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37
무원 도창회 수필가
무원(无源) 도창회(都昌會) 수필가를 만난 것은 다른 문학행사에서 몇 차례 인사를 나눈 적은 있으나 더욱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필자가 한국 예총에서 『예술세계』주간으로 있을 때 그에게 수필부문 신인상 심사를 의뢰하면서 그의 문학과 인생을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을 맡았을 때 나는 사무처장으로 재임하고 있었다. 그가 자주 임원회의나 다른 업무로 자주 뵐 기회가 많았으나 당시 이사장의 편견으로 그를 비협조자로 낙인을 찍어서 배제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나 내가 이사장에게 항의하여 참석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와는 한국수필가협회 모임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며『한맥문학』『문학세계 』등에 내가 시월평을 쓸 때 거기에서도 자주 만났다. 그는 각 문학지마다 많은 연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호(雅號) 무원(无源)에 대해서 어떤 연유로 누가 작호(作號)했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동국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 피천득과 양주동 선생을 은사로 모셨는데 이때 양주동 박사가 나의 수필을 보고 그의 문통(文統)을 이어주기를 바라면서 자기의 호 무애(无涯)에 항렬을 맞추어서 무원(无源)으로 지어주었어요. 그리고 양박사는 나의 학점도 100점에서 1점을 빼고 99점만 주었어요. 나머지 1점은 자기가 죽고 난 후에 가져가라며 웃더군요. 아마도 만점을 주면 한국의 국보가 바뀔 수 있다는 우려가 담긴 뜻의 농담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참으로 무애 양주동 박사다운 유머이다.
그후 우리는 문협의 행사에서 만나서 문학과 문단을 얘기하면서 소주도 한 잔씩 나누었고 특히 정정순 시인이 경영하는『불교문학』에는 매회 빠짐없이 참석하여 격려와 축하를 해주는 열렬파 참여자로서 만나기도 했다.
그는 1937년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서 출생하여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에 동둑대학교 영문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동국대 문리대 강사로 시작해서 전임교수로 다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1964년에 『신태양』지와『신세계』지에 수필「여자의 손톱」과 시「기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게 되어 그동안 수필집『땡감을 깨무는 마음으로』『겨울을 앓는 사람』『바람밥』『밤별』『무원수필』『영미수필선』등과 수필이론서『수필문학론』『한국현대수필의 사적 고찰』등 그리고 장시집『장송비가』『한 영혼의 연가』『무영탑』그리고 영시집『English Poetry Written by Do Chang Hol』등 많은 창작집을 발간하였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경기문학 수필부문 대상을 비롯해서 문예한국 본상, 한맥문학 본상, 탐미문학 대상, 한국신문예협회 수필 대상, 세계시인협회(한국) 계관시인상 등 문학상도 그의 문학적 업적만큼 수상하는 영광도 안았다. 이와 같은 그의 문학에 대해서 평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도창회 교수가 우리 한국 전통 수필을 벗어버린 수필 창작의 새 패러다임을 만들어 앴다. 한국 명수필의 현장으로 발표된 도창회의 일련의 수필은 그의 수필 쓰기의 세 번째 변신을 보이고 있다. 한 마디로 유미주의 수필에의 시도다. 그는 이들 수필에서 작법상 내적 갈등의 심화, 페이소스, 속도감, 클라이막스, 카타르시스를 중요시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상렬 문학평론가「도창회 교수의 수필 연구」중에서
도창회를 잘 아는 사람이 그의 수필을 읽으면 누구나 공통되게 느끼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작가와 글이 똑같이 잘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일 것이다. 대개는 인간과 그가 쓴 글이 가장 진솔한 자기 표현의 글이기 때문이다. 도창회를 잘 아는 나로서 그의 작품을 읽으면 그의 인격과 그의 수필이 ‘그 사람의 그 글’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도창회는 단순하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 소탈한 성격의 저변에는 항상 슬픔과 고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공덕룡 문학평론가 「도창회의 수필 세계」중에서
그에 대한 작품세계에서 일별할 수 있듯이 그가 수필을 창작을 위해서 다양한 변모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재동 시인의 견해에 따르면(『시사문단』 2005.4.) ‘수필 창작의 태도를 세 번씩이나 지속적으로 변신을 꾀한 작가라는 점이다. 릴릭이즘(lyricism) 즉 서정수필을 쓴 것이 그 첫 번째요, 에로티시즘(eroticism)을 표방한 이미지수필을 쓴 것이 두 번째요, 유미주의(唯美主義) 즉 미를 위한 미를 추구하는 수필을 쓴 것이 세 번째 변신이다. 국내에 많은 수필가들이 있지만 수필문학사상 이렇게 세 번에 걸침 변신은 도창회 선생의 경우가 현재까진 유일한 삶이 아닌가 한다.’라는 언지가 그렇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우려하는 우리 수필세계는 어떠한가. 그는 「현대수필이 나아가야할 방향」(『수필학 제12집』에서 아홉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그가 심도 있게 지적하는 문제가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우리 수필문단에 대중수필이냐 문학수필이냐를 두고 논란을 거듭해 오고 있다. 어떤 이는 대중에게 잘 읽히는 대중수필을 쓰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우기고, 다른 한 쪽은 돈벌이가 안 되고 읽는 사람이 없더라도 진정한 문학수필을 써야 한다고 우긴다. 다른 장르의 문학에서도 문학의 대중성은 크게 논란이 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류의 보고(寶庫)가 될 만한 작품이 처음부터 많은 독자를 데리고 태어나지 않았음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더욱이 돈벌이와 무관하다. 항상 양(量)보다는 질(質)이 우선하는 이치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는 수필에 관한 문제가 나오면 단호하다. 우리 수필의 비극은 Fomal Essay보다는 Infomal Essay가 많다는 것이다. 격식을 갖추어서 길게 표현하는 철학수필 포멀 에세이를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수필(私隨筆)만 쓰다 보니 포멀 에세이가 없어서 항상 섭섭하다는 논지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쯤에 미국의 에머슨이나 영국의 칼라일 같은 포멀리스트가 나올지 늘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수필학의 근원으로 하여 우리 수필문단에 많은 영향을 끼쳐서 그는 문단 활동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한국신문예협회 회장과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국제펜한국본부 자문위원, 한국수필가협회 수석부회장, 한국불교문인협회 부회장, 한국비평가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수필전문지인『수필시대』주간과『문학세계』등 여러 문학지에서 고문이나 자문위원을 역임하였다. 한편 시단에서도 인정을 받아서 한국현대시인협회와 자유시인협회 등에서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시도 창작하는 노장 문인이다.
최근에 한국문협 심포지엄에 함께 참석하고 왔다. 수필계뿐만 아니라, 한국문단 전반과 우리 문학의 침체에 대한 의견을 진지하게 교환한 바 있다. 언제 파주 임진강으로 나들이 와서 민물매운탕에 소주 한 잔 나누자는 정담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