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화산용주사봉불기복게(御製花山龍珠寺奉佛祈福偈)는 1796년 5월 정조가 용주사 부처님을 받들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직접 쓴 게송입니다.
가로4.5㎝, 세로 68㎝로 닥종이에 먹으로 쓰여졌으며, 글씨는 해서이고 모두 두권인데 어제본(御製本)답게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제본하고 5개의 연꽃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내부는 붉은 선으로 굵게 경계선을 그리고 그 안에는 역시 붉은 색의 가는 선으로 칸을 나눠 글을 썼습니다. 글은 일종의 불교식 가사체로 먼저 절의 내력을 간략히 말한 후 ①초서분(初序分) ②정종분(正宗分) ③결게분(結偈分)으로 나누어 게송을 읊었습니다.
기복게를 짓는 취지를 "절은 현륭원의 재궁(齋宮)으로 건립하였습니다. 소자(정조)는 팔만 사천 법문의 경의(經義)를 베껴쓰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삼가 게어(偈語)를 지어 삼업(三業)의 공양을 본받아 은혜에 보답하는 복전을 짓습니다."라 하고 부모에게는 길러주신 은혜가 있으니 공경으로써 공양하면 이것이 바로 보은의 길이라 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정조는 호문(好文)의 군주로 알려져 있을 만큼 그가 지은 각종 시·논·제문·찬 등은 무려 184권 100책에 달해 《홍재전서(弘齋全書)》에 실려 전하며, 이 기복게는 정조의 수 많은 글 중에서도 부처님에 대한 칭송과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잘 담고 있습니다.
1790년 용주사의 창건 무렵 채제공이 쓴 절의 상량문입니다.
중국의 소주(蘇州)에서 직조한 주황색의 비단에 창사의 의미를 먹으로 썼는데 가로 약 15㎝,세로 94㎝의 크기에 유려한 필치와 문장으로 용주사 창건의 내용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상량문의 내용을 보면 "아름다운 염부(閻浮)의 나무가 있는 대지인 이곳 화산은 명산 속리산(俗離山)에서 지맥이 뻗어내려 북으로 오육백리 지점입니다. 지세의 변화는 마치 용이 꿈틀거리듯 조화롭게 서려있고 황홀히 구름을 타는 듯한 산천은 맑고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주상전하께서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선왕의 능침(陵寢)을 이곳에 정하고 상서 로운 땅에 무한한 정성을 기울여서 절을 지어 자복사(資福寺)로 삼았습니다. 절이 완성된 후 영원토록 등불이 이어져 재해를 막고 나라에 복이 깃들며 길이 선침(仙寢)의 수호신이 될 것이며 아울러 국왕의 만수무강을 빈다"라고 하였습니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후기에 무신으로 벼슬에 올라 영조·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채제공는 정조가 즉위한 이후 그는 여러 요직에 중용되었는데 절을 창건하던 1790년, 즉 상량문을 지었던 해에는 좌의정으로서 행정의 수반이 되었고 이후 3년 동안 왕과 독대(獨對)하면서 정사를 오로지 하였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을 무렵 왕의 명으로 지은 상량문은 당대의 세도가 다운 거침없는 필치와 활달한 문장으로 2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름다운 구름무늬의 비단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곡병풍
용주사에는 대웅보전의 후불탱과 함께 김홍도의 작품으로 알려진 4폭의 병풍에 그린 초목화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져왔으나 사실 이 병풍을 그린 화가가 김홍도냐 아니냐를 밝힐 수 있는 문헌적 자료는 없습니다.
전해져 내려오기로는 정조가 왕실에서 사용하던 것을 용주사에 하사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화법이 정교하고 채색 또한 아름답습니다. 병풍의 크기는 가로 65.5㎝, 세로222.5㎝이며 종이에 채색한 작품입니다.
조선후기를 대표했던 화원(畵員)인 단원 김홍도는 산수화와 인물화, 그리고 풍속화와 화조도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그림에 대한 재질을 유감없이 나타내었습니다. 당시 조선후기의 화풍은 남종화법과 그를 바탕으로 한 진경산수가 유행을 하던 시기였는데 그도 이러한 남종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산수화 등에 적용하였습니다.
병풍을 살펴보면 바위의 채색에 있어서 다른 작품들보다는 농묵을 사용하고 있으며 개성 있는 푸른색의 바위와 붉은 꽃으로 대비되는 표현이 눈에 띄는데 이러한 표현법은 19세기 궁중의 가리개와 같은 유물에서 불 수 있습니다. 이 초목화에서 사용된 수채화적인 채색법은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이색화풍과의 관련도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바위나 초목에서 나타나는 구슬과 같은 둥글둥글한 원형의 점들 또한 19세기의 병풍이나 가리게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병풍의 각 폭에는 각기 다른 초목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동·단풍·매화·모란 등이 있는데 오동나무만 제외하고는 암갈색 혹은 푸른색의 바위를 안고 하늘을 오를 듯 피어 있습니다. 그 채색이 담담하여 수채화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일반적인 민화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 색채가 부드러워 현대인에게도 금방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11호로서 높이 40㎝, 가로 29㎝, 세로 20㎝의 방형(方形) 중국제 향로입니다. 향(香)은 보통 입냄새나 몸냄새를 제거하고 집안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의 갖가지 취기를 없애기 위해 사용됩니다. 불교에서는 이 향이 마음의 때까지도 씻어준다고 하여 법회나 의식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일반적인 향로와는 달리 불교에서의 향로는 불보살에게 향을 공양할 때 쓰이는 것이며 2개의 촛대, 2개의 화병과 함께 오구족(五具足)이라 하여 불구(佛具)의 으뜸으로 칩니다.
불보살에게 향을 공양하기 위해 불단에 놓는 예배용 향로에는 부처님께 올리는 발원문을 새기고 은입사·선각·점각· 등의 방법으로 제작연대·제작자·봉안사찰명 등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향로는 불보살에 대한 경배의 보조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향을 사름으로써 세속의 모든 번뇌망상을 사라지게 하고 청정한 법열의 삼매경으로 몰입하게 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금동향로는 조선초기에 왕실에서 사용되어 오던 것인데 정조가 절을 사도세자의 능침사찰로 조성하면서 청동향로와 함께 하사한 것입니다. 네 마리의 용이 향로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향로의 몸체와 네 다리에는 금으로 당초무늬를 세공하여 붙임으로써 매우 화려해 보입니다.
향로의 몸체 양쪽에는 역시 금으로 테를 두른 작은 손잡이가 있고, 향로 뚜껑도 금으로 테를 두르고 다시 중앙에 장방형의 테두리를 만들어 빗살무늬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네귀퉁이에는 5엽의 금으로 된국화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정중앙에는 꼭지가 순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상부가 떨어져 나가고 중간의 보주형태를 한 손잡이 받침부분만이 남아있는데 사면에 순금장식이 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둥근 테두리 안에 8개의 꽃무늬가 장식되어있습니다. 전체적으로 향로 몸체의 무늬는 금판을 세밀히 가공한 후에 붙여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창건 당시에는 호성전(護聖殿)이라 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봉안한 전각이 있었는데, 바로 이 향로가 위패 앞에 안치되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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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로도 금동향로와 함께 정조의 하사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방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있으며 높이 20㎝, 입지름 27㎝인 8각의 중국제 청동향로입니다. 향로의 양쪽에는 용이 조각된 손잡이가 있고 8면으로 구획된 각면 상부에는 장방형의 테두리 안에 '만세락(萬歲樂)'이라는 명문이 들어있으며 주위에는 당초무늬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역시 각 8면에 안상(眼象)을 마련하고 여덟 장면의 그림을 넣었습니다.각각의 그림 내용을 살펴보면, 야월낙안도(夜月落雁圖), 우중어옹도(雨中漁翁圖), 촌중행사도(村中行事圖), 산중별장도(山中別莊圖), 고주귀범도(孤舟歸帆圖),산사참배도(山寺參拜圖),강촌심방도(江村尋方圖),효천출범도(曉天出帆圖)입니다.
이와같은 팔경을 주제로 하는 그림의 형식에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국 북송대에 송적(宋迪)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으로 성립된 것인데, 호남성 동정호(洞庭湖)의 남쪽 영릉(零陵) 부근 즉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만나는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를 여덟가지 소재로 그린 것입니다.
이 소상팔경도와 용주사의 것과는 그 소재가 다르지만 강촌, 기러기, 어부 그리고 돛단배 등의 구성은 소상팔경도와 유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재의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소상(瀟湘)이 아름다운 경치의 대명사로 간주되면서 실경적(實景的)인 성격은 점차 사라진 결과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시대의 명종연간에 이미 소상팔경도가 그려지기 시작하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더욱 더 유행을 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이 그림을 즐겨하였습니다. 16세기에는 안견파(安堅派)화가들이 자주 그렸으며 중기에는 김명국(金明國), 후기에는 정선(鄭敾), 최북(崔北)등이 중국의 작품과 그 소재를 같이하는 소상팔경도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송도팔경(松都八景), 조선세대의 신도팔경(新都八景:漢陽八景)과 같이 소상팔경도의 형식을 빌어 새로운 소재의 팔경도로 발전시켰던 것을 보면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이러한 소재상의 변화가 있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용주사에서 이 청동향로를 하사받은 것이 정조때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 조선초기에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전하는데 이에 따르면 그 제작시기는 명나라 초기가 됩니다. 절에는 창건당시에 호성전이 있었고, 이후에는 축성전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전각 내에서 청동향로는 선열을 기리는 향을 마음껏 피워 올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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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는 모두 10구의 동자상이 효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원래는 지장전에 지장시왕상과 함께 봉안되었고, 모두 목조로 크기는 60㎝ 안팎입니다. 동자상은 순수한 불심의 표현입니다. 동자상의 모습은 여래상처럼 각자(覺者)로서의 완전미도 아니고 보살상처럼 장식미도 필요치 않으며 그렇다고하여 신중상처럼 자유분방한 표현양식을 지니고 있지도 않습니다. 단아한 모습의 동자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덧 마음이 순진무구해지듯이 그저 순수성 그것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순수성이 여래상의 다른 면이기도 하고 한편 보살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용주사의 동자상은 대부분 정면 입상의 자세이지만 고개를 왼쪽이나 이지만 고개를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인 것도 있고 앞으로 숙인 것도 있어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두 손을 앞으로 내어 持物을 잡고 있는데, 지물은 호랑이·사자·학·거북 등의 동물이고 연꽃도 있습니다.
머리모양으 삭발한 동자상이 5구, 쌍계머리가 5구이고,복장은 녹색·적색·청색을 주조로 한 긴옷을 입고 있으며 띠 모양의 천의(天衣)를 어깨에 걸쳐 발에까지 늘어뜨리고 있습니다. 모두 신발을 신었으며 대좌는 4각·8각의 목재입니다. 일부는 대좌가 파손되었다가 지물이 결실된 것도 있지만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경전이나 불화들 속에서 쉽게 동자의 모습을 보게되는데, 《화엄경》의 선재동자는 진리를 찾아 한발 한발 희망찬 남방순례길에 오르고 영상회상도의 문수동자는 바로 자비의 화신인 문수보살이며 심우도에서 소를 찾는 동자는 바로 진리를 찾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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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에는 모두 2개의 석탑이 있는데 그 하나가 효행박물관 쪽에 위치합니다. 전체높이 4.5m의 이 화강암 5층석탑은 부근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전합니다. 우리 나라 대개의 석탑이 가람의 입구나 법당 앞에 위치하는데 반해 이 석탑은 용주사 가람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역시 다른 곳에서 이전해 온 것임을 알게 합니다.
제일 아래에 지대석이 있고 그 위에 하대석이 놓였는데, 지대석의 사방 각 면에는 귀꽃모양의 안상(眼象)을 3개씩 새겼고 그 위 기단면석에는 위패(位牌)형의 사각을 모각하였습니다. 1층옥신에는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고 1·2·3층의 옥개석 모두에는 4단씩의 옥개받침이 있으나 4층만은 2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층의 옥개석과 맨 위의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써 조성하여 간략화하였고 각 옥개석의 처마끝에는 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전이 없는 수직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이처럼 기단부에 안상이 있고 대체로 체감률이 적은 탑의 특징 등에서 고려시대의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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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과 천보루 사이에는 효행박물관 앞의 5층석탑과 함께 또하나의 5층석탑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5층석탑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부처님의 진시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으로 처리 되었습니다 .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받침은 3단씩입니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시 사리가 봉안되어 있는 사리탑은 용주사를 참배하는 모든 불자들의 신앙의 귀의처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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