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금모행, 그 밤의 풍경 / 김성문
대구 간송미술관 개관 전시회에서 신윤복의 그림 ‘야금모행 夜禁冒行’과 마주한다. 야금모행이란 밤에 통행이 금지된 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니는 행위를 뜻한다. 조선 시대의 야경을 배경으로 한 이 그림은 단순한 풍속화를 넘어, 금기의 경계와 그 속의 인간적인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멋을 낸 한 양반과 여인이 겨울밤의 골목길을 조심스레 지나고 있다. 하늘엔 새벽녘 그믐달이 떠 있고, 인물들의 옷차림은 모두 두툼하다. 추운 계절, 금지된 시간을 뚫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다. 그들 곁에는 붉은 도포를 입은 순라군이 서 있다. 관모 아래 방한용 두건인 풍차風遮를 썼고, 도포 속엔 분홍빛 옷이 살짝 비친다. 오른손에는 작은 막대를 들고 있어 누군가를 단속하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중앙의 양반은 오른손으로 갓의 테를 잡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순라군에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건넨다.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알면서도,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태도는 시대를 넘어 오늘의 우리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앞장서는 동자는 초롱을 두 손에 들고, 오른쪽 겨드랑이에 풍차를 끼운 채 뒷사람들을 돌아본다. 조심스럽고 긴장된 걸음걸이. 신윤복은 이 동자를 조심스럽게 작게 그렸다. 그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그림을 보며, 자연스레 통금의 기억으로 되돌아갔다. 조선 시대뿐 아니라 광복 직후의 우리 사회도 야간 통행을 제한한 시절이 있었다. 서울과 인천에서는 저녁 8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이후엔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통금이 완화되었다. 치안 확보가 이유였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은 많은 시민에게 긴장과 불편을 안겨주었다.
나 역시 통금을 어기고 곤란을 겪은 기억이 있다. 친구들과의 만남이 길어져 대중교통을 놓쳤고, 밤길을 골목골목 헤매며 집으로 향했다.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집 앞에 도착하려던 순간, 방범대원의 호루라기 소리가 밤을 가르며 울렸다. 결국 붙잡혀 파출소로 연행되었다.
경찰은 “왜 늦었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해 하루 동안의 행적을 시간대별로 조서에 기록하도록 했다.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일이 30분 가까이 이어졌고, 결국 감금실에서 한숨 눈을 붙인 후, 통금 해제 시간에 맞춰 풀려날 수 있었다. “앞으론 절대 위반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받아낸 뒤였다.
또 한 번은 가을밤,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와 시내 번화가의 작은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다 자정을 넘겼다. 그 시절의 대화는 왜 그렇게도 깊고 아쉬웠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결국 집으로 향한 건 통금 해제 이후.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해 벨을 눌렀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몇 번을 눌러보다 지쳐서 문에 기대어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문이 열렸고, 낯선 남성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내 집에서 왜 남자가?’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 남자는 당황한 내게 “아저씨, 아래층에 사시는 분 아니세요?” 하고 묻는다. 그제야 내가 위층 집 앞에서 잠들어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민망함에 “죄송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통금이 낳은 씁쓸하면서도 웃긴 한 장면이었다.
물론 야간 통행금지는 국가 안보와 치안 유지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사람들의 일상에 불편함을 가져왔고, 삶의 리듬마저 바꿔놓았다. 통금 시간이 다가오면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고, ‘빨리빨리’라는 말은 생활의 구호처럼 자리 잡았다. 줄을 서면 새치기를 하게 되고, 식당에서도 주문이 늦어지면 초조해졌다. 그렇게 형성된 속전속결 문화는 어쩌면 우리의 성격까지 바꾸어 놓은 건 아닐까.
그림 속 야금모행의 풍경도, 내 젊은 날의 통금 기억도, 결국 밤이라는 시간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과 사회의 풍경을 보여준다. 야간 통행이 단속되던 시절, 우리는 시간에 쫓기며 하루를 살았다. 지금도 그 습관이 남아 있어, 천천히 해도 되는 일에 조급함을 느낄 때가 있다.
신윤복이 그린 겨울밤의 한 장면이 내게 오래도록 남는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금지된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속에서 어떻게 인간다운 얼굴을 지켜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림 한 점이 건넨 기억의 실마리 덕분에, 나 또한 오래전 그 밤을 다시 걷는다. 그리고 느낀다. 시대는 달라도, 밤의 풍경 속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김성문
『한국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한국수필가협회/한국공무원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대구지역위원회/대구문인협회 이사/대구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학시선작가협회 명예회장, 윤동주 문학상 대상 수상. 수필집 『가야국 산책』, 『기억 저편』.
첫댓글 김성문님,
교체하신 작품으로 올려드리겠습니다.
연락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