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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미식가들이 날씨가 추워지는 겨울철에 특별히 제맛을 느낄 수 있다고 추천하는 음식이 어복쟁반이다. 놋 쟁반에 양지머리와 편육, 소 젖가슴살인 유통, 소의 혀를 배, 파, 미나리, 버섯 등의 각종 채소와 함께 넣고 육수를 부어가며 끓여 먹는다. 고기를 다 건져 먹은 후 만두나 냉면 사리를 넣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맛난 음식으로 널리 소문이 나 있지만 어복쟁반이 어떤 음식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냉면, 어죽과 함께 평양을 대표하는 음식이었기에 쭉 남한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름조차 생소한 음식이다.
남북이 분단된 지 반세기를 훨씬 넘긴 지금 평양냉면은 이름에만 지역명이 남아 있을 뿐 대한민국의 대표 국수가 됐고, 어죽도 전국적으로 퍼졌지만, 어복쟁반은 그 맛에 비해 널리 자리를 잡지 못했다. 아마도 서울에 설렁탕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쇠고기 중에서 팔다 남은 잡고기와 잡뼈를 넣어 만든 음식으로 평양에 어복쟁반이 있었다면 서울에는 설렁탕이 있었다. 어복쟁반은 잡고기로, 설렁탕은 잡뼈로 끓인 음식인데 둘 다 시장에서 먹는 서민 음식으로 발달했다. 설렁탕은 곰탕을 물리치고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고, 어복쟁반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고급 요리로 변신했다.
어복쟁반은 평양시장의 상인들이 만들어 먹던 음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북한의 추운 겨울 아침, 상인들이 시장에서 흥정을 하면서 커다란 놋 쟁반에 소의 젖통을 비롯해 각종 고기와 야채를 넣고 끓여 먹던 것에서 비롯된 음식이라는 것이다.
어복쟁반은 평양시장에서도 이른 아침에만 파는 음식이어서 조금만 늦으면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전문점도 생겨났지만 처음엔 평양시장 상인들이 해장을 겸해 아침에 먹던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어복쟁반의 기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따지고 보면 어복쟁반이라는 이름에서 시장 상인들이 먹던 음식이라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어복쟁반은 원래 우복(牛腹)쟁반이었다가 나중에 이름이 바뀐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복은 한자 그대로 소의 뱃살이라는 뜻이다. 정확하게는 소 뱃살 중에서도 젖가슴살로 만든 음식으로 어복쟁반에는 유통(乳筒), 그러니까 젖가슴이 반드시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소의 젖가슴살은 별로 값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평양의 시장 상인들이 큰돈 들이지 않고도 쉽게 구할 수 있어, 젖가슴살로 어복쟁반을 끓였다. 사실 소 젖가슴살은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부위지만 어복쟁반을 먹으며 맛보는 젖가슴살은 평소 먹는 쇠고기와는 다른 독특한 맛이 있다.
어복쟁반의 또 다른 기원으로는 원래 생선 내장으로 끓였기 때문에 어복(魚腹)장국으로 부르다 나중에 소의 내장에다 소의 골수를 섞어 만들면서 현재의 쇠고기를 넣은 어복쟁반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복쟁반의 기원을 다룬 1926년의 신문 기사에서는 평양 사람들조차 여러 말들을 하고 있으니 그 뿌리가 확실치 않다고 했다.
어쨌든 서울에서는 암소의 연한 가슴팍살로 편육을 만들어 어복쟁반을 만들지만 평양에서는 값비싼 골수를 넣어 만든다고 했으니 당시에도 지역에 따라 약간의 변형이 이뤄진 모양이다.
전통적인 어복쟁반의 특징은 맛도 맛이지만 먹는 그릇과 먹는 방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전 세숫대야만큼이나 큰 크기의 넓적한 쟁반에 장국을 말아놓고 팔뚝을 걷어붙이며 고기를 집어 먹다가 쟁반 한 귀퉁이를 들어 국물을 마시는 것이 제맛이라는데 서울의 음식점에서 그렇게 먹기는 힘드니 아쉽다.
다만 몇몇 어복쟁반 전문점에서는 세숫대야 크기의 놋그릇에 담아 내오기도 하는데 그 맛이 더 특별하게 느껴지니, 음식은 맛이라는 내용 못지않게 그릇이라는 형식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력을 조금 보태 추정해보건대, 어복쟁반은 유난히 추웠을 겨울철 평양시장 바닥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쟁반을 올린 후 소 젖가슴살과 채소를 넣고 끓이며 한편으로는 먹고 흥정하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 육수를 부어가며 정을 다지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잘 꾸민 식당에서나 어복쟁반을 먹을 수 있지만 어쩐지 어복쟁반 속에는 재래시장의 정감이 물씬 녹아 있는 것 같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