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때 선조는 자기가 믿었던 수군방어선과 육군 방어선이 허무하게 뚤리자 크게 당황했다.왜구가 가까이 오자 얼마나 빨리 도망갔는지 그는 말을 타고 도망갔는데 그의 시중을 들던 신하와 궁녀들과 3일거리이상 떨어져서 먼저 도망간후 시종들을 기다려야 했다. 그가 과연 정치를 잘했다면 백성들이 먼저 궁궐을 불태웠을까 ?
우리의 왕중에 적군이 수도로 밀려오자 도망한 사람은 여럿있다. 물론 짱개역사에도 많다. 가장대표적인 분이 동천태왕이다. 그는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초반승리에 도취되어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결사의 방진을 치고 최후의 저항을 하자 고구려가 자랑하는 무적기병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고슴도치처럼 꽉찬 창의 방어망과 화살에 막혀 주력기병을 대부분 잃고 패했다. 수도 환도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유유와 밀우라는 뛰어나고 충성스런 장군덕에 남은 병력을 모아 수천리의 땅을 수복했다고 그의 비문에 써있다.
동천태왕은 한나라를 위협했던 선조들의 업적을 깍아내리고 수도를 함락당한 치욕때문에 자결했는데 그다음 태왕이 선왕을 따라 자결하는 것을 금한다고 공표했는데도 동천태왕의 용사들은 태왕의 무덤위에서 자결하여 백성과 하늘로부터 그의 무덤을 가려주었다. 백성들이 슬퍼하는자가 극히 많았다고 한다.
거란 성종이 40만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자 고려 현종은 강조에게30만대군으로 막게했는데 강조는 천추태후에 나오는 유명한 장수이다. 그는 거란군을 초반에 거침없이 밀어붙여 거란군의 희생이 많았다. 성종은 병력을 일부 우회하여 강조가 방심한 옆구리를 쳤는데 강조는 결국 포로가 되어 죽고 만다. 고려 현종은 수도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항복의사를 전한뒤 뜻밖에 양규를 비롯한 고려북방군이 거란의 배후를 공격하여 승기를 잡자 항복약속은 물건너가고 거란군을 쫓아버렸다.
명나라 숭정은 이자성의 40만 반란군이 북경으로 들이닥치자 제신들이 남경으로 천도하거나 산해관의 오삼계휘하 병력10만을 빼어 수도를 방위하고 청에 영토를 할양하여 섬기자는 의견을 모두 무시했다. 고집불통이고 의심이 많았던 숭정은 선조와 비교되는데 선조는 이순신을 전쟁이 끝난뒤 숙청하려 했지만 숭정은 전쟁이 한창인데도 최고지휘관이자 명나라 역사 최고의 장군 원숭환을 능지처참해 버렸다.
만일 숭정이 선조처럼 원숭환을 백의종군시킨후 다시 기용했다면 명나라는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숭정은 패망이 다가오자 부인과 딸을 칼로 찌르고 자결했다. 딸은 팔을 잘렸지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숭정이 남경으로 도망했다면 명나라는 양자강을 기반으로 청과 대치하여 금과 남송처럼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 숭정의 선택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 왕과 황제는 자고로 사직을 보전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그가 살 이유가 없다고 본다. 발해마지막왕 대인선과 신라의 경애왕은 점령군이 자결을 권고하자 거부했다. 대인선은 결국 끌려가고 경애왕은 살해되었다.
만일 선조가 숭정처럼 한양에 남아 있엇다면 조선은 망하고 지방의 장수들이 제각기 나라를 세웠을 지 모른다. 그도 역사를 돌이켜 보니 고려황제들도 도망을 자주 간것을 안것이다. 고려 공민왕은 20만 홍건적이 수도로 접근하자 수도를 버렸다 하지만 20만대군을 모아 수도를 수복하고 홍건적을 소탕했다. 선조역시 병력을 모아 수도를 수복하겠다고 일단 도망한 것으로 보인다.
적군이 평양을 함락하고 의주근처까지 오자 겁에 질린 선조는 급기야 압록과 요수를 건너 명나라 본토로 도망하려 했다. 그러자 제신들사이에 선조가 압록과 요수를 건너면 다시는 조선으로 못돌아올것이라고 설득했다.선조가 아들 광해군을 남쪽으로 보내 병력을 모으게 하고 세자로 삼았다. 그는 책임을 아들에게 넘긴 것이다.
선조가 수도를 버린것은 무턱대고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그가 비난받아야 하는것은 적에 대한 대비가 그만큼 충분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여진족토벌에 공이 있던 원균과 이순신을 경상도와 전라도로 보내 해군을 강화하고 전국의 성을 수리하게 하고 신립과 이일로하여금 남쪽군대를 돌아보게 했다. 왜구에 대한 보고가 그들의 병력이 15만이 넘고 또 30만이라는 보고도 있었는데 선조는 유성룡이 작성한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은 당시 30만이 훨씬 넘었다. 게다가 왜구를 겨우 도적떼나 해적떼로 치부하던 시기인지라 그들의 전투력을 얕잡아 보던 당시의 군부의 오판도 크다. 총체적인 책임은 선조에게 있으나 우리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히틀러와 독일전체에 묻는 것처럼 전쟁초반 조선군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선조와 조선군부모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말을 잘타고 기본무예도 익힌 선조가 고구려의 태왕처럼 직접 진두지휘했으면 어떨까 왜 도망하는데 그의 무예를 ?나 참 부끄러운 일이다
이순신장군이 왜군 수만을 죽이고 그들의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전쟁승리에 대한 공헌이 50%이상된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무명의 장군을 유성룡의 천거를 믿고 전라좌수사로 임명한 선조의 공도 일부 있다고 봐야한다. 한신은 항우를 먼저 찾아갔지만 그의 재능을 몰라주자 유방에게 갔다. 결국 한신의 공로로 유방은 전쟁에서 이겼다. 한신이 유방에게 당신은 장수를 잘 부린다고 칭찬한 것을 보면 알수있다.
나는 노무현 전대통령이 다른건 몰라도 인재를 알아보는 재능은 있다고 본다. 그가 기용한 고건과 이해찬은 유능한 사람이 아닌가 본인이 무능하더라도 인재를 알아보는 재능이 있다면 유방처럼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쥘수 있는 것이다.
선조는 무능하고 의심많고 겁이 많은 옹렬한 군주라는 평가에 나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이순신과 권율이라는 인재를 등용한 것은 그의 공이며 승전의 공로가 일부 있다는 것은 인정해줬으면 한다. 조선의 역사를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조선은 전기에는 고구려의 옛땅을 수복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통해 영토가 많이 축소되었으나 정조대왕때도 연해주대부분과 만주의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엉터리 고구려영토보다 정조대왕때 영토가 더크다.
고종은 제주에서 말갈까지 4천리 강토라고 하고 황제국을 선포했는데 왜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란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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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져온 곳 :
블로그 >마곡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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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만주몽골조선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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