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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누가복음 제16강
말씀을 듣고 지키라
말씀 / 누가복음 8:1-21
요절 / 누가복음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오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말씀을 듣는 마음 밭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지 살펴보고 좋은 마음 밭을 일구어 풍성하게 결실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복음사역에 헌신한 여인들 (1-3)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 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예수님은 복음사역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셨습니다. 갈릴리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늘 열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복음의 일꾼들로 훈련하셨습니다. 이들은 아직 어리지만 장차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만민구원사역을 섬길 예수님의 계승자들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전도여행에는 여러 여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막달라인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던 비참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런 마리아를 예수님은 새 사람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기초해 헌신적으로 주님과 복음사역을 섬겼습니다. 요안나는 헤롯왕의 재산관리 책임자인 구사의 아내로 강남의 귀부인처럼 외제차를 몰고 고급 레스토랑에 드나들며 사모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외에도 ‘백합화’란 이름을 가진 수산나는 아름다운 백합화처럼 예수님을 아름다운 헌신으로 섬겼습니다. 그 외에 여러 믿음의 여인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후 자기 소유를 드려 늘 배고픈 예수님과 제자들을 맛있는 음식으로 섬겼습니다. 또 양들을 위해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중보기도의 수고를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역사가 일어나는 곳에는 어디서나 믿음의 여인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모임도 머더배리, Grace A. Lee. 전선지 선교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여인들의 헌신과 동역으로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진주 교회의 세 분의 자매 목자님들도 여유로운 여가 생활을 즐기며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구원의 은혜에 기초하여 양들을 섬기며 중보기도의 수고를 힘써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섬기시는 자매 목자님들의 헌신을 주님께서 받으시고 우리 교회를 부흥케 하시며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세우실 줄 믿습니다.
Ⅱ.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21)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비유를 가르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5-8).”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외치셨습니다. 이를 볼 때 들을 귀 있는 자들이 있고 들을 귀 없는 자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들을 귀 있는 자만이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을 귀 있는 자는 어떤 자입니까? 귀가 있다고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깊이 이해하며 듣는 사람입니다. 그는 한 마디만 해도 척척 다 알아듣습니다. 반면에 들을 귀 없는 자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전혀 생각해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한국말인데 전혀 말귀를 못 알아먹습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또 다른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귀에는 세상적인 귓밥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큰 무리는 예수님께 나아와 폭포수와 같은 은혜의 말씀을 듣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고 뻔한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뻔한 얘기 해놓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어 많은 무리들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큰 무리 중에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조차도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비유의 뜻이 궁금했습니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9)” 이것은 ‘비유의 뜻이 뭡니까?’ 단순히 물어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물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에페로톤’으로 ‘신문하고 있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집요하게 질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비록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 뜻을 알기 위해 집요하게 열정적으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어찌하든지 알고자 하는 영적소원이 충만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요 겸손한 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소원을 가지고 나아온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합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자들과는 달리 알고자 하는 영적소원도 겸손한 자세도 없었습니다. 들을 귀가 없으면 알고자 하는 소원이라도 겸손함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들은 이것마저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아도 인식하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영적소원을 가지고 겸손히 나아온 제자들에게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십니다. 이 비유에서 씨 뿌리는 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씨가 떨어진 땅은 말씀을 듣는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씨에는 생명력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씨를 땅에 뿌리면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씨가 어디에 뿌려지냐에 따라 열매를 맺느냐 못 맺느냐가 결정됩니다.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첫째, 길 가와 같은 마음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가는 밭과 밭 사이에 있는 길로 보통 농부들이나 경운기, 트랙터 등이 다니고 때로는 여행객들도 다닙니다. 이 길은 사람들이나 농기계로 인해 다져져 딱딱합니다. 씨가 심겨질 틈이 없습니다. 이곳에 뿌려진 씨는 짓밟히다가 결국 새에게 먹혀버립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예 말씀이 심겨지질 않습니다. 마음이 완악해서 말씀을 듣는 즉시 튕겨 버립니다. 전도하다보면 이런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불신자들입니다. 왜 그들의 마음은 길가와 같을까요? 자기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생각과 고집, 교만 때문에 조금도 마음의 틈을 주질 않습니다. 이런저런 세상의 인본적인 지식이 사람의 마음을 굳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 중 하나일 뿐이라 치부해버립니다. 또 교회에 다니며 말씀공부는 하지만 말씀에 구속받기는 싫다며 말씀을 튕겨내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불신자와 다름없는 무늬만 크리스천입니다.
우리는 12절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뿌려질 때 마귀도 함께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도록 열심히 일합니다. 20세기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의 ‘스쿠르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보면, 스쿠르테이프가 이제 막 유혹사역을 시작한 초보악마 웜우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환자들이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든 축구를 하든 성경 퀴즈대회를 하든 상관 말고 내버려두라.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고자 할 때는 비상사태다. 어찌하든지 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하라.” 마귀는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또 성경을 공부할 때 열심히 일합니다.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가 말씀을 튕겨내는 순간 벌떼처럼 달려들어 주워가 버립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다 말씀을 제대로 영접하지 않으면 즉시 와서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길가와 같은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호세아 10장 1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회개의 트랙터로 굳어지고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럴 때 공의의 말씀을 비처럼 내려주셔도 다 영접할 수 있는 좋은 땅이 됩니다.
둘째, 바위와 같은 마음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바위 위는 얕은 흙이 덮여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씨가 뿌려지면 잘 싹이 납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려야 할 때에 바위가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뿌리가 짧습니다. 바람이 불면 쉽게 넘어져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아주 완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영적소원이 있어 말씀도 잘 듣고 은혜도 받습니다. 한 번 은혜를 받으면 당장 목자요 선교사로 살겠다고 큰 소리 치는 바람에 목자들을 흥분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바람과 함께 나타났다가 시련의 때에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립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뿌리입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세상적인 야망이 숨겨져 있습니다. 절대 회개하지 않고자 하는 남모르는 죄가 숨겨져 있습니다. 지극히 편한 신앙만을 추구합니다. 이와 같은 커다란 바위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말씀이 더 이상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겁니다. 뿌리가 얕으니 시련의 바람이 불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깊이가 1인치 밖에 안 되는 피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하고 자기욕심을 따라 움직이는 감정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꿈과 이상의 바위를 깨고 드러내면 죽는 줄로만 생각합니다. 내 인생이 없어지고 망할 것 같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에 바위를 깨고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함으로 깊이 뿌리내릴 때 말씀이 나를 지켜주고 말씀이 내 인생을 인도해 줍니다. 말씀이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려 어떤 역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뿌리가 없어 부평초처럼 이리저리 떠다니는 신앙이 아니라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려 깊은 영적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이 밭은 원래는 씨가 잘 자랄 수 있는 밭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마음이 길가처럼 딱딱하지 않습니다. 바위와 같은 숨은 야망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셋 중에선 괜찮은 땅 같습니다. 문제는 그 밭에 가시떨기도 함께 자란다는 것입니다. 가시떨기는 억세기 때문에 씨가 그 기운에 막혀 잘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구하는 마음이 가시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이 가시에 찔리고 나면 맥을 못 춥니다. 이 마음 밭은 오늘날 신자들, 특히 구신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사단은 자꾸 우리 마음에 염려의 가시들을 심습니다. 먹고 살 걱정, 자식들 교육걱정, 장래걱정, 물질염려, 건강염려 등 염려와 걱정이 끊이질 않습니다. 이러다보면 말씀은 뒷전이고 생각과 관심은 현실문제 해결에 급급하여 생활인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또 재물의 유혹이 가시가 되어 찌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나도 저 정도는 갖추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명품 옷에, 고급 외제차를 몰고 크고 넓은 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벌어 두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또20억에 당첨되었다한들 우리의 욕심이 거기서 끝이겠습니까? 물질에 대한 욕심에 한번 사로잡히게 되면 영적소원이 사라지고 자꾸 마음이 물질에 분산됩니다. 재물은 필요하지만 이것을 모으는데 인생의 소망과 목적을 두게 되면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소망과 영적인 기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9,10절에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이르게 된다고 돈 욕심 부리는 자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분량 안에서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향락의 가시가 있습니다. 틈만 나면 게임 하느라 영력을 다 소진합니다. 청년의 때 정욕의 가시에 찔리기 쉽습니다. 어떤 사람은 각종 영화나 드라마(미드, 일드)에 빠져 말씀 볼 시간이 없습니다. 먹거리와 볼거리, 놀거리, 즐길거리가 많은 이 시대의 세상 잔재미들이 말씀을 막아 우리의 영적 영양분을 다 빨아 먹어버립니다. 하루에 인터넷 서핑 2~3시간씩은 기본으로 하지만 기도하는 시간은 기본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육신이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한 우리 마음에는 끊임없이 이런 가시들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가시를 뽑는 것을 포기하고 세상과 적당히 짝하는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쉽습니다.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께 열심히 하고 세상에 나가서는 그곳에 충실합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가시의 기운에 막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신자들이 힘없이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시에 기운이 막혀 질식당해 죽은 신자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름캠프를 통해 많은 은혜와 감동이 있었습니다. 말씀공부와 예배를 통해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감동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밖으로 나가면서 이런저런 유혹 가운데 가시밭길로 걸어들어 갑니다. 우리는 말씀의 감동에서 삶의 변화와 열매로의 연결 끈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날마다 마음에 틈타는 가시들을 뽑아내는 것입니다. 대충 윗부분만 뜯어내 버리면 가시는 죽지 않고 다시 순이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적당히 치우면 안 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가시 뽑는 작업을 통해 말씀의 감동이 삶의 변화와 온전한 열매로 맺어져 힘 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좋은 땅과 같은 마음 (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열린 자세를 가진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자세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가 아무리 좋은 말씀도 사람의 말로 듣고 가볍게 여기면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우리 믿는 자 가운데 역사하게 됩니다.
또한 좋은 땅은 말씀을 영접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다음에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지키어’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간직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잠깐 감동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자꾸 묵상하고 암송합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듣기 위해 이곳저곳 찾아다니지만 정작 들은 말씀 중 한 말씀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에 대한 지식은 늘어가지만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내면에 간직하고 삶에 적용함으로 삶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삶 가운데서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에 순종하는 것 못지않게 인내가 중요합니다. 왜 인내해야 할까요? 말씀의 씨가 아무리 좋은 땅에 떨어졌어도 열매를 맺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인내가 뽕잎을 비단으로 바꾼다” 했습니다. 누에가 뽕잎을 열심히 먹고 인내하면 나중에 아름다운 비단 실을 뽑아내게 됩니다. 우리도 지금은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누에가 뽕잎을 먹듯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음에 간직하고 순종하며 인내하면 언젠가 비단결처럼 곱디 고운 내면과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으로 빚어지는 날이 반드시 오게 됩니다. 또한 외적으로도 불신자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 전도의 열매도 맺게 됩니다. 때로는 바위와 같은 나의 야망을 깨뜨려야 하는 아픔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시떨기의 유혹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한 우리들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실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등불을 켜서 등경위에 두는 목적은 방에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빛을 받아 죄로 어두워진 세상을 밝히 비추어야 합니다. 진리는 언젠가는 알려지고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영적으로 더 풍성해지고 영적소원이 없는 자들은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21).” 일반적으로 가족은 무엇으로 결정합니까? 혈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족은 혈통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오직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자, 말씀을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만이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진한 예수님의 피를 나눈 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형제애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기뻐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가족의 핵심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임을 알고 말씀 가운데 살도록 서로 격려하며 세우며 이 길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은 어디에 속합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길가 혹은 바위 위 혹은 가시떨기 밭이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을 가진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만약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이 아니라면 우리도 이런 밭이 되면 됩니다. 충분히 좋은 마음 밭이 되도록 기도하면 됩니다. 길 가와 같은 마음이라면 회개의 쟁기로 갈아엎으면 됩니다. 바위와 같은 마음이라면 바위를 깨뜨리고 골라내면 됩니다.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라면 가시를 제거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저런 밭이었지만 결국 좋은 땅이 되어 풍성한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밭도 기름지고 부드러운 옥토가 되어 말씀의 씨앗이 뿌려질 때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고 격려하며 말씀대로 사는 아름다운 가족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