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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다드의 서, 제32장 죄, 그리고 무화과 잎으로 만든 앞가리개를 벗는 일에 대하여
미르다드가 말했다.
“그대들은 ‘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니, 인간이 어떻게 죄인이 되었는지 알고 싶을 것이다.
만약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죄인이라면, 신 자신이 그 ‘죄’의 원천임에 틀림없다고 그대들은 선언한다. 그러나 그렇게 선언했다 해도 얻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믿어 의심치 않는 바로 그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내 동행자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대들의 길에 놓인 이 함정을 없애려고 한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이 인간의 길에 놓인 이 함정을 없앨 수 있도록.
신에겐 어떤 죄도 없다. 태양이 촛불에 빛을 주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인간 역시 아무런 죄가 없다. 촛불이 태양 아래서 스스로를 남김없이 태워 태양과 융합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면.
그러나 빛을 내려 하지 않는 촛불에겐 죄가 있다. 그런 촛불은 심지에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불을 갖다 대어도, 성냥과 그 성냥을 옮기는 손을 저주한다. 태양 아래서 타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촛불에겐 죄가 있다. 때문에 그런 촛불은 스스로를 태양으로부터 격리시켜 숨으려 한다.
인간이 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에 대한 무지를 감추려 하기 때문에 인간은 죄를 범한다.
그렇다. 무화과 잎으로 앞을 가린 것에는 죄가 있다.
그대들은 인간의 타락에 관한 얘기를 읽은 적이 있지 않은가? 말은 지극히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그 의미는 더없이 숭고하고 미묘한 이야기를? 인간이 신의 가슴에서 막 떨어져 나왔을 때는 마치 어린 신처럼 너무도 수동적이라서 활동적이지도 않고 창조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지 않은가? 인간은 신의 모든 속성을 부여 받았다. 하지만 마치 어린애처럼 자신의 무한한 능력과 재능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지도 못했다.
에덴 동산에 사는 아담은 아름다운 유리병 속에 들어간 고독한 씨앗 같았다. 유리병 속의 씨앗은 언제까지나 씨앗 그대로 있을 뿐, 그 껍질 속에 갇혀진 놀랄 만한 것이 생명과 빛으로 일깨워지는 일은 결코 없다. 씨앗이 자기 성질에 맞는 토양에 묻혀 있다가 스스로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는 한.
그러나 아담에게는 자신을 심어서 싹을 틔우기 위한, 자신의 성질에 맞는 토양이 없었다. 아담에겐 자신의 얼굴을 비춰 줄 혈연의 얼굴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담의 귀에는 그 어떤 인간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담의 목소리는 그 어떤 인간의 목구멍에서도 다시 울리는 법이 없었다. 아담의 심장에는 고독의 노래가 고동치고 있었다.
만물이 자기 짝을 갖고 스스로의 진로를 나가기 시작한 세계속에서도 아담만은 홀로였다. 완전히 그 혼자였다. 그는 자신에게도 미지의 손님이었다. 아담에겐 이루어야 할 일도 없었으며, 따라가야 할 지정된 길도 없었다. 아담에게 에덴 동산은 아기의 편한 잠자리 같은 것이었다. 요컨대 그에게 에덴 동상은 수동적인 지복(至福)의 상태, 완벽하게 준비를 갖춘 부화기였다.
선과 악이라는 지식의 나무와 생명의 나무는 둘 다 아담의 손에 닿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손을 뻗쳐 그 열매를 따서 맛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내부에 갈무리되어 있는 그의 미각과 의지, 그의 사상과 욕구, 그리고 그의 생명까지도 천천히 풀려나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 스스로는 풀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의 내부에서 협력자 -자신이 갈무리한 많은 것을 풀어 줄 수 있는 조력자-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아담이 자기 자신의 존재 외에 그 어디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의 존재는 신성이 너무 강력한 탓으로 도움이 필요 없었으니 말이다.
이브는 새로운 티끌, 새로운 숨이 아니다. 이브는 진실로 아담의 티끌이자 숨이다. 이브의 뼈는 아담의 뼈이며, 이브의 살은 아담의 살이다. 다른 피조물이 그 곳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완전히 동일한 아담이 한 쌍이 된 것이다. 남자 아담과 여자 아담으로.
이리하여 거울에 비춰지지 않았던 고독한 얼굴이 거울인 반려자를 얻었다. 그 어떤 인간의 목소리로도 다시 울리지 않았던 아담의 이름이 달콤한 음률로 에덴의 오솔길 여기저기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불꽃 없는 강철이 풍부한 불꽃을 가져다주는 부싯돌과 만났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타지 않았던 촛불은 양 끝에서 불을 점화시켰다.
촛불은 하나이며, 심지도 하나이고, 불꽃도 하나이다. 얼핏 보면 상반되는 극(極)에서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리하여 유리병 속의 씨앗은 싹을 틔워 자신의 신비를 내보일 수 있는 토양을 발견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하나라고 의식하지 않는 ‘하나됨’이 ‘이원성’을 만들어낸다. ‘하나됨’은 ‘이원성’의 알력과 대립함으로써 자신의 통일성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신의 충실한 닮은꼴이자 심상인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신 -시원(始原)의 의식- 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씀’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과 ‘의식’ 양자는 ‘성스러운 이해’ 속에서 통일된다.
‘이원성’은 벌이 아니다. ‘하나됨’의 성질을 내재해 있으며, ‘하나됨’의 신성을 열어 보이기 위한 필요 과정이다. 이 밖의 다른 생각은 유치한 것이다. 이 같은 엄청난 과정이 70년 안에 끝나리라 믿는 것은 어린애 같은 생각이다. 70년이 아니라 7천 만 년이라고 생각할 지라도.
신이 된다는 것이 그토록 보잘 것 없는 일이겠는가?
신이 그처럼 잔인하고 인색한 감독자이겠는가? 나눠줄 수 있는 모든 영원이 있는데도, 인간에게 70년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밖에 할애해 주지 않고, 그 기간 내에 인간이 자기의 신성과 신과의 하나됨을 완전히 자각해 자기 자신을 통일함으로써 에덴을 회복해야 한다고 정해 두었단 말인가?
‘이원성’의 길은 아주 길다. 그 과정을 달력으로 측정하려는 자는 어리석다. ‘영원’은 별들의 회전을 헤아리지 않는다.
활동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못했던 수동적인 아담을 둘이 된 후부터는 금방 적극적이고 활동적으로 변했으며,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번식할 수 있게 되었다.
둘이 된 아담의 첫 행동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선’과 ‘악’의 나무 열매를 먹고, 전세계를 자신과 똑같이 둘로 만드는 것이었다. 사물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예전처럼 천진무구하고 무관심한 상태가 아니었다. 사물은 선 아니면 악, 유익한 것 아니면 해로운 것, 유쾌한 것 아니면 불괘한 것 어느 한쪽이 되었다. 이런 것들은 예전엔 하나였지만, 대립하는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이브에게 선과 악을 맛보라고 부추기던 뱀은 무엇인가? 활동적이긴 했지만 여전히 아무 경험이 없었던 ‘이원성’이 자기 자신을 활동하고 경험하도곡 재촉한 심원한 목소리가 아니던가?
이브가 처음 그 목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순종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브는 자극제였다. 그녀는 반려자의 숨겨진 힘을 끌어내도록 설계된 도구였던 것이다.
이 최초의 인간 이야기 속에서, 그대들은 다음과 같은 광경을 떠올리느라고 종종 멈춰서지 않았던가? 즉 최초의 여성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새장 안의 새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감시의 눈이 없는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면서 에덴의 나무 사이를 남몰래 걷다가, 유혹하는 열매에 침을 흘리면서 떨리는 손을 뻗는 광경 말이다.
이브가 그 열매의 더없이 달콤한 맛을 보려고 열매를 따서 보드라운 과육(果肉)에 이를 박았을 때, 그대들은 꼴깍 침을 삼키지 않았던가? 열매의 더없이 달콤한 맛은 이브 자신과 그녀의 자손 모두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쓴맛으로 변해 버렸다.
그대들은 온 마음을 기울여 바라지 않았던가?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신이 나중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브가 무모한 행동을 하려 하는 바로 그때에 나타나 그녀의 무모한 행동을 막아 주기를. 그리고 이브가 그런 행동을 끝낸 뒤라도 아담에게 공범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있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러나 신은 미리 막지도 않았고, 아담도 공범이 되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은 자신의 닮은꼴이 자신을 닮지 않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원성’의 기나긴 길을 걷게 된 것은 신의 의지이자 계획이었다. 즉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펼쳐서, 자기 자신을 ‘이해’로써 통일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담 역시 그 열매를 먹고 싶지 않았다 해도 아내가 내민 열매를 먹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내가 그 열매를 먹는다는 이유만으로도 아담은 먹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한 몸이라서 어느 쪽이든 상대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이 선과 악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분노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은 인간이 그 열매에 입을 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동시에, 신은 인간이 그 열매에 입을 대리라는 결과를 미리 알았으며, 인간이 그 결과에 직면할 만큼 힘을 갖기를 바랬다. 그리고 인간은 힘을 가졌다. 그리고 인간은 그 열매를 먹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결과와 마주했다.
그 결과란 ‘죽음’이다. 왜냐하면 신의 의지에 의해 힘을 가진, 그리하여 둘이 된 인간은 그 즉시 수동적인 통일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은 벌이 아니라 ‘이원성’에 내재된 생의 한 국면이다. ‘이원성’의 성질은 만물을 둘로 나누고 만물에 그림자를 생기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은 이브에 의해 자신의 그림자를 얻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삶에 ‘죽음’이라 불리는 그림자를 얻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의 ‘죽음’에 의해 그림를 달게 되었지만, 신의 생(生) 속에서는 그림자 없는 생을 계속 영위한다.
‘이원성’은 끊임없는 알력이다. 그리고 그 알력은 대립하는 양자가 서로를 말살시키는 일에 열심히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외관상 상반된 것이 서로를 완성케 하고, 서로를 충족시키며, 손에 손을 맞잡고 동일한 목적 -완전한 평화, 하나 됨, 그리고 ‘성스러운 이해’의 균형- 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환상은 감각에 뿌리박고 있으며, 감각이 지속되는 동안은 이 환상도 지속된다.
그래서 아담은 자신의 눈이 열린 뒤, 신의 부름에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동산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벌거벗었기 때문에 두려워서 몸을 숨겼습니다.’ 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제게 주신 여자가 나무 열매를 따서 주었기 때문에 저는 먹은 것입니다.’
이브는 아담의 뼈이자 살일 뿐,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새롭게 생겨난 아담의 이 ‘나’를 생각해 보라. 자신의 눈이 열린 뒤부터, 아담은 자기 자신을 이브나 신, 그리고 신의 모든 창조물과는 다르며, 동떨여져 있으며, 독립된 것이라 보기 시작한다.
이 ‘나’는 환상. 신으로부터 분리된 이 인격은 새롭게 열린 눈의 환상. 이 환상의 자아는 실체가 없으며 실재성도 없다. 이 ‘나’는 인간이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자신의 본래 자기, 즉 신인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 이 환상은 밖의 눈이 감춰지고, 안의 눈이 빛날 때는 사라져 버린다. 이 환상은 아담을 번뇌에 시달리게 하는 한편, 그의 정신을 기만했고 그의 상상력을 유혹했다. 완전히 자기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자아를 갖는다는 것. 이것은 어떠한 자아도 의식하지 않는 인간에겐 정말이지 너무나 기분 좋고 매혹적인 감언(甘言)이다.
그리하여 환상의 자아는 아담에게 알랑거리면서 유혹했다. 아담은 환상의 자아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서, 혹은 너무 ‘벌거 벗어서’ ‘부끄러워’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환상에서 손을 떼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온 마음을 기울여서,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자신의 재간을 몽땅 발휘해서 그 환상에 매달렸다. 그는 무화과 잎을 엮어서 자신의 ‘벌거벗은’ 인격(personality)을 가렸는데, 이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신의 눈으로부터 멀리하기 위한 앞가리개를 만든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무화과 잎으로 앞을 가린 이원적 존재가 됨으로써, 지복이 넘쳐흐르는 천진무구의 상태이자 자신이 ‘하나’이나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불의 칼이 인간의 ‘생명의 나무’ 사이에 놓이게 된다.
인간은 선과 악이라는 대칭의 문을 통해 에덴 동산을 뛰쳐나왔다. 인간은 ‘이해’라는 단일한 문을 통해 에덴 동산에 들어올 것이다. 인간은 ‘생명의 나무’를 등 뒤에 둔 채 출구로 뛰쳐나갔다. 인간은 ‘생명의 나무’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다시 들어갈 것이다. 인간은 기나긴 시련의 행로를 걷고 있을 때는 자신의 알몸을 부끄러워하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신경을 쓴다. 여행의 목적지에 도달하면, 인간은 더 이상 벌거벗은 몸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인간이 죄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될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는다. 죄는 결국 자기를 해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앞가리개가 아니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렇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신 사이 -유한한 자아와 영속적인 자아 사이- 에 놓아 둔 칸막이 외엔 어떤 것도 죄가 아니다.
처음엔 아주 작은 무화과 잎에 불과했던 칸막이가 지금에 와서는 거대한 요새가 되어 있다. 인간은 천지무구의 에덴 동산을 뛰쳐나온 뒤로는, 무화과 잎을 겹겹이 쌓아 앞가리개를 엮는 일에 전보다 더 열중했다.
게으른 자들은 자신들 앞가리개의 터진 부분을 더 열심히 일하는 이웃들이 버리는 앞가리개 조각으로 깁는 데 만족하고 있다. 그리고 ‘죄’라는 옷을 깁는 것은 모두 죄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끄러움, 즉 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인간 최초의 통절한 감정을 지속시키는 데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극복하려는 것 외에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아, 인간의 모든 노동은 부끄러움을 위해 부끄러움을 포개고, 앞가리개 위에 앞가리개를 겹치고 있다.
인간의 기술이나 학문은 무화과 잎이 아니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끊임없이 전쟁에 광분하는 인간의 제국, 국가, 민족대립 및 종교는 무화과 잎을 숭배하는 온갖 종파가 아니던가?
인간의 선과 악, 명예와 불명예, 정의와 불의, 인간의 무수한 사회적 신조와 인습. 이 모든 것들이 무화과 잎으로 만든 앞가리개 아니던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을 따지고, 측정 불가능한 것을 측정하고, 어떤 잣대도 초월해 있는 것을 표준화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누더기 조각을 짜 맞추는 것이 아니던가?
자신의 고통으로 가득 채우는 쾌락에 대한 인간의 탐욕,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부(富)에 대한 인간의 강한 욕심, 자신을 예속시키는 지배에 대한 인간의 갈망, 자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영예에 대한 인간의 욕구. 이 모든 것들이 수많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앞가리개가 아니던가?
인간은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리려는 처절한 투쟁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앞가리개를 착용했다. 앞가리개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마침내 피부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숨을 헐떡인다. 인간의 겹겹이 둘러싸인 피부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망상 속에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려 하지만, 진실로 해방을 실현시켜 줄 유일한 일만은 하려 하지 않는다. 유일한 일이란 바로 자신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인간은 불필요한 피부가 제거되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전력을 다해 매달린다. 알몸이 되길 바라면서도 옷을 완벽히 입고 있으려 한다.
알몸이 될 때가 가까이 왔다. 나는 그대들이 불필요한 피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앞가리개- 를 벗어 던지는 것을 돕기 위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 역시 원하는 사람들 모두가 불필요한 피부를 벗어 던질 수 있도록 도와 주길 나는 바란다. 나는 단지 길을 제시할 뿐, 각자의 불필요한 피부는 스스로 벗어 던져야 한다. 설사 그 작업이 아무리 심한 고통을 수반한다 할지라도.
그대들은 그대 자신으로부터 구원해 줄 어떤 기적도 기대해선 안 된다. 또한 고통을 두려워 해서도 안 된다. 벌거벗은 ‘이해’ 는 고통을 영원한 법열(法悅)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들은 ‘이해’의 알몸 속에서 자신과 마주쳤다 해도, 그리고 신에게 부름받아 ‘너희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해도, 더 이상 부끄러워 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신으로부터 숨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대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명쾌하고도 엄숙하게 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신이여, 저희들을 보십시오. 저희들은 영혼, 저희들의 존재, 저희들의 유일한 자아를. 부끄러움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는, 당신이 시간의 여명 속에서 저희들에게 정해 주신 길고도 엄격하고 괴로운 선과 악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거대한 향수가 발길을 재촉하고 신념이 마음을 받쳐 줌으로서 이제는 ’이해‘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상처 자국도 봉했습니다. 이렇게 저희들은 선화 악에서 벗어나고, 생과 사에서 벗어나고, ’이원성‘의 모든 환상에서 벗어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아를 제외한 온갖 자아에서 벗어나 당신의 성스런 임재(臨齋)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알몸을 가리는 어떠한 무화과도 없으며, 당신 앞에 부끄러움이나 두려움 없이 광명을 얻어 서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희들은 합일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희들은 극복한 것입니다.“
이제 신은 무한한 ‘사랑’으로 그대들을 껴안고, 곧바로 그대들은 신의 ‘생명의 나무’로 데려갈 것이다.
이렇게 나는 노아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나는 그대들에게 가르친다.“
이상은 스승이 난롯가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