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포르투갈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에 기독교를 전했는데 사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영향력이 별로 없었다. 1905년에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쫓아내고 암본에 있는 신부를 추방하고 카톨릭 교인을 개신교로 개종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인들의 가치와 신뢰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동인도회사와 그 정부가 설립되고, 동인도회사가 가는 곳에 교회도 세워지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는 원하던지 원치 않던 교회 일에 간섭하는 동인도회사와 연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동인도회사 정부 시절의 인도네시아 교회성장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인도회사가 주는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교회는 조금씩 양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8세에는 파당, 스마랑, 수라바야에 여러 교회가 세워졌다. 당시에는 현지인 사역자가 없었기에 인도네시아 교회의 성장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네덜란드 교회의 조직의 형태, 신앙 고백, 교회의 규칙과 규율 그대로 인도네시아 교회의 규범과 기준이 되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교회는 개혁교회(Gereformeerde-Cavin)의 규정에 따라 세워졌다.
자바선교의 활성화를 시작한 것은 1811년으로 영국 침례교회에서 윌리암 로빈슨을 선교사로 파송하여 현지인을 가르치는 첫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이후 요셉캄(런던선교회), 요한 수퍼(독일)는 자카르타 지역으로 고톨롭은 스마랑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리고 브룩크너는 인도네시아 최초로 신약 성경을 자바말로 번역했다. 요셉캄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열정과 용기 때문에 ‘말루쿠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었고, 인도네시아 교회 속에 새로운 영적 부흥을 일으켰다. 이후 은퇴한 네덜란드인과 인도네시아 평신도들이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바치면서 자바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복음을 전하려는 시도들이 시작되었고 자바선교에 중요한 역할들을 했다. 요하네스 엠데와 믿음의 형제들은 1835년에 신약성경 전체를 쉬운 언어로 바꾸어 출간하였다. 이 성경이 말레이 언어로 된 최초의 신약성경이다. 그 이후 프레드릭 로데윅 안팅은 자바선교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그는 스마랑 법원 재직시절부터 복음전파에 관심을 가진 경건파였고 원주민 선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또한 그는 자바 기독교인들을 모아서 전도자로 훈련시키는 사역을 했다. 삼위일체,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을 중심주제로 삼았다. 안팅의 선교방식은 ‘원주민 선교는 원주민이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1931년에는 모조와르노의 젤레스마가 인도하는 공동체 동부 자바교회는 말랑에 병원과 학교를 세워 부흥했고, 남부 자바 교회는 개혁교회 지도아래 자립을 배워갔고, 선교단체는 병원과 학교 등 선교인프라를 지원했다. 1940년 5월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모든 지원이 갑자기 중단되었지만, 미국 선교부의 지원과 인도네시아 교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어려움 가운데서 교회가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계 2차 대전에서 세력을 확보한 일본이 1942년 인도네시아의 통치권을 갖게 되자 무슬림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면서 이와 대조적으로 기독교회는 그간 네덜란드와 연관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도 모함을 받았으며, 교회 지도자들은 일본에 의해 억류되었고 교회에 대한 외부원조는 일체 끊기게 되었다. 그러나 외부원조가 끊어지고 힘든 과정을 통하여 인도네시아 교회는 자립하는 것을 몸소 배웠고 교회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후, 인도네시아 교회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왔고, 많은 교단들이 종족, 지역 그리고 다른 요인들에 의해 분리되어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교회가 자바 기독교회이다. 자바기독교회는 자바의 대표되는 교회로서 자바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지고 있다. 그 외 오순절 계통 교회들의 교세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이며 교회안에서 중국인들의 역할 또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1965년도 공산 쿠데타와 급변하는 사회 현상들 속에서 자바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부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