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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대승사
2026년 10월 04일(일요일)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입니다.
사불산 산마루에는 사면(四面)석불상이 있는데 《삼국유사》 권3 <사불산조>에 587년(신라 진평왕 9) 커다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사면석불이 공덕봉(功德峰) 중턱에 떨어졌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4불암이었습니다.
왕이 소문을 듣고 그곳에 와서 예배하고 절을 짓게 하고 ‘대승사’라고 사액(賜額)하였습니다. 망명비구(亡名比丘)에게 사면석불의 공양을 올리게 하였고, 망명비구가 죽고 난 뒤 무덤에서 1쌍의 연꽃이 피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뒤 산 이름을 사불산 또는 역덕산(亦德山)이라 하였습니다.
1644년(인조 22)과 1722년(경종 2)에 의현(義玄), 종수(鍾守) 등이 중수하였고, 1831년(순조 31) 구담(九潭)이 중창하였습니다.
1922년 대화재로 불타, 의운(義雲), 덕산(德山)이 복원시켰는데, 1956년 또 대화재가 발생, 명부전, 극락전만 남고 소실되어, 1966년 남인(南印), 대휴(大休) 등에 의해 삼창(三創)되었습니다.
이 절에는 보물 제575호인 대승사목각탱부(木刻幀附) 관계문서(4장)와 사적비(寺跡碑) 및 아미타불사에서 나온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7권), 불사리 1과(顆) 등이 있습니다.
부속암자로 반야암(般若庵), 묘적암(妙寂庵), 상적암(常寂庵) 등이 있는데, 특히 반야암은 기화(己和)가 《금강반야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經五家解說義)》(1415)를 지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대승사 일주문
일주문은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정면에는 "사불산 대승사(四佛山 大乘寺)", 후면에는 "불이문(不貳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사불산대승사(四佛山大乘寺) 편액
편액 글씨는 퇴경 권상노(退耕 權相老 1879~1960)의 글씨입니다.
권상노대종사는 일제강점기때 승려로 18세 때 김룡사로 출가하여, 뚜렷한 학벌은 없지만 불교계에서 소문난 학승이었습니다. 광복 후에는 불교계의 원로로 활동하면서 1953년 동국대학교 초대 총장을 맡기도 했으나, 친일파 708인,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 모두 이름을 올리는 불명예도 가지고 있습니다.
일주문 보수 공덕문
불기 2531년(1987)에 일주문 보수하는데 공양을 바친 사람들의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일주문 해체 복원공사 기록(1990년)
일주문 뒷면에는 불이문이라는 편액을 달아놓았고 한자는 불이문(不二門)이 아닌 불이문(不貳門)으로 적고 있는데 두 한자는 모두 ' 두 이'를 뜻합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고 생과 사, 만남과 이별도 따져보면 모두가 둘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하나'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이문을 통과하면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는 세계이기에 모든 중생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불이문(不貳門) 편액
기해년(1958) 5월(己亥五月) 김병광(金炳光)의 글씨입니다.
일주문으로는 독특한 옆면 구조를 보입니다.
옆면 처마가 짧은 맞배지붕이어서 비바람 막는 풍판을 단 것은 당연하지만
보조기둥 활주가 처마를 받치는 게 아니라 옆면 가로부재들을 받치고 있고
구불구불 휜 모양으로 깎아 멋을 냈으며 아래쪽에 판벽을 달아 난간처럼 꾸몄습니다.
화장실
고풀스럽게 조성한 주차장 뒤 뒷깐(해우소)
목조로 만들어진 소변기
온심당
온심당(溫心堂) 편액
대승사 사적비
대승사 백련당(白蓮堂).
옛 사진을 근거로 최근에 중건한 건물이며 정면 11칸, 측면 2칸의 규모에 동서로 길게 자리잡고 있는데 중앙 3칸은 사대부가의 솟을대문과 같은 형식이며 나머지는 모두 방으로 재가자들이 참선, 정진하는 선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백련당(白蓮堂) 편액
백련당 편액은 한국 서예계의 중진인 소정 전윤성(蘇亭 全允成) 선생의 글씨입니다
현묵당
현묵당(玄默堂) 편액
동진당
템플스테이 숙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진당(同塵堂) 편액
백련당을 통해서 들어가면 이어서 이층 누각인 만세루가 나오고 만세루 누각 아래를 지나면 이어서 대웅전이 나오는 배치입니다.
만세루
문경 대승사 만세루는 2층 누각으로 '누하진입' 구조의 건물입니다. 만세루는 다른 사찰에선 보제루, 구광루, 안양루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법요식을 하는 공간이나 강당으로 사용됩니다.
만세루
만세루(萬歲樓) 편액
범종루에는 불교 사물인 범종과 법고, 목어 및 운판 등이 모두 있어서 규모가 꽤 큽니다.
범종루는 2007년 건립되었고, 범종은 2년 뒤인 2009년에 조성되었습니다.
범종루(梵鍾樓) 편액
사불산대승사대승선원 범종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만약 사람들이 삼세 일체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이 모든 법계의 성품을 보자.
모든 것은 일체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법고
법고를 치는 이유는 축생(畜生)을 제도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또한 정법(正法)의 북을 쳐서 시방세계(十方世界)를 깨우치게 하기 위함입니다.
법고를 칠 때는 두 개의 북채로 마음 심(心)자를 그리면서 두드립니다.
운판, 목어
통나무로 된 목어는 중생을 상징하는 물고기의 몸과 성불을 상징하는 용의 머리로 구성되어 있고, 운판은 그 이름처럼 모양이 구름을 닳았고 쇠로 제작하며 금강인 '부처님의 지혜'를 나타낸다고 합니다.
청련당(靑蓮堂)
스님들의 거처 공간이자 일반 신도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좌측 맨 끝에 있는 방은 주지 스님께서 머물고 계시는 공간입니다.
청련당(靑蓮堂) 편액
편액은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 월산(月山 1912~1997)스님이 썼습니다.
1947년 청담 성철 자운과 함께 문경 봉암사에서 결사 수행을 해 불교 정화운동에 앞장섰고, 조계종 총무원장, 원로회의 의장을 지냈셨습니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만세루 뒷면
대웅전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어간에는 6분합문, 좌우 협간에는 4분합문을 달았습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중앙 뒤쪽에 기둥을 세워 그 사이에 후불벽을 세웠는데 그 앞쪽에는 석가여래가 문수, 보현보살을 거느리고 앉아 있으며 뒤쪽에는 화려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경 대승사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삼존불과 목각아미타여래설법도(목각탱, 보물 제575호였다가 국보 제321호로 승격)가 있는데, 현재는 개금불사 중으로 법당 안에는 없습니다. 목각탱은 전국에 7점 정도 남아 있는데, 문경 대승사 목각탱은 나무로 깍아 돋을새김 또는 뚫을새김으로 조각한 것으로, 원래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에 있던 것을 철종 13년 대승사의 큰 화재로 법당이 불타 없어지자 새로 법당을 짓고 당시 폐찰 상태로 방치되어 있던 부석사 무량수전의 후불목각탱을 옮겨온 것입니다. 이 목각탱의 반환 문제로 영주 부석사 측과 오랜 시비가 있었는데 대승사 측이 부석사의 조사당 복원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대승사에 두는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합니다.
1675년(숙종 1년)에 제작된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현존하는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 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대중성 짙은 평담한 미적 감각을 바탕으로 강 직하고 개성 넘치는 묘사력은 17세기 후반에 활약했던 조각승 단응(端應), 탁밀(후)의 조각유풍과 관련 있습니다.
특히 불화와 조각을 절묘하게 접목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중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현존하는 6점의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84년 예천 용문사, 상주 남장사, 서울 경국사, 1692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1782년 남원 실상사 약수암) 중에서 가장 규모도 크고, 불보살상의 표현이나 작풍에 있어서도 격이 뛰어나며 도상의 수도 많아 다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들의 모본으로 볼 수 있어 중요합니다.
대승사 목가아미타여래섭법상(국보)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후불탱화 형식을 조각으로 표현한 목각탱으로 총 10매의 판목을 조합하여 아미타극락세계를 장엄하게 표현하였습니다.
화면의 중앙에 자리 잡은 본존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주변에 보살 및 제자, 천왕상 등 24구의 존상을 좌우 대칭을 이루도록 정연하게 배치하였습니다.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聞慶 大乘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 국보 제321호).
중앙에는 키형광배와 연꽃대좌를 부조하고 여기에 별도의 목조본존아미타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며 좌우로 5단에 걸쳐 협시상들을 배치했는데 좌우대칭으로 사천왕, 8대보살(관음, 세지, 문수, 보현, 제장애, 금강장, 지장, 미륵), 2천상, 이천자(일궁, 월궁), 6대제자상 등 24구의 존상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습니다.
상단 좌우로 화불(타방불)과 비천 등이 장식되었으며 각각의 존상들 옆에는 존상을 밝혀주는 명패가 달려 있어 목각아미타설법상 도상의 이해도를 높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목각탱화가 6군데가 있는데..예천 용문사 포함 경북에만 4군데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문경 대승사 목각탱화가 단연 으뜸이라고 합니다.
숙종1년(1675년)에 제작되어 현존하는 조선 후기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높이 4m 폭 3m의 크기이며 후불탱화 형식을 나무로 깎아 부조나 투조기법의 조각으로 표현한 목각탱으로 총 10매의 판목을 조합하여 아미타극락세계를 장엄하게 표현하였습니다.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목각탱화로 1973년 12월 31일 보물 제575호로 지정되었다가 2017년 8월 31일 국보 제321호로 승격되었는데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원래 부석사에 모셔져 있던 것을 대승사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1862년 대승사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명부전과 응진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불에 탔습니다. 이에 의운, 취월, 덕산스님이 다시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셨으나 후불탱화를 봉안할 여력이 없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폐찰 수준이었다는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1869년 목각후불탱(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을 가져옵니다.
1675년 처음 만들어질 당시 이 목각탱은 영주 부석사의 금색전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19세기 후반 부석사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전각이 무너지면서 이 화려한 목각탱은 무량수전 뒷방에 방치되어 40여 년간 향불조차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반면, 문경 대승사는 1862년(철종 13년) 큰 화재로 법당과 승방이 모두 불타버리는 참사를 겪었습니다. 전각은 새로 지었으나 당장 내부에 모실 부처님을 새로 조성할 돈이 없었습니다. 이때 대승사 스님들의 뇌리에 부석사에 방치된 목각탱이 스쳤습니다. 대승사 측은 "부처가 있으나 모실 스님이 없고, 스님은 있으나 모실 부처가 없으면 서로 의논하여 옮기는 것이 관례"라며, 순흥 관아의 정식 허가를 받아 1869년 부석사의 목각탱을 대승사로 모셔 왔습니다.
대승사 목각후불탱은 소영당 신경대사(?~1705)와 그의 제자 단응, 탁밀이 1675년 부석사에서 제작하여 봉안한 것으로 길이 3.6m, 폭 2.9m, 판목 10매를 잇대어 붙인 것인데, 대승사 목각후불탱은 목각후불탱 중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가장 크며 조각 수법 또한 가장 뛰어나다고 합니다.
사건은 6년 뒤인 1875년에 터졌습니다. 다시 사세를 조금씩 회복하던 부석사 스님들이 관아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대승사가 우리 부처를 몰래 훔쳐 갔다(늑탈)"는 것이 부석사의 주장이었습니다.
반환 요구가 거세지자 대승사 스님들은 관찰사와 총섭(승군 관할 기관)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올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진흙탕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부석사에 의탁하던 한 승려가 불상을 돌려받는 대신 수백 냥의 돈을 요구하자, 대승사 측은 이를 두고 "부처를 파는 도적의 흉계"라며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조선시대 지방 관청은 이 종교적 분쟁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경상도 관찰사는 일차적으로 정당한 절차를 거쳤던 대승사의 손을 들어주며 부석사의 주장을 무고로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갈등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았고, 결국 이듬해인 1876년(고종 13년) 두 사찰은 지극히 현실적인 타협점에 도달합니다. 목각탱은 대승사에 그대로 모시되, 대승사가 부석사의 낡은 핵심 전각인 '조사당(祖師堂)' 수리 비용 250냥(당시 쌀값 등 물가 기준, 현재 가치로 환산 시 약 1250만~2500만 원 상당)을 전액 지불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이 기막힌 거래의 전말은 대승사에 전해 내려오는 소장과 '완의(完議, 합의서)' 등 11점의 문서를 통해 오늘날까지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1973년 처음 보물로 지정될 때는 불상과 이 소송 문서들이 하나로 묶여 지정되었다가, 2017년 불상의 압도적 가치가 증명되면서 목각탱만 단독으로 국보(제321호)로 승격되었고 소송 문서들은 보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소송 사건은 단순히 유물을 둘러싼 스님들의 다툼이 아닙니다. 당시 조선 후기 불교계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지역 사찰들의 경제력(사세)이 어떻게 변동하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귀중한 역사적 단면입니다. 결과적으로 대승사의 절박함과 부석사의 현실적인 타협이 맞물려, 이 위대한 목각탱과 부석사의 조사당 모두 훼손 없이 온전하게 우리의 곁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대승사 목각후불탱은 목각후불탱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부석사와 대승사의 목각탱화로 인한 소송 떄의 관계문서 4매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상주 대승사 외사사 승도등장 보물575-1호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으로 폐찰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자 시비가 일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대승사에서 관(官)의 인증을 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입니다. 더구나 각상(各像)에 이름이 쓰여져 있고 부석사 와의 분쟁으로 서장(狀)이 오고간 후 고종(高宗) 13년(1876)에 완결(完結)을 본 관계문서가 남아 있어서, 이 방면의 연구에 크게 공헌하는 작품입니다.
상주 사불산 대승사 승도등장 (보물575-2호)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으로 폐찰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자 시비가 일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대승사에서 관(官)의 인증을 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입니다.
도내 상주 사불산 대승사 제승등장 (보물575-3호)
현재 대승사에 있는 목각탱화는 원래 영주 부석사에 있던 것으로 폐찰되어 있던 부석사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그 뒤 부석사에서 반환을 요구하자 시비가 일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대승사에서 관(官)의 인증을 받기 위해 작성한 문서입니다.
완의 보물575-4호
완의는 고종 13년(1876)에 당시 목각탱화의 봉안을 둘러싸고 대승사와 부석사간에 서로 합의한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석가여래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승사 대웅전 내 신중도
대웅전 신중도는 부처님의 정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그린 불화로 신중은 원래 인도의 재래신들이 부처님의 자비심에 감동되어 불교에 귀의한 후, 불법의 유통과 감호를 맹세한 성중을 말합니다. 제석천왕, 대범천왕, 위태천왕, 용왕, 아수라, 사천왕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위태천왕
위태천왕은 사천왕의 32장군 중 우두머리 장수로서 정법을 수호하며, 손에 팔만사천근의 금강보저를 들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실 때 불법을 구하고 보호하리라고 명세하였다고 합니다.
위태천왕은 깃털 모양의 장식을 갖춘 투구를 쓴 무장 모습으로 배를 약간 내민 채 팔만사천근이나 되는 금강보저를 손에 들고 서 있습니다.
대웅전 귀공포 좌측 용이 물고기를 살짝 물고 극락정토로 보내려는듯 하고 있고, 우측 용은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문경 대승사의 대웅전은 정면 3칸의 전면에 4짝-6짝-4짝의 꽃살문이 있습니다. 문살의 무늬는 솟을꽃살문으로 가운데 어칸문 6짝은 모란꽃, 좌우칸 4짝은 국화꽃을 새겨 넣었습니다.
좌우칸 4짝은 국화꽃로 장식하였으며 문 아래쪽에는 연꽃 속에 고사리 문양을 덩굴처럼 표현해 두었습니다.
대웅전 측면 꽃문살
대웅전 기단의 연꽃무늬
조선 후기에 화재로 대웅전 기단을 새로 쌓으면서 옛 석재 몇 개를 끼어 넣었는데, 민화처럼 연꽃이 피어나는 형상을 소박하게 아로새긴 기단 면석이 눈에 띕니다
노주석(露柱石)
노주석은 사찰에서 예불 의식에 필요한 기본적 도구이며 야간법회 시 불을 밝히거나 또는 숯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 석물로 "불우리", "노반지주", "광명대", "화사석", "정료대" 등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층기단의 탑이 유독 문경지역에만 집중적으로 나타나듯이 노주석 또한 문경에 남아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 중의 하나이며 석등 보다는 앞선 형식이지만 고려시대 이전의 것은 아직까지 알려진 것이 없으며 조선시대의 유물이 영남지역에 조금 남아있을 뿐입니다.
노주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7호)
문경 대승사 대웅전 앞 뜰에는 2기의 노주석이 서 있습니다. '불우리', '화사석', '정료대'라고도 하는데, 1729년에 제작되었으며, 야간 법회때 불을 밝히는 석등의 일종으로, 숯불을 피워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데도 사용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봉암사, 김룡사 등 몇 곳에 없는 독특한 문화재입니다.
형태는 사각형 지대석을 놓은 뒤, 사각기둥을 한가운데 세우고 그 위에 받침이 있는 화반(化盤)을 올려놓았는데 오랜 세월 사용되면서 화반 일부가 금이 간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완형을 유지하고 있고 꾸밈이 없이 수수한 형태입니다.
조선시대 불교미술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간주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옹정7년(영조5년, 1729년)이라는 제작연대와 공인의 이름을 알 수 있어 불교공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높이는 200㎝, 화대폭 119㎝, 화대받침 84㎝, 간주높이 170㎝, 간주폭 50㎝로서 국내 현존 노주석으로서는 적은 규모는 아닙니다.
노주석 기둥에 적혀 있는 명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열 : 雍正七年己酉四月日庚申辛酉壬戌(옹정칠년 기유 사월 일 경신 신유 임술)
2열 : 癸亥田流成立付任亥甘化主先客別(계해 전류 성림부 임해 감화주 선객별)
3열 : 坐廻明供主太俊工人孝英位李太英(좌회명공주태준 공인 효영위 이태영)
측면 : 冶工鄭免主(치공 정명주)
대승선원 앞 향나무
대승선원
대승선원은 'ㄷ'자형 건물로 정면 8칸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대승선원은 한국불교 정화의 씨앗이 움튼 곳으로 원효, 의상, 나옹, 무학, 함허스님이 머물렀고 ,성철, 청담, 서암, 자운 스님과 비구니 묘엄스님이 정진한 곳이며 금오, 고암, 월산, 향곡 등 숱한 한국불교의 거목들이 수행한 곳입니다.
종정 법전 스님이 한 덩이 밥과 한 조각 김치로 끼니를 때우며 깨달음을 얻은 곳도 이곳입니다.
천강사불(天降四佛) 편액
대승사 선원에는 천강사불, 지용쌍려이라고 쓰여있었는데 이는 '하늘에서는 사면석불이 내려오고 땅에서는 쌍으로 된 연꽃이 솟아났다'는 뜻인데 이는 대승사 창건 설화를 나타냅니다.
사불산 산마루에 있는 사면 석불상은 삼국유사 불산조에 따르면 587년(신라 진평왕 9) 커다란 비단 보자기가 공덕봉 중턱에 떨어졌는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4불암이 싸여 있었다고 합니다.
천강사불(天降四佛: 하늘에서 불상 넷이 내려왔다는 고사)
편액의 글씨는 시암 배길기(是菴 裵吉基 1917~1999)의 글씨입니다.
지용쌍련(地聳雙蓮) 편액
지용쌍련(地聳雙蓮: 땅에서 연꽃 둘이 솟아났다) 절의 창건설화
시암 배길기(是菴 裵吉基 1917~1999)의 글씨입니다.
선원이 쌍련(雙蓮)선원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설된 것은 1924년이고, 1944년에는 청담 성철 경봉 운허 효봉 자운 같은 큰 스님들이 만나 의기투합한 곳이자 성철 큰 스님이 3년 동안 눕지 않고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로 용맹정진의 모범을 보인 곳이기도 합니다.
그 뒤로 문을 닫고 열기를 거듭하던 선원을 1995년 조실 월산스님이 대승선원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대표적인 참선도량으로 부흥시켜 오늘에 이릅니다.
당시 월산스님이 쓴 편액이 앞면 중앙에 걸려 있습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 글을 쓴 이는 석파 이하응(石坡 李昰應 1821~1898), 즉 흥선대원군입니다.
편액을 가까이서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일부러 긁어 지운듯한 흔적이 있는) 맨 위부터 石坡(석파)라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원 좌측 방 처마에는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이 걸려 있고 그 방에는 보물 제991호인 금동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고 합니다.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선원에 모셔져 있어서 일반인은 친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화재청 자료사진을 내려받았습니다.
진평왕 9년(587)에 세운 대승사에 모셔진 보살상으로 유리상자를 씌워 모셔 놓았습니다.
불상 속에서 나온 관음보살원문(觀音菩薩願文)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선 중종 11년(1516) 불상에 새로 금을 칠하기 이전인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보물 제991호)
머리에는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고 있습니다.
귀는 약간 짧고 목에는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가 명확하게 있습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팔에 걸쳐 내려 무릎을 덮고 있으며, 전신에 걸쳐 화려한 구슬 장식이 있습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와 수평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손바닥을 위로 하고 있습니다.
아미타 아홉 가지 손갖춤 구품인(九品印) 중에 하품중생인입니다.
가슴, 배, 무릎에 표현된 구슬 장식이 경상북도 영덕의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 제993호)과 흡사하지만 어깨와 등의 번잡한 장식이 옷속에 감추어진 점이 다릅니다.
특히 띠매듭 바로 위의 치마상단이 긴 상체의 가운데에 표현되어 마치 보살상을 둘로 나눈 것처럼 보이게 한 것 또한 이 불상만의 독특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승선원(大乘禪院) 편액
월산(月山 1913~1997)스님의 글씨입니다.
영수산방(靈壽山房) 편액
추사 김정희와 교류한 중국 청대 최고의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의 글씨로 우측 첫번째 글자인 영(靈)자의 속자 영(灵)을 변용하여 쓴 글씨라고 합니다. 영수(靈壽)란 무량수(無量壽)와 통한다고 합니다.
대웅전 측면
삼성각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내부에는 중앙에 목각 칠성탱을 봉안하고 좌우에 목각 산신탱과 독성탱을 모시고 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삼성각 내부에는 칠성, 독성, 산신의 삼신을 모신 곳입니다.
삼성각에도 목각탱화가 조각되어 있으나, 작품성은 좀 떨어지는 듯합니다.
칠성탱
중앙에 치성광여래와 일광·월광보살, 칠원성군의 칠성탱
독성탱
나반존자의 독성탱이 있는데, 탱화가 아니라 황금빛 목각탱
산신탱
산왕대신의 산신탱
응진전은 나한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단층 목조건물이며 자연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으며 전면 3칸 모두 4분합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주련의 글씨는 인천문화원장을 역임한 동정 박세림(東庭 朴世霖, 1924~1975) 선생이 썼습니다.
응진전(應眞殿) 편액
오백나한상
오백나한상
응진전에는 중심에 석가모니불,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작은 크기로 모셔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오백나한상
꽃이라든지 부채라든지 혹은 요령이나 깃털 같은 것을 들고 있는데 그 모양이 모두 다르고, 나한들 표정도 모두 제각각이라 응진전 나한상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은 족히 걸릴 듯합니다.
응진전 내 좌우에는 500나한상이 있는데, 467구의 소조상, 32구의 석조상, 1구의 석고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873년에 발간된 '대승사중창기'에 따르면 이 나한상 모두는 19세기 초반에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동진보살
선향당(禪香堂) 편액
삼성각, 응진전앞에 5층석탑
5층석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