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밧#이스라엘#6.25#반유대주의
이스라엘과 6.25 전쟁
대한민국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히브리어: יחסי ישראל–קוריאה הדרומית)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시작되어, 1962년 4월 9일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최초로 양국 관계가 시작된 것은 1950년 한국 전쟁 발발을 통해서였다.
당시 이스라엘 수상이었던 다비드 벤구리온은 대한민국을 돕는 유엔군에 이스라엘군을 참전시키는 것을 지지하였다. 국내에선 생소한 이스라엘군(IDF)의 6.25 참전 지지는 마영삼 전 이스라엘 대사의 ‘한국 전쟁 기간 UN에서 이스라엘의 역할(Israel’s Role in the UN during the Korean War)‘이란 자료를 통하여 국내에 알려졌다.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은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 방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비식별 정책(중립적 정책)은 폐기되고 새로운 접근법으로 대체되었는데, 이는 냉전 대결의 한복판에서 이스라엘을 미국과 유엔의 편에 서게 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스라엘은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 어떤 조처를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 총리는 IDF 병사들을 파견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벤구리온은 자신의 제안에 대한 논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진지하게 이것이 침략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군대를 보내야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당 중 마팜(히브리어: מַפָּ״ם)과 공산당 마키(Maki)라는 두 좌파 정당은 "이스라엘 독립 원칙에 위배된다"라며 새로운 정책 방향에 반대했다. 그들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이스라엘이 어느 편을 들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이 북한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 견해는 이 두 정당의 특성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을 종식시키고 유럽 유대인을 구출하는 데 있어 소련의 역할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벤구리온 정부는 중립 원칙을 포기한 후 일련의 불신임 운동에 직면했다. 결국 1950년 8월 3일, 이스라엘 정부는 군인을 파병하는 대신 유엔을 통해 63,000달러 상당의 의료품 등 총 10만 달러 상당을 한국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이스라엘 국민에게도 엄청난 부담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국가가 탄생한 지 겨우 2년 후였고, 독립을 위한 소모적인 전쟁(아랍 5개국과 전쟁)을 치른 후였고, 나라는 긴축의 시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에게 매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도움이었다.
한국 전쟁과 이스라엘 외교 정책의 변화는 한국 전쟁 발발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전쟁 발발 불과 일주일 후인 7월 2일, 대통령 바이즈만과 벤구리온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 내각 회의가 열렸다. 그들은 한국 전쟁이 이스라엘의 외교 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스라엘의 정책 입안자들은 유엔이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어떤 나라든 보호함으로써 세계 평화의 보증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2년 전에 그러한 침략을 경험했고, 이런 일이 미래에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북한의 공격이 유엔에 의해 처벌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의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50년 7월 3일 외교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당시 외무부 장관 모셰 샤렛은 이스라엘에 대한 또 다른 공격 행위의 가능성을 우려하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개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유엔과 유엔의 행동을 지지하자는 제안은 이스라엘 내각 회의에서 채택되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비식별 정책은 서방 진영에 대한 동맹 정책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 이 새로운 정책은 이스라엘 외교 정책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스라엘 대표단이 한국 전쟁 논의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이스라엘 정부에 중국에 공관을 개설할 것을 요청한 중국과의 협의 중 이스라엘 외교관들은 한국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지에 대한 7가지 계획을 설명했고, 이는 UN의 한국정 휴전안의 초안이 되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특히 유엔에서 이스라엘 대표단은 한국 전쟁 문제를 다루는 데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베 리(Trygve Lie)의 격려에 힘입어, 이스라엘 대표단은 이러한 아이디어에 기초한 원칙 선언문과 결의안을 제정하고 통과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결론적으로 한국 전쟁은 새로 탄생한 이스라엘과 한국의 정부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양국 관계는 한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리고 독립 전쟁의 여파에서 회복 중이던 이스라엘에도 매우 힘든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군의 6.25 참전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많은 유대인이 미군과 영국군으로 한국전에 참전하였고, 이들 중 상당수가 휴전 후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다. 그러므로 유대인 참전용사는 본국에도 잊혀졌고, 이스라엘 안에서도 기억되지 못했다.
‘한국 전쟁 기간 UN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의 저자인 마영삼 전 이스라엘 대사는 노르망디에 있는 연합군 묘역을 살펴보던 중 수많은 묘비에 다윗의 별이 새겨져 있는 걸 보고 "한국 전쟁에 참전한 유대인들도 많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스라엘에 신문광고, 방송 등을 통해 이스라엘에 거주하던 참전용사들을 찾아내었고 그분들에게 감사명패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미친 북한 체제를 쓰러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
2010년 북한의 연평도 포격 당시 이스라엘 아비그도리 리베르만 당시 외무장관이 발표한 성명 내용이 이랬다. 당시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북한은 시리아, 이란과 함께 악의 축”이라며 “그들의 무기 확산과 도발 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라고 비판했다. 이스라엘의 대표적 영자신문 예루살렘포스트는 온라인판에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을 자세히 보도한 뒤 리베르만 장관의 성명을 머리기사로 내기까지 했다.
당시 북한의 눈치를 보던 국내 정치권은 물론, 북한을 규탄했던 국제사회 다른 어느 국가보다 강도가 높은 비판이었다. 아예 체제 자체를 문제 삼으며 그 종식 필요성을 거론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주한 외국대사관이 ‘독도’와 ‘동해’를 각각 ‘리앙쿠르 암초’와 ‘일본해’로 표기할 때, 한국의 입장에 따라 ‘독도’ ‘동해’ 표현을 쓴 유일한 나라이다. 실제로 러시아,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스페인, 폴란드, 이탈리아, 에콰도르, 칠레, 스웨덴, 핀란드, 이란 대사관 모두 독도와 동해를 각각 리앙쿠르 암초와 일본해로 표기하고 있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여러 부분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우호와 지지를 항상 보내왔다.
올해는 이스라엘의 유대력 5784년이고, 지금은 잘 사용되지 않지만, 한국의 단기 4357년이다. 이렇게 지구상에서 자기들의 민족력을 쓰는 유일한 민족은 유대민족과 한민족뿐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기도를 흡사 우리의 창처럼 암송하곤 한다. 5음계로 이루어져 있어 듣다 보면 영락없는 우리 창과 가락이 같다. 60~70년대 국내 번안 가요 중 유독 이스라엘 민요가 많은 인기를 누렸다.
신앙적 관점을 배제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멀지만 가까운 나라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지지한다. (We stand with Israel)”라고 외치지만 “이스라엘도 우리를 지지한다. (Israel stand with us)”라고 오래전부터 외쳐왔다.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를 보다 보면, 이것이 PC(정치적 올바름)주의 선언인지, 반전운동 인지? 아니면 그저 반유대주의의 몸짓인지? 그 저의를 짐작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10월 7일 시작된 전쟁은 분명 하마스의 테러로 인해, 수백·수천의 이스라엘 국민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하게 잔인하게 살해되고 납치당함으로 시작되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천안함 폭침으로 수십 명의 우리 군인과 민간인이 사상하여도 한마디 책임도 묻지 못하는 비겁한 국가의 비굴한 국민이 황망한 인도주의를 외치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표현의 자유가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hyYcM3urcA
글: <월간샤밧> 편집국장
※ 이 달(이야르)은 이스라엘 건국기념일(욤 하아츠마우트)이 있는 달입니다.
참조:- Gideon Rafael, Destination Peace, Three Decades of Israeli Foreign Policy: A Personal Memoir(London, 1981),
- UN, A/C.1/645, Supplementary report of the Group on Cease-Fire inKorea, January 11, 1951.
- UN, A/C.1/651, Intervention of the Central People’s Government of thePeople’s Republic of China in Korea, January 13, 1951.
- Trygve Lie, In the Cause of Peace (New York, 1954),
- UN, GAOR, Fifth Session, First Committee, 425th Meeting, January 13, 1951,
- Michael Brecher, Decision in Israel’s Foreign Policy (New Haven, 1975)
- Protocol of the Foreign Affairs and Defense Committee meeting (meeting No. 43/2) July 3, 1950. (Archives of the Ben-Gurion
Institute for the Study of Israel and Zionism, Ben-Gurion University of the Negev, henceforth BGA).
- Institute of Foreign Affairs and National Security (IFANS), Document No.722.2 IS, Registration No. 629,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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