌 듯해 보였다. 주칠칠은
깜짝 놀란 듯 실성한 소리로 말했다.
아,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녀는 원래 그 편지를 보낸 까닭은 동쪽에서 소리지르고 서쪽을
공격하려는 사람들의 계책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순간 편지에 씌여진대로
사람이 나타나자 깜짝 놀랐던 것이다. 심지어 심랑마저도 약간 놀란 듯
신중한 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지?
그 인영은 마치 심랑 등이 묶고 있는 곳을 정확히 알기라도 하는듯 곧바로
그들이 서 있는 창쪽으로 달려왔다.
그 인영이 창 바로 앞에까지 도착했을 때 심랑은 비로소 그 인영이 한
사람의 거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 거지의 머리는 어지럽게 풀어헤쳐져
있었으며 옷은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였고, 손에는 탁오봉을 들고 있었고
등에는 몇 겹의 마대를 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 모습은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주칠칠이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혹시, 김불한이 다시 온 걸까요? 아닌 것 같아요.
나타난 사람의 등에 메고 있는 마대만 보아도 그 사람은 개방의
정식제자로서, 아무 소속없이 거지 행세를 하고 있는 김불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개방 제자는 그들이 서 있는 창 앞 우측 가까이까지 오더니 달리던
몸을 멈추고 읍을 하면서 말했다.
심 형은 안녕하시오?
심랑이 깜짝 놀란 듯 말했다.
그렇소.
개방 제자가 또 말했다.
주 아가씨도 안녕하시오?
주칠칠도 깜짝 놀란 듯 말했다.
예, 아무 일 없어요.
심랑과 주칠칠 두 사람은 입으로는 비록 상대방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으로는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방 제자와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는데
상대방이 자신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던 것이다.
그 개방제자는 그들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고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께서는 저를 모르시겠다는겁니까?
그 사람은 심랑과 주칠칠 곁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가볍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사실, 제가 최근 많이 변했습니다. 몰라 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요.
심랑은 이 순간에야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그
거지의 얼굴은 매우 초췌한 듯했으며 얼굴에는 덕지덕지 때가 끼어
있었다. 얼핏 보건대 상당히 초라한 모습이었으나, 그 거지의 흑백이
분명한 두 눈은 여전히 옛날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칠칠도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아! 당신이었군요.
심랑도 깜짝 놀란 듯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했다.
원래 서 형이셨군요.
그 개방 제자도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소이다. 바로 서약우이외다.
누가 옛날의 그 화려한 장식을 좋아하고 스스로 풍류남아라고 자처하던
옹련요금 신검수 서약우가 오늘 이렇게 개방에 투신할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방 안의 밝은 등불 아래서 보는 서약우의 모습은 더욱 초라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왼손에는 탁오봉을 들고 오른손에는 흰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오른손을 동여맨 붕대에는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주칠칠은 그의 붕대를 감은 오른손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보낸 그 편지는 당신이 보낸 겁니까?
서약우가 말했다.
그렇소.
주칠칠은 웃음을 머금은 채 탄복하는 눈으로 심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심랑의 추측이 정확히 맞아 들어간데 대해서 탄복하는 마음이
우러났던 것이다.
심랑은 주칠칠의 그러한 눈길을 모른 척 서약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얼마간 못 뵙는 사이에 서 형께서는 어떻게 강호 제일방에 투신하게
되었습니까?
심랑은 말을 할 때 언제나 상대방을 염두에 두고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개방이라는 말 대신 강호 제일방이라는 말로 대신했던 것이다.
서약우는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말하자면 길어집니다.
심랑은 그의 웃음 속에 참담한 기색이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얼른 화제를
돌려서 말했다.
서 형께서는 오늘 어떠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저와 상의하시려 하는
겁니까?
서약우가 신음소리를 내며 한참 깊은 생각에 잠겨있더니 고개를 들고
심랑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 일은 제가 개방에 투신하는 그 시점에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겁니다.
심랑이 말했다.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서약우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제가 그 고묘에서 심 형과 헤어진 후 지난 날의 행동에 대해서 상당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지난 날의 제 잘못을
씻어내야 할 지 알수가 없더군요.
그는 잠깐 탄식을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당시 저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에 세상을 살아갈 의욕이 점점 사라져
갔습니다. 그래서 방향도 살피지 않고 터벅터벅 이리저리 돌아다녔죠.
불과 보름도 지나기 전에 제 모습은 이미 초라하게 변했고, 거지와 별반
다름없는 상태로 되어 갔습니다.
심랑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서 형께서는 하필 그렇게 자책할 필요까지야.......
서약우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심 형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당시 저는 제 몸을 혹사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슴에 쌓여있던 죄책감과 고통을 덜어낼 수 있었던
겁니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개방은 현재 무림계의 제일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문하의 제자들은
천하에 널리 산재해 있고, 그 위세는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을
정도입니다. 서 형께서 만약 몸을 혹사하기 위해서 개방에 투신하였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까요?
서약우가 말했다.
저는 본래 개방에 투신할 의사는 없었습니다. 다만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거지꼴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이 제 모습을 보고 가련하다고 여겨
저에게 적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들이 적선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구요.
그는 또 씁쓸하게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만 제가 어찌 개방의 서식이 그렇게 정통하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저를 알아보고 개방의 세 분 장로를 파견해서
저와 담판을 하였던거죠.
주칠칠이 말했다.
담판할 게 뭐가 있다구요?
서약우가 말했다.
그들은 제가 이미 구걸행위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개방에 가입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들의 규정을 위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개방의 모든 제자들은 저를 적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거였죠.
주칠칠이 말했다.
세상에 그런 엉터리 규정이 어디 있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개방에
가입하겠다고 말했다는 건가요?
서약우는 그녀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고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그렇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개방에 가입하겠다고 말을 했지요.
저는 그 당시에 제 앞길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에게 머리를 박박 깍고 화상이 되라고 했다면
아마 저는 지금쯤 화상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개방의 그러한 방법은 인재를 구하려는데 그 본뜻이 있을 뿐이오. 그들이
만약 서형의 무림계에서의 명망과 무공을 중시하지 않았다면 서 형 등에
그렇게 많은 마대를 매고 다니게 하지도 않았을것이오.
그는 한눈으로 서약우가 등에 매고 있는 마대가 일곱 자루나 되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개방 제자들이 등에 매고 다니는 마대는 바로
개방에서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써 마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지위가 높은 것이었다.
마대 하나에서부터 마대 일곱 자루를 매는 신분까지의 과정이란 매우
어렵고 긴 세월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서약우가 개방에
투신하자마자 일곱 자루의 마대를 매는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개방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전례가 없는 일이며 서약우에 대한 특별한
우대라고밖에 생각지 않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약우는 도리어
탄식하면서 말했다.
제가 그당시에 만약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개방에
투신했겠습니까? 그리고 또 이왕 개방에 투신한 이상 어떻게 마대 몇자루
많고 적음에 연연해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웃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만약 제가 마대 일곱 개를 맬 수 있는 제자가 되지 않았다면,
저는 그러한 중요한 비밀을 들을 수도 없었겠지요.
심랑이 말했다.
보건대 서 형께서 오늘 저를 찾아오신 것은 틀림없이 방금 말씀하신 그
비밀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는 듯하군요.
바로 그렇소이다.
주칠칠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비밀인데요? 빨리 말씀해 보세요.
주칠칠이 대화에 끼어 들기만 하면 서약우는 고개를 숙이고 주칠칠의
눈길을 피하고는 하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제가 개방에 투신한 후에 개방에서는 저에게 아무런 임무도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매일 개방의 세 분 장로를 수행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는 것 뿐이었죠.
주칠칠이 말했다.
방주는요? 당신은.......
심랑이 주칠칠의 말을 가로채고 말했다.
개방은 지난 해 옹 방주가 돌아가신 후에 방주의 자리는 지금까지
비어있는 상태요. 방 중의 큰 일들은 모두 그 세 분 장로께서 공동으로
상의하셔서 결정하고 있소.
주칠칠이 눈을 깜박거리면서 말했다.
그럴 필요가 있어요? 아예 그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출해서 방주로
삼으면 되지 않겠어요?
심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세 분 장로는 무림계에서의 대본이나 무공이나 명망이 모두 서로
엇비슷하오. 그래서 세 분이 서로 상대에게 양보를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방주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들 세 사람이 서로 상대에게 양보하는 게 아니겠죠. 저는 강호에
그처럼 듣기 좋은 일이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어요. 만약 그들 세
사람이 서로 방주자리를 놓고 다투는데, 아무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도 방주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나아가 상대방도
방주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말을 한다면, 그러면 혹시 믿을 수
있을까 몰라도.......
심랑이 말했다.
당신은 꽤 총명한 편이오.
저는 총명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러한 일은.......
그녀는 심랑을 한 번 바라보고 갑자기 말머리를 바꿔서 말했다.
그 뒷일이 어떻게 됐는지 계속 말해 보시죠.
서약우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 분 장로를 쫓아다니는 며칠간은 매우 한가로웠으나 나는
상당히 이상한 일을 발견하게 되었던거요.
또 주칠칠이 끼어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그 세 사람은 제가 개방에 투신한 그 날부터 시작해서 한순간도 내
옆에서 떠나지 않고 붙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제 옆에서
나갈 때는 같이 나가고, 제 옆으로 돌아올 때는 같이 돌아오는 것이었죠.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도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제 옆에 붙어 있는
겁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죠. 그러나 후에 그 세
사람이 서로 아무도 저와 단독으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던 겁니다.
주칠칠이 말했다.
그건 이상한데요? 당신은 여자도 아니고. 혹시 그들 세 사람이 서로
질투라도 했단 말인가요?
그녀는 갑자기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군요. 그 세 사람은 서로 방주자리를 놓고 다투고 있었던 거예요.
누구도 상대를 이길 수 없었기 때문에 그중에 누구라도 당신의 도움이
있기만 한다면 다른 두 사람을 누르고 방주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이러한 상황 아래서 그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그중 누구 한 사람이 당신을 설복해서 자기편으로 끌어 들일까봐 걱정하게
됐던거죠. 그래서 당연히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과 당신이
단독으로 얘기하는 기회를 갖지 못하도록 방해했던거죠.
심랑이 신음섞인 소리로 말했다.
저는 개방 삼로 가운데서 단공 장로의 성격은 편벽해서 때때로 멋대로
행동하는 결점이 있고, 구양륜 장로는 게걸스럽기는 하나 협의의 인물이고
아울러 매우 정직하다고 들었고, 좌공룡 장로는 상당히 인자하고 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소. 그들 세 사람은 무림계에서 현명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오. 어떻게.......
서약우가 그의 말을 가로채고 장탄식하면서 말했다.
사람은 얼굴만 보고는 그 마음 속을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제가 만약 그
세 장로와 그렇게 매일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꿈에도 그 세 사람 중에
인면수심의 악마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겁니다. 만약 제가
우연한 기회에 그 사람의 악독한 계책을 알아 내지 못했다면 개방의 수천
명의 제자들은 틀림없이 그 사람의 손에 목숨이 위태로와질 겁니다.
심랑이 얼굴색을 변하며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소?
서약우는 침중한 표정으로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심 형을 찾아온 원인은, 첫째는 이 일이 심 형과 약간의
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심 형께 강호의 도의를, 그리고 강호의
정의를 위해서 개방의 이 위험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드리는 이유에서
입니다.
심랑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제가 이미 개방은 무림계에서 가장 큰 방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개방이 만약 악한 인간의 손에 흘러들어가게 된다면 강호에는 틀림없이 큰
난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서 형께서 제게 시키실 일이 어떤 일인지
빨리 말씀해 주시오. 제 힘이 닿는 한 강호의 대란을 막기 위해서 저는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 서 형의 분부를 따르겠습니다.
서약우가 말했다.
이 일은 사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됩니다.
서약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신중한 음성으로 이어서 말했다.
사일 전에 저는 그 세 분 장로와 황폐한 사당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가볍게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었으나, 저는
잠이 들지 않아 이리저리 몸을 뒤척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칠칠이 조바심이 나는 듯 또 끼어들었다.
그 세 사람은 모두 자는 척 하고 있었던거겠죠?
서약우가 말했다.
그날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매우 추운 날이었소. 우리 네 사람은 황폐한
사당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네 사람이 그 모닥불을 에워싸서 잠을 자고
있었지요. 내 발밑에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은 구양륜 장로였소. 구양륜
장로의 머리는 좌공룡 장로와 같이 놓여 있었죠. 좌공룡 장로의 발은 단공
장로의 발에 닿아 있었소. 단공 장로의 머리는 자연히 내 머리곁에 같이
뉘여져 있었죠.
주칠칠이 실소하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잠을 자고 있었는지가 당신이 지금 말하려고 하는
비밀과 관계라도 있다는 건가요?
서약우가 말했다.
당연히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지요. 밤이 깊었을 때 저는 모닥불의
불길이 점점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마른 장작 몇 개를 더
집어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나려고 할 때였소. 그런데 바로 그순간,
갑자기 단공 장로가 슬며시 손을 뻗치더니 손가락으로 내 머리에 천천히
몇 개의 글자를 써넣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주칠칠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 인간은 과연 잠을 자는 척 했던거군요.
심랑은 도리어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단공 장로가 썼다는 몇 글자가 틀림없이 서 형께서 말씀하시는 비밀과 큰
관계가 있겠군요.
서약우가 말했다.
그 사람이 쓴 몇 개의 글자는 바로 '당신과 내가 힘을 합쳐서 좌씨를
없애버립시다' 하는 거였소.
주칠칠이 말했다.
단공, 그 인간은 과연 올바른 인간이 아니었군요. 개방의 세 분 장로 중
좌공룡은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당신은 단공 그 인간의
제의에 동의하지는 않았겠죠?
서약우가 말했다.
그때 나는 비록 그가 쓴 글자를 똑똑히 알아차릴 수 있었으나, 전혀 모른
척 하고 있었소. 그러자 단공 장로가 다시 몇 개의 글자를 더 쓰는
것이었소. 그 글자는 '이 인간은 믿을 수 없소. 오늘밤 손을 써야 하오.
바로 이순간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이때 주칠칠이 또 끼어들었다.
그리고 또 뭐라고 썼지요? 빨리 좀 말씀하세요.
그의 손놀림은 갈수록 무거워져 갔소. 제가 느끼건대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소. 그렇지만 그 사람이 이 몇 개의 글자를 다 썼을
때, 좌공룡 장로가 갑자기.......
그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창밖에서 갑자기 일진의 옷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그들이 앉아있던 방의 창문은 꼭꼭 닫혀 있었는데,
이 옷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매우 똑똑히 들려오는 것을 보면 지금
창밖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매우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옷깃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서약우의
얼굴색이 갑자기 처참하게 일그러지며 부르짖었다.
큰일났소.
심랑이 한손으로 재빨리 촛불을 눌러 끄며 말했다.
서 형께서는 지금 밖에 쫓아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다는거요?
서약우가 말했다.
좌공룡
심랑은 이상하다는 듯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사람이 왜......?
이때 갑자기 창밖에서 침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개방 삼로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반도 서약우를 체포하기 위함이오.
원컨대 강호의 친구들은 제발 이 일에 끼어들지 말기를 바라오.
그 말소리는 매우 신중하고 내력이 충만해 있었다. 말을 하는 사람의
내력이 매우 깊음을 말소리를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심랑은 작은 소리로 서약우에게 물었다.
지금 말을 하는 사람이 바로 좌공룡이오?
그렇소이다.
심랑은 비록 더이상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무공으로 논한다면 개방 삼로의 명성은 결코 무림 칠대고수에
쫓아가지 못할텐데 어떻게 좌공룡의 내력이 얼핏 듣건데, 천법 대사나 단
공자, 웅사교오 등보다도 더 깊은 듯 한 거지? 혹시 그가 지금까지 여태껏
자신의 본 무공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최근에 무슨
기연이라도 만난 것일까?)
창밖에서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서약우, 그래도 빨리 나오지 못하겠는가? 네 녀석이 이미 그 속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계속 숨어있는다 해도 소용없다.
지금 네 녀석이 숨어있는 방의 전후좌우가 모두 포위되어 있다. 도망갈
생각은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주칠칠이 말했다.
저 사람들은 당신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던 게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왜 당신을......?
서약우가 주칠칠의 말을 끊고 장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자신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나를 죽여서 내 입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소.
주칠칠이 말했다.
괜찮아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심랑이 여기 있는데, 아무도 당신을 죽일
수는 없을 거예요.
- 제 3권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