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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한복음 19장부터 20장, 21장까지입니다.
19장은 18장에 이어서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넘겨지는 장면이고, 20장은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장면입니다. 부활하시고 특정한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다음 21장은 부활하신 이후에 베드로를 다시 만나시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들을 하나하나 다 설명드리는 것보다, 집사님이 갑자기 부탁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서, 요한복음 19장, 20장, 21장이 마태·마가·누가복음과 달리 제일 마지막에 기록되었잖아요.
마지막에 기록된 복음서가 다른 세 복음서가 이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나는 이것을 이렇게 기록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0장, 21장의 마지막 부분에 관한 기록이 어떤 신앙적·신학적 목적을 위해 기록되었는지,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맥락에서 요한복음은 1장과 21장을 서론과 결론으로 담고 있고, 종론에 해당하는 부분은 1장 1절부터 18절입니다. 1장 1절부터 18절이 서론이고, 2장부터 20장까지가 본문을 이루고 있습니다.
2장부터 12장까지가 표적의 책이고, 13장부터 시작하면서 영광의 책으로 내용이 전개된다는 말씀은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록되는 요한복음은 예수님, 우리 주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씀드렸나요?
한마디로 그분의 신성입니다.
특히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은 요한이 직접 본 것이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이 태초를 볼 수가 없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곧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히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신 한 인간으로, 왕으로, 선생으로, 교사로만 믿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의 구주이시며, 우리의 종이시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다는 것만 믿어서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본질이 다 충족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왕이시고, 인간으로서 우리를 위해 철저하게 봉사하신 종이시며, 우리와 같은 사람이시라는 것뿐만 아니라,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사실이 반드시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 형성된다고 생각한 요한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책이 요한복음입니다.
바로 그 내용을 선언하는 것이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입니다.
그다음 본론이 시작되면서 일곱 개의 표적을 통해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또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 곧 “나는 무엇이다”라는 선언이 나옵니다. 소위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존재, 곧 자존에 대한 선언과 연결됩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포도나무다.”
이 일곱 가지 선언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특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라는 말씀 역시 예수님의 선재성과 신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읽을 때는 요한복음의 근본적인 신학적·신앙적 기초가 예수님의 신성이라는 측면을 놓치지 않고 읽어 나가야 합니다.
이 내용은 요한복음 19장, 20장, 21장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19장을 이 사실을 놓치고 그냥 읽으면, 다른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십자가 사건의 진행 과정만 따라가다가 끝나고 맙니다. 전체적인 맥락을 놓치게 되는 것이죠.
자, 이 사실을 이해하고 19장을 보겠습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18장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 두 가지를 물었죠.
첫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그 질문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유대인의 왕이라.”
그리고 또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이 질문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대답하지 않으셨는지 설명드렸죠.
만일 빌라도가 “네가 진리냐?”라고 물었다면 예수께서는 “내가 진리니라”라고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진리는 단순히 “truth”, 어떤 정보나 사실에 관한 진리가 아닙니다. “Who is the truth?” 누가 진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어떤 정보나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십니다.
그런 다음 18장 38절 하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에 대한 첫 번째 선언을 합니다.
그런 다음 바라바를 놓아 달라는 요구가 나오고, 19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됩니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여러분, 이것이 이제 빌라도의 심판 과정에서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19장 1절의 채찍질은 시간적으로 이상합니다.
채찍질은 일반적인 신문 과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일부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재판 결과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재판 결과를 내리기도 전에 채찍질부터 하게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19장 1절은 시간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행위와 재판 과정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18장 38절에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라고 했으면 채찍질하면 안 됩니다.
아무 죄도 찾지 못했는데 채찍질하게 한 것입니다.
빌라도가 죄가 없다고 해 놓고 왜 채찍질하게 했을까요?
대중의 요구를 누그러뜨리려 했던 것입니다.
대재판관이 대중의 요구에 따라, 법과 양심에 따라 하지 않고 대중의 심리를 바꾸려고 죄인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법 체계와 사법 체계의 권위가 도전받는 시대에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관을 씌웁니다. 그리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가서 예수님을 조롱하며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그러면서 때립니다.
지독한 모욕입니다.
5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가시관을 왜 씌웠습니까?
핍박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모욕하기 위해서였습니까?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을 것입니다. 핍박의 의미도 있고 모욕의 의미도 있습니다.
자색 옷은 왕의 옷을 상징합니다. 당시 왕들이 입는 색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너 왕이지? 한번 왕 노릇 해 봐라.”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5절에서 빌라도가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이 말을 라틴어로 표현하면 “에케 호모(Ecce Homo)”입니다.
“보라, 이 사람이라.”
아주 유명한 표현입니다.
“Ecce Homo.”
“보라, 이 사람이라.”
이 말은 그 현장에서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를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너희에게 데리고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18장 38절에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다시 19장 4절에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18장 38절과 19장 4절 사이에 무엇이 있습니까?
19장 1절의 채찍질이 있고, 2절의 가시나무관과 자색 옷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죄가 있어서 채찍질하고, 죄가 있어서 가시관을 씌우고, 죄가 있어서 자색 옷을 입힌 것이 아닙니다.
죄가 없다는 두 판단 사이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까?
군중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빌라도는 “나는 죄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너희들이 계속 요구하니 이 정도는 했다”라는 식으로 군중의 요구를 누그러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핍박과 조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보라, 이 사람이라.”
여러분, 이 표현이 요한복음 1장과 대응합니다.
요한복음 1장은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요한복음 1장 29절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1장 36절에서도 요한이 예수님을 보며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은 “보라”라는 선언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19장에서는 빌라도의 입을 통해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선언합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아우르는 두 개의 “보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한 다음에 6절과 7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소리를 칩니다.
빌라도가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다.”
그랬더니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빌라도가 말합니다.
“너희가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그러자 7절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게 된 핵심 이유가 설명됩니다.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은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계속해서 여러 사람에 의해 주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장 34절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첫 번째 증언입니다.
두 번째는 1장 49절입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에 대한 두 번째 고백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6장 69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말합니다.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세 번째 고백입니다.
그다음 11장 27절을 보십시오.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네 번째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 1장 34절의 요한, 1장 49절의 나다나엘, 6장 69절의 베드로, 11장 27절의 마르다를 통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다섯 번째입니다.
19장 7절입니다.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예수를 고발하는 사람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고발합니다.
참 놀랍지요.
예수를 믿는 사람의 입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를 고발하는 사람의 입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예수를 잡아끌고 간 이후 그들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자, 그렇게 예수의 신성을 근거로 결국 십자가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19장 19절입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썼더라.”
아까 빌라도가 처음 심문할 때 18장에서 두 가지를 물었죠.
하나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정치적인 직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빌라도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총독으로 와 있는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19장 8절에서 “더욱 두려워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의 패에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만 씁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이 뭐라고 합니까?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하였다고 쓰라.”
이것이 19장의 핵심입니다.
그 나머지 내용들, 예수께서 어떻게 돌아가시고 십자가 위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내용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장과 대응해서 이 내용을 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된 유대인들의 핵심적인 고발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 다음을 살펴봅시다.
19장 25절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등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곁에 서 있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27절입니다.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그 제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가운데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8절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이 기록됩니다.
마침내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다 이루었다.”
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tetelestai)”라고 합니다.
완전히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빚을 다 갚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빚을 졌는데 누군가 그 빚을 대신 갚아 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다 갚았다.”
“완불되었다.”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지막 선언입니다.
그 나머지 내용으로 예수님의 장례가 기록됩니다.
38절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합니다.
39절에는 니고데모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장례에 유력한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일단 전체적인 맥락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20장입니다.
드디어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20장 1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다른 현대어 성경들은 “아침에”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입니다.
토요일부터 시작된 안식일이 지나고, 안식 후 첫날에 무덤에 갑니다.
무덤에 가 보니 돌이 옮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합니다.
그 다른 제자는 요한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이 이야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갑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같이 달려갑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릅니다.
세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지만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조금 후에 시몬 베드로가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갑니다.
베드로는 용감합니다.
뭔가를 확인하려고 직접 들어갑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먼저 달려갔지만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나중이었습니다.
그다음 베드로가 먼저 들어갑니다.
그리고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는 것을 봅니다.
그 후 다른 제자, 곧 요한도 들어갑니다.
그는 보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과정을 요한은 이렇게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자, 이 모든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어 가는지 보겠습니다.
부활 사건의 증인들의 이야기를 계속 읽어가면서 넘어가겠습니다.
11절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베드로가 들어갔고, 요한도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 밖에 남아 있었습니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는데 두 천사가 보입니다.
12절입니다.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여자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14절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미 무덤 밖으로 나오셔서 마리아의 뒤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합니다.
왜 알지 못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20장 14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제일 먼저 무덤에 들어갔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요한도 들어왔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세마포가 놓여 있는 모습만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맨 처음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천사 둘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예수께서 그 뒤에 서 계셨지만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날이 밝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또 동굴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보기 때문에 여명의 빛에 가려져서 실체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가복음 24장과 비교해 보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3절부터 보십시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 16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심지어 날이 밝은 가운데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도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예수님을 처음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단순히 어두워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이전과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태를 정확히 어떤 단어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영화롭게 된 몸, 부활의 몸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면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한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20장 19절입니다.
“이날 곧 그 주간의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문들이 닫혀 있는데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또 26절을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기서는 아예 문들이 닫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어떠한 상태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공간을 초월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활하신 몸의 상태를 성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장면을 이렇게 두 번이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까 20장 14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도 얼른 알아보지 못했던 마리아도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1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마리아는 동산지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16절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그때 마리아가 알아봅니다.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랍오니”라는 말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름을 부르시자 알아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알아볼 수 있는 모습도 있고, 우리의 현재적인 인식으로는 쉽게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도 있다는 것입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런 모습에서 마침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부활의 상태가 어떠할지를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영광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부활의 몸을 묘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곧 보이는 반응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여러분, 이 부분은 조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8장 9절을 보면 부활하신 이후 예수께서 여인들을 만나셨을 때 여인들이 보이는 반응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마태복음 28장 9절에서는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17절에서는 예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부분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의 특별한 상황과, 그 이후 여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만난 상황을 구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7절은 예수께서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이후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고, 마지막에는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직후부터 승천하시기까지 여러 단계의 만남과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직후 예수께서 아버지께 올라가신 사건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모든 세부적인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20장 17절의 다음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여기 예수님의 대속 사역의 의미가 압축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 막달라 마리아에게 전하라고 하신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내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고,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결국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이 내가 전하고자 하는 사람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이 지금 내가 복음을 전하는 상대방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어떤 사람들만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어떤 기별도 그 기별을 전하라고 전달받은 사람이 자기들만 복을 누리는 독점적인 기별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그러므로 어떤 교단이나 교파에 속했느냐를 떠나서, 진정한 복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재림 신앙을 하는 사람이든, 장로교인이든, 감리교인이든, 다른 교파의 사람이든, 우리는 “내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이고, 내 하나님이 너희 하나님이다”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미션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예수께서 그렇게 제자들을 만난 다음에 19절부터 두 번째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번째 만나는 장면은 그날 저녁입니다.
“이날 곧 그 주간의 첫날 저녁 때에.”
일요일 저녁입니다.
그날 아침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셨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만나셨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들이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20절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은 한마디로 하면 “샬롬”입니다.
샬롬.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
22절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을 맡기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여기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사역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자기 힘으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위 안에서 복음을 전하고 죄 사함을 선포하는 사역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도마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나타난 것처럼 도마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표현할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도마는 혼자 어디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다녀가신 다음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났어. 못 자국을 봤어. 손도 만져봤어.”
그러자 도마가 말합니다.
“내가 직접 그렇게 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어.”
이제 그다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요한은 철저하게 도마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 기록합니다.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다시 문이 닫혀 있는데 예수께서 오십니다.
그리고 “샬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28절입니다.
요한복음의 절정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지금까지의 고백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요한복음에 기록된 고백은 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34절에서 세례 요한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49절에서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9절에서 베드로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27절에서 마르다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여러 차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0장 28절에 와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도마의 고백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18절에 기록되어 있는 요한의 신학적 선언을 마지막에 고백으로 완성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이 처음부터 선언했죠.
요한복음 1장 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에 해당되는 고백이 마침내 요한복음 20장 28절에서 나옵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마지막으로 도마의 고백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리고 2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그리고 요한은 30절과 31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의 진정한 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요한복음은 마지막 기록 목적까지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면 21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결론까지 다 나왔습니다.
지난번에 유니스 집사님이 질문해 주신 것처럼, 요한복음 21장은 그렇기 때문에 별도의 부록처럼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21장을 부록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한 시 5분이기 때문에 잠깐 브레이크하고 5분만 쉬었다가 요한복음 21장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브레이크하겠습니다.
앞에서 못 보신 부분들은 어제 올려드리고, 다시 올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톡방을 보시면 기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핵심 요약 정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