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서 좋은 시 찾기 4-2
저는 중앙지 중에서는 경향신문과 문화일보 당선작을 좋게 보았고,
지방지 중에서는 국제일보와 전북일보, 영남일보 당선작이 그중 좋게 느껴졌습니다.
이 세 신문사의 당선작은 중앙지 당선작에 ‘못지않은’ 것이 아니라 중앙지 당선작들보다 ‘낫다’고 여겨집니다.
아무튼 경향신문 당선자 윤석정은 제가 시 창작 실기 지도를 직접한 제자여서 언급을 피하고 싶습니다.
문화일보 당선작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판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 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결
―박지웅, 〈즐거운 제사〉 전문
제사를 축제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 조상의 슬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례라고 하여 엄숙하거나 지루하기만 하다면 요즘 아이들은 거부감을 갖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얼굴을 본 적 없는 조상을 원망할지 모릅니다.
시를 읽어보니 어느 일가의 제사 지내는 광경이 손에 잡힐 듯 와 닿습니다.
아버지 제삿날 가족이 모여 있는데, 향 냄새를 맡고 아버지의 혼백이 조금 열어둔 문으로 들어옵니다.
이 시의 특징은 유머 감각에 있지 않을까요?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 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이란 대목을 보십시오.
몰려다니며 제삿밥을 얻어먹는 귀신들이 유리창에 코 박고 들여다보니 제사상이 차려져 있는 것입니다.
“있다 가자”는 말이 참 유머러스합니다. ‘(맛있는 게) 있구나,
가자’로 이해해도 좋고 ‘(여기에 한동안) 있다가 가자’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마지막 연은 어떻습니까? 제사가 즐거운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고인이 되었지만 시적 화자에게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새끼들이 있습니다.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곁”은 의복이 아니겠지요.
식구 혹은 가옥, 달리 말해 가족의 품이나 보금자리일 것입니다.
즐거운 제사를 통해 화자의 가족은 공동체의식을 다시금 갖게 되고 ‘곁’의 의미를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시가 지나치게 안정적이라고 할까요, 신인다운 패기와 모험심 같은 것이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기성복을 벗어버리고 구멍 낸 청바지 같은 것도 입어보는 것이 어떨까, 충고하고 싶네요.
그렇다고 선배시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항심을 보여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모범·규격·전형·전범 등으로부터 일탈하려는 노력이 없는 시인이 스스로 무덤을 파고
드러눕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 다음으로 국제신문 당선작을 봅시다. ‘혁필화(革筆畵)를 보며’라는 제목입니다.
혁필화란 납작한 가죽에 여러 빛깔의 물감을 묻혀,
글씨를 쓰면서 그 뜻에 어울리는 그림을 함께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인사동 거리에서 저도 언젠가 알록달록한 혁필화를 쓰는 사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글자를 그림 모양으로 묘하게 쓰거나 그리는 혁화쟁이는 글자,
혹은 글자 옆에다가 용이나 말 등 동물을 비롯해 온갖 그림을 기기묘묘하게 그려 넣지요.
혁화쟁이 할아버지의 글자를 보며 시인은 자기 아버지의 젊을 날을 떠올립니다.
맞춤 주문한 전각(篆刻)을 품고 도장집을 나서는 길,
인사동 돌확 옆 낡은 좌판 위로 어스름한 새벽을 펼쳐놓은
노인을 향해, 다채로운 구두코가 나이테처럼 둘러서서
푸른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의 거친 손이 그려내는 혁필화를 본다
어느새 기념족자 신청 순서에 놓인 아버지 이름 석 자,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풀어내는
혁화쟁이의 은밀한 내간체가 설화처럼 피어나고, 환하게
어룽거리는 혁필화 한 장으로 남은 아버지, 두 손 가득 펄럭이는데
네모난 비단천 속 피뢰침 같은 철심이 박힌 지문의 파원(波圓) 위로
바스락, 굴참나무 거친 수피가 뗏목처럼 흐르다 멎고
저만큼 달아난 행서체 굴곡 따라 범람하는 푸른 바다,
서늘한 그늘 겹겹 장마 속에 깃들어 계신 아버지 용오름을 하며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이민아, 〈혁필화(革筆畵)를 보며〉 앞 16행
이 시에서는 확실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도장집을 나서다 혁필화를 그리는 노인을 보게 되고,
그 노인에게 그림을 신청하려고 쓴 이름이 아버지의 함자였습니다.
화자에게 아버지는 ‘생면부지의 한 사내’였습니다.
그런데 중절모를 쓴 혁화쟁이는 나도 잘 모르는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안다는 듯이
“쉼 없는 영사기처럼 거침없이” 행서체로 풀어냅니다.
그 풀어냄 과정이 인용한 부분의 끝 5행인데 표현의 화려함이 혁필화를 방불케합니다.
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올해의 당선작들 가운에 표현의 세련미에 있어 이 작품 곁에 놓일 시는 없습니다.
그 앞 부분, “닳고 닳아 유통기한을 넘긴 듯한 넓죽한 가죽 붓에/ 곤궁한 물감을 묻혀 그려내는 획을 낮은 포복으로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생면부지의 한 사내가 길어올린 필생의 알리바이” 같은 대목도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멋진 표현입니다.
화려하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날카롭습니다.
심사위원의 칭찬을 훈장처럼 달고 나온 시들 태반이 미숙하고 어색하여 고소가 머금어질 정도인데 이 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인의 경지를 이미 훌쩍 넘어서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5~16행이 한 개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문장이 길어지면 호흠이 굵은 이점이 있지만 시의 내용이 거칠어지거나 성글어지기 쉽지요. 문장 분할을 했더라면 더욱 멋진 중반 부분을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정자체로 양각한 옥돌전각을 아버지의 혁화와 번갈아보며,
온전히 다 타버린 참숯처럼 더 이상 사그라들 것도 없던
옥탑방 가득 고인 내 아버지 시린 청년을 읽는다
장난감 블럭을 쌓아 안으로만 숨어들던 내 나이 미운 일곱 살
문득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전각 틀이 비좁다, 여기
가난의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비로소 마주 앉은
탁란(托卵)의 깊은 둥지, 수척한 아버지 긴꼬리태양새 되어
끝없는 비단길 위로 날아가는 에움길인지도 몰랐다.
시는 이와 같이 끝납니다.
화자의 나이 일곱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일까요,
“내 아니 미운 일곱 살”이라고 되어 있군요.
“빈한의 그림자를 도려내던 모진 칼바람을 듣는다”,
“아버지의 혁화” 및 “가난한 골목 끝에 펼쳐진 혁필 한 장”은 화자의 아버지 또한 혁화쟁이였거나
가난한 화가였으리라 짐작케 합니다.
그런데 시의 종반부가 난해의 늪으로 빠져버립니다.
“여기”부터 시작되어 “몰랐다”로 끝나는 문장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탁란(托卵)’이란 새끼를 기를 재주가 없는 새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몰래 갖다놓고서 기르는
희한한 습성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아버지가 자기를 기르지 않고 다른 집에 맡겼다는 인상을 주는 부분인데,
정확한 뜻은 감지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긴꼬리태양새’는 새의 한 종인지 뭔지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긴 꼬리 태양새’라고 하지 않고 붙여 쓴 것은 고유명사여서 그런 것일까요?
“몰랐다”로 끝나는 문장 자체가 앞 문장과 연결이 안 되므로
시의 종반부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 멋진 마무리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가 갖고 있는 개성미는 올해 신춘문예의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 ‘이승하 교수의 시쓰기 수업,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2022. 4.28.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