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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
초 한 대
초 한 대 ―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光明의 祭壇이 문허지기 전
나는 깨끗한 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리고도 그의 生命인 心志까지
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 ㅅ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暗黑이 창구멍으로 도망간
나의 방에 품긴
祭物의 偉大한 香내를 맛보노라
1934.12.24.
창구멍
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춤을 발려 뚤려 논 적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츰해 비치웁니다
눈 나리는 져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헤끝으로 뚤려 논 적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1936년 초
비ㅅ자루
요 - 라조리 베면 저고리 되고
이 - 렇게 베면 큰 총 되지.
누나하구 나하구
가위로 좋이 쏠았더니
어머니가 비ㅅ자루 들고
누나 하나 나 하나
볼기짝을 때렸소
방바닥이 어지럽다고-.
아니 아-니
고놈의 비ㅅ자루가
방바닥 쓸기 싫으니
그래ㅅ지 그랬어
쾌ㅅ심하여 벽장 속에 감촸더니
이튿날 아츰 비ㅅ자루가 없다고
어머니가 야단이지요.
『가톨릭 少年』1936.12
오줌쏘개 디도
바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디도는
간 밤에 내 동생
오줌 쏴서 그린 디도
우에 큰 것은
꿈에 본 만주땅
그 아래
길고도 가는 건 우리 땅
『가톨릭 少年』1937.1
기와장 내외
비오는 날 져녁에 기와장 내외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이나선지
꼬부라진 잔등을 어루만지며
쭈룩쭈룩 구슬피 울음 웁니다
대궐 집웅 우에서 기와장 내외
아름답든 넷날이 그리워선지
주름 잡힌 얼골을 어루만지며
물끄러미 하늘만 처다봅니다
1936년 초
편지
누나!
이 겨을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힌 봉투에
눈을 한 줌 옇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년 12월경
해바라기 얼골
누나의 얼골은
해바라기 얼골
해가 금방 뜨자
일터에 간다
해바라기 얼골은
누나의 얼골
얼골이 숙어 들어
집으로 온다
-1938년
슬픈 族屬
힌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힌 고무신이 거츤 발에 걸리우다
힌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힌 띠가 가는 허리 질끈 동이다
1938.9.
十字架
쫒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였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가요.
鐘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 ‧ 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1941.5.13.
못자는 밤
하나, 둘, 셋, 네
…………………………
밤은
많기도 하다
1941.6월 경
또 다른 故鄕
故鄕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 곱게 風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쫒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鄕에 가자
1941.9.
별 헤는 밤
季節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츰이 오는 까닭이오.
來日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靑春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과
별 하나에 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식 불러 봅니다. 小學校때 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일홈과, 佩,鏡,玉 이런 異國少女들의 일홈과 벌서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일홈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일홈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프랑시쓰 ‧ 쨤」, 「라이넬 ‧ 마리아 ‧ 릴케」 이런 詩人의 일홈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에 게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일홈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였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일홈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1941.11.5
(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懺悔錄
파란 녹이 낀 거울 속에
내 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王朝의 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滿 二十 年 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懺悔錄을 써야 한다.
-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웨 그런 부끄런 告白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1942.1.24.
쉽게 쓰여진 시
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六疊房은 남의 나라.
詩人이란 슬픈 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詩를 적어 볼가.
땀내와 사랑내 포그니 품긴
보내주신 學費 封套를 받어
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敎授의 講義 들으려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沈澱하는 것일가?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六疊房은 남의 나라.
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속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1942.6.3.
<시비 탐방>
윤동주 시인
* 신 웅 순
윤동주는 1917년 망명지 북간도에서 태어나 1945년 적국 후쿠오까 형무소에서 졸했다. 29세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북간도에 묻혔다.
1925(9세)년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 급우로는 함께 옥사한 고종 사촌 송몽규, 외사촌 김정우 그리고 문익환 등이 있었다. 소학교 재학시 만주에 대한 일본 침략은 극에 달했고 또한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이 명동촌을 중심으로 퍼져가던 때였다.
명동촌은 외삼촌 김약연 선생이 일찌기 이주해 개척한 땅이었다. 교육과 종교, 독립 운동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활발한 곳이었다. 1910년 조부 윤하현이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했다. 윤동주는 여기에서 태어났고 유아 세례도 여기에서 받았다.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
1932년 용정으로 이사하기까지 윤동주는 16년간을 명동촌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과 소년 시절을 대부분 여기에서 보낸 셈이다.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한준명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해도 그랬고 …… 하하! 본 래 재주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 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송몽규는 그 때 이름으로 한범이라고 했는데, 그놈은 늘 말 잘하고 엉뚱했고, 동주와 한범이는 늘 한 책상에 나란히 앉았어요. 인물이야 문익환이가 제일 훤했고 ……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서 제일 부자였어요. 밭이 많았거든. 집안에 늘 말을 매고(기르고) 다 닐 땐 그걸 타고 다녔지요. 아들 동경 유학도 시켰었고 …… (송우혜,『윤동쥬 평전』(세계사,2003),65-66쪽.)
1929(13세)년에 송몽규 등의 급우와 함께 <새명동>이라는 등사판 문예지를 간행했다. 1931(15세)년 3월에는 명동 소학교를 졸업했다. 윤동주는 송몽규, 김정우와 함께 명동에서 20리나 떨어져 있는 대랍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 1년간 수학했다.
「별헤는 밤」에 나오는 패, 경, 옥의 소녀들은 중국인 소학교 6학년 때 책상을 같이했던 이름들이다. 윤동주가 사랑했던 소녀들은 아니다. 이웃 사람들, 시인들의 이름처럼, 비둘기, 강아지 같은 이름처럼 추억 속의 이름들이다.
1932년(16세) 4월 캐나다 미션계인 용정의 은진 중학에 입학했다. 아버지는 1931년 늦가을 명동에서 용정으로 이사했다.
용정중학교 현관 앞 「서시」시비
용정중학교 현관 앞에 윤동주의 「서시」 시비가 서있다. 윤동주는 다재다능한 학생이었다. 이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농구도하고, 웅변도 하고, 아침 조회도 했을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을 것이다.
「서시」는 죽기 3년 전 1941년 11월 21일에 썼다. 북간도를 떠나 연희 전문에서 수학을 마치고 일본 유학 직전에 쓴 시이다.
1934년(18세) 12월 24일로 명기된 「초 한 대」,「삶과 죽음」,「내일은 없다」 등 세편을 썼다. 이 세 작품이 오늘날 찾을 수 있는 최초의 작품이다. 송몽규는 1935년 1월 1일자 동아일보 신춘문예 꽁트 부문에 「숟가락」이 당선되었다. 여기에서 윤동주는 큰 자극을 받았고 자기 문학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었다. 세 편의 시를 출발점으로 운동주는 시의 완성된 날짜를 기록, 정리 보관하기 시작했다.(위의 책,105쪽.)
1935년(19세) 9월 은진중학에서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37년 12월에 가서 윤동주는 느닷없이 동시 「조개껍질」을 썼다. 최초의 동시이다. 「무얼 먹고 사나」,「만돌이」,「해바라기 얼굴」등 주옥 같은 동시를 썼다. 그것은 정지용의 시집의 영향을 받았다.
정지용은 윤동주가 평생을 두고 가장 좋아한 시인이다.지금도 윤동주의 유품 중에 『정지용』 시집이 남아있는데,도처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고, 곳에 따라서는 적절한 촌평도 가해져 있는 등 그가 얼마나 정독하던 책인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동시라는 장르에 대 한 재평가와 그에 대한 도전 의지로 나타났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동시짓기는 1938년 연전 1 학년까지 계속된다. (위의 책,152-154쪽)
1936년(20세)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 중학교가 폐교되었다. 윤동주는 용정으로 돌아와 문익환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연길에서 발행하는 『가톨릭 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동시 「병아리」,「빗자루」 등을 발표했다.
1938년(22세) 2월 17일 광명중학교 5학년을 졸업하고 4월 9일 연희 전문학교 문과에 송몽규과 함께 입학했다. 동요, 동화의 엄달호, 판소리의 김삼불, 풍류객 김문웅, 한글의 허웅, 영문학 이순복 등의 이 때의 친구들이다.
외솔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손진태 교수로부터의 한국사의 비극적 운명을, 이양하 교수로부터의 영시를 배웠다. 이 교수들로부터 정신 ․ 사상면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연희 전문학교시절 윤동주는 창내벌(창천동)과 신촌벌을 산책하면서 자신만의 시 세계를 생각했다. 윤동주의 정신적 토양은 여기에서 형성되었다. 「새로운길」, 「슬픈 족속」,「사랑의 전당」,「이적」,「아우의 초상화」 등이 이 때의 작품들이다.
북아현동에서 살 때 정지용을 만났고 기숙사에 들어가서는 2년 후배 정병욱을 만났다. 특히 정병욱과의 만남은 윤동주에겐 큰 행운이었다. 정병욱이 없었더라면 시인으로서의 윤동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주는 졸업기념으로 자선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육필 시고 3부를 만들었다. 77부 한 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고는 모두 19편으로 되어 있으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 있으며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 자로 되어있다.
이 시고를 받아 본 이양하 교수는 출판을 보류하도록 권하였다.「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등의 작품이 일제의 검열을 넘길 수 없을 것이며,일본 유학을 앞둔 동주의 신변을 걱정해 서였다.때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결국 이 때의 3부 중 정병욱 씨에게 준 1부가 해방된 조국에 서 밝은 대낮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정병욱,「잊지못할 윤동주의 일들」,『나라사랑 23집』,외솔회, 140-141쪽.)
1941년 (25세)에 그의 대표작 「서시」, 「별헤는 밤」을 비롯, 「또 다른 고향」, 「십자가」, 「새벽이 올때까지」 등 십 수편을 이 때 썼다. 연희 전문 문과 <문우지>에 시 「자화상」, 「새로운 길」도 이 때에 발표된 것들이다.
이 무렵 윤동주는 국내 외의 많은 문인들의 작품에 심취해있었다. 외국 작가들로는 키에르케고르, 도스또에프스키, 발레리, 지드, 보들레르, 쟘, 릴케, 장콕토 등이 있으며 국내 시인으로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이상, 서정주 등이 있었다.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했고 세계 정세는 전운이 감돌았다. 유학을 앞둔 윤동주는 그야말로 마음이 착찹했고 초조했다. 4년 동안의 대학생활 마무리, 앞으로의 진로문제, 오랜 객지 생활, 젊은이들에게의 일제의 징집영장, 전운이 도는 세계 정세 등 자신이나 세계에도 무엇하나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에겐 또 다른 고향이 필요했던 것이다.
1942년 연전 졸업 후 한달 정도 고향집에 머물렀다. 일제는 강제로 일본식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개명했다. 「참회록」을 쓴지 닷새만이다. 참회록은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이였다. 1942년 1월 24일 「참회록」으로 자신을 정리하고 창씨계명계를 제출했다. 욕됨으로 쓰여진 저항시였다.
윤동주는 졸업기념으로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시고를 만들려고 했다. 이양하 교수의 출판 보류 권고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용정에서라도 출판할려고 했으나 여력이 없어 그의 육필 시고는 그만 좌절되고 말았다.
당시 조선 문인협회라는 문인 단체가 있었는데 한국민족의 자체를 부정한 단체였다. 그 어떤 문인 단체도 일제의 규제하에 있었다. 문단 활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출간을 했더라면 윤동주는 반역뿐만 아니라 원고마져 잃어버렸을 것이다.
정병욱은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 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병욱의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얽힌 이야기 일부를 인용해본다.
동주 자신이 가졌던 것과 이양하 선생께 드린 시고는 찾을 길 없고 내게 주었던 것이 나의 어머니 장롱 깊숙히 감춰졌다가 1948년 정음사에서 출판됨으로써 동주의 시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동주가 검거된 반년 후 나는 소위 학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피차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마당에 이르러 나는 동주의 시고를 나의 어머님께 맡기며, 나나 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여 주십사하고 부탁하였다.그리고 동주와 내가 죽어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희 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 났었다.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위의 책, 141쪽.)
동주의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가 간행되어 나온 것은 해방 후인 1948년 1월 30일이었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 전문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 지나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정병욱 못지 않게 윤동주가 세상에 햇빛을 보게 만든 사람은 강처중이었다. 강처중은 연전 시절 윤동주의 유품들을 일제 치하에서도 고스란히 보관해 낸 사람이다. 또한 강처중은 1947년 2월부터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소개하기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정지용에게 부탁하여 초간본 시집의 서문을 써 받기도 했다. 발문은 직접 자신이 써서 붙였다. 그렇게 해서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윤동주의 누이동생 윤혜원 또한 용정집 윤동주의 중학생 시절 작품을 보관해와 세상에 알렸다. 시 124 편 산문 4 편이 전부이다. 정병욱, 강처중, 윤혜원의 합작품이다.
1955년 서거 10주년 기념 증보판 시집『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출간 때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이 삭제되었다. 정지용은 월북했고 강처중은 남로당 좌익으로 처형되었다. 6.25 ․ 좌우익은 우리 민족의 대참극이었다.
윤동주의 여성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의 시에서는 「별헤는 밤」에서 패, 경, 옥이 나오고, 몇 시편에 나오는 순이 그리고 1976년 『나라사랑』23집 윤동주 특집호의 정병욱 교수의 회고담이 전부이다. 「사랑의 전당」, 「소년」, 「눈오는 지도」 등에서 순이가 나올 뿐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들이다.
1942년(26세)에 윤동주는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해 여름방학을 이용해 고향집 용정을 다녀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고향집 동생들에게 “앞으로 우리말 인쇄물이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나 심지어 악보까지 사서 모으라” 당부했다. 이 때 「흰그림자」,「쉽게 쓰여진 시」 등의 작품을 썼다.
가을에 일본에 건너가 도시샤 영문과로 전학, 다케다 아파트에서 하숙을 했다. 1942년 섣달 그믐 당숙 윤영춘 씨가 도일한 길에 윤동주를 찾았다. 당숙은 독서에 너무 열중해서 얼굴이 파리해진 것을 퍽이나 염려했다고 한다. 6조 다다미 방에서 추운 줄도 모르고 새벽 두 시까지 읽고 쓰는 일 그것이 윤동주 일상의 전부였다. 국어말살, 징병제 공포 등 시국은 흉흉해지고 일제의 발악은 극에 달했다. 1942년 그해 겨울 방학에는 집에 오지 않았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처럼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속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쉽게 쓰여진 시」 일부
1942년 6월 3일자로 되어 있다. 이 시는 릿교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고 여름 방학을 앞 두고 썼다. 무엇을 예감했을까.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이 시 한 장은 그의 마지막 길이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그 후의 시고는 알 길이 없다.
1943년 7월 14일 도시샤 대학에서 첫학기를 마치고 고종 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체포되었다. 죄목은 독립운동이었다. 송몽규는 나흘 앞선 7월 10일에 체포되었다.
일제 때의 정부 극비 문서들인 『특고월보』1943년 12월호와 『사상월보』제 109호에 관계 기록이 있다. <경도에 있는 조선인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었다. 윤동주 혐의는 <조선 독립운동>이었고 <중심인물은 송몽규이고 윤동주가 동조했고 이 사건으로 검사국에 송국된 사람은 송몽규․ 윤동주․ 고희욱 3인>이었다는 경찰 수사가 밝혀졌다.
윤동주는 절명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이다. 그의 나이 만 27세 2개월 남짓이다. 그의 운명을 지켜보았던 일인 간수는 다음과 같이 유족에게 전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나 마지막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순명했지요. 짐작컨데 그 소리가 마치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는 듯 느껴지더군요
윤동주의 사망 통지서를 받고 윤동주의 아버지와 윤영춘 씨가 현해탄을 건너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했다. 죄수복을 입은 채 50여명의 한국 청년들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서 있었으며 그 행렬 속에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도 있었다고 한다. ‘저 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윤동주도 그 모양으로……’ 하고 흐느꼈다고 한다. 송몽규는 1945년 3월 7일 절명했다. 윤동주가 주사를 맞고 죽은 것을 알고 자기도 죽어갈 것을 알면서 계속 주사를 맞아야했던 심경은 어떠했을까. 윤동주는 송몽규와 함께 이렇게 간 것이다.
윤동주의 장례날은 1945년 3월 6일. 장지는 용정의 동산에 있는 중앙 교회의 묘지였다. 장례식에는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1945년 6월 14일 가족들은 ‘시인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창씨 개명한 히마누라에서 비로소 자기 성과 이름을 되찾고 처음으로 시인의 호칭이 붙여진 것이다.
·송우혜,『윤동주 평전』(세계사,2003). 신웅순,『20세기 살아 숨쉬는 우리문학과의 만남』(푸른 사상,2006), 33-67쪽을 참고, 재구성하여 작성.
『시와 인식』(문경출판사,2010.겨울),156-183쪽.
[출처] 윤동주 편- 신웅순 |작성자 석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