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최씨(永川崔氏) 성주군(星州郡) 수륜면(修倫面) 남은리(南隱里, 法山) 마을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南隱里), 법산(法山)은 영천최씨(永川崔氏) 문중의 집성촌이다. 영천최씨 시조 최한(崔漢)은 고려 중엽 행예부판 소감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최식(崔寔)의 4 아들 .중 둘째아들로 의종(毅宗)∼명종(明宗) 때에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三重大匡神號衛上將軍)을 지냈고 나라에 유공하여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책봉되어 영천(永川)을 식읍으로 받음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연산(燃山)은 영양(永陽), 영천(永川)의 고호(古號)이다. 시조공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 송현에 있다.
시조공 연산부원군 최한(崔漢)은 영천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백리땅에 덕업을 쌓았으며 고려 중엽 이후 그 자손이 충훈절의(忠勳節義)로 관직과 행적이 사기실록 명인록(史記實錄名人錄)을 장식하고 있다.
시조 최한(崔漢)은 경주최씨에서 분적한 최균(崔均. 전주최씨 일파)의 9세손 최식(崔寔)의 둘째 아들이다. 최한은 고려 예종과 명종 때 공을 세워 연산군에 봉해졌다. 연산은 영천의 옛 이름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영천을 본관으로 삼았다. 영천은 경상북도 남동쪽에 있는 지명이다.
시조의 아들 최완은 문과에 장원하여 상찰사를 지냈으며 그의 동생 최집은 좌정승을 지냈다. 최완의 아들 최상례는 절도사를, 증손 최윤기는 판도판서를 역임했다.
영천최씨 가운데 이름을 남긴 인물은 최무선이다. 그는 화약 제조법의 필요성을 느끼고 원나라 사람 이원에게 그 제조법을 배운다. 1377년(우왕3년) 조정에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하여 화약과 각종 화기를 만들었다. 1380년 왜구가 침입했을 때 부원수로서 진포(금강 하구)에서 화포와 화통을 처음으로 사용, 왜선 500여 척을 전멸시킨다.
그의 아들 최해산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저서 "화약수련법" "화포법" 등을 통해 그 비법을 전수 받는다. 그 뒤 화차. 완구(碗口). 발화(發火). 신포(信砲) 등을 만들었다.
판군기시사를 지낸 최일의 아들 최흥효는 1411(태종11)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교리를 거쳐 1420년(세종2) 홍문관제학을 지냈다.
의병장 최문병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천장산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대장이 되어 적의 침입을 격퇴했다. 영천에서 적을 화공(火功)으로 섬멸했으며 감목관을 역임했다. 조선 때 학자 최서림은 학문과 덕행으로 유명하다.
2000년 현재 영천최씨 인구는 18,721명으로 조사되었다. 경북 경산시 용성면 곡란동, 외촌동, 경북 상주군 수륜면 남은동이 집성촌이다. 주요파는 참의공파, 참봉공파, 좌윤공파, 월주공파, 방어사공파, 참판공파 등이다
7세(世)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은 시조공의 둘째 아들 최집(崔王+集)의 5대손이자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둘째아들로 왜구(倭寇)침범 격퇴용 화약 병기개발을 절감하고 원(元) 나라의 염초장(焰硝匠) 화약기술자 이원(李元)을 집에 불러 제조법을 배웠으나 아들이 폭사 당하는 등 천신만고의 실험 끝에 화포제작에 성공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우왕3)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화포·화전·화통 등의 화기(火器)를 만드는 한편 화포 발사에도 전복되지 않는 전함건조에도 힘썼다. 당시 개발된 화포는 대장군포, 2장군포, 3장군초, 육화포, 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화주(지금의 로켓포의 원조) 등이다.
영천최씨(永川崔氏)는 전국 약 6천 가구 2만인 정도의 종인이 전국 각지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법산)과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 외촌리 등이다. 영천최씨 중 법산(法山)은 시조공의 10대손인 월곡(月谷) 최흥효(崔興孝)의 차자(次子)인 사정공(司正公) 최계손(崔繼孫)의 손자로 통정대부 고령현감(通政大夫高靈縣監)을 지낸 최희호(崔希浩)의 후(后)로써, 영천최씨의 여러 분파 가운데 사정공파(司正公派)에 해당한다. 최희호는 죽헌공 최항경의 고조(高祖)가 된다.
성주 법산리 영천최씨 입향조는 17세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 선생이다. 선생은 경기도 원당에서 진사를 지낸 최정(崔淨)의 아들로 태어났다. 법산에 터를 잡은 것은 16세 때인 1575년 부친 진사공이 성묘차 성주 법산에 왔다가 병을 얻어 갑자기 세상을 떠,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의 도움을 받아 3년 시묘를 마치게 된 인연이 있다. 이 때 어머니가 아들에게 “벼슬을 원치 않거든 굳이 서울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도학이 높은 한강 선생을 사사함이 어떠냐”고 권유해 선영에서 가까운 법산에 자리 잡았다.
죽헌 선생이 터 잡은 지 430여 년이 지난 현재 100여 호의 동성대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바, 성주 법산은 영천최씨 집성촌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 중의 하나다. 긴 세월 동안 유가의 전통을 지켜온 법산마을은 문무급제자가 22명, 생원·진사 19명 등 뛰어난 유학자와 특히 효행자가 많이 나왔다.
죽헌은 학덕을 겸비한 최고의 선비였고, 그의 두 아들 관봉(관봉)과 매와(梅窩)도 학문과 덕량이 빼어나고 효심이 지극해 죽헌 선생 3부자를 중국의 ‘소씨일가(蘇氏一家)’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3부자를 법산마을 앞 오암서원(鰲巖書院)에 배향해 불천위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 3부자를 같은 서원에 봉향하는 곳은 이곳뿐이다. 죽헌의 이러한 효행 정신을 이어받은 법산의 영천최씨 후손들은 대대로 효행을 했고, 문중 족보 행적에는 효행 기록이 많이 눈에 띈다. 대표적인 효행 사례로 시아버지(崔永祐)의 불치병을 며느리 안동권씨(崔鍊의 부인)가 신화(神話)나 전설(傳說)에서나 있음직한 살신성효(殺身成孝)의 효행은 유명한 이야기라고 한다. 당시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영남 일원의 선비, 학자들이 찬사의 글을 앞 다투어 보내와 ‘최효부 안동권씨 실기록’ 문집을 편찬하기에 이르렀다. 오암서원 입구에 최효부 안동권씨의 효행비와 여표비(閭表碑)가 세워져 있으며, 마을 안에 죽헌공파종택(竹軒公派宗宅)이 있다.
근자에도 이곳 마을에서는 성주군수의 효부상, 대구 보화원의 효행 표창 등 효부상을 수상한 사람이 8명이나 되어, 성주군에서는 이 마을을 ‘효마을 법산’이라고 명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