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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乘起信論
馬鳴菩薩造
원순 역
(논-1)
歸命盡十方
最勝業徧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하나이다.
온 누리에 가득하신 우리 부처님
뛰어난 업 온갖 지혜 두루 갖추고
걸림없이 자유 자재 몸을 나토며
중생들을 구하시는 자비로운 분
그 모습은 법의 성품 진여의 바다
그 안에는 무량공덕 갖추고 있어
참 진리를 여실하게 닦으신 이여
거룩하신 불법승께 귀의합니다.
(논-2)
爲欲令衆生이 除疑捨邪執하며 起大乘正信케하며 佛種不斷故이니라.
중생들의 온갖 의심 풀리게 하고
집착으로 생긴 견해 버리게 하며
참 대승의 바른 믿음 일깨워 주어
부처님 씨 이어 가기 바라옵기에.
(논-3)
論曰에 有法이 能起摩訶衍信根이라하니 是故로 應說하니라.
논에서 "어떤 법이 대승에 대한 믿음의 근본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니, 이 때문에 반드시 이 내용을 말해야 한다.
(논-4)
說有五分인데 云何爲五오?
一者는 因緣分이요, 二者는 立義分이요, 三者는 解釋分이요, 四者는 修行信心分이요, 五者는 勸修利益分이라.
이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설명하니 어떤 것들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요, 둘째는 '대승의 법(法)과 의(義)는 무슨 내용인가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부분'이요, 셋째는 '법(法)과 의(義)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이요, 넷째는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이요, 다섯째는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공부할 것을 권하는 부분'이다.
(논-5)
初에 說因緣分이라.
처음은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논-6)
問曰 : 有何因緣으로 而造此論이오?
答曰 : 是因緣有八種이니 云何爲八이오?
一者는 因緣總相으로 所謂 爲令衆生이 離一切苦 得究竟樂케하니, 非求世間名利恭敬故이니라. 二者는 爲欲解釋如來根本之義하여, 令諸衆生이 正解不謬故이니라. 三者는 爲令善根成熟衆生이 於摩訶衍法에 堪任不退信故니라. 四者는 爲令善根微少衆生이 修習信心故이니라. 五者는 爲示方便하여 消惡業障하고 善護其心 遠離癡慢하여 出邪網故이니라. 六者는 爲示修習止觀이니 對治凡夫二乘心過故이니라. 七者는 爲示專念方便으로 生於佛前하여 必定不退信心故이니라. 八者는 爲示利益勸修行故이니라. 有如是等因緣이니 所以로 造論하니라.
물음: 무슨 인연으로 이 논을 만듭니까?
대답: 이 인연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들이 그 여덟인가?
첫째, 인연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니 세간의 대가와 명예와 존경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풀이하여 중생들이 모두 그 뜻을 바르게 알아 그릇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셋째, 마음의 좋은 뿌리가 성숙한 중생들이 대승법을 받아들여 대승법에 대한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넷째, 마음의 좋은 뿌리가 적은 중생들이 믿음을 닦아 익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섯째, 중생들이 방편을 배워 악업을 녹이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여 어리석음과 잘난 체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삿되고 나쁜 악업의 그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섯째, 중생들이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닦아 익혀 범부와 이승(二乘)의 허물을 고치도록 바라는 것이다.
일곱째, 중생들이 염불에 전념하는 방편을 배워 부처님 앞에 새롭게 태어나 굳은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덟째, 중생들에게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수행을 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논을 쓰게 된 인연이다.
(논-7)
問曰이라 脩多羅中 具有此法인데 何須重說이요? 答曰이라 脩多羅中雖有此法이라도 以衆生根行不等이며 受解緣別이라. 所謂 如來 在世에 衆生利根하고 能說之人의 色心業勝일새 圓音一演에 異類等解하여 則不須論이라. 若如來滅後라면 或有衆生能以自力으로 廣聞而取解者이며 或有衆生 亦以自力으로 少聞而多解者이며 或有衆生 無自心力이어 因於廣論 而得解者이며 亦有衆生 復以廣論文多爲煩 心樂摠持少文하여 而攝多義 能取解者라. 如是 此論은 爲欲總攝如來廣大深法無邊義故로 應說此論이니라.
물음 : 경 가운데 이 법을 다 갖추고 있는데 다시 설명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대답: 경 가운데 이 법이 있더라도 중생의 마음과 행동이 다르고 법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인연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는 중생도 근기가 뛰어났고 법을 말씀하시는 분의 능력도 뛰어났기에 오롯한 소리로 한 번 말함에 여러 계층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여 논이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에는 혼자 힘으로 불법을 많이 들어야 이해하는 중생이 있을 수 있고, 혼자 힘으로 불법을 적게 듣고도 많이 아는 중생이 있을 수 있으며, 스스로 불법을 알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많은 논의 도움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중생도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분량이 많은 논은 번거롭게 여기고 여러 가지 뜻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을 좋아하여 적은 글에 많은 뜻이 담겨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중생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보기들과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깊고 넓은 법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를 담으려고 하기에 이 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논-8)
已說因緣分이고 次說立義分이라. 摩訶衍者는 總說有二種이니 云何爲二리오? 一者는 法이요, 二者는 義라. 所言法者는 謂衆生心이라. 是心이면 則攝一切世間法出世間法이니 依於此心하여 顯示摩訶衍義니라. 何以故오? 是心眞如相이 卽示摩訶衍體故이며 是心生滅因緣相이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이니라. 所言義者는 則有三種이니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體大이니 謂一切法이 眞如平等하여 不增減故이니라. 二者는 相大이니 謂如來藏이 具足無量性功德故이니라. 三者는 用大이니 能生一切世間出世間善因果故이며 一切諸佛이 本所乘故이며 一切菩薩이 皆乘此法하여 到如來地故니라.
이미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말했고, 이어서 '대승의 법(法)과 의(義)는 무슨 내용인가'를 말하겠다. 대승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는 법(法)이요, 다른 하나는 의(義)이다.
법(法)이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담고 있으므로 대승의 뜻을 드러내 보인다. 왜냐하면 이 마음에 있는 진여의 모습이 곧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 있는 생멸인연의 모습이 그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義)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 체대(體大)이니 모든 법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相對)이니 여래장이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용대(用大)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좋은 인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이 본디 쓰는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써서 모두 여래의 경지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논-9)
已說立義分이고 次說解釋分이라. 解釋分에 有三種인데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顯示正義이고, 二者는 對治邪執이며, 三者는 分別發趣道相이니라.
이미 '대승의 법(法)과 의(義)는 무슨 내용인가'를 설명했고, 이어서 '법(法)과 의(義)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 부분에는 세 단락이 있는데 무엇이 셋인가?
첫 번째는 '올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삿된 집착을 다스린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도 닦을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논-10)
顯示正義者는 依一心法하여 有二種門이니 云何爲二리오? 一者는 心眞如門이며 二者는 心生滅門이라. 是二種門이 皆各總攝一切法이니 此義云何리오? 以是二門不相離故이니라.
'올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 법으로 말미암아 두 종류의 길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마음에 있는 진여의 길이며, 또 하나는 마음에 있는 생멸의 길이다.
이 두 길이 모두 저마다 모든 법을 거두어들이니 이 이치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이 이치는 두 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논-11)
心眞如者는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 所謂 心性이 不生不滅이니 一切諸法은 唯依妄念이어 而有差別이라. 若離心念하면 則無一切境界之相이니 是故로 一切法이 從本已來로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이니 畢竟에 平等하여 無有變異하고 不可破壞이어 唯是一心이라. 故로 名眞如니라. 以一切言說이 假名無實이어 但隨妄念으로서 不可得故니라.
마음에 있는 진여는 곧 하나의 법계로서 '전체 큰 모습으로 있는 법에 들어가는 길의 바탕'이다. 이른바 마음의 성품이 불생불멸이니 모든 법은 오직 망념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뿐이다. 망념을 여읜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없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이 본디부터 말에 있는 모습과 이름에 있는 모습과 마음이 인연한 모습을 여의어서, 마침내 평등하여 변할 것이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어 오직 한마음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진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임시로 세워진 개념이어서 실체가 없이 다만 망념을 따르므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12)
言眞如者란 亦無有相이니 謂言說之極으로 因言遣言이라. 此眞如體는 無有可遣이니 以一切法 悉皆眞故이며 亦無可立이니 以一切法 皆同如故니라. 當知하라.一切法은 不可說不可念故로 名爲眞如니라.
진여란 또한 어떤 모습이 없으니 이는 최선을 다한 표현으로 말에 기대어 말을 버린 것을 말한다. 이 진여의 바탕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모든 법이 다 참되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수도 없으니 모든 법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논-13)
問曰이라. 若如是義者라면 諸衆生等이 云何隨順해야 而能得入이리오? 答曰이라. 若知一切法을 雖說이라도 無有能說可說하며 雖念이라도 亦無能念可念하면 是名隨順이라하고 若離於念하면 名爲得入하니라.
물음 : 이런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따라가야 진여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대답: 모든 법을 말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나 말할 법이 없고, 생각하더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나 생각할 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 이를 수순이라 하고, 만약 망념을 여읜다면 '진여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논-14)
復次 此眞如者는 依言說分別하면 有二種義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如實空이니 以能究竟顯實故며 二者는 如實不空이니 以有自體具足無漏性功德故이니라.
다시 이 진여는 말로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참으로 진실한 공(空)이니 마침내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참으로 진실한 불공(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가 사라진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논-15)
所言空者는 從本已來 一切染法이 不相應故이니 謂離一切法差別之相이라. 以無虛妄心念故이니라. 當知하라. 眞如自性은 非有相 非無相이며, 非非有相 非非無相이며, 非有無俱相이며 非一相非異相이며 非非一相 非非異相이며 非一異俱相이며 乃至總說하면 依一切衆生일새 以有妄心으로 念念分別은 皆不相應故로 說爲空이라. 若離妄心이면 實無可空故이니라.
공(空)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는 본디부터 오염된 모든 법과 서로 붙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법의 차별된 모습을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하니 진여에는 헛된 망념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진여의 자성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요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有)와 무(無)를 다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또한 같은 모습도 아니요 다른 모습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요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같거나 다른 모습을 다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나아가 전체 입장에서 말하면 모든 중생에게 기대었기에 헛된 마음으로 생각마다 분별하는 것은 모두 진여와 서로 붙어 어울리지 않으므로 공(空)이라도 한다.
만약 헛된 마음을 벗어나면 실로 공(空)이라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논-16)
所言不空者는 已顯法體 空無妄故이니라. 卽是眞心이니 常恒不變하고 淨法滿足일새 則名不空이라. 亦無有相可取이니 以離念境界이어 唯證相應故이니라.
불공(不空)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법의 바탕이 공(空)이어서 망념이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심이니 진심은 늘 변하지 않고 깨끗한 법이 가득 차 있기에 불공이라도 한다. 또한 취할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으니 망념의 경계를 벗어나 오직 이 진심을 증득해야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논-17)
心生滅者는 依如來藏하니 故로 有生滅心이라.所謂 不生不滅이 與生滅과 和合하여 非一非異이니 名爲阿梨耶識이니라
마음에 있는 생멸은 여래장에 기댄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말하자면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 이를 일러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논-18)
此識에는 有二種義일새 能攝一切法하고 生一切法하니라.
이 식(識)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모든 법을 거두고 모든 법을 낼 수 있다.
(논-19)
云何爲二오? 一者는 覺義이요, 二者는 不覺義이니라.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각(覺)의 뜻이요 또 하나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논-20)
所言覺義者는 謂心體離念이라. 離念相者는 等虛空界하여 無所不徧 法界一相이니 卽是如來平等法身이라. 依此法身하여 說名本覺이니라. 何以故오. 本覺義者는 對始覺義說하니 以始覺者는 卽同本覺이라. 始覺義者는 依本覺故로 而有不覺하고 依不覺故로 說有始覺하니라.
각(覺)의 뜻은 마음의 바탕이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읜 모습은 허공계와 같아 어떤 곳이라도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와 똑같은 모습이니,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이 법신으로 말미암아 본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본각의 뜻은 시각(始覺)의 뜻에 맞서서 말하니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뜻은 본각으로 말미암아 불각이 있고 불각으로 말미암아 시각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논-21)
又 以覺心源故로 名究竟覺이라하고 不覺心源故로 非究竟覺이니라.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에 구경각이라고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했기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논-22)
此義는 云何오? 如凡夫人은 覺知前念起惡故로 能止後念일새 令其不起케하여 雖復名覺이라도 卽是不覺故이니라. 如二乘觀智 初發意菩薩 等은 覺於念異하고 念無異相이니 以捨麤分別執著相故로 名相似覺이니라. 如法身菩薩 等은 覺於念住하여 念無住相이니 以離分別麤念相故로 名隨分覺이니라. 如菩薩地盡은 滿足方便하여 一念相應하고 覺心初起하여 心無初相이니 以遠離微細念故로 得見心性하고 心卽常住하니 名究竟覺이니라. 是故로 洙脩多羅에 說하되 若有衆生이 能觀無念者라면 則爲向佛智故이니라.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범부들은 앞생각이 나쁜 생각을 일으킨 것을 알고 뒷생각을 그칠 수 있기에 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범부각(凡夫覺)이라고 해도 이는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의 지혜를 얻은 이나 대승의 가르침에서 처음 공부할 마음을 낸 보살들은 다른 모습인 망념을 깨달아 그 생각에 '번뇌로 달라진 모습'이 없으니, 이 거친 분별로 집착하는 모습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법신보살은 '번뇌로 달라진 모습'이 없다는 경계에 머무는 마음을 깨달아 그 생각에 '나로 바뀌어 머무는 모습'이 없으니, 이 분별하는 거친 망념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고 한다.
보살의 모든 수행을 다 한 이들은 방편을 다 갖추어 한 생각에 맞서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모습을 깨달아 그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망념의 모습'이 없으니, 이 미세한 망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의 참 성품을 볼 수 있고, 그 마음이 늘 이어지니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경에서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부처님의 지혜로 간다"고 말한 것이다.
(논-23)
又 心起者란 無有初相可知인데도 而言知初相者는 卽謂無念이라. 是故로 一切衆生을 不名爲覺이라하니 以從本來 念念이 相續하여 未曾離念故로 說하되 無始無明이니라. 若得無念者라면 則知心相生住異滅하니 以無念等故로 而實無有始覺之異니라. 以四相俱時而有하여 皆無自立이어 本來平等하여 同一覺故니라.
또 '마음이 일어난다'고 표현하여 마음에는 알 수 있는 처음 모습이 없는데도 처음 모습을 안다고 말한 것은 곧 무념을 말한다. 이 때문에 모든 중생을 각(覺)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중생들은 본디부터 생각마다 이어져 아직 망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작이 없는 때부터 시작된 무명이라고 한다.
무념을 얻은 자라면 마음의 모습이 생겨나고• 머무르고• 바뀌고• 사라지는 것을 아니 무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또한 참으로 시각도 없으니 그 까닭은 네 가지 각의 모습이 한꺼번에 같이 있기에 모두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이 본디 평등하여 한결같은 각(覺)이기 때문이다.
(논-24)
復次 本覺을 隨染分別하면 生二種相이니 與彼本覺과 不相捨離라. 云何爲二오? 一者는 智淨相이고 二者는 不思議業相이라. 智淨相者는 謂依法力熏習 如實修行이어 滿足方便故로 破和合識相하고 滅相續心相하여 顯現法身 智淳淨故이니라. 此義云何오? 以一切心識之相이 皆是無明이더라도 無明之相이 不離覺性일새 非可壞 非不可壞이니 如大海水 因風 波動에도 水相 風相이 不相捨離하며 而水非動性이라. 若風止滅이면 動相則滅이나 濕性不壞故이니라. 如是衆生의 自性淸淨心이 因無明風動하며 心與無明이 俱無形相이어 不相捨離라도 而心非動性이니 若無明滅이면 相續則滅하나 智性不壞故이니라. 不思議業相란 以依智淨하여 能作一切 勝妙境界이니 所謂 無量功德之相은 常無斷絕 隨衆生根하여 自然相應 種種而現일새 得利益故이니라.
다시 본각을 오염된 정도에 따라 분별하면 두 가지 모습이 생기지만 본각과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맑은 지혜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맑은 지혜의 모습'이란 법력의 훈습에 따르고 여실하게 수행하여 온갖 방편을 다 갖추기에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리고 이어지는 망념을 멸하여 법신으로서 순수하고 맑은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이 다 무명이더라도 무명의 모습이 각(覺)의 성품을 여의지 않으므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물결치고 움직일 때에도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이 서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치면 움직이는 물결의 모습은 사라지나 축축한 물의 성품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본디 성품인 깨끗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움직이며 마음과 무명의 모습이 다 형체가 없어 서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므로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마음이 곧 없어지나 참 지혜의 성품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란 맑은 지혜에 따라 뛰어나게 오묘한 온갖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모습은 끊어짐이 없이 늘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붙어 어울리며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모든 중생들이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논-25)
復次 覺體相者는 有四種大義일새 與虛空等하고 猶如淨鏡하니라. 云何爲四오? 一者는 如實空鏡이니 遠離一切心境界相하여 無法可現이니 非覺照義故니라. 二者는 因熏習鏡이니 謂如實不空이라. 一切世間境界 悉於中現하나 不出不入하고 不失不壞하여 常住一心하니 以一切法이 卽眞實性故이며 又 一切染法이 所不能染이니 智體不動하고 具足無漏하여 熏衆生故이니라. 三者는 法出離鏡이니 謂不空法이라. 出煩惱礙智礙 離和合相하여 淳淨明故니라. 四者는 緣熏習鏡이니 謂依法出離故로 徧照衆生之心하여 令修善根케하니 隨念示現故이니라.
다시 각(覺)의 바탕의 모습은 네 종류 큰 뜻이 있기에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참으로 진실한 공(空)의 거울'이니, 마음의 경계에 나타나는 모든 모습을 멀리 떠나 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음을 말한다. 각의 바탕은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因)으로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울'이니 참으로 진실한 불공(不空)을 말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지만 별다른 것이 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각의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각의 바탕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서지는 것도 아니어서 늘 한마음에 머무른다. 이는 모든 법이 곧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며 또 오염된 모든 법이 오염시킬 수 없는 곳이니, 지혜의 바탕이 움직이지 않고 어떠한 번뇌도 없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난 거울'이니 불공(不空)의 법을 말한다. 이는 번뇌장애와 지혜장애를 벗어나고 생멸과 어울린 모습을 떠나 맑고 깨끗하여 밝기 때문이다.
넷째는 '연(緣)으로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울'이니 '법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난 거울'에 따라 두루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 그들이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게 하는 것을 말한다. 각의 바탕이 중생들의 생각을 따라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논-26)
所言不覺義者란 謂不如實知 眞如法一故로 不覺心起하여 而有其念이라. 念無自相이나 不離本覺일새 猶如迷人이 依方故로 迷하여 若離於方하면 則無有迷라. 衆生도 亦爾니라. 依覺故로 迷하나 若離覺性하면 則無不覺이라. 以有不覺 妄想心故로 能知名義하여 爲說眞覺이라. 若離不覺之心하면 則無眞覺 自相可說이니라.
불각의 뜻은 무엇인가?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사실을 참으로 진실하게 알지 못하기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 망념이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망념은 자기 모습이 없으나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기대기에 길을 잃었으나 방향에 대한 집착을 여의면 길을 잃음도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다. 각에 기대기에 어리석지만 각의 성품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다, 불각인 헛된 생각이 있기에 이름과 뜻을 알아 참된 각이라고 설하게 되나,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말할 만한 참된 각(覺)의 자기 모습도 없다.
(논-27)
復次 依不覺故로 生三種相이니 與彼不覺과 相應不離니라.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無明業相이니 以依不覺故로 心動을 說名爲業하나 覺則不動이라. 動則有苦이니 果不離因故니라. 二者는 能見相이니 以依動故로 能見일새 不動則無見이라. 三者는 境界相이니 以依能見故로 境界妄現일새 離見則無境界니라.
다시 불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모습이 생기니 불각과 서로 붙어 어울려 다닌다. 무엇이 그 세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인 업의 모습이다. 불각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움직임을 업이라고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결과가 원인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견(能見)의 모습이다. 마음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봄이 없다.
셋째는 경계로 나타난 모습이다. 능견으로 말미암아 헛된 경계가 나타나기에 능견을 떠나면 경계가 없다.
(논-28)
以有境界緣故로 復生六種相이니 云何爲六이오? 一者는 智相이니 依於境界하여 心起分別 愛與不愛故이니라. 二者는 相續相이니 依於智故로 生其苦樂 覺心起念하여 相應不斷故이니라. 三者는 執取相이니 依於相續하여 緣念境界하고 住持苦樂하여 心起著故이니라. 四者는 計名字相이니 依於妄執하여 分別假名言相故이니라. 五者는 起業相이니 依於名字 尋名取著하여 造種種業故니라. 六者는 業繫苦相이니 以依業受果하여 不自在故이니라.
경계로 나타난 모습의 연(緣)이 있기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이 생기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첫째는 ‘세간에 있는 지혜의 모습’이니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분별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이니 세간에 있는 지혜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기고 그것을 분별하여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 서로 맞아떨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착하는 모습’이니 분별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말미암아 망념의 경계를 반연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물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실체가 없는 이름을 붙이는 모습’이니 헛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이름을 짓고 말로 나타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업을 일으키는 모습’이니 실체가 없는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찾고 집착하여 온갖 업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업에 얽힌 괴로운 모습’이니 업 때문에 그 과보를 받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29)
當知하라. 無明能生一切染法이니 以一切染法이 皆是不覺相故니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이 오염된 모든 법을 낼 수 있으니, 오염된 모든 법이 모두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논-30)
復次 覺與不覺에 有二種相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同相이며 二者는 異相이라. 言同相者란 譬如種種瓦器 皆同微塵性相이듯 如是無漏無明의 種種業幻이 皆同眞如性相이라. 是故로 脩多羅中 依於此眞如義故로 說하되 一切衆生이 本來常住 入於涅槃菩提之法이어 非可修相이며 非可作相이라 畢竟無得하고 亦無色相可見이라 而有見色相者는 唯是隨染業幻所作일새 非是智色不空之性이라 以智相無可見故이니라. 言異相者란 如種種瓦器 各各不同이듯 如是無漏無明은 隨染幻差別이며 性染幻差別故이니라.
다시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같은 모습이고, 둘째는 다른 모습이다.
같은 모습이란 비유하면 온갖 모양의 질그릇이 모두 똑같이 미세한 흙가루의 성품과 모습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의 온갖 허깨비와 같은 업도 모두 똑같은 진여의 성품과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서 이 진여의 뜻에 기대어, ”모든 중생이 본디부터 열반과 깨달음에 늘 들어가 있기에 이는 수행으로 이루어지거나 인연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진여의 성품과 모습은 마침내 얻을 것도 없고 또한 볼 수 있는 빛깔도 없다. 빛깔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오염된 법을 따른 허깨비와 같은 업이 지은 것이기에 ‘지혜의 빛깔로서 불공(不空)’의 성품이 아니다. 참 지혜의 모습은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다른 모습이란 온갖 질그릇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무루와 무명은 다르다.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은 오염된 법의 허깨비와 같은 차별을 따르고 있고, 그 성품은 오염된 허깨비와 같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논-31)
復次 生滅因緣者란 所謂 衆生이 依心하여 意,意識轉故니라.
다시 생멸의 인연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기대어 의(意)와 의식(意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논-32)
此義云何오? 以依阿梨耶識일새 說有無明이라.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리야식에 기대기에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논-33)
不覺而起 能見能現하여 能取境界하고 起念相續하니 故로 說爲意니라. 此意는 復有五種名이니 云何爲五오? 一者는 名爲業識이니 謂無明力不覺心動故이니라. 二者는 名爲轉識이니 依於動心 能見相故니라. 三者는 名爲現識이니 所謂能現一切境界니라. 猶如明鏡에 現於色像하듯 現識도 亦爾하여 隨其五塵하면 對至卽現하여 無有前後이니 以一切時 任運而起하여 常在前故니라. 四者는 名爲智識이니 謂分別染淨法故니라. 五者는 名爲相續識이니 以念相應不斷故며 住持過去 無量世等 善惡之業 令不失故며 復能成熟 現在未來 苦樂等報 無差違故이니라. 能令現在 已經之事를 忽然而念하고 未來之事를 不覺妄慮하니 是故로 三界虛僞 唯心所作이라. 離心則無六塵境界니라. 此義云何오? 以一切法이 皆從心起하여 妄念而生일새 一切分別은 卽分別自心이니라. 心不見心하여 無相可得이라. 當知하라. 世間의 一切境界는 皆依衆生 無明妄心하여 而得住持니라. 是故로 一切法은 如鏡中像이듯 無體可得이어 唯心虛妄이니 以心生則種種法生하고 心滅則種種法滅故이니라.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한 생각이 일어나 능견(能見)과 능현(能現)으로 나누어 경계를 취하고 망념을 일으켜 이어가기 때문에 ‘의(意)’가 된다고 한다. 이 의(意)에는 다시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업식(業識)이라고 하니 무명의 힘으로 깨닫지 못한 상태로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식(轉識)이라고 하니 움직인 마음에 기대어 모든 경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現識)이라고 하니 이른바 모든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밝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나타내듯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를 상대하면 곧 앞뒤가 없이 나타난다. 이는 모든 삶 속에 있는 인연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언제나 경계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하니 오염된 법과 맑은 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하니 망념이 맞아떨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에서 지은 좋은 업과 나쁜 업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에 받을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를 어김없이 받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일을 각성하지 못하고서 자기도 모르게 헛되이 걱정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삼계는 거짓으로서 오직 마음이 지을 뿐이다.
마음을 여의면 바깥의 여섯 가지 경계가 없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법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 망념으로 생겼기에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 중생의 헛된 마음인 무명에 따라 머무를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 얻을 수 있는 어떤 실체도 없으며 오직 헛된 망념일 뿐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논-34)
復次 言에 意識者란 卽此相續識이 依諸凡夫 取著轉深하여 計我我所 種種妄執하고 隨事攀緣하여 分別六塵을 名爲意識이라하고 亦名分離識이라하며 又復說에 名分別事識이라. 此識은 依見愛煩惱增長義故니라.
다음에 말한 의식이란 무엇인가. 곧 이 상속식(相續識)이 모든 범부들의 집착이 깊어짐으로 말미암아 ‘나’와 ‘내 것’이라고 헤아리는 온갖 헛된 집착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 반연하여 여섯 가지 경계를 분별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하며, 분리식이나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이라고도 한다. 이 식은 견애(見愛) 번뇌로 말미암아 번뇌를 더 늘어나게 한다는 뜻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논-35)
依無明熏習하여 所起識者란 非凡夫能知이며 亦非二乘智慧所覺이니 謂依菩薩從初正信發心觀察하여 若證法身이면 得少分知나 乃至 菩薩究竟地에서도 不能盡知일새 唯佛窮了니라. 何以故오? 是心은 從本已來 自性淸淨하더라도 而有無明이고 爲無明所染하여 有其染心이니라. 雖有染心이라도 而常恒不變일새 是故로 此義는 唯佛能知니라.
무명 훈습에 따라 일어난 식(識)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문이나 연각의 지혜로 깨달을 바도 아니다. 이 식은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내고 관챃하는 수행에 따라 법신을 증득하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만, 보살 구경지에서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직 부처님만 다 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디 자기 성품이 깨끗하고 맑더라도 무명이 있고, 무명에 오염되어 오염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염된 마음이 있더라도 늘 그 성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논-36)
所謂 心性常無念故로 名爲不變이라.
말하자면 마음의 성품은 늘 망념이 없기에 불변이라고 한다.
(논-37)
以不達一法界故로 心不相應하고 忽然 念起하니 名爲無明이라.
하나의 법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지만, 문득 망념이 일어나니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논-38)
染心者는 有六種이니 云何爲六이오? 一者는 執相應染이니 依二乘解脫 及信相應地해야 遠離故이니라. 二者는 不斷相應染이니 依信相應地 修學方便하여야 漸漸能捨로서 得淨心地에 究竟離故니라. 三者는 分別智相應染이니 依具戒地하여 漸離하고 乃至無相方便地하여야 究竟離故니라. 四者는 現色不相應染이니 依色自在地하여야 能離故이니라. 五者는 能見心不相應染이니 依心自在地하여야 能離故이니라. 六者는 根本業不相應染이니 依菩薩盡地하여 得入如來地하여야 能離故이니라.
오염된 마음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첫 번째는 ‘집착으로서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성문 연각의 해탈과 믿음이 맞아떨어지는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끊임없이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믿음이 맞아 떨어지는 위치에 기대고 방편을 닦아 익혀야 차츰차츰 버릴 수 있는 것으로서 맑은 마음의 위치를 얻어야 마침내 이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분별하는 지혜로서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절도 있는 아름다운 삶의 위치에 기대어 잘못된 삶을 차츰차츰 벗어나고 결정된 틀이 없는 방편을 쓰는 위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드러난 모습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몸의 활동이 자재하여 거침새가 없는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능견(能見)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마음이 자재한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근본 업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보살의 수행이 다 끝나는 경계에 기대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논-39)
不了一法界義者는 從信相應地에 觀察學斷하여 入淨心地해야 隨分得離하며 乃至 如來地에 能究竟離故니라.
하나의 법계를 알지 못하는 이는 믿음이 맞아떨어지는 위치에서 자기 마음을 살피고 무명을 다스려서 끊는 법을 배워 맑은 마음의 경계에 들어가야 자기 능력에 따라 무명을 벗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모든 무명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논-40)
言相應義者란 謂心念法異이니 依染淨差別하여 而知相緣相同故니라. 不相應義者란 謂卽心不覺이니 常無別異이어 不同知相緣相故이니라.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라고 말한 뜻은 ‘마음[心王]’과 ‘마음의 작용[念法]’은 다르지만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의 차별에 따라 아는 모습과 연(緣)의 모습이 같기 때문이다.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말한 뜻은 마음 자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다름이 없지만 아는 모습과 연(緣)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논-41)
又 染心義者란 名爲煩惱礙라하니 能障眞如根本智故이며 無明義者란 名爲智礙라하니 能障世間自然業智故니라. 此義云何오? 以依染心하여 能見能現이 妄取境界하여 違平等性故이며 以一切法이 常靜하여 無有起相인데 無明不覺이 妄與法違하니 故로 不能得 隨順世間一切境界하는 種種知故니라.
또 오염된 마음이란 뜻은 ‘번뇌 걸림돌’이라고 하니 진여의 근본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무명이란 뜻은 ‘지혜 걸림돌’이라고 하니 세간에서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염된 마음에 따라 능견(能見)과 능현(能現)이 헛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성품을 어기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늘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습이 없는데 무명으로 깨닫지 못한 채 헛되이 법과 어긋나므로 세간의 모든 경계를 따르는 온갖 앎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42)
復次 分別生滅相者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一者는 麤니 與心相應故이며 二者는 細니 與心不相應故이니라. 又 麤中之麤는 凡夫 境界이고 麤中之細 及細中之麤는 菩薩境界이며 細中之細는 是佛 境界니라.
다시 생멸하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거친 모습이니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미세한 모습이니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 거친 가운데 거친 모습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가운데 미세한 모습과 미세한 가운데 거친 모습은 보살의 경계이며, 미세한 가운데 미세한 모습은 부처님의 경계이다.
(논-43)
此二種生滅은 依於無明熏習而有이니 所謂 依因依緣이라. 依因者는 不覺義故이며 依緣者는 妄作境界義故니라. 若因滅이면 則緣滅이고 因滅故로 不相應心滅이며 緣滅故로 相應心滅이니라. 問曰: 若心滅者라면 云何相續이며 若相續者라면 云何說究竟滅이리오? 答曰: 所言滅者는 唯心相滅이지 非心體滅이니 如風依水 而有動相이라. 若水滅者라면 則風相斷絕이어 無所依止나 以水不滅로 風相相續이라. 唯風滅故로 動相隨滅해도 非是水滅이라. 無明도 亦爾하여 依心體而動이라. 若心體滅이면 則衆生斷絕이어 無所依止나 以體不滅로 心得相續이라. 唯癡滅故로 心相隨滅하나 非心智滅이니라.
이 두 종류의 생멸은 무명 훈습에 따라 있으니 이른바 인(因)에 기대고 연(緣)에 기댄다. 인(因)에 기댄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며, 연(緣)에 기댄다는 것은 헛되이 경계를 만드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因)이 없어지면 연(緣)이 없어지고, 인(因)이 없어지기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 없어지며, 연(緣)이 없어지기에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물음: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마음을 이어가며, 이어가는 마음이라면 마침내 없어진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답: 없어진다는 것은 오직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만 없어지지 마음의 바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람이 물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물이 없어지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 기댈 것이 없겠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기에 바람의 모습은 이어진다. 오직 바람만 사라지기에 움직이는 모습이 따라서 없어져도 물은 없어지지를 않는다. 무명도 그러하여 마음의 바탕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마음의 바탕이 없어진다면 중생 자체도 사라져 기댈 것이 없겠지만 마음의 바탕은 불멸이기에 그 마음은 이어갈 수 있다. 오직 어리석음만 없어지기에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따라서 없어지나 참마음의 지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논-44)
復次 有四種法熏習義故로 染法淨法이 起不斷絕이라. 云何爲四오? 一者는 淨法이니 名爲眞如하고 二者는 一切染因이니 名爲無明하며 三者는 妄心이니 名爲業識하고 四者는 妄境界이니 所謂 六塵이니라.
다시 네 가지 법이 훈습하는 뜻이 있기에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이 끊어지지 않고 일어난다.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깨끗한 법이니 진여라고 하고, 둘째는 오염된 모든 법의 인(因)이니 무명이라고 하며, 셋째는 헛된 마음이니 업식(業識)이라고 하고, 넷째는 헛된 경계이니 여섯 가지 경계를 말한다.
(논-45)
熏習義者는 如世間衣服이 實無於香이나 若人以香而熏習故로 則有香氣이듯 此亦如是니라. 眞如淨法이 實無於染이나 但以無明而熏習故로 則有染相이고 無明染法이 實無淨業이 但以眞如而熏習故로 則有淨用이니라.
훈습의 뜻은 무엇인가. 마치 세간의 옷에는 실제 향기가 없지만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기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 이 훈습의 뜻도 이와 같다. 진여라는 깨끗한 법은 실제 오염된 것이 없으나 다면 무명으로 훈습하기에 오염된 모습이 있고, 무명이라는 오염된 법은 실제 맑은 업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에 맑은 작용이 있다.
(논-46)
云何熏習에 起染法不斷이오? 所謂 以依眞如法故로 有於無明이고 以有無明染法因故로 卽熏習眞如라. 以熏習故로 則有妄心이고 以有妄心일새 卽熏習無明하고 不了眞如法故로 不覺念起하여 現妄境界라. 以有妄境界染法緣故로 卽熏習妄心하고 令其念著이 造種種業케하여 受於一切身心等苦니라. 此妄境界熏習義에 則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增長念熏習이고 二者는 增長取熏習이라. 妄心熏習義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業識根本熏習이니 能受阿羅漢辟支佛一切菩薩生滅苦故이며 二者는 增長分別事識熏習이니 能受凡夫業繫苦故이니라. 無明熏習義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根本熏習이 以能成就業識義故이며 二者는 所起見愛熏習이니 以能成就分別事識義故니라.
어떻게 훈습하기에 오염된 법을 일으키는 것이 끊어지질 않는가. 이른바 진여라는 법에 따라 무명이 있고, 무명이라는 오염된 법의 인(因)이 있기에 진여를 훈습한다. 진여를 훈습하기에 곧 헛된 마음이 있고, 헛된 마음이 있기에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라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상태로 헛된 생각이 일어나 헛된 경계를 나타낸다. 헛된 경계인 오염된 법의 연(緣)이 있기에 곧 헛된 마음을 훈습하고 그 헛된 생각으로 집착하여 모든 업을 짓게 하므로 몸과 마음에 있는 온갖 괴로움 같은 것을 받는다.
이 헛된 경계가 훈습하는 뜻에는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증장념(增長念) 훈습이고 또 하나는 증장취(增長取) 훈습이다.
헛된 마음이 훈습하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업식 근본 훈습’이니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들에게 모두 생멸하는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을 더 늘어나게 하는 훈습’이니 범부에게 업에 얽힌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무명이 훈습하는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근본 훈습이니 업식을 이루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일어난 견혹(見惑)과 애혹(愛惑)이 훈습하니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을 이루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논-47)
云何熏習일새 起淨法不斷이오? 所謂 以有眞如法故로 能熏習無明이라. 以熏習因緣力故로 則令妄心에 厭生死苦 樂求涅槃케하니라. 以此妄心이 有厭求因緣故로 卽熏習眞如하여 自信己性하고 知心妄動 無前境界일새 修遠離法이니라. 以如實知 無前境界故로 種種方便으로 起隨順行하여 不取하고 不念하며 乃至久遠熏習力故로 無明則滅이라. 以無明滅故로 心無有起하고 以無起故로 境界隨滅이라. 以因緣俱滅故로 心相皆盡하니 名得涅槃 成自然業이니라.
어떻게 훈습하기에 깨끗한 법을 일으키는 것이 끊어지질 않는가. 이른바 진여라는 법이 있기에 무명을 훈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헛된 마음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헛된 마음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 성품을 믿고, 중생의 마음은 헛되이 움직인 것으로서 다른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헛된 마음을 멀리 벗어나는 법을 닦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에 온갖 방편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수행을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없어진다.
무명이 없어지기에 마음이 일어남이 없고, 마음이 일어남이 없기에 경계가 따라서 없어진다. 인(因)과 연(緣)이 모두 없어지기에 마음의 모습이 다 사라지니 열반을 얻어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논-48)
妄心熏習義는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分別事識熏習이니 依諸凡夫二乘人等厭生死苦에 隨力所能하여 以漸趣向無上道故니라. 二者는 意熏習이니 謂諸菩薩發心勇猛速趣涅槃故이니라.
헛된 마음이 훈습하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의 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성문 연각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에 따라 힘이 닿는 대로 최고의 도를 향하여 차츰차츰 나아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의(意) 훈습이니, 모든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용맹스럽고 빠르게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논-49)
眞如熏習義에는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自體相熏習이며 二者는 用熏習이라. 自體相熏習者란 從無始世來 具無漏法하고 備有不思議業하여 作境界之性이라. 依此二義 恒常熏習하여 以有力故로 能令衆生이 厭生死苦하고 樂求涅槃케하니라. 自信己身에 有眞如法하고 發心修行하니라. 問曰: 若如是義者라면 一切衆生이 悉有眞如일새 等皆熏習인데 云何有信無信이며 無量前後差別이오? 皆應一時에 自知有眞如法하고 勤修方便하여 等入涅槃하리라. 答曰: 眞如는 本一인데 而有無量無邊無明일새 從本已來 自性差別이어 厚薄不同故이니라. 過恒沙等上煩惱가 依無明하여 起差別하고 我見愛染煩惱가 依無明하여 起差別이라. 如是一切煩惱는 依於無明하여 所起前後無量差別하니 唯如來能知故니라. 又 諸佛法은 有因有緣이니 因緣具足해야 乃得成辦이라. 如木中火性이 是火正因인데 若無人知하여 不假方便이면 能自燒木은 無有是處이니 衆生도 亦爾니라. 雖有正因熏習之力이더라도 若不遇諸佛菩薩善知識等 以之爲緣이면 能自斷煩惱入涅槃者는 則無是處니라. 若雖有外緣之力이더라도 而內淨法이 未有熏習力者라면 亦不能究竟 厭生死苦 樂求涅槃이니라. 若因緣具足者라면 所謂 自有熏習之力하고 又 爲諸佛菩薩等 慈悲願護故로 能起厭苦之心하고 信有涅槃일새 修習善根이라. 以修善根成熟故로 則値諸佛菩薩示教利喜하고 乃能進趣向涅槃道니라.
진여 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자체 모습의 훈습이며, 또 하나는 용(用)의 훈습이다. 자체 모습의 훈습이란 시작이 없는 때부터 무루법을 갖추고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을 준비하여 경계를 만드는 성품이다.
이 두 가지 뜻이 늘 훈습하는 것에 따라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즐기며,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라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수행하는 것이다.
물음: 이런 뜻이라면 모든 중생에게 진여가 있기에 똑같이 훈습할 것인데 어찌 믿음이 있고 없는 것과 같은 많은 차별이 있습니까. 모두가 한꺼번에 스스로 진여라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 진여는 본디 하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이 있기에 본디부터 자기 성품의 차별이 두텁거나 엷어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근본번뇌가 무명에 따라 차별을 일으키고, 아견(我見)과 애염(愛染) 번뇌가 무명에 따라 차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는 무명에 따라 앞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을 일으키는 것이니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을 이룩하는 데는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니 인연을 갖추어야 이룩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있는 불의 성품이 불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불 놓는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니 비록 열반을 이루게 하는 근본 원인이 훈습하는 힘이 있더라도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모두를 만나 그 분들로 연(緣)을 삼지 않는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바깥 연(緣)의 힘이 있더라도 안의 깨끗한 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없는 이라면 끝내는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즐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因)과 연(緣)을 다 갖춘다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지켜주는 힘 때문에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는 것을 믿기에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아서 익힌다.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아서 익힌 힘이 무르익었기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가르침을 만나 기뻐하고 열반의 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논-50)
用熏習者란 卽是衆生外緣之力이라. 如是外緣은 有無量義이나 略說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差別緣이고 二者는 平等緣이라. 差別緣者란 此人이 依於諸佛菩薩等하여 從初發意始求道時 乃至 得佛에 於中 若見若念이 或爲眷屬父母諸親하며 或爲給使 或爲知友或爲怨家 或起四攝 乃至 一切所作 無量行緣하니 以起大悲 熏習之力으로 能令衆生이 增長善根케할새 若見若聞에 得利益故이니라. 此緣은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近緣이니 速得度故이며 二者는 遠緣이니 久遠得度故이니 是近遠二緣을 分別하면 復有二種리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增長行緣이며 二者는 受道緣이라. 平等緣者란 一切諸佛菩薩이 皆願度脫一切衆生하려 自然熏習 恒常不捨니라. 以同體智力故로 隨應見聞에 而現作業이니 所謂 衆生이 依於三昧해야 乃得平等見諸佛故이니라.
용(用) 훈습이란 곧 중생의 바깥 인연이 주는 힘이다. 이와 같은 바깥 인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차별 인연이고 또 하나는 평등인연이다.
차별인연이란 공부하는 사람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 기대어 처음 공부할 마음을 내 도를 찾기 시작할 때부터 부처님의 경지를 얻을 때까지, 그 가운데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과 보살들이 모두 권속이 되기도 하고 부모나 친척이 되기도 하며, 또는 심부름꾼이나 아는 친구나 원수가 되기도 하며, 또는 보시•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섭(同事攝)을 일으키기도 하며, 나아가 하는 일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보살행의 인연이 된다. 이와 같이 불보살님께서 일으키는 자비로운 큰마음을 가지고 훈습하는 힘으로 중생들의 좋은 마음의 뿌리가 더 늘어나게 되어 보는 이나 듣는 이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차별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가까운 인연이니 빠르게 도를 얻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먼 인연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야 도를 얻기 때문이다. 가까운 인연과 먼 인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보살행을 더 늘어나게 하는 인연’이며, 또 하나는 ‘불도를 받아들이게 하는 인연’이다.
평등인연이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원력으로 중생들을 모두 괴로움에서 건지고자 자연스럽게 이들을 훈습하여 언제나 버리지 않는 인연이다. ‘중생들이 불보살과 같은 바탕이라고 아는 데서 나오는 힘’이기에 중생들이 보고 듣는 것에 감응하여 자연스럽게 그 활동을 나타내니,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 속에 들어가야 모든 부처님을 평등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51)
此體用熏習을 分別하면 復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未相應이니 謂凡夫二乘 初發意菩薩等이 以意意識熏習 依信力故로 而能修行이나 未得無分別心이 與體相應故이며 未得自在業修行이 與用相應故니라. 二者는 已相應이니 謂法身菩薩이 得無分別心일새 與諸佛智用相應이라. 唯依法力 自然修行하여 熏習眞如하고 滅無明故이니라.
이 체(體)와 용(用)의 훈습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아직 맞아떨어지지 않은 훈습이니, 범부와 이승과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낸 보살들이 의(意)와 의식의 훈습으로 믿음의 힘에 기대기에 수행할 수는 있으나 아직 분별이 없는 마음이 체(體)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한 업의 수행이 용(用)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미 맞아떨어지는 훈습이니, 법신 보살이 분별이 없는 마음을 얻었기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용(用)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오직 법력에 따르고 자연스럽게 수행하여 진여를 훈습하고 무명을 없애기 때문이다.
(논-52)
復次 染法은 從無始已來 熏習不斷이라가 乃至得佛하여 後則有斷이라. 淨法 熏習은 則無有斷盡於未來이니 此義云何오? 以眞如法이 常熏習故이니라. 妄心則滅이면 法身顯現하여 起用熏習이니 故로 無有斷이니라.
또 오염된 법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훈습하여 끊어지질 않다가 부처님이 되고 난 뒤에 끊어진다. 그러나 깨끗한 법의 훈습은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끊어짐이 없으니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진여라는 법이 늘 훈습하기 때문이다. 헛된 마음이 없어지면 법신이 드러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니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다.
(논-53)
復次 眞如自體相者란 一切凡夫 聲聞緣覺 菩薩諸佛이 無有增減이라. 非前際生이요 非後際滅이라. 畢竟에 常恒이어 從本已來로 性自滿足 一切功德이라. 所謂 自體有大智慧光明義故이며 徧照法界義故이며 眞實識知義故이며 自性淸淨心義故이며 常樂我淨義故이며 淸涼不變自在義故니라. 具足如是 過於恒沙 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하여 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로 名爲如來藏이라하고 亦名如來法身이라하니라. 問曰: 上說 眞如其體는 平等하여 離一切相인데 云何復說 體有如是種種功德이오? 答曰: 雖實有此諸功德義라도 而無差別之相일새 等同一味로 唯一眞如니라. 此義云何오? 以無分別로 離分別相이니 是故로 無二니라. 復以何義 得說差別이오? 以依業識하여 生滅相示니라. 此云何示오? 以一切法이 本來唯心일새 實無於念이나 而有妄心이어 不覺起念하여 見諸境界故로 說無明이라. 心性不起는 卽是大智慧光明義故니라. 若心起見이면 則有不見之相이나 心性離見이면 卽是徧照法界義故니라. 若心有動이면 非眞識知이니라. 無有自性이어 非常非樂非我非淨이라. 熱惱衰變이면 則不自在이며 乃至具有過恒沙等 妄染之義니라. 對此義故로 心性無動이면 則有過恒沙等 諸淨功德相義示現이라. 若心有起이어 更見前法可念者는 則有所少이나 如是淨法의 無量功德은 卽是一心이니 更無所念이어 是故로 滿足하여 名爲法身如來之藏라하니라.
또 진여 자체의 모습이란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 모두에게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생긴 것도 아니요 미래에 없어질 것도 아니다. 끝내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본디부터 그 성품이 스스로 모든 공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 성품에 깨끗하고 맑은 마음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시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유로움의 뜻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불리(不離) •부단(不斷) •불이(不異)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부처님의 법을 다 갖추고, 나아가 만족하여 조금도 모자란 뜻이 없기에 여래장이라고 하며 또한 여래 법신이라고도 한다.
물음 : 위에서 진여 그 바탕은 평등하여 모든 모습을 벗어났다고 말했는데, 어찌 다시 진여 바탕에 이처럼 온갖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대답 : 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더라도 차별이 없는 모습이기에 똑 같은 한 맛으로서 오직 하나의 진여일 뿐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분별이 없는 것으로 분별된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에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에 따라 생멸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이는가. 모든 법이 본디 오직 마음뿐이기에 실로 망념이 없는 것이나, 헛된 마음이 있어 깨닫지 못한 상태로 헛된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에 무명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성품이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큰 지혜 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보는 것을 일으키면 보이지 않는 모습도 있게 되나, 마음의 성품이 보는 것을 떠나면 곧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성품이 없어 상(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뜨거운 고뇌로 쓰러지고 변화하면 자유롭지 않으며,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헛되이 오염된 뜻을 갖추게 된다.
이 뜻을 상대하기에 마음의 성품이 움직임이 없으면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모든 맑은 공덕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고 다시 앞의 법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공부가 모자라나, 이처럼 깨끗한 법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은 곧 한마음이니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에 만족하여 법신 여래장이라고 한다.
(논-54)
復次 眞如用者란 所謂 諸佛如來가 本在因地에서 發大慈悲하고 修諸波羅蜜하여 攝化衆生하며 立大誓願하고 盡欲度脫 等衆生界라. 亦不限劫數하고 盡於未來에 以取一切衆生 如己身故로 而亦不取衆生相이라. 此以何義오? 謂如實知一切衆生이 及與己身과 眞如平等하여 無別異故라. 以有如是大方便智로 除滅無明하고 見本法身하니 自然而有 不思議業 種種之用이라. 卽與眞如等 徧一切處하고 又亦無有用相可得이라. 何以故오? 謂諸佛如來가 唯是法身智相之身이며 第一義諦이니 無有世諦境界일새 離於施作이라. 但隨衆生見聞하여 得益故로 說爲用하니라.
또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디 인지(因地)에서 자비로운 큰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우고 중생계를 다 건져 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세월을 한정하지 않고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자기 몸처럼 취하기에 중생이라는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중생과 자기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를 게 없음을 실답게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방편으로 쓰는 지혜가 있기에 무명을 없애고 본디 법신을 보니 자연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온갖 작용이 있다. 곧 진여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고 또한 얻을 수 있는 용(用)의 모습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모든 부처님은 오직 법신의 지혜에 있는 몸이며 최고의 진리일 뿐 세간의 이치로서 경계가 없기에 베풀고 만드는 헛된 조작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이 보고 듣는 것을 따라 이익을 얻기에 용(用)이라고 말할 뿐이다.
(논-55)
此用에 有二種이니 云何爲二오? 一者는 依分別事識하여 凡夫二乘이 心所見者를 名爲應身이라. 以不知轉識現故로 見從外來하고 取色分齊하여 不能盡知故라. 二者는 依於業識하여 謂諸菩薩 從初發意 乃至 菩薩究竟地 心所見者를 名爲報身이라. 身에 有無量色이고 色에 有無量相이며 相에 有無量好라. 所住依果도 亦有無量種種莊嚴하고 隨所示現하니 卽無有邊하고 不可窮盡할새 離分齊相이라. 隨其所應하여 常能住持일새 不毀不失이니라. 如是功德이 皆因諸波羅蜜等 無漏行熏 及不思議熏之所成就하여 具足無量樂相故로 說爲報身하니라. 又 爲凡夫所見者는 是其麤色이니 隨於六道 各見不同하여 種種異類로 非受樂相일새 故로 說爲應身이라. 復次 初發意菩薩等所見者는 以深信眞如法故로 少分而見이라 知彼色相莊嚴等事가 無來無去이어 離於分齊하여 唯依心現일뿐 不離眞如니라. 然이나 此菩薩은 猶自分別이니 以未入法身位故라. 若得淨心하면 所見微妙 其用이 轉勝하여 乃至 菩薩地盡에 見之究竟이라. 若離業識하면 則無見相일새 以諸佛法身이 無有彼此色相迭相見故이니라. 問曰: 若諸佛法身離於色相者라면 云何能現色相이오? 答曰: 卽此法身이 是色體故로 能現於色이라. 所謂 從本已來 色心不二니라. 以色性卽智故로 色體無形을 說名智身이라. 以智性卽色故로 說名法身 徧一切處라. 所現之色은 無有分齊니라. 隨心 能示 十方世界 無量菩薩 無量報身 無量莊嚴 各各差別이나 皆無分齊일새 而不相妨이라. 此는 非心識分別能知이니 以眞如自在用義故이니라.
이 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에 기대어 범부와 이승이 본 것을 응신이라고 한 것이다. 전식(轉識)이 나타난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밖에서 왔다고 보고 한정된 색에 집착하여 진실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업식에 기대어 모든 보살이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에서부터 보살의 마지막 수행단계까지에서 본 것을 보신이라고 한 것이다. 보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이 있고, 그 색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이 있으며, 그 모습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이 있다. 머물고 기대는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장엄이 있고, 어떤 곳에도 나타나니 곧 그 끝이 없고 다함이 없기에 한정된 모습을 벗어난다. 그 감응한 곳을 따라 늘 머무를 수 있기에 망가지거나 잃어버릴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공덕이 모두 모든 바라밀과 번뇌 없는 보살행의 훈습과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훈습’으로 이루어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운 모습을 다 갖추었으므로 보신이 된다고 말한다.
또 범부가 본 것은 거친 색이니 여섯 갈래 중생의 나쁜 길을 따라 저마다 보는 게 달라 온갖 유형으로 즐거운 모습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응신이 된다고 한다.
다시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낸 보살들이 본 것은 진여라는 법을 깊이 믿기에 조금이나마 보신을 보는 것이다. 그 색의 모습과 장엄 따위의 일들은 오고감이 없으며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모습을 떠나 오직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가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법신의 위치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맑은 마음을 얻는다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차츰차츰 뛰어나다가 보살의 수행단계가 다 끝나면 보는 경계가 다할 것이다. 업식을 벗어나면 보는 모습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서로가 색의 모습으로 서로 보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음 : 부처님의 법신이 모두 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벗어났다면 어떻게 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대답 : 이 법신 자체가 색의 바탕이기에 색을 나타낼 수 있다. 말하자면 본디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색의 성품이 곧 지혜이기에 색의 바탕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혜의 몸이라고 한다. 지혜의 성품이 곧 색이기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한다. 나타난 색은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형태가 없다. 마음대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과 보신과 장엄들이 저마다 차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모두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형태가 없으므로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유자재한 용(用)을 뜻하기 때문이다.
(논-56)
復次 顯示 從生滅門 卽入眞如門이라. 所謂 推求五陰 色之與心하면 六塵 境界는 畢竟 無念이며 以心無形相일새 十方求之해도 終不可得이니라. 如人迷故로 謂東 爲西하나 方實不轉하듯 衆生 亦爾하여 無明迷故로 謂心 爲念하나 心實不動하니라. 若能觀察 知心無念이면 卽得隨順하여 入眞如門故니라.
다시 생멸의 길에서 진여의 길로 들어가는 내용을 드러낸다. 이른바 오음(五陰)에 있는 색과 마음을 추구해보면, 육진 경계는 끝내 헛된 생각이 없고 마음은 모습이 없기에 아무리 찾아도 결국 얻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헤매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나 방향은 실로 바뀌지 않듯,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어리석음으로 마음을 헛된 생각이라고 해도 마음은 실로 움직인 것이 아니다.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헛된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의 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논-57)
對治邪執者란 一切邪執이 皆依我見이니 若離於我하면 則無邪執이라. 是我見에 有二種이니라.
삿된 집착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삿된 집착이 모두 다 아견(我見)이니 ‘나’를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논-58)
云何爲二오? 一者는 人我見이고 二者는 法我見이니라.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이다.
(논-59)
人我見者란 依諸凡夫하여 說하니 有五種이라.云何爲五오? 一者는 聞하기를 脩多羅 說에 如來法身은 畢竟에 寂寞하여 猶如虛空이라함에 以不知爲破著故로 卽謂虛空 是如來性이니라. 云何對治오? 明 虛空相은 是其妄法이니 體無이어 不實이라. 以對色故로 有是可見相이어 令心生滅케하나 以一切色法이 本來是心이어 實無外色이니라. 若無外色者면 則無虛空之相이라. 所謂一切境界는 唯心妄起故로 有이니 若心離於妄動하면 則一切境界滅이라. 唯一眞心이 無所不徧이니라. 此는 謂如來廣大性智究竟之義하니 非如虛空相故니라. 二者는 聞하기를 脩多羅 說에 世間諸法이 畢竟 體空이고 乃至 涅槃眞如之法이 亦畢竟空이며 從本已來 自空이어 離一切相이라함에 以不知爲破著故로 卽謂眞如涅槃之性이 唯是其空이라. 云何對治오? 明 眞如法身 自體가 不空이니 具足無量性功德故이니라. 三者는 聞하기를 脩多羅 說에 如來之藏은 無有增減이어 體備一切功德之法이라함에 以不解故로 卽謂如來之藏에 有色心法일새 自相差別이라. 云何對治오? 以唯依眞如義하여 說故니 因生滅染義示現으로 說差別故이니라. 四者는 聞하기를 脩多羅 說에 一切世間 生死染法이 皆依如來藏하여 而有일새 一切諸法이 不離眞如라함에 以不解故로 謂如來藏 自體에 具有一切世間 生死等法이라. 云何對治오? 以如來藏은 從本已來 唯有過恒沙等 諸淨功德이어 不離不斷 不異眞如義故일새 以過恒沙等 煩惱染法은 唯是妄有일뿐 性自本無이어 從無始世來 未曾與如來藏과 相應故이니라. 若如來藏體에 有妄法이면 而使證會永息妄者는 則無是處故이니라. 五者는 聞하기를 脩多羅 說에 依如來藏故로 有生死하고 依如來藏故로 得涅槃이라할새 以不解故로 謂衆生有始니라. 以見始故로 復謂如來所得涅槃이 有其終盡이어 還作衆生이라. 云何對治오? 以如來藏 無前際故로 無明之相도 亦無有始니라. 若說三界外 更有衆生始起者라면 卽是外道經說이니라. 又 如來藏은 無有後際이니 諸佛所得涅槃이 與之相應하여 則無後際故이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란 모든 범부에 기대어 말한 것이니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경에서 “여래 법신은 마침내 적막하여 허공 같다.”고 한 말을 듣고, 이 말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인 줄 알지 못하기에 곧 허공이 여래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허공의 모습은 헛된 법이니, 그 바탕이 없어 실답지 않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색을 상대하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어 마음이 생멸하게 하지만 모든 색법이 본디 마음이기에 실로 바깥의 색은 없다. 바깥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다. 이른바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헛되이 일으키기에 있는 것이니, 마음이 헛된 움직임을 벗어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오직 하나의 참마음만이 어떤 곳에서도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다. 이는 여래의 크고 넓은 성품 지혜의 가장 뛰어난 뜻을 말하니, 허공과 같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끝내 그 바탕이 공(空)이고, 열반과 진여라는 법도 끝내 공(空)이며, 본디부터 스스로 공(空)이어서 모든 모습을 벗어났다.”고 한 말을 듣고, 이 말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인 줄 모르기에 곧 진여와 열반의 성품은 오직 공(空)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진여에 법신 자체가 불공(不空)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니,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에서 “여래장은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이 그 바탕에 모든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한 말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곧 여래장에 색과 마음의 법이 있으므로 근본성품이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오직 진여의 뜻만 기대어 말할 뿐이니, 생멸의 오염된 뜻이 나타남에 따라 차별을 말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경에서 “모든 세간의 삶과 죽음으로 대두된 오염된 법이 모두 여래장에 기대어 있기에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에, 여래장 자체에 모든 세간의 삶과 죽음과 같은 법을 다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여래장은 본디부터 오직 갠지스강 모래알보다 더 많은 깨끗한 공덕만 있어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에, 갠지스강 모래알보다 더 많은 번뇌인 오염된 법은 오직 헛되이 있을 뿐 그 성품 자체가 본디 없어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서로 붙어 어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 자체에 헛된 법이 있다면 이것을 증득하여 영원히 헛된 법을 없앤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기대기에 삶과 죽음이 있고, 여래장에 기대기에 열반을 얻는다.”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고, 시작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또 “여래가 얻은 열반은 그 끝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여래장은 과거에 시작인 어떤 시점도 없기에 무명의 모습도 시작이 없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시작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곧 외도의 경에서 말한 것이다. 또 여래장은 미래의 끝인 어떤 시점도 없으니 모든 부처님이 얻은 열반도 이와 맞서 미래의 끝인 어떤 시점도 없기 때문이다.
(논-60)
法我見者란 依二乘鈍根故로 如來 但爲說人無我하니 以說不究竟으로 見有五陰生滅之法하고 怖畏生死하여 妄取涅槃이니라. 云何對治오? 以五陰法自性이 不生이어 則無有滅이니 本來涅槃故이니라.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란 무엇인가. 이승의 아둔한 근기에 기대기에 여래께서는 다만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말한 내용이 가장 뛰어난 법이 아니기에 이승은 오음에 생멸이 있다고 보고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헛되이 열반을 취한다.
(논-61)
復次 究竟離妄執者란 當知이니 染法과 淨法이 皆悉相待로서 無有自相可說이라. 是故로 一切法이 從本已來 非色非心이며 非智非識이며 非有非無이어 畢竟에 不可說相이니라. 而有言說者란 當知하라 如來善巧方便으로 假以言說 引導衆生이라. 其旨趣者는 皆爲離念하여 歸於眞如니라. 以念一切法하여 令心生滅케하면 不入實智故이니라.
또 마침내 헛된 집착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은 서로 맞서 기댐으로 있게 되는 것으로서 말할 만한 근본성품이 없다는 사실을 으레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본디부터 물질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어서 끝내 말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말이 있게 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으레 알아야 한다. 여래께서는 훌륭한 방편으로 임시 말로써 중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취지는 모두 헛된 생각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모든 법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생멸하게 되면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62)
分別發趣道相者란 謂一切諸佛 所證之道 一切菩薩 發心修行趣向義故이니라.
‘도 닦을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한 도를 모든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수행해 나간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논-63)
略說發心이면 有三種이니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信成就發心이고 二者는 解行發心이고 三者는 證發心이니라.
간단히 도 닦을 마음 내는 것을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알고 행하면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며, 셋째는 ‘증득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다.
(논-64)
信成就發心者란 依何等人하고 修何等行하여 得信成就하여야 堪能發心인가? 所謂 依不定聚衆生이 有熏習善根力故로 信業果報하고 能起十善하며 厭生死苦하여 欲求無上菩提하려 得値諸佛하여 親承供養하고 修行信心하며 經一萬劫에 信心成就故이니라. 諸佛菩薩이 教令發心케하며 或以大悲故로 能自發心하며 或因正法欲滅로 以護法因緣으로 能自發心하니라. 如是 信心成就하여 得發心者는 入正定聚에 畢竟不退이니 名住如來種中에 正因相應하니라. 若有衆生善根微少라면 久遠已來 煩惱深厚일새 雖値於佛 亦得供養이더라도 然이나 起人天種子하며 或起二乘種子니라. 設有求大乘者라도 根則不定일새 若進若退니라. 或有供養諸佛하고 未經一萬劫 於中에 遇緣일새 亦有發心이니라. 所謂 見佛色相하고 而發其心하며 或因供養衆僧으로 而發其心하며 或因二乘之人이 教令發心케하며 或學他 發心하니라. 如是等發心은 悉皆不定일새 遇惡因緣하면 或便退失 墮二乘地하니라.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에게 기대고 어떤 행을 닦아 믿음을 이룩해야 도 닦을 마음을 낼 수 있는가.
이른바 ‘어떤 길로 갈지 결정되지 않은 중생’이 마음의 좋은 뿌리를 훈습한 힘이 있는 것에 기대기에 업의 과보를 믿고 열 가지 좋은 행을 일으켜,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모든 부처님을 만나 몸소 공양하고 믿음을 수행하며 일만 겁을 지나 믿음을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들을 가르쳐 도 닦을 마음을 내게 하며, 때로는 자비로운 큰마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도 닦을 마음을 내며, 때로는 바른 법이 멸하려고 할 때 법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연으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들이다.
이처럼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 사람들은 반드시 도를 이루게 할 길로 들어가 끝내 도 닦는 공부에서 물러나지를 않으니, 이를 여래의 씨앗 가운데 머물러 바른 인(因)과 맞아 떨어진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마음의 좋은 뿌리가 적다면,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기에,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더라도 하늘의 신이나 인간의 씨앗을 일으키며 또는 이승의 씨앗을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찾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떤 때는 공부에 나아가고 어떤 때는 공부에서 물러난다.
때로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않았어도 그 가운데 좋은 인연을 만나기에 또한 도 닦을 마음을 내기도 한다. 이른바 부처님의 겉모습을 보고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많은 스님들을 공양하므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이승의 가르침으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배워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 닦을 마음을 낸 것은 아직은 모두 굳은 마음들이 아니므로 나쁜 인연을 만나면 때로는 도에서 물러나 이승의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논-65)
復次 信成就發心者은 發何等心인고? 略說하면有三種이니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直心이니 正念眞如法故요 二者는 深心이니 樂集一切諸善行故요 三者는 大悲心이니 欲拔一切衆生苦故이니라. 問曰: 上說에 法界一相 佛體無二인데 何故로 不唯念眞如하고 復假求學諸善之行이리오? 答曰: 譬如大摩尼寶 體性이 明淨이나 而有鑛穢之垢니라. 若人이 雖念寶性이더라도 不以方便種種磨治라면 終無得淨이니라. 如是 衆生의 眞如之法도 體性이 空淨이나 而有無量煩惱染垢니라. 若人이 雖念眞如라도 不以方便 種種熏修라면 亦無得淨이니라. 以垢無量徧一切法故로 修一切善行하여 以爲對治니라. 若人이 修行一切善法하면 自然歸順眞如法故니라. 略說方便하면 有四種이니 云何爲四오? 一者는 行根本方便이라. 謂 觀一切法에 自性이 無生이고 離於妄見하여 不住生死니라. 觀一切法이 因緣和合으로 業果不失하고 起於大悲 修諸福德하여 攝化衆生하며 不住涅槃이니 以隨順法性無住故이니라. 二者는 能止方便이라. 謂 慚愧悔過하여 能止一切惡法일새 不令增長이니 以隨順法性 離諸過故이니라. 三者는 發起善根하여 增長方便이라. 謂 勤供養 禮拜三寶하고 讚歎隨喜하여 勸請諸佛하니라. 以愛敬三寶淳厚心故로 信得增長하여 乃能志求無上之道니라. 又 因佛法僧力所護故로 能消業障하고 善根不退하니 以隨順法性 離癡障故이니라. 四者는 大願平等方便이라. 所謂 發願 盡於未來토록 化度一切衆生하여 使無有餘皆令究竟無餘涅槃케하니 以隨順法性 無斷絕故이니라. 法性은 廣大하고 徧一切衆生하여 平等無二이어 不念彼此하고 究竟寂滅故이니라.
다시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것은 어떤 마음을 내는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바로 진여라는 법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좋은 모든 행을 즐겨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자비로운 큰 마음이니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음 :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이며 부처님의 바탕에 둘이 없다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오직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좋은 행을 찾아 배워야만 합니까.
대답: 비유하면 큰 여의주의 바탕이 맑고 깨끗하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들이 여의주의 성품을 생각하더라도 온갖 기술로 갈고 다듬지 않는다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라는 법도 그 바탕이 텅빈 듯 깨끗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가 있다. 사람들이 진여를 생각하더라도 온갖 방편으로 그 진여를 닦아 익히지 않는다면 또한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가 모든 법에 두루하기에 좋은 행을 모두 닦아 이 힘으로 번뇌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은 모든 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라는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방편을 말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행하는 방편’이다. 이는 모든 법의 자기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고 헛된 견해를 벗어나 삶과 죽음에 머물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연의 어울림으로 업과(業果)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고 교화하며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허물을 멈출 수 있는 방편’이다. 이는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여 나쁜 모든 법을 멈추고 더 키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음의 좋은 뿌리를 일으켜 늘리는 방편’이다. 이는 부지런히 삼보를 공양•예배•찬탄•기뻐하며 모든 부처님에게 법을 말씀하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삼보를 아끼고 공경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커져 무상도(無上道)를 구하려고 하며 또 불법승(佛法僧) 삼보의 힘이 보호하기 때문에 업장을 녹여 마음의 좋은 뿌리에서 물러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넷째는 ‘큰 원력의 평등한 방편’이다. 말하자면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빠짐없이 모두 무여열반을 얻게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단절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의 성품이 크고 넓어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어 나와 남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가장 뛰어난 적멸이기 때문이다.
(논-66)
菩薩이 發是心故로 則得少分 見於法身이고 以見法身故로 隨其願力하여 能現八種利益衆生이니라. 所謂 從兜率天에서 退에서 入胎 住胎 出胎 出家 成道 轉法輪하며 入於涅槃하니라. 然이나 是菩薩 未名法身은 以其過去無量世來有漏之業을 未能決斷일새 隨其所生하여 與微苦相應이니라. 亦非業繫이니 以有大願自在力故라. 如脩多羅中 或說에 有退墮惡趣者는 非其實退라하니 但爲初學菩薩로서 未入正位하여 而懈怠者가 恐怖하여 令使勇猛故이니라. 又 是菩薩이 一發心後遠離怯弱하고 畢竟에 不畏墮二乘地라. 若聞 無量無邊阿僧祇劫을 勤苦難行해야 乃得涅槃이라도 亦不怯弱이라. 以信知一切法 從本已來 自涅槃故이니라.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볼 수 있고, 법신을 보기에 그 원력대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른바 도솔천에서 내려와 모태에 들어가 머물다, 모태에서 나와 출가하여 도를 이루고, 법을 설파하다가 열반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법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의 유루업을 아직 끊어버릴 수 없으므로, 태어난 곳에서 미세한 괴로움과 서로 붙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업에 얽힌 괴로움은 아니니 큰 원력의 자유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때로는 “방편으로 나쁜 길로 물러나 있음은 진실로 공부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내용과 같으니, 그 뜻은 다만 처음 도를 배우는 보살로서 아직 바른 위치에 들지 못하고 게으른 자들이 두려워하기에 그들에게 용맹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은 도 닦을 마음을 한 번 낸 뒤에는 두려운 마음을 멀리 벗어나 마침내 이승의 경계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어려운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열반을 얻는다는 소리들 듣고도 약해지거나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이는 모든 법이 본디 열반임을 믿고 알기 때문이다.
(논-67)
解行發心者란 當知하라 轉勝이니 以是菩薩은從初正信已來 於第一阿僧祇劫에 將欲滿故일새 於眞如法中에 深解現前하여 所修離相이라. 以知法性體 無慳貪故로 隨順하여 修行檀波羅蜜하고 以知法性無染이어 離五欲過故로 隨順하여 修行尸波羅蜜하며 以知法性無苦이어 離瞋惱故로 隨順하여 修行羼提波羅蜜하고 以知法性無身心相이어 離懈怠故로 隨順하여 修行毗梨耶波羅蜜하며 以知法性常定이어 體無亂故로 隨順하여 修行禪波羅蜜하고 以知法性體明이어 離無明故로 隨順하여 修行般若波羅蜜하니라.
‘알고 행하면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수행하는 보살이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행’을 완성하고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회향’하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서,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보다 경계가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처음 바른 믿음에서 첫 번째 아승지겁을 거쳐 수행이 오롯해지려고 하기에 진여법의 진실에 대해 깊은 이해가 드러나 닦는 수행이 생멸 변화하는 겉모습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인색하거나 탐욕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오염될 것이 없어 오욕의 허물을 떠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괴로움이 없어 성내거나 번거로움을 벗어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몸과 마음의 모습이 없어 게으름을 벗어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늘 안정되어 그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밝아 무명을 여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논-68)
證發心者란 從淨心地 乃至菩薩究竟地에서 證何境界리오? 所謂 眞如니라. 以依轉識하여 說爲境界하나 而此證者는 無有境界일새 唯眞如智이니 名爲法身이니라. 是菩薩은 於一念頃에 能至十方無餘世界하여 供養諸佛하고 請轉法輪이라. 唯爲開導하여 利益衆生이나 不依文字니라. 或示超地 速成正覺은 以爲怯弱衆生故며 或說 我於無量阿僧祇劫에 當成佛道는 以爲懈慢衆生故이니라. 能示如是 無數方便은 不可思議하나 而實菩薩種性根等하고 發心則等하며 所證亦等하여 無有超過之法이라. 以一切菩薩이 皆經三阿僧祇劫故이니라. 但隨衆生 世界不同하여 所見所聞의 根欲性이 異이니 故로 示 所行亦有差別이니라. 又 是菩薩發心相者는 有三種心 微細之相이라. 云何爲三이오? 一者는 眞心이니 無分別故요 二者는 方便心이니 自然 徧行하여 利益衆生故요 三者는 業識心이니 微細起滅故이니라.
‘증득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심지(淨心地)에서 보살의 구경지(究竟地)까지 무슨 경계를 증득한 것인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으로 말미암아 경계를 말하지만 깨달음은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에 있는 지혜뿐이므로 법신이라고 한다.
이 보살은 한 생각에 빠짐없이 시방세계에 도달하여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법을 말씀하시기를 청한다. 이것은 오직 중생들을 가르쳐 이익을 주고자 함이나 글자에 기대지는 않는다.
때로는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마지막 수행단계’를 뛰어넘어 빠르게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약하거나 겁이 많은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지겁을 수행해야 부처님의 도를 이룬다고 말한 것은 게으르고 잘난 체하는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수한 방편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지만, 실로 보살의 수행으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는 이는 근기가 평등하고, 도 닦을 마음을 낸 것도 평등하며, 깨달은 것도 또한 평등하여 이를 뛰어넘는 법이 없다. 모든 보살이 다 세 아승지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의 세계가 다른 데에 따라 보고 듣는 근기와 욕구와 성품이 다를 뿐이므로 행하는 것 또한 차별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이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낸 모습에는 미세한 모습을 보이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참 마음’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으로 쓰는 마음’이니 스스럼이 없이 두루 행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요, 셋째 마음은 ‘업식(業識)’의 마음’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논-69)
又 是菩薩은 功德成滿이어 於色究竟處에서 示一切世間 最高大身이라. 謂以一念相應慧로 無明頓盡이니 名一切種智니라. 自然而 有 不思議業일새 能現十方하여 利益衆生하니라.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가운데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인다. 이는 한 생각에 진여와 맞아떨어진 지혜로 무명이 단숨에 사라진 것을 말하니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이 있기에 시방세계에 나타나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논-70)
問曰: 虛空無邊故로 世界無邊이고 世界無邊故로 衆生無邊이고 衆生無邊故로 心行差別이 亦復無邊이라. 如是境界 不可分齊일새 難知難解니라. 若無明斷이면 無有心想인데 云何能了일새 名一切種智리오? 答曰: 一切境界는 本來一心으로 離於想念이나 以衆生妄見境界故로 心有分齊니라. 以妄起想念하여 不稱法性故로 不能決了니라. 諸佛如來는 離於見想이어 無所不徧이니라. 心眞實故로 卽是諸法之性이라. 自體顯照一切妄法하니 有大智用 無量方便이니라. 隨諸衆生所應得解하여 皆能開示 種種法義이니 是故로 得名一切種智니라.
又 問曰: 若諸佛이 有自然業이어 能現一切處 利益衆生者라면 一切衆生이 若見其身 若覩神變 若聞其說하여 無不得利인데 云何世間에 多不能見이리오? 答曰: 諸佛如來의 法身이 平等하고 徧一切處하여 無有作意故로 而說自然이라. 但依衆生心現인데 衆生心者는 猶如於鏡이라. 鏡若有垢이면 色像不現이듯 如是衆生心이 若有垢이면 法身不現故이니라.
물음 : 허공이 끝이 없으므로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으므로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으므로 그 마음의 차별도 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계를 한정지을 수 없으므로 알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명이 끊어졌다면 마음에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릅니까.
대답: 모든 경계는 본디 한마음으로서 상념을 벗어나지만 중생들이 헛되이 경계를 보기에 마음에 분별할 있는 한정된 모습이 있다. 헛되이 상념을 일으켜 법의 성품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헛된 견해와 생각을 벗어나 어떤 곳이라도 그 지혜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성품이 그러하다. 자체가 헛된 모든 법을 환하게 비추는 큰 지혜의 작용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곳을 따라 모두 온갖 법의 이치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른다.
물음 : 모든 부처님께서 자연스런 업이 있어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그 분의 신통변화를 보거나 설법을 듣고 많은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간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볼 수 없습니까.
대답 :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고 모든 곳에 두루하여 억지 의도가 없기에 ‘자연스런’이란 표현을 쓴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인데, 중생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에 때가 끼면 모습이 나타나지 않듯, 중생의 마음에 번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논 -71)
已說 解釋分하고 次說 修行信心分이라. 是中에 依未入正定衆生故로 說修行信心이니라.
이미 ‘법(法)과 의(義)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을 설명했고, 다음은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여기서는 반드시 도를 이루게 할 길로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을 위하여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것’을 설명한다.
(논-72)
何等信心이고 云何修行이오? 略說하면 信心에 有四種이니 云何爲四오? 一者는 信根本이니 所謂 樂念眞如法故니라. 二者는 信佛有無量功德이니 常念親近하고 供養恭敬하며 發起善根하여 願求一切智故니라. 三者는 信法有大利益이니 常念修行諸波羅蜜故니라. 四者는 信僧能正修行 自利利他이니 常樂親近 諸菩薩衆하여 求學如實行故니라.
무엇을 믿음이라 하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믿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라는 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공양 공경하며 착한 마음을 일으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도 가져다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보살들을 즐겨 가까이하고 실다운 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논-73)
修行에 有五門일새 能成此信이라.
수행에 다섯 가지 방편이 있기에 이 믿음을 이루게 할 수 있다.
(논-74)
云何爲五오? 一者는 施門이요 二者는 戒門이요 三者는 忍門이요 四者는 進門이요 五者는 止觀門이니라.
무엇이 그 다섯인가.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지관(止觀)이 다섯 가지 방편이다.
(논-75)
云何修行施門이오? 若見一切 來求索者면 所有財物을 隨力施與하고 以自捨慳貪으로 令彼歡喜케하니라. 若見厄難 恐怖危逼하면 隨己堪任하여 施與無畏니라. 若有衆生 來求法者이면 隨己能解하여 方便爲說이나 不應貪求 名利恭敬이라. 唯念自利利他하고 迴向菩提故이니라. 云何修行戒門이오? 所謂 不殺 不盜 不婬하고 不兩舌 不惡口 不妄言 不綺語하며 遠離貪嫉欺詐諂曲瞋恚邪見하니라. 若出家者라면 爲折伏煩惱故로 亦應遠離憒鬧하여 常處寂靜하며 修習少欲知足頭陁等行하니라. 乃至 小罪 心生怖畏하고 慚愧改悔니라. 不得輕於如來所制禁戒하고 當護譏嫌하여 不令衆生 妄起過罪故이니라. 云何修行忍門이오? 所謂 應忍他人之惱하고 心不懷報하며 亦當忍於利衰毀譽稱譏苦樂等法故이니라. 云何修行進門이오? 所謂 於諸善事에 心不懈退하고 立志堅强하여 遠離怯弱이라. 當念過去 久遠已來 虛受一切身心大苦 無有利益이라. 是故로 應勤修諸功德하여 自利利他로 速離衆苦니라. 復次 若人이 雖修行信心이라도 以從先世來 多有重罪惡業障故로 爲邪魔諸鬼之所惱亂하고 或爲世間事務種種牽纏하며 或爲病苦所惱하니라. 有如是等 衆多障礙이니 是故로 應當勇猛精勤하니 晝夜六時로 禮拜諸佛하고 誠心懺悔하며 勸請隨喜하고 迴向菩提하니라. 常不休廢하고 得免諸障하면 善根增長故이니라.
보시를 어떻게 수행하는가. 찾아와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이 닿는 대로 베풀고 인색한 마음을 버려 그 중생들을 기쁘게 한다. 그들이 재난을 만나 두려워하면 능력이 있는 대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 준다. 법을 구하는 중생이 있다면 알고 있는 대로 방편을 가지고 말하나 명예와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까지 같이 생각하고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계율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나쁜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남을 이간시키거나 나쁜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꾸미지 않아야 한다. 욕심•시기•속임수•사실을 비트는 것•분노•삿된 견해를 멀리 떠나야 한다. 출가 수행자라면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늘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어려움을 참아 이겨내는 수행들을 해야 한다. 작은 죄에도 두려움을 내고 부끄러워하며 허물을 뉘우쳐야 한다. 여래께서 만든 계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헐뜯음을 막아 헐뜯는 중생들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해야 한다.
인욕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참아내며 앙갚음할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익과 손해, 명예와 체면의 손상, 칭찬과 헐뜯음,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법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여 한다.
정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좋은 모든 일에 게으르거나 물러날 마음이 없어야 한다. 마음먹은 것이 굳세어 약하고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거 속에서 헛되이 받은 몸과 마음이 모두 커다란 괴로움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때문에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고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까지 생각하는 마음으로 모든 괴로움을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또 사람들이 믿음을 갈고 닦더라도 전생부터 지은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에, 때로는 삿된 마구니와 모든 귀신들의 괴롭힘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세간의 일들이 여러 가지로 꼬이기도 하며, 때로는 병고에 시달리게도 된다. 이런 많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여섯 때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해야 한다.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고 중생의 모든 기쁨을 따라서 기뻐하며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늘 쉬지 않고 정진하여 모든 장애를 벗어나면 좋은 마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논-76)
云何修行止觀門이오? 所言 止者란 謂止一切境界相이니 隨順奢摩他觀義故니라. 所言 觀者란 謂分別因緣生滅相이니 隨順毗鉢舍那觀義故이니라. 云何隨順이오? 以此二義로 漸漸修習하여 不相捨離하면 雙現前故이니라.
지관(止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지(止)란 모든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관(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관(觀)이란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니, 위빠사나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뜻으로 차츰차츰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않는다면 지(止)와 관(觀)이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논-77)
若修止者라면 住於靜處하여 端坐正意라. 不依氣息 不依形色하고 不依於空하며 不依地水火風 乃至 不依見聞覺知하라. 一切諸想은 隨念 皆除하고 亦遣除想하라. 以一切法은 本來無相이어 念念不生 念念不滅이고 亦不得隨心外念境界니라. 後에 以心除心하니 心若馳散하면 卽當攝來하여 住於正念하라. 是正念者란 當知하라 唯心일뿐 無外境界니라. 卽復此心은 亦無自相이어 念念不可得이라. 若從坐起 去來進止 有所施作 於一切時에 常念方便하고 隨順觀察하며 久習淳熟하면 其心得住니라. 以心住故로 漸漸猛利 隨順得入 眞如三昧하여 深伏煩惱하고 信心增長일새 速成不退니라. 唯除疑惑 不信誹謗 重罪業障 我慢懈怠이니 如是等人은 所不能入이라.
만약 지(止)를 닦는 자라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한다. 몸 속에서 일어나는 숨이나 어떤 모습에 기대지 않고, 허공에 기대지 말며, 지수화풍(地水火風)과 견문각지(見聞覺知)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모든 생각은 생각대로 모두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한다. 모든 법은 본디 어떤 모습이 없어 생각마다 불생불멸이고, 또한 바깥 경계를 생각하는 마음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그 뒤에 마음을 마음으로 없애니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 그 마음을 거두어 정념(正念)에 머물러야 한다.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일 뿐 바깥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으레 알아야 한다. 이 마음 또한 근본실체가 없기에 생각마다 얻을 수 없다.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의 모든 행위에서 늘 방편을 생각하고 이치대로 살피며 오래 공부하다 보면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 마음을 가졌기에 차츰차츰 가세게 물이 흐르듯 진여삼매에 들어가 번뇌를 없애고 믿음을 키우기에 서둘러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 공부는 오직 부처님의 법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헐뜯는 죄 많은 사람들과 아만이 있거나 게으른 사람들만 빼니, 이런 사람은 삼매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논-78)
復次 依如是三昧故로 則知法界一相이라. 謂一切諸佛法身이 與衆生身과 平等하여 無二이니 卽名一行三昧니라. 當知하라 眞如는 是三昧의 根本이니 若人修行하면 漸漸 能生無量三昧니라.
다시 이 삼매에 기대기에 곧 법계가 하나의 모습인 줄 안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평등하여 다를 게 없음을 말하니, 이를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한다. 진여가 삼매의 근본이니 사람들이 이를 수행하면 차츰차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으레 알아야 한다.
(논-79)
或有衆生이 無善根力이면 則爲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이라. 若於坐中에 現形恐怖나 或現端正男女等相일새 當念唯心하면 境界則滅이어 終不爲惱하리라.
때로는 어떤 중생은 마음의 좋은 뿌리가 없어 마구니나 외도나 귀신들의 모든 홀림을 받는다. 앉아 공부하는 가운데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미남 미녀들의 모습들로 나타날 때, 이들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이 경계는 곧 사라져 마침내 괴롭지가 않은 것이다.
(논-80)
或現天像 菩薩像하고 亦作如來像하여 相好具足하고 或說陀羅尼하며 或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하며 或說平等空無相無願 無怨無親 無因無果 畢竟空寂 是眞涅槃이라하며 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케하며 亦知未來之事케하며 得他心智하고 辯才無礙이어 能令衆生이 貪著世間 名利之事니라. 又 令使人이 數瞋數喜케하며 性無常準이라. 或多慈愛하고 多睡多病하여 其心懈怠케하니라. 或卒起精 進하다 後便休廢하고 生於不信하여 多疑多慮니라. 或捨本勝行하고 更修雜業하니 若著世事하면 種種牽纏이라. 亦能使人이 得諸三昧 少分相似케하나 皆是外道所得일새 非眞三昧니라. 或復令人이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乃至 七日 住於定中케하고 得自然香美飮食하며 身心適悅하고 不飢不渴하여 使人愛著케하니라. 或亦令人이 食無分齊이어 乍多乍少 顏色變異케하니라. 以是義故로 行者는 常應智慧觀察하여 勿令此心이 墮於邪網케하라. 當勤正念으로 不取不著하면 則能遠離是諸業障일새 應知外道所有三昧는 皆不離見愛我慢之心이니 貪著世間名利恭敬故이니라. 眞如三昧者란 不住見相하고 不住得相하며 乃至 出定해도 亦無懈慢이어 所有煩惱가 漸漸微薄하니라. 若諸凡夫 不習此三昧法이면 得入如來種性은 無有是處니 以修世間諸禪三昧하여 多起味著하면 依於我見하여 繫屬三界하니 與外道共이니라. 若離善知識所護면 則起外道見故니라.
때로는 하늘의 모습이나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한 여래의 모습을 만들어서 부처님의 상호를 다 갖춘다. 때로는 다라니를 말하고 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한다. 떼로는 평등•공(空) •무상(無相)•무원(無願)•무원(無怨)•무친(無親)•무인(無因)•무과(無果)•끝내는 비어 고요한 것이 참된 열반이라고 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과거 전생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얻고 변재가 막힘이 없어 중생들이 세간의 명리에 집착하게 한다. 또 사람들을 자주 성내게 하거나 기쁘게 하여 그 성품이 오락가락하게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애정이 많고 잠이나 병이 많아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한다. 때로는 갑자기 정진을 시작하다 뒤에 바로 멈추게 하고 믿음이 없어 의심이나 쓸데없는 생각이 많게 한다. 때로는 본디 뛰어난 수행을 버리고 다시 쓸데없는 공부를 하게 하며, 세상일에 집착하여 온갖 일을 번거롭게 만든다. 또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삼매 비슷한 것을 얻게 하지만 이들은 모두 외도들이 얻는 경계이므로 진짜 삼매가 아니다.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나 이틀, 사흘이나 이레를 선정 속에 머물게 하고, 자연의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게 하며,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아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한다. 때로는 먹는 것이 일정하지 않게 금방 많다가 금방 적게 하여 사람들이 낯빛을 바꾸게 한다.
이런 이치이므로 수행하는 이들은 늘 지혜롭게 관찰하여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게 않게 해야 한다. 부지런히 정념(正念)으로 이들을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업의 장애를 멀리 여읠 수 있으므로, 외도가 갖는 삼매는 모두 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을 여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예와 이익과 존경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의 삼매란 보는 모습에 머물지 않고 얻는 모습에 머물지 않으며, 나아가 선정에서 나와도 게으르거나 거만한 것이 없어 모든 번뇌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않고서 ‘여래가 될 수 있는 성품’에 들어간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정 삼매를 닦아 거기에 맛 들여 자주 집착을 일으키면 아견(我見)으로 말미암아 삼계에 묶이니 외도와 함께 하는 것이며, 선지식의 보호를 멀리하면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논-81)
復次 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는 現世에 當得十種利益이니 云何爲十이오? 一者는 常爲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이요 二者는 不爲諸魔惡鬼所能恐怖요 三者는 不爲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이요 四者는 遠離誹謗甚深之法일새 重罪業障漸漸微薄이요 五者는 滅一切疑諸惡覺觀이요 六者는 於如來境界에 信得增長이요 七者는 遠離憂悔이어 於生死中에 勇猛不怯이요 八者는 其心柔和이어 捨於憍慢일새 不爲他人所惱요 九者는 雖未得定이라도 於一切時 一切境界處에 則能減損煩惱하여 不樂世間이요 十者는 若得三昧라면 不爲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이니라.
또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이 삼매를 배우고 익힌 이는 지금 세상에서 열 가지 이익을 얻으니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 언제나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보호를 받는다.
둘째, 모든 마구니와 악귀들이 겁을 주지 못한다.
셋째, 아흔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들이 어지럽히지 못한다.
넷째,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법을 헐뜯지 않기에 무거운 죄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다섯째, 모든 의심과 나쁜 견해가 사라진다.
여섯째, 여래의 경계에 있는 믿음이 크게 늘어난다.
일곱째, 근심과 회한을 벗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용맹스럽게 공부를 하며 겁을 내지 않는다.
여덟째,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잘난 체하는 마음을 버렸으므로 다른 사람이 괴롭히지 않는다.
아홉째, 비록 선정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삶의 모든 경계에서 번뇌를 줄일 수 있고 세간의 삶을 즐기지 않는다.
열째, 삼매를 얻으면 바깥 인연의 모든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논-82)
復次 若人唯修於止이면 則心沈沒하고 或起懈怠하여 不樂衆善하고 遠離大悲하니 是故로 修觀이니라. 修習觀者는 當觀이니 一切世間有爲之法이 無得久停이어 須臾變壞하고 一切心行이 念念生滅하여 以是故로 苦라. 應觀 過去所念諸法이 恍惚如夢이라. 應觀 現在所念諸法이 猶如電光이라. 應觀 未來所念諸法이 猶如於雲이어 忽爾而起라. 應觀世間一切有身이 悉皆不淨種種穢汙이어 無一可樂이라. 如是當念 一切衆生이 從無始世來로 皆因無明所熏習故로 令心生滅케하여 已受一切身心大苦하고 現在卽有無量逼迫하며 未來所苦 亦無分齊일새 難捨難離인데도 而不覺知이니 衆生 如是 甚爲可愍이라. 作此思惟하고 卽應勇猛立大誓願하여 願하옵건데 令我心이 離分別故로 徧於十方하고 修行一切諸善功德하며 盡其未來에 以無量方便으로 救拔一切苦惱衆生하여 令得涅槃第一義樂이니라. 以起如是願故로 於一切時 一切處 所有衆善에서 隨已堪能하고 不捨修學하여 心無懈怠니라. 唯除 坐時 專念於止하고 若餘一切 悉當觀察 應作不應作이니라.
또 사람들이 지관(止觀)만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때로는 게을러져 좋은 일들을 즐기지 않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멀리하기 때문에 관관(觀觀)을 닦는다.
관관(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모든 세간의 생멸하는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금방 변하고 사라지며, 모든 마음이 생각마다 생멸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 형체가 없이 꿈과 같음을 보아야 한다.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보아야 한다.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구름이 문득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깨끗하지 못하고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하나도 즐거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부터 모두 무명이 훈습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어 이미 모든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그침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괴로움이 그 끝이 없어 버리고 떠나기가 어려운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바라옵건대 제 마음이 분별을 떠나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착한 모든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 그들에게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고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이런 원력을 일으키므로 모든 삶이 있는 곳에서 좋은 모든 일들을 능력에 따라 처리하고, 배우고 익히는 일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앉을 때 지관(止觀)에 전념하는 것만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에서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논-83)
若行若住 若臥若起에서 皆應止觀俱行이라. 所謂 雖念諸法 自性不生이라도 而復卽念 因緣和合하여 善惡之業 苦樂等報가 不失不壞이고 雖念因緣으로 善惡業報라도 而亦卽念 性不可得이니라. 若修止者면 對治凡夫 住著世間하여 能捨二乘 怯弱之見하고 若修觀者면 對治二乘 不起大悲 狹劣心過하여 遠離凡夫不修善根이라. 以此義故로 是止觀二門 共相助成하고 不相捨離니라. 若止觀不具이면 則無能入 菩提之道니라.
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다시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과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록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과보를 생각하지만 또한 그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止)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리고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관(觀)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이 뜻으로 지(止)와 관(觀)은 서로 돕고 떨어질 수 없다.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논-84)
復次 衆生은 初學是法하며 欲求正信이나 其心怯弱이라. 以住於此娑婆世界에 自畏不能常値諸佛 親承供養이니라. 懼謂信心難可成就라하며 意欲退者는 當知이니 如來는 有勝方便이어 攝護信心이라. 謂 以專意念佛因緣으로 隨願得生他方佛土하여 常見於佛하고 永離惡道니라. 如脩多羅에 說하되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陁佛하고 所修善根을 迴向하여 願求生彼世界이면 卽得往生하여 常見佛故로 終無有退니라. 若觀彼佛眞如法身하고 常勤修習이면 畢竟에 得生住正定故이니라.
또 중생들은 처음 이 법을 배우면서 바른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약하다. 그 까닭은 이 사바세계에서는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공양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루기 어렵다’고 걱정하며 공부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이 있어 믿음을 거두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 바라는 사람의 원대로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 늘 부처님을 보고 영원히 나쁜 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가 닦은 마음의 좋은 뿌리를 회향하여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곧 태어나 언제나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끝내 공부에서 물러날 일이 없다.”고 말한 내용과 같다. 부처님의 진여에 있는 법신을 보고 늘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그 세계에 태어나서 바른 선정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논-85)
已說修行信心分이니 次說勸修利益分이니라. 如是摩訶衍諸佛秘藏을 我已總說이라.
이미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을 말했다. 다음은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공부할 것을 권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에 있는 부처님의 소중한 모든 법을 내가 이미 다 말한 것이다.
(논-86)
若有衆生이 欲於如來甚深境界에서 得生正信하고 遠離誹謗하여 入大乘道라면 當持此論 思量修習해야 究竟에 能至無上之道니라. 若人聞是法已에 不生怯弱하면 當知이니 此人은 定紹佛種이어 必爲諸佛之所授記니라.
어떤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서 바른 믿음을 내며 헐뜯지 않고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으레 이 논을 가지고 생각하고 닦아 익혀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최고의 도에 다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이어받아 반드시 모든 부처님이 수기한다는 것을 으레 알아야 한다.
(논-87)
假使 有人이 能化三千大千世界滿中衆生하여 令行十善케하더라도 不如有人이 於一食頃에 正思此法이라. 過前功德이어 不可爲喩니라. 復次 若人이 受持此論하여 觀察修行 若一日一夜하면 所有功德은 無量無邊일새 不可得說이니라. 假令 十方一切諸佛이 各於無量無邊阿僧祇劫에서 歎其功德이라도 亦不能盡이니 何以故오? 謂法性功德無有盡故로 此人功德도 亦復如是이어 無有邊際니라.
설사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그들에게 열 가지 좋은 행을 행할 수 있게 하여도, 잠깐 겨를에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공덕만 못하다. 앞에 있는 공덕보다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한 공덕이 더 뛰어나 뭐로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논을 가지고 하루 밤낮을 수행하면 거기에서 오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다 말할 수가 없다. 가령 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저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다 찬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법성에 있는 공덕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공덕도 이와 같아서 그 끝이 없다.
(논-88)
其有衆生이 於此論中에 毀謗不信하면 所獲罪報는 經無量劫에 受大苦惱이라. 是故로 衆生은 但應仰信일뿐 不應誹謗이라. 以深自害하고 亦害他人하여 斷絕一切三寶之種이며 以一切如來가 皆依此法하여 得涅槃故이며 一切菩薩이 因之로 修行하여 入佛智故이니라.
어떤 중생이 이 논의 내용을 헐뜯고 믿지 않는다면 그 허물의 과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큰 괴로움을 받는다. 이 때문에 중생들은 오직 우러러 믿을 뿐 이 법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
헐뜯음으로써 심하게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 삼보의 모든 씨앗을 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가 모두 이 법에 따라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으로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논-89)
當知하라. 過去菩薩도 已依此法하여 得成淨信하고 現在菩薩도 今依此法하여 得成淨信하며 未來菩薩도 當依此法하여 得成淨信하니라.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거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룰 것이다.
(논-90)
是故로 衆生은 應勤修學하니라.
이 때문에 중생들은 이 법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논-91)
諸佛甚深廣大義를 我今隨分總持說하니 迴此功德如法性하여 普利一切衆生界라.
세상 모든 부처님의 크고 깊은 많은 뜻들
제가 이제 형편 따라 모든 내용 설명하여
진여 법성 이 공덕을 아낌없이 회향하니
두루 모든 중생계에 이익 있게 하옵소서.
대승기신론(한문/한글-원순역) (tistory.com)
무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nature0820/1375747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