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바퀴
김행숙
두 개의 바퀴를 쓰러뜨리지 않고 계속 굴리기 위해.
모든 자전거 도로는 거대한 검은 허파로 빨려 들어간다.
뜨거운 연기를 토하는 산이 보이는 도시에서 살고 있어.
몇 백 년 동안.
엽서 한 장의 존재 이유.
이쪽 빌딩에서 저쪽 빌딩으로 날아가는 새와 같지 않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생수와 담배와 콘돔을 샀다.
자전거 도둑이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어.
그까짓 자전거를 타고 네가 영원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주할 순 없지.
너는 뭔가를 꼭 붙잡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들.
빙빙 도는 두 개의 바퀴처럼.
한 개의 머리에 두 개의 귀가 존재하는 이유.
네가 기울어질 때 쏟아지지 않는 것들.
반대쪽으로 기울어질 때에도 쏟아지지 않는 것들.
검은 숲의 입구가 많이 존재하는 이유.
가을에 큰 홍수가 있을 거라는군.
별자리가 이동하고 있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군. 괜찮지?
낮과 밤의 순서가 뒤집혀도 이틀만 지나면 너는 그 밤이 그 밤처럼 곤하게 잠이 들고.
바닷물이 따뜻해지고 꿈이 미지근해진다.
너는 곧 잊혀질 거야.
----------------------------------------------------------------------
(개인적 감상)
존재의 의존성와 정반합의 원리
전통과 진보라는 두 바퀴는 균형을 이루며 움직여야 쓰러지지 않는다.
김행숙의 아래 글에서 보듯 일부 문학인들이 과거 문학만을 고집하며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태도에는 완고함이 깔려 있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의 입자와 파동성의 이중성이라는 양자역학의 기초를 깔아놓고도 끝내 양자역학의 확률성과 우연성을 부정하여 앞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두 바퀴(혹은 그 이상)로 서로 균형을 잡으면서 과학이든 문학이든 앞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정의 부정(반)은 필수적인 원리이다.
1. 김행숙, 박진의 '문학의 새로운 이해' 서문 중
이제는 상투적이 되어 버린 '문학의 죽음'이라는 말은 다들 알고 있던 기존의 문학 개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선언적으로 말해 준다. 그렇지만 문자 그대로 문학이 죽었다고 한탄하는 목소리에는 과거적인 의미의 문학만을 인정하는 완고한 태도가 깔려 있다. 문학이 과거의 영예와 독보적인 지위를 더 이상 누리지 못하고 고유한 영역을 상실하게 될 바에야 차라리 명예롭게 자결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들에게 "문학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말했다가는 신성 모독이나 명예 훼손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의 문학이 죽었는지, 빈사 상태인지, 아니면 소생 가능성이 있는지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의 관심사는 바로 지금 문학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학이 아니었던 것들, 문학이 못 되었던 것들, 문학 바깥에 있던 것들과의 관계 변화와 새로운 자리 배치를 통해, 문학은 이동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문학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문학의 중심에 있던 것들, 문학의 정수이자 본질이라 생각 되던 것들, 문학의 권위를 지탱해 왔던 것들이 문학 안의 또 다른 것들과 지금 자리를 바꾸고 있는 것이다. 아직 안정된 모습을 갖추지 않은 이 분주하고 혼란스러운 움직임에 우리는 관심이 있다.
2. 두 개의 수레바퀴 :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대해 닐스 보어와 첨예하게 맞섰다. 보어는 양자가 관측을 통해 확률로 결정된다고 주장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이를 부정했다. 학계의 증명은 보어의 확률론에 손을 들어주며 과학은 진보했다. 여기서 말하는 '주사위'란 자연계에서의 우연성을 뜻한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는 수많은 우연성이 존재하며, 이러한 우연성들은 모두 과학법칙 안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3. 헤겔의 정신현상학
변증법(정반합)적 사유를 통한 인식의 발달 과정은 의식, 자각, 이성, 정신, 종교, 절대지(絕對知)의 여섯 단계로 나아간다.
내가 '지금' '이곳'에 '이것'을 보는 감성에 관한 확실성이 흔들리고 그런 상식은 전체에 걸친 진리를 포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참다운 인식으로 나아가는 발전을, 헤겔은 인식론과 논리학과 변증법이 일체화한 뛰어난 논술로써 저술하였다. 그것은 '감성에 관한 확신에서 지각(知覺)으로, 다시 오성(悟性=知性)으로'라는 의식(意識)의 발전이요, 자의식의 발전이며 나아가서 보편화한 자의식으로서 이성(理性)의 여러 단계이고 종교의 여러 단계를 거쳐 드디어 사유와 존재의 일체성을 절대로 인식하는 절대지(絶對知)의 단계에 도달하는 발전이다. 개인이 이런 철학에 기초하여 통찰하는 수준으로 도달에 보편하는 정신상·사회상·역사상 인식이 발전하는 여러 단계를 요약으로 반복해야 한다.
두 개의 바퀴 / 김행숙
두 개의 바퀴를 쓰러뜨리지 않고 계속 굴리기 위해.
(전통과 진보라는 두 바퀴를 쓰러뜨리지 않고 계속 굴리기 위해서.)
모든 자전거 도로는 거대한 검은 허파로 빨려 들어간다.
(모든 자전거도로는 역사를 상징. 정반합에 의해 전통이라는 정은 진보라는 반 즉 거대한 검은 허파(앞바퀴 혹은 뒷바퀴까지 은유)로 빨려 들어가서 곧 새로운 전통이 되고 또다른 반의 진보가 또 대두되고)
뜨거운 연기를 토하는 산이 보이는 도시에서 살고 있어.
몇 백 년 동안.
엽서 한 장의 존재 이유.
(뜨거운 연기를 토하는, 산이 보이는 도시로 끊어읽어 볼 수 있다.도시(문명)의 뜨거움과 산(자연)의 서늘함이 두 바퀴이다는 앞 1,2행과 등가성 및 확장)
(이 장면은 합이 되어 한 장의 인간과 자연을 조화하는 엽서가 된다.엽서는 너에게 보내기 위한 것이므로 나와 너가 두 바퀴를 상징)
이쪽 빌딩에서 저쪽 빌딩으로 날아가는 새와 같지 않다.
(나와 너는 서로 의존적으로 묶여있는 존재이므로 아무 의존성없이 새가 이 쪽 빌딩에서 저쪽 빌딩으로 그냥 날아가는 것과는 같지 다르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편의점에 들어갔다. 생수와 담배와 콘돔을 샀다.
(자전거는 편의점을 가리키고 편의점은 생수와 담배와 콘돔을 가리킨다.서로 의존적으로 묶여있다.그러면서 인간의 문화가 앞으로 움직인다)
자전거 도둑이 없는 도시에서 살고 있어.
그까짓 자전거를 타고 네가 영원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도주할 순 없지.
(역사는 정반합으로, 연기론적,인과론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이 순간의 자전거(문명, 역사, 예술 등)는 불완전한 것(하위단계)이므로 자전거도둑이 훔쳐서 완전성(이데아, 절대지)에 이르는 영원까지 도주할 수가 없다)
너는 뭔가를 꼭 붙잡고 싶어 했다.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들.
빙빙 도는 두 개의 바퀴처럼.
한 개의 머리에 두 개의 귀가 존재하는 이유.
(나와 너는 의존적인 존재들이다. 나는 너를, 너는 나를 꼭 붙잡아야 한다.전통은 진보를 진보는 전통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한 개의 머리에 붙은 두 존재이다.둘 다 시대의 부름을 듣는 존재이다)
네가 기울어질 때 쏟아지지 않는 것들.
반대쪽으로 기울어질 때에도 쏟아지지 않는 것들.
검은 숲의 입구가 많이 존재하는 이유.
(두 바퀴는 서로를 지탱하므로 기울어지거나 쏟아지지 않는다.검은 숲, 거대한 검은 허파는 완전성(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이데아, 헤겔의 절대정신에 다가가는 것 혹은 그것을 상징)에 이르는 길인데 입구가 많이 존재해야 닿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독일의 검은숲(전나무숲)
가을에 큰 홍수가 있을 거라는군.
별자리가 이동하고 있어.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을 거라는군. 괜찮지?
낮과 밤의 순서가 뒤집혀도 이틀만 지나면 너는 그 밤이 그 밤처럼 곤하게 잠이 들고.
바닷물이 따뜻해지고 꿈이 미지근해진다.
(현상계는 변한다.홍수가 여름에만 발생한다거나 겨울에는 항상 눈이 온다는 전통적 생각(진보도 또다른 전통이 되므로 마찬가지)은 버려야 한다.별자리는 움직인다.노멀이 바뀐다.낮과 밤은 순서가 뒤집혀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면 이 또한 전통이나 클리셰가 된다.)
(과거에는 상상도 못했지만 기후변화 시대에 이런 현상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오늘날 헬조선이라며 꿈이 미지근한 젊은이는 또 얼마나 많은가 )
너는 곧 잊혀질 거야.
(그러므로 정반합의 원리에 의해 전통도 새로운 전통(진보)에 의해 잊혀지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도 너도 잊혀질 것이고 또 잊혀져야 역사는 앞으로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