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대를 하고 대구 침산동에서 금,은,
보석을 겸비한 시계점을 경영하는 내 바로
위의 형님일을 잠시 도와 주었다.
그러던 중 시계점 옆집 점포가 비워져 안동에 있던 지금의 나의 아내를 대구로
내려오게 하여 의상실을 차리게 하였다.
안동에서 같이 일하던 아가씨들 2명을
수배하여 아내와 3명이 의상실을 경영 하였는데, 그 당시 일이 많아 대단히 바빳던 기억이 난다.
나의 형님은 장사하는 수완이 좋아 영업을
잘 하였다. 형님은 집 부근 동국무역에 다니는 아가씨들을 많이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의상실에도 많이 소개를 시켜
주었다. 형님의 덕으로 개업 첫달 부터 성업 중이였다 일이 많아 장사가 잘 되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동국무역 아가씨
들은 한번에 옷값을 다 결재 하지않고 여러번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수금하는 형식 이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활부 같은 형식이였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옷값을 다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일하던 중간에 그만두고 말없이 떠나는
아가씨들이 생겨 그럴때는 속절없이 돈을
받지 못하고 떼이는 일 들이 발생 하곤 했다.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고 나는 나의 아내와
결혼을 한다.
의상실 부근에 전세로 보금자리를 마련
하고 신혼여행을 경주로 떠난다.
불국사등 여러 유적지들을 탐방하며 우리
는 단꿈의 결실을 맺게 된다.
가장이 된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주위를 정리하고 중구 중앙통에 있는 영남
투자금융에 근무하고 있던 내 고향 형님을
찾아가 취업을 부탁한다.
유진하 형님은 마당발이라 계원 및 다방면
에 친구가 많은 편이다.
부탁한지 보름 정도 지났을까?
그 형님에게서 소식이 왔다. 대한방직 월배
공장 기관실 반장 자리가 있는데 갈수
있겠느냐고 하는데, 선뜻 가겠노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 형님의 계원 친구인
김영광씨에게 부탁하여 성사 되였다.
형님의 친구 김영광씨는 기관실 A반 반장
이고, 나는 B반 반장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주간 일주일 근무하고 야간 일주일 근무
하는 주 야간 교대 근무 형식 이였다.
그 당시 통근버스를 타고 다니며 출퇴근 하였는데, 자택이 침산동 골목시장 부근에
있는 관계로 10분 정도 걸어와 원대오거리
에서 통근버스를 탑승 하여야 하였다.
오거리에서 아침 07시에 승차하여 월배
공장 까지는 약 1시간 정도 걸렸다.
08시에 공장 입구에 도착하여 주,야간 2교대를 하며 근무를 하였다.
공장이 쉬는 일요일에도 우리 기관실 직원
들은 개별적으로 출근하여 작업을 하여야
했다. 월배공장은 천에 염색을 위주로 하는
공장이라 정수처리,폐수처리,시설등을
완벽하게 정비 하여야 다음날 공장 작업이
원활하게 돌아갈수 있는 공정이라 우리
기관실 직원들은 막중한 자부심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을 처리 하였다.
일요일 특근은 평일의 1.5배 수당을 붙여
준다. 우리 B반 반원들은 김기종,김성열,
도만영,도보석, 그리고 반장인 나와 5명이
한 반원들이 였다. 공무과 직원 2명은 주간
근무를 하면서 주로 공장내 설비 시설의
정비 보수를 맡아서 하는데,나이가 좀 많은
장병거씨와 양천석씨와 2명이 한조가 되여서 정비 일을 하였다.
나이가 많은 장병거씨는 이 계통에 경험이
아주 많은 베테랑 이였다.
양천석 친구는 나와 나이가 같으며, 성격이
쾌할하고 아주 호탈하여 여러 동료 직원
들과 농담도 잘 하면서 친하게 잘 지낸 친구라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리는 한조
조직원들과 호흡이 잘 맞아 원만하게 맡은바 일들을 충실하게 무리없이 잘 처리
하였다.군대생활 하면서 단련된 몸이라
매사에 적극적으로 성실하게 일을 추진해
나갔다.
우리 조원중 김기종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우리집 부근 원대오거리에서
항상 같이 통근버스를 타고 다니며 자연스럽게 친해 지게 되였다.그 친구는
대구공고 화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한방직
에 취업한 성실하고 유능한 친구였다.
주간 근무를 마치고 야간 근무 시간에는
조금 한가한 시간이 생기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반장이라 주 메인 보일러실에서 근무
하며 주위 여러곳을 삷펴야 했다.
15ton 되는 메인 보일러인데 완전 자동
시스템이라 매 시간마다 점검하는 작성표
에 체크 만 해주면 된다.
야간에 근무하면 졸음이 오는 때가 많은데
졸음이 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장
내부를 한바퀴 돌면서 잠을 깨우곤 했다.
우리 동료들은 나름 쉬는 규칙이 있다.
저녁 0시 부터 한시간씩 교대로 돌아가며 쉬는 아지트가 있다. 이시간이 황금같은 시간 이였다.
나는 국가가 인정해 주는 다수의 자격증을
구비한 관계로 뜻뜻하게 취업 하였으며
보수도 타 직좋에 비하여 많이 높은 편이다
회사에서 각종 자격증 수당도 챙겨주며 일의 보람을 느끼게 하여 준다.
어느듯 세월이 흘러 아내와 나는 우리들의
새 보금자리를 마른 하게된다.
결혼생활 1년만에 첫 딸 아이를 얻었다.
축복의 시간 이였다.
아내는 회사에서 마른해준 내당동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첫 아이를 순산 하였다.
조리원에서 1주일간 조리하고 무사히 집
으로 돌아와 아내는 모유를 먹이면서 성심
성의껏 첫째 아이를 키웠다.
나는 달성공원앞 유명 하다는 철학관에서
우리 아이의 이름을 작명 하러 갔다.
출생일과 사주를 겸비하여 이름을 지었는
데 가운데자가 나와 같은 자가 나왔다.
나는 바를정(正),자인데 딸 아이는 칠정(征) 자와 불을윤(潤) 자가 나왔다.
사주에 나오는데로 지금 까지 征潤 으로
불리워 진다. 나의 딸 아이는 지금까지 아무 탈없이 무탈하게 직장생활 잘 하면서
딸딸딸(3딸) 의 엄마로 즐겁게 지낸단다.
♡아내에게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낀다 ♡
첫댓글 정수님!
나의 결혼생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안동 예쁜 처녀을 그것도 의상실하는 처녀을
어떻게 꼬시길래 정수님한태 시집을 왔을까요.
재주가 많은 사람입니다.
지금은 아들분 한분에 딸셋분입니까.
외국은 여행은 많이 다녀오셔는지요.
딸 많은 부모님들은 여행을 많이 다녀 온다던데..
나는 아들.딸 한명씩입니다
이정수님 행복하세요.
좋은곳 많이 다녀오시고요.
강선생님!!! 댓글 감사 합니다. 제가 여자 꼬시는 능력이 좀 있나 봅니다 ㅎㅎ
아직 중,고등학교 다니는 외손녀가 셋 이랍니다. 우리
딸 아이는 일반 회사에 과장으로 무탈하게 잘 다니고 있고,우리 아들은 잘 나고 훌륭한 아들 이랍니다.
멘사회원 출신 이랍니다.아들 자랑~~~
팔불출 이지요💜💜💜
예쁜 부인을 만났습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