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강
③ 시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자주 잊어버리곤 하는 사물들의 모습과 의미를 다시금 발견하게 해 준다.
뭐라카노, 저 편 강 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워라카노 뭐라카노 뭐라카노
니 흰 옷자락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라카노, 저 편 강 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니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의 「이별가」전문
여기에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평소에 지나쳐버린 죽음과 삶의 문제들을 넘어서는 인연과의 그리움을 되새기게 한다. ‘뭐라카노’ 등의 사투리를 의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소박한 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시는 이렇게 삶 속에 얽매인 이들에게 세상의 여러 사물들과 일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혜안(慧眼)을 갖게 해 줍니다.
이와 같이 시의 쓸모(효용)는 시를 통해서 자연의 모습과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고 이 발견의 경험은 인생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에 관해서도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적 발견의 감동은 인생, 자연, 사회, 우주를 다시금 확인하면서 보다 너그럽게 성숙한 눈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8-3. 시의 정신
시정신(poetry)은 시 작품을 창조할 때 대상에 대하여 고양된 정신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의 감동이나 기분 등에 넘치게 하며 그것을 작품 창조에 까지 고양시키는 정신활동으로서 어떤 훈련된 자의식(自意識)의 개입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것은 출발 때부터 산문이 아니라, 시를 쓰게 하는 의미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을 지닌 바 감득(感得) 작용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미(美)나 진(眞)에 대한 수동적인 감응뿐만 아니라, 현대에서는 비평이라는 지적인 역할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녹수청산(綠水靑山)도 없고
만산홍엽(滿山紅葉)도 없었다
어쩌다가 눈에 띄는 희미한 하늘
지워진 무지개의 흔적과
죽음의 그림자만 다가오고 있었다
별빛 하나
볼 수 없는 숨 막히는 이 지구
이미 생존을 포기한 폐토(廢土) 위에서
모두가 유령으로 남아 있었다
아, 그들의 죄는 과연 무엇일까.
--졸시 「不在中 . 2」전문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시적(詩的)이라는 말을 가끔 씁니다. 서녘 하늘을 온통 빨갛게 물들이는 태양을 등지고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보고 우리는 시적이라고 말합니다. 시적이라는 말에 반대되는 것은 산문적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와글거리며 한 개라도 더 팔겠다고 아우성치는 남대문시장의 시끌벅적한 호객행위나 백화점의 바겐세일장은 분명히 산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느낌이 다르고 또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때)과 공간(장소)에 따라서 심리상태에 의한 감흥이나 인상이 달라지므로 시적인 것이 산문적이 되거나 이와 반대로 산문적인 것이 시적인 것으로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모든 사람들이 산문적이라고 느낄 때에 시적인 것을 발견하고 시적이라고 할 때 산문적인 것을 찾아내는 예지叡智)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시적과 산문적인 느낌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시적이라면
- 어떤 희귀(稀貴)한 것.
- 좀 기이(奇異)한 것.
- 비범(非凡)한 것.
- 새로운 것.
- 마음에 커더런 감흥을 일으키게 하는 것 등.
* 산문적이라면
- 흔히 볼 수 있는 것.
- 평범한 것.
- 시들한 것.
- 우리가 예사로 보아 넘기거나 별 흥미가 없는 것 등.
시적이다라고 하면 ‘비유(非有)에의 동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나 신비한 것,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여기에서 ‘비유’라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존재(sein)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시적이라는 것은 상당히 폭이 넓어집니다. 어떤 초현실적인 절대자를 그리워하고 여기에 의지함으로써 인생의 고뇌와 무상(無常)에서 벗어나려는 종교나 한 가닥 지엄(至嚴)한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 이에 따르려는 윤리, 심지어 시와 가장 먼 듯 싶은 철학도 현실에서 찾지 못할 우주와 인생의 근원을 탐구하는 한, 다름아닌 시정신의 할로(發露)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초에 과학은 우주의 불가사의(不可思議)에 대한 놀라움으로 하여 그 미지(未知)의 비밀을 탐지하려는 데서 비롯되었다면 이러한 과학정신도 그대로 시정신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종교, 윤리, 철학, 과학 등 인생의 값진 유산의 밑바탕에는 엄연히 시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는 인간의 가장 높은 가치이며 또 시정신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진선미(眞善美)에 대한 마음을 돌이키는 인간 혼의 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카알 센드버그의「시의 가(假) 정의」를 읽어보면 시와 시정신에 대한 해법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① 시는 반향(反響), 음절(音節), 파장(波長) 등의 일정한 의도(意圖)에 따라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마련된 악장(樂章)을 통하여 쓰여진 하나의 설계도지요.
② 시는 바다의 동물이 육지에 살면서 다시 공중을 날으려는 기록이지요
③ 시는 생명을 해설한 총서(叢書)지만, 그 해설은 너무나 재빠르게 지평선으로 사라져 버리지요.
④ 시는 미지의 불가사의의 장벽을 헐어버리기 위한 음절을 탐구하는 일이지요.
⑤ 시는 수수께끼로 가득찬 누런 명주수건의 명제(命題)로서 흔히 고무풍선 속에 넣고 푸른 봄 하늘을 흙바람에 날아오르는 지연(紙鳶)의 꽁무니에 매어놓았지요.
⑥ 시는 한 떨기 화초가 수분을 갈구(渴求)하는 뿌리와 아름답게 피어난 꽃송이 사이에 감도는 침묵이고 또 속삭임이지요.
⑦ 시는 지상에서 살기 위한 역설을 일삼는 동시에 그놈을 무덤에 매장하는 직분(職分)이지요.
⑧ 시는 무지개가 어떻게 생기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를테면 공상을 기록한 원본이지요.
⑨ 시는 히야신스의 꽃과 비스키트의 종합이지요.
⑩ 시는 그 때 그 때 무엇이 보이나 하고 궁금히 생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문을 열어 보이고 또 닫아버리는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