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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속에 따뜻한 마음을 나누어 주시는 우리님들 우리는 좋은친구 입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요?
마음은 도구이며 연장입니다.
마음이란 특별한 과업에 사용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내려놓아도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 중에서
80~80%는 반복적이고 부질없는 잡념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부정적인 성질을 품고 있을 때도 적지 않아서,
대부분의 생각들이 해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당신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내 말이 사실임을 알게 될 겁니다.
부질없고 해로운 생각들로 인해 소중한 에너지가 새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의 행렬이란 사실, 중독이나 다름없습니다.
중독이란 무엇일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중독이란 나보다 더 강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거짓된 즐거움을, 고통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생각에 중독될 수밖에 없나요?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내용물과 활동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멈추면 자신의 존재 또한 끝장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기초해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거짓된 자아를 '에고'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에고라는 용어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그 말을 사용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창조된 거짓된 자아를 뜻합니다.
에고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는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에고로 존재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고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스로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으려 하고
거기에서 어떤 해방이나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에고는 말합니다.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난 행복할 텐데.
저런 일이 생기면 난 평화로워질 텐데."
에고가 현재에 관여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조차도,
에고가 보고 있는 것은 현재가 아닙니다.
에고는 과거의 눈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만들어 내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서
현재를 하나의 수단으로 축소하기 일쑤이지요.
여러분 스스로 마음을 잘 관찰해보면,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분석력과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요.
필요하다면 좀 더 집중적으로 좀 더 분명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는 있겠지만,
마음을 잃어버리고 싶진 않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죠.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을 겁니다.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는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마음은 괴물로 자라나 우리 자신을 파괴할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생각과 의식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생각은 의식의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생각은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을 딛고 솟아나는 것입니다.
생각보다 더 낮은 차원으로,
동물이나 식물의 수준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생각하는 마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집중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내면의 중얼거림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평화롭게,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부릴 수 있게 되고, 무언가 창조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면
시계추처럼 생각과 생각 없음 사이를,
유심과 무심 사이를 몇 분 간격으로 오갈 수 있을 겁니다.
무심이란 생각의 헤아림이 없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죠.
생각은 자기보다 훨씬 더 광대한 의식 영역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어느새 힘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파괴적이 됩니다.
마음이란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도구입니다.
다른 마음들과 대적할 때 공격과 방어를 하고, 정보를 얻고,
저장하고, 분석하는 일은 잘하지만 창조적이지는 않습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의 창조력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무심의 장소로부터,
고요한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은 창조적인 충동이나 통찰에 형상을 부여할 뿐입니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생각이 멈춘 순간의 고요한 상태에서
창조적인 돌파구가 열렸다고 말해 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미국의 저명한 수학자들에게 연구 방법을 질의한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창조적인 활동에 있어서
생각은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창조적이지 못한 이유는 생각하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을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신의 생명과 육체라는 기적이 창조되고 유지되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마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성이 작동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지름이 0.2밀리미터도 안 되는 인간 세포의 DNA가
어떻게 600쪽 분량의 책 100권 정도를 채울 수 있는 지령을 담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작용하는 지성이 얼마나 광대한지,
그리고 우리의 앎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마음이 그러한 지성과 다시 연결된다면 경이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은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게놈
인간의 게놈(염색체의 한 세트)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빛 파장의 증가에 반응함으로써 어떻게든 그 일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빛의 파장은 우주의 대 중앙 태양에서
은하계의 어두운 중심부를 통과해
다시 우리의 태양의 중심을 지나 지구 가이아의 중심으로 유입됩니다.
그 광선이 지구를 관통할 때,
또한 우리의 육체를 관통하면서
소위 잠들어 있던 DNA 를 활성화 시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세계 어디로 가든
우린 금융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있습니다.
돈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우리 사회 환경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의 실패와 고통이....
실제로는 아주 작은 소수권력의 돈에 의해 통제됩니다.
우리의 내면 세계가 성공하고 성공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새로운 세계라는 진정한 기회를 얻습니다.
그 새로운 세계질서는 매우 특별하며
진보적인 새로운 도전이 됩니다....
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입니다.
지금우린 진정한 정치권력이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현재 위급한 정치상황을 고려할 때
새로운 질서만이 가치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삶은... 균형을 이루며 자유롭게 흐르도록
천체적 에너지에 충만한 "우주적 토로스"라는 것,
토로스를 따라가면서 늘 새로운 형태로
우리몸이 청정하게 성장하고 ...
그 안전한 에너지로 가는 열쇄로 있습니다.
우리몸이 지닌 토로스시스템은 매우 역동적이며
최대한 자원을 활용하려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뇌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이유는
몸의 파동이 시공간 전자기능에 중첩되어 확산됨으로
여기에도 저기에도 확률적인 것에 붙고 이끌려 있어서 입니다.
토로스의 영양하에 중첩으로 얽켜있기 때문에
보이는 환영의 실체의 대물림도 확률적인 것 입니다.
,
그리고 우리는
사회 소수 권력층에 이끌린 경제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회란 경제속에는 소수권력이 지배하는 법,질서 굴래며 소수 권력 그들이....
마치 우리 몸의 촌충처럼살고 있는 것입니다.
춘충이 당신의 몸속에서 기생하는 방식은
당신의 몸에 화확물을 주입하는 양식을 합니다.
춘충에겐 이롭지만
당신에겐 해로운 음식만을 먹고싶게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가진 이 기생충은 아주 교묘하며,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버리려 합니다,
우리는 이 촌충의 경제속에 살고 있습니다.
소수 권력층이 거진다 그 춘충이며,
우리가 그들의 먹이인 것이죠,
전 소수 권력층 그 엘리트 집단에 의해 운영되는
하나의 세계 그리고 우리 정부와
우주 코로스와 연결된 하나라는 차이점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로스적 연결성은, 근원적이고 영적인 수준에서
우리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 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구 정복은 완전히 반대의 개념입니다.
그것은 분리하고 지배하는 전략으로서
우리 모두가 서로 적대시 하게 만드는 개념입니다.
누가 민주당이고 누가 공화당인지,
자유주위자인지 보수주위자인지 생각합니다.
궁극적으로 양 편의계획이 같은데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문제입니다.
전 우리가 전체주위적 세계를 향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이사회는 극소수 권력에 의한건 군사 독재입니다.
소수가만든 권력을 가지고 모두를 지배하는 체제입니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그 어디에도 도망가거나 숨을 곳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 음모라는 것에 대해....
너무도 우숩게 여기고 있었지 안았나요.
그들 입장에선
그것을 음모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회적인 도전입니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사건을 한번에 해명할,
어떤 정당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예전에 전 개인적으로,
똑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많은 돈과 지배력을 갖는 것을 정당화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요.
"그들이 그져 그 상항에 이점을 취할 뿐이지
그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니다.라고요
하지만 살다보니 결과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확신을 더욱 더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그 들의 조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전 이것을 아는건
가치있는 일이라고 결정 했습니다.
왜냐하면 분노와 슬픔 그 반대편에는
투명함과 힘이 있으며
그 힘에 의해 나는 바로
코로스에 집중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20년이네에 세상이 정말
어떻게 돌아 가는지 이해 하게 될것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장 큰 감옥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감옥은 사회의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입니다.
옮고 그름, 도덕과 비도덕,좋은 것과 니쁜 것,
건전과 불건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혼돈이 없는 영역이란 것을 만듭니다.
그렇게 인식한 믿음의 영역안에서 삶을 살아가고..
그 안에서 말하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당신이 평범하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놔듭니다.
하지만 일단 그 영역에서 한 발짝 나오면
그 땐 당신은 특이한 사람이 되기 시작합니다.
철인이 한 일은
전 인류를 교도소 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누구라도 평범한 영역을 벗어나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밝아 버립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그 혼란이 없는 영역에서 조금 벗어나려고 활 때
당신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이렇게하면 사장이 워라할까?
안돼..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가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은 술집이나 직장에 있는 사람은 뭐라고 말 할까?
그 철인들이 만들어 한 일은
서로에게 규범을 부과하는 절대적인 군인들을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위기는 탄생이다] 라는
세계관을 같는다면!!!
우리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같게 될것이란
세계관을 같는다면!!!!!!
절망스러운 환경의 세상을
창조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토로스는 절대 고요상태 제로 지점에서
각각 토로스형 체계 중앙에 노여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저 모든 사람이
토로스 에너지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 고요함을 중심에두고
우리모두가 서로 살아있는
우주의 무한한 의식속으로 영결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당연하다고 배우고 여기는 것들이
맞지 않다는 좋은 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너무나도 자주
이런 개념 속에 갇혀버립니다.
그것이 패러다임입니다.
무위경조
당신 자신이
다른 존재가 되어 당신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그리고 완전한 관찰자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 그것이 긍극적인 질문 아닐까요?
현실은 무엇인가요?
예전엔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떤 점에서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지요.
사람들이 비현실이라고 말하지만 말이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설명하면 할수록 그것을 설명하려고 투자하면 할수록
신비의 굴속에서 길을 잃기가 쉽지요.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 확률적 과정을 이야기 하려합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 말이죠.
우리가 세상을 느끼는 방식과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그 차이의 문제 이야기 입니다.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바라보는 지금 이 문화의 많은 것들
잘못된 패러다임 위에 존재한다는 신호 아닌가요?
즉 생각의 힘을 너무나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시대와 세대에서 만들어진 가정은 항상 존재했습니다.
지구가 평평하다든가 둥굴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죠.
우리가 당연히 어기는 숨겨진 가정들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이 말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가정의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당연하다고 배우고 여기는 것들이
맞지 않다는 좋은 지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너무나도 자주
이런 개념 속에 갇혀버립니다.
그것이 패러다임입니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사람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신비일까요? 모두가 수수께끼일까요?
분명히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더 깊이 물어보는 것은
새로운 나의 세계로 문을 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삶을 더 즐겁게 해줍니다.
삶의 진정한 요령은 앎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현실을 왜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걸까요?
같은 관계와 똑같은 일들을 왜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걸까요?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이 뮤한한 가능성의 바다위에서
왜 우리는 똑같은 현실을 계속해서 창조해내는 걸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선택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지 ! 놀랍지 않나요?
우리가 일상에 익숙해져서 즉 우리가 하루의 삶을 창조해내는데
너무 익숙해져서
현실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외부의 세계가 우리안의 세계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사실에
너무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질병에 이르는 단계는
정상적인 전자의 공명자장에 대한
비정상적인 방해와 혼란에 의한 것입니다.
방해적인 파동에너지가 원자레벨에서
정상적인 전자의 공명자장을 바꾸어 버리면
원자로부터 분자, 분자로부터 세포,
세포로부터 기관에 이르는 질서 정연했던
정보교환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립니다.
예를들면 생체에 있어서 원자의 공명자장이
오랜기간에 걸쳐 방해를 받으면
생화학적 이상이 최종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 생화학적 이상은 표준적인 의학적 검사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시점이 거의 대부분 현대의학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이라는 것이 질병의 발생과정에 있어서는
이미 상당히 늦은 단계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원자의 공명자장에의 방해가 더욱 더 오래 끌게 되며
이윽고 세포의 손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더욱 더 공명자장의 흐트러짐이 계속되게 되면
세포의 손상이 최종적으로 기관의 기능을 방해하게 되고
그 결과 질병에 걸리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외부 세계를 창조한다는
절대적으로 견고한 물리적 현실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은
다른 물리적 현실 몸 세포의 가능성과 확률의 활동
즉 전자의 흐름 그 원리에 따라 삶을 보는 것입니다.
전자 흐름의 양이 증가할 때 현실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다른 물리적 현실이라는 것에 우리 자신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의 일부이구요.
하지만 둘 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연히 홀로 날아온 돌멩이라고도 볼 수도 있죠.
그래서 서로서로 복잡한 물질들이 반응해서
특정 존재의 상태로 나타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내가 돌부리를 걷어차면”
발가락이 아프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 아픔을 현실로 느끼고 생생하게 와 닿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경험이고
그 사람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인식입니다.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실험대상자에게 어떤 물체를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뇌를 컴퓨터로 PET 스캔했습니다.
그리고 뇌의 일정부분이 반응하는 것을 측정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게 한 뒤 똑같은 물체를 상상하게 했습니다.
대상자가 같은 물체를 상상하자 뇌의 같은 부분이 반응 했습니다.
마치 실제 눈으로 그 물체를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보는 것은 누구인가?
뇌인가?
눈인가?
그리고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가 뇌로 보는 것이 현실인가?
아니면 눈으로 보는 것이 현실인가?
그리고 뇌는 주위에서 보는 것과
뇌가 기억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부분의 뇌신경망이 반응했기 때문이죠.
이 실험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던집니다.
현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수많은 정보에 폭격당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정보들이 몸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이죠.
그것들은 우리의 오감을 통해 거르고 걸러져서 각 단계별로
정보를 걸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의식까지 올라오는 것들은 대부분 자기 보존을 위한 정보들입니다.
뇌는 초당 4천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중 단지 2천여 가지만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 2천여 가지의 정보들 대부분 몸과 주위환경
그리고 시간에 관환 것들입니다.
우리는 빙산의 일각만을 보며 살고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라는 빙산에서 낡은 부분만을 보는 것이입니다.
뇌가 4천억 개의 정보를 처리하고 그중 우리는 2천여 개만 인식한다면
현실은 뇌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뇌는 정보를 계속 받아내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통합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눈은 렌즈와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뇌 뒤의 테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카메라 테잎과 같습니다.
뇌가 볼 수 있다고 하는 것들만 뇌 안에서 저장해둔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이 카메라는 제 주위의 것들을 더 많이 봅니다.
왜냐하면 카메라는 반대의견이나 판단이 없기 때문이죠.
뇌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뿐입니다.
뇌가 볼 수 있다고 투영하는 것 이상을 볼 수 있을까요?
그런 식으로 뇌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들만 보는 것이죠.
우리의 삶은 늘 조건화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과 맞는 패턴만을 연결시킵니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 합니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하는 기관입니다.
우리는 항상 현실 속에서 결과를 창조해 냅니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거울에 비춰보고 난 뒤에 그것들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견고하고 거대한 갑판위에 살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정답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항상 관찰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 있게 하는 !
우리의 뇌가 인식하는 것들에 의해 한정되어 있습니다.
뇌는 우리에게 사물을 인식하고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레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거대한 환상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에 있는 것을 보기위해 외부로 나가는 길은 사라집니다.
우리의 뇌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과 뇌에서 일어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밖에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동떨어진 외부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멈추지 않는
전자단계의 흐름 엉킴이 중첩되는 결과에 좌우 합니다.
물질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다고 생각해온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물질을 궁극적으로 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원자나 분자 안은 대부분 이 공간이고 입자의 크기는 극히 작습니다.
나머지는 진공입니다.
입자는 항상 존재와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러면 소멸되었을 때 그 입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시간의 방향에는 신비라고 하는 거대한 신비가 존재합니다.
우주의 기본법칙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물리 법칙에서 사용하는
미래를 바라볼 때 쓰는 인식론적인 관점이
과거를 바라보는 관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주물리는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수수깨끼가 생깁니다.
왜 우리는 어떤 것은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과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오직 미래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는가 하는 것들...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원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공은 대부분 텅 비어있죠.
사실 우주는 대부분 텅 비어있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비어있고 물질은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에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없습니다.
우주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습니다.
원자를 살펴보죠.
우리는 원자를 딱딱한 공기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자는 중앙에 밀도가 높은 물질을 가진 작은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위는 전자가 무작위의 가능성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맞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밀도가 높다고 생각하는 원자핵 역시
전자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를 반복합니다.
이러한 비물질적인 물질들에 대해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구체화된 정보조각 같은 것입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입니다.
이 전자들은 충전이 돼서 닿기도 전에 다른 전자들을 밀어냅니다.
우리가 시간의 앞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의식의 경험에 불과 합니다.
우주원리에서의 우리는 시간을 거꾸로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항상 의식적으로 끝없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관찰하면 입자처럼 보이죠.
관찰하지 않을 때는 가능성의 파동이 존재하고
관찰할 때는 경험의 입자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견고한 것이라고 여기는 입자는 실제로 중첩되어 존재합니다.
가능한 위치가 펼쳐지고 입자는 한 순간 모든 위치에 존재합니다.
조사하는 순간 입자는 가능한 위치 중 하나로 고정됩니다.
중첩이란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
세포입자을 감싸는 전자가 선택할 때까지는
몸의 세계는 가능한 조각들로 존재한다는 것의 중첩입니다.
동시에 여러곳에 존재하던지
많은 가능성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들로 있고
그리고 하나를 선택해 다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물질은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주위의 사물을 내가 입력하거나
선택과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서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없애야 합니다. 대신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물질세계라 하더라도 의자,탁자, 방, 카페트, 카메라까지 포함해서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의식의 가능한 흐름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흐름에서 순간순간 선택해서
나의 실질적 경험이 구체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너무 중요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원자는 물질이 아니라 단지 경향일 뿐이기에....“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경험과는 별개로
세계가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것에 나의 경향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물을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관찰자로 가능성과 확률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관찰자란 무엇일까?
저는 관찰자를 몸속에있는 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계속의 귀신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껍데기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입니다.
그리고 의식은 주위를 관찰하고
몸은 온갖 종류의 감각기관으로 갖추고 주위의 신호들을 포착해 냅니다.
물은 4대 원소 중에 수용성이 가장 뛰어납니다.
물은 비 물리적인 현상에도 반응합니다.
생각이 어떻게 물 분자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는 대부분 알고 계시죠.
우리몸의 90%가 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매혹적인 이야기죠 놀랍지 않나요?
만일 물에 생각을 전하는 일들을 할 수 있다면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 보세요.
정말로 생각 하나만으로도 몸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실질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의지를 적어내려 가다가도 지워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그런 다음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합니다. 그래서
시간적 평균으로 보면 그 의지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결국 그 의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사실로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을 견고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현실에 갇혀버립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구체적이라면 분명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실제 현실을 바꿀 수도 없게되죠.
하지만 현실이 나의 가능성 즉 의식 자체의 가능성이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가 다가오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정할 수 있을까요?
고전적 사고관에서는 나는 어떤 것도 바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현실에서 어던 역할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나름대로 움직이는 물질적인 존재입니다.
결정적인 법칙에 의해서 말이죠.
그리고 수학은 주워진 환경 속에서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결정합니다.
경험자인 나는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수학이 어떤 것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취하는 여러 가능성을 알려줄 수도 있지만
네가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경험은 알려줄 수 없습니다.
내가 그 경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내가 나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폭탄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질책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
그리고 너의 인생이 왜 내 인생의 목적에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도대체 사물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현실의 경험 속으로 성공이란 생각이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나요?
생각의 본질이 존재하는 걸까요?
난 내가 실제라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현실의 시간선 위에서 우리가 선택하기 전 까지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하죠
우주학에는 우리 각자가 살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합니다.
거시적인 세계도 존재하고 세포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원자와 핵의 세계도 존재합니다.
이 세계들은 각자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그 세계들은 나름의 언어와 수학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 작은 세계가 아니라 각자가 모두 다른 세계입니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서로 보충해 줍니다.
왜냐하면, 저는 원자이기도 하고 세포이기도 하며 눈으로
보이는 생물학적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단지 다른 단계의 진실일 뿐입니다.
과학과 철학에 의해 밝혀진 가장 깊은 진실은 단일성이라는 기초적인 진실입니다.
현실의 가장 깊은 소립자적 단계에서는
여러분과 저는 글자 그대로 하나입니다.
깨달음이 나아갈 때 새롭게 바뀌는 이해들...
깨달음이 앞으로 나아갈 때, 세상에 대한 이해는 물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바뀐다는 것에 귀 기울이고 대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나
나의 목적과 방향 등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 물론 바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나와 주변의 관점이 달라질 것이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 관점이 더욱 폭넓어질 것입니다.
큰 맥락에서 바라보면,
세상은 내가 봉사하고 베풀기 위해 온 곳이며,
내가 운명적으로 만나서 알아보고 함께 참여하기로 한
내 이웃 친구 가족들과 재결합하기 위해 온 곳입니다.
세상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우주적으로 진실이기는 하지만,
현재 인류의 성장 단계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정의의 중요성을 알기에는 지나치게
생존적 만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내가 이제 막 이 개념을 파악하여
나의 관계나 이해 범위 안에서 체험할 때마저도,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파노라마 입니다.
즉 전에도 보거나.. 알 수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는 큰 시야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본질적으로 베푸는 곳입니다.
내가 베푸는 것을 통해 이것을 알죠.
세상은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곳이라는 것을.....
내가 결합하고 재결합하는 것으로 이것을 알지요.
내가 세상을 위해 저세상에서 선물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이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지만,
당신이 거창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착각하지 마세요.
실제로 우리의 역할은 매우 한정적일 것이며,
지극히 드문 상황에서만 주목과 찬사를 받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때 당신은 세상이 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어떤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입증하는 곳이 아니라,
인정이나 찬사를 받은 일 없이
남몰래 무대 뒤에서 일을 해내는 곳의 세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 그 신성이 세상에서 일하는 방식이며,
내가 삶에서 큰 목적과 방향을 체험하기 시작할 때
세상에서 일하는 법을 배울 방식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시작하기 전에는,
세상은 생존과 자아실현을 위한 곳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큰공동체라고 부르는
삶의 거대한 파노라마 속에서 진실과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큰 공동체에서는
깨달은자들이 어디서나 가능한 한 은밀하게 일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선물을 필요로 하고
받기로 운명 지어진 사람들에게 그 선물을 베풉니다.
깨달음은 큰공동체 거의 모든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지만
다만 큰공동체와 연루된 어려움과 시련에서 진보하여
자신을 격리한 극소수 사회에서만은 환영 합니다.
그 밖의 모든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환경·문화·윤리·믿음·기준이 어떤 특성이냐에 상관없이
깨달음은 대단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선물을 베풀고, 자신의 일을 수행 합니다.
깨달음은 큰공동체에서
각기 다른 사회의 특성에 맞게 독특한 표현을 찾지만,
깨달음의 목적과 운명은 항상 같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을 공유하기 위해 파견된
다른 여러 사람들과 재결합하여
세상에서 특정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명을 완수하고 나면,
몸은 정신이 의식을 찾기위해 움직이도록 도구
우리의 현시된 삶 너머에 있는 영적 가족에게 되돌아갈 것이며,
몸이 컴퓨터 본체라면 영은 기억장치 디스크 처럼,
거기에서 다음 임무를 준비할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없습니다. 오직 해야 할 일만 있으며,
이 일과 관련해서 오직 성공과 실패만 있습니다.
성공하면 당신은 계속 전진할 것이고,
실패하면
당신 자신과 당신의 영적 가족은 그 자리에서 지연될 것입니다.
실패가 항상 태만에서 오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주위 사정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실패에 비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삶의 목적,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닌
원래 정해진 목적을 찾는 일에서
성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것은 대단한 성취입니다.
이 성취는 다른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는 만족과 의미를 보장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비난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며,
심지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나는 어떤 것을 주기 위해 세상에 왔으며,
나의 선물에는 그 자체에 가야 할 곳이 담겨 있고
받기로 정해진 사람들이 있어 나는 이것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선물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으며,
선물을 얼마나 긴 시간에 걸쳐 줄 것인지는 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결과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당신이 결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최종 결과는 큰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큰 계획은 삶의 모든 활동과 사건을 미리 결정하지는 않지만,
그 대신 모든 삶과 삶의 진화를 위해 방향을 설정한다.
여기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지만,
마지막 결과는 적절한 시기에 최종적으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우리에게는 특정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저세상에 고향이 있으므로 베풀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은 우리의 생존에 대한 충동이나 자기만족에 대한 소망을 초월합니다.
이 목적은 이러한 다른 충동이나 소망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우리 삶에 더 중요한 초점과 더 높은 기준을 설정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베풀기 위해 온 당신에게 세상이란 무엇인가?
세상은 당신의 선물이 필요한 곳입니다.
당신의 선물은
특정 사람들에게 특정 시간에 특정 방식으로 베풀어져야 합니다.
이 선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며,
당신이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반드시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다.
사회은 때달음이 없는 곳이므로 지금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회는 갈등이 있는 곳입니다.
물질적 삶에서 표면에 나타난 모든 갈등 밑에는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저항하는 것 사이의 본질적인 투쟁이 있습니다.
이 투쟁은 개개인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이 투쟁은 깨달음 과 의지, 통합과 분리,
목적과 자기결정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이곳에 사명이 있어서 왔다는 것을 알고, 또 그 사명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채
성심성의껏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참으로 적습니다.
알려진 일이고 긴급한 일이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워 보이는 어떤 것에 자신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으로 적지만, 세상의 발전을 위해 그들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깨달음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면, 인류는 오래전에 사라졌을 것입니다.
인류에게 준 약속과 유산은 일반 대중이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활동으로 살아 유지됩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매우 다른 곳입니다.
세상의 환란은 기회이고, 세상의 갈등은 세상의 부름이며,
세상의 어려움과 재난은 세상의 조건입니다.
여기에 불평이나 비난이 없습니다.
오직 행해야 할 일만 있으며, 잠시 머무는 곳에서 베풀어야 할 큰 선물만 있습니다.
이런 이해는 인간의 도덕은 물론 큰공동체에 있는
모든 사회 문화의 예와지 도덕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그 적용 범위는 우주적이며,
어떤 상황에도 스며들어 그 상황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는 어느 사회든 그 사회의 제한과 제약에서 자유로우며,
깊은 자각 속에서 그런 목적을 지닌 사람 또한 자유롭습니다.
세상은 의미 없는 곳이 아니고, 절망적인 곳이 아니며, 사악한 곳이 아닙니다.
사회는 문제가 많은 곳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따르는 사람은 일하기 위해 이곳에 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통해
이 세상에 있는 이들과 저 공간에 있는 이들이 진보하기 때문입니다.
큰공동체 영성은 한 종족만을 위한 영성이 아니며, 많은 종족을 위한 영성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전 우주를 위한 영성입니다.
그래서 큰공동체 영성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을 요구합니다.
깨달음의 체험은 우주적이며, 모든 지역적 관습과 한계를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혜택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삶에서 영감의 근원입니다. 우리 삶의 신비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신비를 설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지 않으면 신비는 당신에게서 멀어질 것입니다.
당신의 목적을 규정짓지 마세요.
그러지 않으면 나의 목적은 나의 규정이 될 뿐입니다.
나의 기원과 운명을 안다고 주장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나는 스스로 직접적인 체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직접적인 체험이야말로 내면의 큰 지혜와 큰 힘에 접근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신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놓아두어 나의 가장 깊은 체험과 결합하게 하세요.
가장 큰 헌신으로 신비와 함께 있도록...
억제하지 말고 신비를 따르세요. 신비의 품 안에 계속 머무르게...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을 알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것이며,
모든 사람의 가슴에서 청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자유를 청하고, 실제 있는 그대로의 삶과 재결합을 청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큰공동체 영성은 모든 종교의 핵심이지만, 동시에 모든 종교를 초월합니다.
큰공동체 영성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지만,
동시에 영감에서 나온 모든 표현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큰공동체 영성은 나의 유산입니다.
우리가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큰 계획에 따라,
큰공동체 영성을 찾고 받아들이고 따르고 전해주는 나는 유산입니다.
당신의 역할은 작고 구체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세요.
당신의 역할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자아실현에 대한 나의 모든 계획에서 오히려 멀어지게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 역할은 당신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지 못할
삶의 큰 진리, 큰 이해, 큰 보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일은 없도록 지내세요.
세상이 완전한 곳이라면, 우리는 이곳에 올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런 마찰이나 갈등이 없이 조화롭게 돌아가는 곳이라면,
세상은 우리에게 적합한 곳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가장 고고한 측면에서부터 가장 저급한 측면까지
인간 상태의 모든 측면을 보여줍니다.
세상은 또한 큰공동체의 환경 안에서도 존재하는데,
이 부분은 이곳에서 거의 인식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당신이 일하는 곳이고, 베푸는 곳입니다.
세상에서의 기쁨은 작지만, 진짜입니다.
세상에서의 고통과 어려움은 크다. 사회는 당신이 찾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이 찾는 것을 저세상에서 올 때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우리의 큰 의문에 답해줄 수도 없고,
이곳에 사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머무는 큰 갈망을 채워줄 수도 없습니다.
큰 의문과 큰 갈망에는 다른 이해가 필요하며, 다른 어떤 것과 함께 머무르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깨달음은 큰공동체에 있는 모든 참된 종교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찾을 가능성이 있지만,
세상에 대한 이해나 사회 속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이해가 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허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변화가 아니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이 변화가 일어나도록 허용하고 지지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지지는 당신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드러나고,
당신이 배우는 것, 당신이 연습하는 것, 당신이 헌신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큰공동체 신학은 관념의 신학이 아니며, 체험과 관계의 신학입니다.
왜냐하면 체험과 관계는 참된 이해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전달하는 매개체이며,
이해가 긴 시간에 걸쳐 자리잡기 훨씬 전에
큰 깨달음을 전하고 구현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실제로 이해하는 데 몇 년이 걸릴 수 있는 것을 이미 체험했을지 모릅니다.
그대 자신의 경험에서 볼 때, 이 말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이해가 자리잡을 때까지 대단히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진정한 체험이 내면에서 일어나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대가 말하는 것이 모두 그대에게 완벽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그대는 여기서 하는 말을 듣고, 느끼고, 알 것입니다.
이 말들은 당신에게 매우 깊이 배어 있어 대단히 친숙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 말의 이면에 있는 의도와 힘 때문입니다.
진리는 알 수만 있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알 수만 있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알 수만 있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질계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기량과 실력이
그대에게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대의 삶에서 물질계의 목적·가치·의미를 이해할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큰공동체 영성을 배움으로써
상황·어려움·기회를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이 이처럼 삶을 재 지각할 때,
과거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이 대단히 분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거나 알지 못할 것들을 알 것이므로 좌절을 맛볼 것입니다.
이 좌절은 진실을 알 때 치르는 대가입니다.
이 좌절은그대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떼어놓습니다.
하지만 이 분리는 일시적이며,
그대 내면에서 큰 이해와 깨달음이 드러나는 것을 허용하도록
삶에서 자신의 위치를 바꿀 뿐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삶과 결합할 수 있고, 삶 속에서 결합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큰 정체성과 큰 목적을 발견하려면,
인간의 추측이나 친숙하고 안심되는 모든 관념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신비에서 그대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것이고,
이전과는 상당히 다르게 세상을 체험할 것입니다.
여기서 그대 내면에서 움직이는 실질적 원동력은 세상에서 자유로울 것이며,
그대 이 원동력으로 세상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극복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세상을 정복하지도 멀리하지도 않으며, 부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그대가 세상에서 자유를 찾았다는 뜻이며,
세상에서 그대의 자유는 아는 자유, 베푸는 자유, 결합하는 자유임을 뜻합니다.
즉, 당신의 습관이나 외적 삶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대 내면에서 지금 불타고 있고 그대의 재 지각 속에
지금 살아 있는 깊은 깨달음에 의해서 알고 베풀고 결합하는 자유를 뜻한다.
이 진리는 어느 행성, 어느 환경에서나 모두 진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큰공동체 영성에 해당하며,
그래서 이것이 전 우주적으로 적용됩니다.
인간의 진리 중에 우주적인 것이 얼마나 되는가요?
인간이 믿고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 진실로 우주적인 것이 얼마나 되는가요?
큰공동체에 있는 다양한 문화를 접해볼 수 있다면,
인간의 진리를 적용하는 데 얼마나 한계가 있으며,
인간의 진리가 얼마나 자기 확신에 차 있고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알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관, 인간의 윤리, 인간의 이점, 인간의 재능,
이 모든 것을 큰공동체에 적용하는 데 얼마나 제한적인지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우리 삶에 그만큼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큰공동체에서 살고 있고, 우리의 세상은 큰공동체에 있으며,
우리는 큰공동체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이제 큰공동체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삶의 큰 문턱, 즉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
보는 모든 것, 믿는 모든 것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문턱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큰공동체를 대비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안녕을 보장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큰공동체 영성을 배우고 체험함으로써
삶이 진화하는 현실 안에서 최대 가치를 얻어내고
가장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자리로 당신이 옮겨 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곳에서 목적의 달성입니다.
왜냐하면 지구의 큰공동체 진입에 참여하기 위해 세상에 왔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행하는 구체적인 활동들이
큰공동체 진입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든 그렇지 않아 보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우리는 이것을 지원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류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고, 인류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큰공동체의 큰 환경 안에서
대단히 유용하면서 심오한 이해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실질적인 분별력과 현명한 통찰력을 기르는 그대의 능력,
참된 결정과 큰 결합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대단히 깊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은 그대의 습관적인 생각,
세상의 조건화, 그대의 고통스러운 과거에 제약받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사람들 대부분이 아무 생각 없이 여전히 굳게 믿고 있는 가정들에조차
제약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대는
인류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인류에게 공헌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이 위치에서 보면, 세상은 베푸는 곳이며, 베풀기 위한 환경입니다.
세상은 영구적인 어떤 것을 베풀기 위한 일시적인 환경입니다.
이 환경에서 삶은 세상의 고통과 고난을 자신이 베풀어야 하는 상황의 일부로써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받아들임이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만약 세상이 우리의 큰 희망과 야망을 저버렸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이곳에서 베풀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세상이 인간의 큰 이상과 염원을 거부한 사악한 곳이라고 느낀다면,
어떻게 이곳에서 베풀 수 있겠습니까?
베풂은 이해와 받아들임에서 시작입니다.
이해가 없다면, 우리의 베풂에는 방향이 없으며,
받아들임이 없다면, 우리의 베풂은 삶에 공격이 됩니다.
내가 사람들을 공격한다면, 나는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치를 떨고, 실망하고, 좌절감을 느끼고, 적대적이고,
화를 내고, 참지 못한다면, 나는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주는 크고, 사람들은 작다. 깨달음은 크고 마음은 작다.
그대가 깨달음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이것들이 더욱더 명백해집니다.
깨달음은 사고방식의 전환이고, 세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며, 재능의 전환입니다.
지금까지 그대는 생존하는 법을 배웠고, 만족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축하합니다!
이제 그대는 깨달음을 배울 때가 되었고,
삶에 진실로 존재하는 대로 지혜의 길을 배울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부름이고, 도전입니다.
그대의 창작이 아닌 삶의 현실에 따라 깨달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진실로 참된 진리는 모두 우주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작은 진리는 어떤 조건 아래서 특정 상황에 적용되요.
하지만 이 것은 큰 진리며 우주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스며듭니다.
그러나 큰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현됩니다.
진리의 적용은 그 당시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진리를 체험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우주적입니다.
큰공동체에서 온 방문자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여기에 무슨 의도로 왔는지를 아는 유일한 길은
이처럼 진리와 깨달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스스로 마음이 이것을 알아내려면, 몇십 년, 심지어 몇백 년이 걸릴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몇십 년, 몇백 년에 걸쳐 이해할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에 온 목적을 알려면,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은 항상 큰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일하는 곳이고, 일을 즐기는 곳이며,
나 자신이 파견하여 승격하는 곳입니다.
인식과 이해에는 어떠한 속임수도 없을 것이며, 분명할 것입니다.
이것이 체험과 관계의 신학입니다.
이것에서 큰 이해와 큰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큰 체험이 적용될 수 있고 바르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을 때,
그 체험에서 큰 이해는 드러납니다.
큰공동체 영성은 큰 종교에 해당합니다.
그대는 우주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는 이 종교의 구성원입니다.
큰공동체 영성은 어느 한 행성의 관념·습관·의식에 묶이지 않는 종교이며,
특정 신이나 특정 인간, 특정 관념을 신앙해야 하는 것에 묶이지 않는 종교입니다.
큰공동체 영성은 창조주로 향하도록 당신을 인도합니다.
또한 당신과 창조주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물질 은하 넘어 우주와 그 너머 다중우주에 존재하는 큰 조직,
그리고 물질 세포는 미세분자로 연결되어 있는 속에서
우리 자신을 찾는 관계의 큰 조직으로 향하도록 인도합니다.
함께 봉사하기로 한 이들과 함께 체험하길...
무위경조
유적을 구성하는 퇴적층의 해석에 대한 방법론이 확립되고,
유물의 형태적 변화가 지닌 시간적 의미에 과학적 이해가 이루어져야한다.
암흑에너지의 힘 신성한 마음은
내안에 있는 물의 근원 세포이며 그 우주 유전자 마음 지성체로
세상에 봉사하고 베풀기 위해 온 곳이며,
그대가 운명적으로 만나서 알아보고 함께 참여하기로 한 사람들과
재결합하기 위해 온 곳입니다.
그 실현에는 거짓말적인 이 사회의 문제들 마음먹고 공부하는 것이며
받아들이는 장으로 용서와 수용을 격습니다.그렇게
반복하는 힘을 격어 진화된 고등인간이 되면
비로서 평화존재 1.7% 암흑물질 지성체는 빠르게 재 지각합니다.
부정적이면 우리의 뇌는 못하는 이유를 열심히 찾습니다.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어도 그쪽으로는 생각하지도 않고
할 수 없는 자료만 찾아냅니다.
그 결과 '안 된다', '불가능하다'고 확정합니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말부터 하면모든 문제는 '잘 풀립니다'
낙천적인 말로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고 나면
뇌는 차차 긍정적인 말을 찾으려고 하고 자신감이 솟아
자기도 모르게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노력하면 내가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다 합니다.
그렇게 이기고 보면
두려움이 물러날 뿐 아니라 생각이 뜻 대로 다 이루어 집니다.
덕은 인위적인 덕이 아닙니다.
최상의 덕은 덕을 의심하지 않음으로 덕이 있는 것이고
정도가 낮은 덕은 덕에 매여있기에 덕이 없는 것이다.
최상의 덕은 무위여서 자연스럽고
정도가 낮은 덕은 유위로서 부자연 스럽다.
인은 유위로 자연스럽고 의는 무위며 부자연 스럽습니다.
사회의 예는 유위이고 그 예는 반응이 없으면
팔을 걷어 붙이라고도 예을 든다.
무위자연의 도가 사라지면 무위자연의 덕이 나타나고
무위자연의 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데...
인위적인 의의 도덕이 사라지면
인위적인 예의 도덕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의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마음이 엷어진 것이며
세상이 어지럽게 되는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을 미리 내어보는 지식이란 것은
도의 알맹 없는 겉치레와 같은 것,
그러므로 참다운 사람은
예와 지를 버리고 도을 택하는 것입니다.
무위경조
가슴을 파고드는 비수
우리는 주저앉고 싶고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고통을 격어봐야 공부가 뭔지 압니다.
사는 일이 이런 것이라며 우리 곁을 스치는 것과 함께..
주어진 고통의 터널을 헤쳐 나오도록 일상은 락이고 복 입니다.
고난과 고통은 새로운 과정의 아름다움으로
몸을 시너지화 할 수 있으니
영이 머문자리 이 순간은 분명 약 입니다.
생활 속에서 용서와 수용과 배려가 공부되어 기쁨이 누려진다면...
나를 없애는 것에 철저히 죽일 수 있다는 결단이 진정한 용기 입니다.
죽은 세포가 새롭게 생성됨에 지성과 지혜가 열려
환영의 생존 그 육체는 신성을 찾기위한 도구 입니다.
우리 몸에 힘이 있듯이 마음에도 힘이 있습니다.
우리 몸은 음식으로 힘을 얻지만
마음은 생각으로 힘을 얻습니다.
좋은 생각은 마음의 힘이 됩니다.
사랑, 희망, 기쁨, 감사, 열정, 용기, 지혜, 정직,
용서는 마음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합니다.
하지만 미움, 거짓, 불평, 의심, 염려, 갈등, 후회는
마음을 약하게 하고 황폐하게 합니다.
마음의 힘에서 아름다움이 태어나고,
사랑에서 연민이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평화란?
싸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힘으로부터 생긴다 입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현실이라고 하는 사회에서의 부는 집착을 내리지 못한 것,
‘여유가 있는 것처럼 사는 완벽을 위한 거짓 인위의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뿐이지 실제로는 가난합니다.
몸이 추운 것은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마음이 추운 것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한때는 뼈를 녹일 것 같은 아픔이나 슬픔이 있을 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의 가치에서 지식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새 날들...
소망이 되는 최선이 공부의 과정이기에 소중합니다.
절망과 고통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숨쉬는 기쁨이 생이라 고난은 마련으로 유익합니다.
없던 것에 실체 나는
새롭게 숨쉬는 생명 실재로 돌아가다.
깨달음과 오르가즘은 둘 다 특별한 내적 경험,
깨달음과 오르가즘은
둘 다 특별한 내적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는 같다.
그러나 오르가즘이 그 사람의 내적 경험에 국한된 것임에 반해
깨달음은
그 사람의 내적 경험이 외부 행위로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누군가 정말 깨달았는 지 깨닫지 못했는 지는
그 사람의 말, 행위에서 자연스럽게 품어져 나오게 됩니다.
깨닫고 난 후에는 내가 인위적으로 하는 행동이 없다.
무위경조는 그냥 내 몸이 경험한 것들로 있는 물이며
그 물이 내 몸속에서 쏟아져 나오듯이 행동하게 된다.
깨달음이 그 사람에게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첫째는 자신의 에고 즉 틀려버린 사고들..
에고에 의해서 발생하는 엄청난 어리석음들....
그렇게 내 감정을 격화시키는 것 때문에 에너지가 급격하게 줄어듭니다.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나'라는 거짓된 용망을 방어하기 위해서
외부 상황에 지나치게 예민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많은 긴장을 하게 되고 돈과 명예 같은 것에 사로 잡혀 살게 되지만
깨닫고 나게 되면 진정한 나' 선함에 사랑이 충만해지고
다른 여러 욕망에 반응을 하는 대신
신성한 나의 내면이 꿈, 자신의 선한 에너지를 사용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깨달음은 진리 곳, 자연의 이해입니다.
근원적인 나! 그 신성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깊은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
신성으로 마음이며 신의 현원으로 영이 재임했다는 오르가즘을 맛보게 된다.
이 사회의 마이너스 에너지 그 성장 정체성,
그것에 상관없이 인간은 평등하고 소중한 신성이다.
십오 년전의 내 모습을 생각해 볼때 생각이 마음에 생생하게 피어나는 것,
그때는 없어서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것이 달랏던 시대였습니다.
내 의지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을 느낄때면 마음이 먼저 가난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부러운 것, 하고싶고 가지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시절 시대였습니다.
사회는 거짓적이다의 그 중심에 살다보면
인의' 그 인위적 유위만을 바라보도록 양육되는 슬픔 그 때는...
왜곡된 문화에 세뇌된 사회 안에서 폭력국가관 나라였으며
공동체이념에 따라 관념적 대물림 폭력시대였습니다.
부모, 선생님,등의 삶도 분리된 개체로써 틀려버린 삶을 격는 인생,
이처럼 자연 그 진실에 숨 쉬지 못하게 되면서..
누구도 저절로 보게 있는 "세상, 누구도 속이지 않는 세상을 가슴으로 발견 했습니다.
마음이 힘들면 죽는다는 착각의 굴래 그 세뇌 기억의 존재 그 때는
사회적 동물이 되어 그 세상을 바라보도록 그 잘못된 인식이
인위적 유위 그 예와 지의 사치가 중요했던 거긴 세상이 아닌 사회였습니다.
삶을 착각속에 살도록 조상의 대물림 왜곡문화 세뇌, 장이였습니다.
생은 도가 숨쉬는 영이며 그 지식으로 나의 발견은 내 안에 신성 “신‘입니다.
몸이 격는 것으로 없던 것의 실체 나는 보이는 것으로 영이 채워지기 위한 실체 신성입니다.
왜 ? 무식하면 삶은 고통 가운데 살게 되는 것일까요? 안타까운일 입니다.
나타낼 수 없어 방황하고 불안하여 저지르는 시간에 사는 것,
그 고통을 격도록 마련으로 있는 것이며 재 지각 되어서는 고락 입니다.
지각변동이 있어 격고 다시 지각하도록 나는 신성으로 지음인 것 입니다.
십오년전 저는 아내에게 버려졌고 이혼도 했습니다.
또 저의 아버지께서는 너같은 자식이 왜 태어났느냐며
미국으로 가던지 죽고 없어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버려져서야... 숨만 쉬고도 만족하는 배움이 시작 되였습니다.
이혼이 내 안에 성인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하게 고맙습니다.
악처을 만나게 되어 공자가 되고 소크라테스가 된 것처럼 말 입니다.
철없던 어린 시절 기억들 까지 이겨 냈기에 내 속이 나타납니다.
변화의 습관 나는 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 기도로..
그렇게 숨 쉬고서 내 몸의 기능이 작동하기시작 되면서
지각하는 일상이 생기고서야 제일먼저 생각나는 것,
삼십년전 자신을 찾으려 싸우다 돌아가신 어머님의 락이 보였습니다.
힘든 것도 참고 견디는 맛, 그 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이겨낸 삶을 보여준 이웃들의 모든 죽음이 스승으로 다가왔습니다.
모두 나 자신을 찾게 되는 정신으로 말 입니다.
내 속 돌보기 영이 살도록 혼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식하면 착하지 않다는 것,
철이 없어 거짓 가면을 쓰고 사회의 속임수에 안주하는 삶,
가족과 친구에게 의심과 부정, 그런 마음들 때문에 나에게 영이 없던 시절,
지나고 보니 하는 일마다 막다른 골목에서 무너지게 되는 절망이 다 마련으로 있었습니다.
다 이겨내도록 있는 좋은 아침, 점심, 저녁, 인데 말입니다.
낙엽이 보이고 글이 보이면서 자식들 생각이 간절 했습니다.
그 때서야 줄 것이 생겼습니다. 그 때서야 자식 볼 수있는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사회를 세상으로 착각하지 않는 발견 때문입니다.
그 때는 이미 거짓, 그 그릇된 꿈은 버렸다며 나타나고 싶었습니다.
성공이 아닌 성취 발명이 아닌 발견을 알려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면 죽는 것이 당연한줄 알고 사는 이유가 뭘까요?
그나마 저는 어린 시절 눈칫밥 먹고 자라면서 일찍이 외로움도
참고 넘기도록 안배했고 또 엄마 없는 애정결핍 때문에
여자 마음 살피고 들어주는 공부도 나눔으로 있어 결국 그 경험들의 락은
해안이 열려 낙엽이 보였고 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변화를 해야 하는 시간에 멈춰 섯고
눈만 뜨면 먹을 것은 저절로 있어 진리 그 맛을 누리는 고락에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없어진 자신감은 숨 쉬는 것으로 다있는 의식의 힘 나는 우주입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우는 과정, 속도가 아니라 방향
성공이 아니라 성취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또다른 십오년 후에 더 다른 나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해가 떠오릅니다.
사회가 아닌 세상을 보는 깨우침
생의 이순간 이찰나가 다 無에서 영이며 혼이다.
무(無)에서 기회와 재료와 씨를 제공 받아
불이 빛의 모체가 되는 것처럼,
無의 내면에 인해 숨 쉬는 평화가 바로 정신의 모체다.
나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며
우주라는 꿈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 듯 몸은 움직임을 여의는 매일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점심, 저녁,에 숨쉬는 영혼,
지구 의식의 시간에 돌아야 잠이 들고 편안한 생명체 우리입니다.
이토록 시간에 따라 긴장하는 것으로 지식 공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구가 숨 쉬는 지각변동 속에는
나에 대한 분리된 개체로써의 인의(인위) 유위만을 보라보게 산다면...!
'나'에대한 욕심이 남아 있는 한 "나'는 고통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의 실재 그 꿈으로 꿈의 핵심적 일부 "고락' 그 인생
생은 떨어져 있거나 우주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점차적으로 깨달아 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 앞에는 무위자연에 나그네라는 사실의 실체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있는 윤회안에서 몸은 우린 누구도 무위자연의 실체
혼이 있기에 도피할 수 있는 영은 없습니다.
백사십억년전 신성 그 별이 터져 우주가 나타난 세상,
사십오억년전 지구가 숨쉬기 시작하면서 신의 현원 우리는
수 억년 늘 매일 일을 격고 거두는 지각변동의 동화에 흘러왔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의 시간을 살아야하는 꿈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할까?
늘 진리를 맛보는 순간 순간이 좋아서 고통이 아닌 고락이라고...!
그 의식에 의해 숨을 쉬는 신의 개념 우리는
나의 경험이 발견으로 있어 해안이 열려야 지식 그 부자로 삽시다.
하여 나의 의식에 무엇이 채워져야 할까 하는 삶의 목적은
고통을 격는 경험으로 변화에 이르도록 계속있는 매일이 꿈입니다.
공부하는 일상을 고맙습니다 하는 나의 진실한 마음이 인격입니다.
몸은 결국 '의식이 나타나기 위한 도구이기에 찰나에 열려갑니다.
그래서 의식의 힘으로 부자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성한마음, 그 것으로 내 안에 종교입니다.
공동체을 섬기는 종교를 믿는 것은 안주하는 것으로 인의 즉 유위며
그 인위가 바로 에고인 것입니다.
착각의 대 물림, 세뇌된 고정관념 틀려버린 사고가 바로 에고인 것 입니다.
우린 또 다른 사람 그 성인을 위해 선량해 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나의 기능이 선량해지면 신들이 내 속에 있기 때문에
내 속의 성인을 위해 저절로 선량해 지는 것입니다.
나는 바로 미리있는 신성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신성 그 하나님(성인)은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
그 래서 신성함을 느끼는 나날로 지식이 늘어나게 의식의 힘, 입니다.
진리의 나날로 욕심을 줄이고 또 줄여 무위 입니다.
그 '도'의 깨우침에 이르면 무위로 하지 않아도 못함이 없습니다.
사회가 아닌 세상을 얻는 깨우침에 이르십시오.
다시는 거짓사회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거짓믿음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심적 도구인 몸이 저절로 영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투명한 시각을 갖게 되어야 깨어있는 의식의 본질,
천체, 광대한 암흑 공간 속까지 기체, 티끌, 성간 구름,
지구 우주 어디에나 유기분자는 풍부합니다.
몸은 마치 높은 전압에 노출된 것과 같아
우리는 그 속에 돌고 순환하도록 늘 문제가 일어나게 있어 시간이며
때문에 삶은 당연히 고통이 아닌 것 고락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눈이 오고 비가오고 번개가 치는 지구의 지각변동 속 그 어떤 날에도
일을 당하면 당할 수록 커지는 힘, 당하면 당할 수 룩 더 잘되는 의식 입니다.
그 처신이 경조(庚兆)하다에 무위 정신일도 하사불성이 됩니다.
사회의 거짓은 거짓으로, 비실재는 비실재로,
덧없는 것은 덧없는 것으로....
그러나 인간은 신성(神聖)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깨달은 자는 실제로 개별적 대상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심신 적 도구인 몸은 마음의 변화 발견 가운데 저절로
신성의 의식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깨닫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다시는 착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에 대한 기대가
"분리된 개체로써 인의" 인위 적 꿈의 사회만을 바라본다면
"그대'는 고통 가운데 있게 될 것 입니다.
진실에 절대로 적대시 하지마시기 바랍니다.
책에서 인간을 배우면 부정적인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게 되어
스스로 폭군이 되어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양심도 굴복하게 됩니다.
인격이 수양된 부자 그 진리를 맛 볼 수 없는 삶이란?
본래 신분을 거지라고 세뇌시켜 원치 않게
거지의 삶을 강요 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개인은 물론
민족전체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해를 몰고 가는 문제의 근원이 됩니다.
참 마음이 왜 어떻게 왜곡 조작되었는지 실상을 파헤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어떤 정신적 중병에 걸려 있는지 진단 해야합니다.
나아가 나의 참 마음을 확인함으로써,
모든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짓눌린 혼의 부활을 모색 해야합니다.
그러면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신성한 마음을 찾게되어
늘 하루, 자신감의 열정이 꽃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경험에 무엇이 채워져야 할까 하는 의식의 힘이 삶의 목적입니다.
의식보다 더 거대한 힘은 없으니 의식을 가지고 장난을친다면
뒤따라온 결과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비가 내려오는 것은 보이고 올라가는 것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태어나고 자라는 것은 보이나
죽어서 혼이 되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천심,부동하고 불변하는 본심, 하늘 별, 신성의 본질입니다.
머리 골에 빛을 통해 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지구가 숨쉬는 빙화기 그 개벽을 수 없이 넘습니다.
반복하는 아침, 점심, 저녁, 힘든 것을 격도록 시간이동 흐름
그 상대성속에 인간의 진화 입니다.
그래서 이기면 훌륭하다 하고 참고 기다림에 성숙합니다.
책에서 인간을 배우면 부정적인생각과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게 되어
스스로 폭군이 되어 자신을 부정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양심도 굴복하게 됩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입니다.
돈이란 것이 감정적으로 있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돈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깨어있지 못하기에
그래서 항시 돈의 영향 하에 있습니다.
돈과 연관된 모든 프로그램의 무의식적인 믿음에 의해 휘둘립니다.
너무 언짢은 것들만 보고 살고 있어
문제 그 답에 무감각하니
그래서 속이 상하다 못해 좌절하고 자포자기까지 합니다.
뭔가 중요한 해답을 주려해도 !
그져 저질러지는 인격으로 나 ! 저기 살아!!!!! 너나 그러셔 !
그저 캄캄한 날들만 지켜보며 오류 속에 있습니다.
돈만 더 많이 더 많이 쌓아올리고 있는 백만장자가 됩니다.
만족이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 거지요?
그것은 자신이 멈추어 서서 늘 일상이 정말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볼 기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행실만이 옳다고 여기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모욕을 참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비수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의 말이 아픈 곳을 낫게 하는 약이 되지요.
준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채워지는 이유가 뭘까요?
나누고 쓰고 없애서 나타나게 있는 일 그 채워짐 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계산된 허무이지만
빈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자유스러운 자유인가요?
공부가 오도록 있는 삶, 그 매일, 일하는 좋은습관이 열려가야 합니다.
학벌, 재산, 지위, 재주로 급수가 정해지는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세상보는 눈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급수는 드러납니다.
세상보는 눈은 傳授(전수)가 아니요 生成(생성)입니다.
정자 난자를 그려놓고 인간의 태초를 해설하나 공허하기 짝이 없듯이
세상보는 눈도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쁜 년이 바람나면 여러 사내 신세 망치 듯
유식한 놈에게 세상보는 눈이 잘못 박히면 여러 사람에게 해독을 끼치지 않나요.
세상이 시끄러운 게 어디 못 배운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요.
잘못 배운 놈들이 많아서 탈이지요.
왜 열심히 살아야 합니까? 보고 격을 것 많아서 아닌가요?나는 우주이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마지못해 열심히 산다고 답하면 하찮고 보잘것없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가 편집적으로 돈 또는 부의 다른 상징을 쫏는 이유가 내 안에 있는 나의 가치가
너무도 작아 보여 그 것을 보상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기심이 태도와 연관 되어있어 허영심과 거짓 자부심을 부르게 마련이지만,
나를 없애는 처신이 생기면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생물학적 기능 그 신성(神聖)의 독창적 가치, "무위자연'에 의한 성장
무위(無爲)의 “무(無)`는 없다는 것이며
”위(爲)’는 (위해서) 와 (대해서)의 의미를 갖습니다.
참 정신 우리’를 혼(魂)으로 표현하면 또 우리란 무엇일까?
어버이는 한민족의 정신이요 자신의 참 정신입니다.
만약 우리들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이 우리들에게
우리나라의 우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여야 할까?
진정한 우리란? 바로 '얼'이며 정신“혼, 아닌가?
만일 우리가 상징하는 정신의 혼이 사람들에게 없다면,
그 사람은 바른 사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혼(魂)이 없는 나라를 나라라 할 수도 있겠는가?
동이문명의 본산지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세계 인종의 씨앗 입니다.
단군시대 약 오천 년전 우리나라 한반도 남해 끝 동해 바다는
거대한 호수였고 빙하기가 끝나면서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갯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그렇게 갯벌이 형성되면서 바다 해수면이 점차 깊어지기 시작하자
우리라는 동이문명을 온 누리에 전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대 조상님들이 해양문명을 이루게 했답니다.
우리민족의 미래를 보려면 우리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 속에 우리 민족의 앞길이 숨어있습니다.
역사를 모르면 우리는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무위자연에 의한 깨우침" "의식의 힘" 신성 의식이
인간세상의 육체로부터 불리 되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성운(星雲)에 의한 무위자연 "기' 흐름
육천년 단군조상의 흔적 나는 누구며 역사는 무엇인가?
지난 세월 내가 삶을 외면하고 회피하고 살아온 것이지
세상은 나를 속이지 않았습니다.
기체, 티끌,성간 구름, 생물의 기본 물질은
우주 어디에나 있습니다.
성간운 유기분자 생물의 변이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주의 진화는 바로 이론이 아닌 현실,
시간에 반복하는 윤회, 지구도 별도 달도 사람도
그 대로 찍는 발견 나타난 것에 반복하는 찰나현상
지구에 환절기가 있고 빙하기가 있음이 무엇을 의미 합니까?
나타나고 터지는 파동이 있음에 성운 흐름에 따라
지구 지각이 변동하도록 잠을 자는 것에 개벽,
우주는 광대하고 무시무시하며 창조를 품고 거룩합니다.
하늘 신성 씨앗의 재임이란?
우리는 생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
마음이 평화롭다면 마치 고요하다 흐르는 물과 같다
바로 그것이다.
마음은 흐르면서도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흐른다.
'성주괴공, 그렇게 순환에 따라 이루어지고
머물다가 무너지는 공 만물이 같이 없어지고
나타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신성일체 하사불성의 균형,
생겨난 것은 목적에 대처하도록 신성에 말미암아
어버이를 공경하면 능히 정신이 극복하도록 처신이 경조하다.
이것을 생활에 체득하게 되면 하늘이 무너짐에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어 이가 곧 도(道)입니다.
무한존재' 씨앗에 있어야
무한대 사색[思索]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근본은 신성이고 그 마음이 신앙이니
따라서 죄는 죄가 아니요
저질러지는 결핍이고 영이 없어 귀신이다.
정신력에 신[神]의 씨앗 임재란?
진리를 맛보는 것에 정신일도 하사불성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무아(無我)라 그럽니다.
그대가 만약 나를 유심히 관찰하지만 내 안 어디에서도
'나'를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성함이 없으면 격고 경험하는 나를 비우는 경로에 없습니다.
나를 보고 또 보지만,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나'는 더욱더 자취를 감추고
'나'는 오직 그대가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에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오직 그대가 찾지 않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으니
그대가 찾는 순간 '나'는 사라져버립니다.
나는 섬과 같다는 생각과 느낌이 바로 에고입니다.
나의 숨이 계속 외부와 하나로 이어줍니다.
우리는 코로만 숨 쉬는 것이 아니며
신체의 모든 모공으로 숨을 쉬고 있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그 물은 우리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삶은 사상이 중요 합니다“
저질러져도 안주하려는 사람들에게 대한 질책 '종교타파,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나"는 "나 아님"의 모임인 이 사회가 정신에 세뇌되기에
석가부처가 처음 깨달음을 얻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
영혼 그 신성함의 길이 도며 그 마음이 종교라고
움직임을 여의는 생각의 힘을 키워야 "지각'할 수 있다고...
나누려 해도 나눔이 없고 비우려 해도 비워질 수 없는 삶,
그 통념적 관념 사고에 대한 질책 입니다.
지각(재생성) 하도록 나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나"의 신성함을 찾는 길이 도입니다.
내가 당신을 보고 당신이 나를 본다는 것은
두 개의 영혼이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삶을 본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볼 수 없다면 어루만짐을 줄 수 없습니다.
눈 맞춤은 오래 본다거나 뚫어지게 본다거나 노려보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든 격고 넘는 다양성의 경험으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잠재력 그 의식의 힘이 몸에 솟아야 합니다.
진리란? 경험의 실현성으로 해석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진리의 해석에 현실성이 빠져있다면 헛된 설교
즉 인위며 유위 종교인 것입니다.
경험적 철학은 사상입니다 현실과 유리된 학문이 아닙니다.
"삶은 사상이 중요 합니다“
용서가 받아들임의 다른 이름이라면
현재 자신의 삶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확히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여야만 용서가 가능합니다.
인위 그 마법에서 풀려나는 길은 하나 그것은 바로“무위(無爲)”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행함이 없이 머무는 과정,
조작으로 꾸미고 도모하는 일체가 쉬어 버리게 되는 것 입니다.
내가 지구 의식을 가졌다는 사실에 접속 하기위해서는
분별 식심을 동원하는 일들이 없어져야 했습니다.
부모, 선생님, 국가, 여러 공동체 범주가 일으키는 굴레에
속아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늘 일상이 깨우침입니다.
지구도 "의식을 가진 통치자로 지배자며 운영자 지구도
하늘의 음양으로 "기'가 솟는 자기장 현원 따라서
‘인간’이 늘 다시 태어나도 또 음양에 지음, 하늘과 나는 공유주파수,
보이는 몸이 전부가 아닌 다양성이 펼쳐지는 변화의 물질계입니다.
지구의 허상 저 넘어 나는 나를 사랑한다 ‘우주 실제시너지’
우주의 법칙은 자력과 같아 어두운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두운 기운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밝은 마음을 지니고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살면,
밝은 기운이 밀려와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춥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갈고 닦아 온 귀중한 정적을
방해 하게끔 감정을 들쑤시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르침은 세상을 향해 설교하거나 뭔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신성함에서 그저 조용히 인식하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스치는 것, 그 인연의 과정에
모든 문제는 언제나 행복의 문제로 숨쉬게 사람이지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지요.
세상에 태어나 처음 어머니, 아버지와 만남을 시작으로
형 누나, 동생 그리고 여러 공동체, 유치원, 국가, 선생님,
일가친척 직장, 그 속에서 만남은 경험이 되어 살아갑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을 인연, 혹은 필연이라 하지요.
마음의 정으로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 주고 싶어지게 마음
손수 만든 선물을 사랑하기에 주고 싶어지고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변화시키고도 싶어집니다.
또한 그 무엇에 대하여 나의 것을 포기하고도 싶어집니다.
사람이 큰 잘못을 하는 것은 어렵지만 살다 보면
우리는 서로 잘못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모든 자신에 대한 사랑은 경험하는 상대성 움직임에 의해 나타나고
때문에 사랑 그 신성이 자라납니다.
이 사회의 거짓 세뇌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분함으로 해석하지 않고 분노로 기꺼이 수용하고 질책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우주는 행복과 풍요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장 모순적인 것은...................
또한 이 세상이 고난과 빈곤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또 배우겠습니까?
이 세상이 '고'일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이 살아있고 흐르기 때문,
강물을 잡으려고 하면 그것이 '고'가 되고 그러나 강물과 함께 흐르자
그러면 강물은 즐거운 여행이 됩니다.
이 세상은 단지 배움터 입니다.
모든 상황과 행동은 소유와 생존의 관점에서 얻으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우리 가슴이 신음하기 때문입니다.
하므로 성취의 유일한 생각은 이 사회를 배움터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내가 맹목적으로 되기 때문에 나빠지는 것,
내가 욕망에 쓰여 지면그것은 사악한 것이며
내가 욕망을 쓰면 그것은 선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씨앗은 씨앗이라는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꽃 피우지만 때가 되면 꽃은 꽃이라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룩하고 얻은 그 어떤 것도 다시 우주 본래자리로 뺏어갑니다.
그러나 사랑한 것, 배운 것, 베푼 것 그것은 영원합니다.
생명이 빠진 모든 테크닉이 영혼을 잠들게 해서 해롭습니다.
그것은 때로 사악하기까지 합니다.
수많은 아픔을 통해 이제 서야 비로소 인생에서 중요한 것
"속도가 아니라 방향,
성공이 아니라 성취 의미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우기 위해 비우는 연속적 과정,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이 사회의 거짓은 거짓으로, 이 세상의비실재는 비실재로,
덧없는 것은 덧없는 것으로....
인간에게 위대한 스승은 고통입니다.
"원칙 없는 정치, "도덕이 없는 상업,"인간성 없는 과학,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노동이 없는 재산의 마술로
정신이 철들지 않으면
돈은 삶의 도구가 되지 않습니다.
돈이 마술을 부리니 인격이 없는 교육, 양심 없는 향락, 등
혼이 없는 역사..
족보 없는 사생아를 지어 냅니다.
욕망을 쫓는 탐욕의 정체성 때문에
다른 여러 사람까지 양심 그 믿음 이 없도록 물려 집니다.
지금 것 살아온 인위 굴래 유위에 세뇌된 조상의 문화로 부터
나를 지우려 해도 지우지 못하는 대물림...
부모, 선생님, 국가, 여러 공동체등
범주가 일으키는 굴레 학교가 수신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인위에 속아 살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깨우침 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이들은
진정 그들 자신만의 세계관의 포로임을 아는 데서 자비심이 생겨납니다.
무집착과 더불어, 세상이나 다른 이들의 관점을 바꾸려는...
또는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을 틀리게 만들려는 압박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지나간 일로 고민하지 않고 미래의 일로 걱정하지도 않아도,
깨달음에 대해 궁리하지 않아도
언제나 진리 상태로 신비롭기만 합니다.
아이의 뇌는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크기의 순백색 도화지와 같습니다.
어른이라면 고통을 참고 이겨낸 경험이 있어야 물려줄 것이 있습니다.
아이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 밝은 빛, 나의 신성함을 보여줄
스승의 능력에 있어야 어른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기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른이 배운 것 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라는 것으로 가르침입니다.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 그 신성이 믿음인 것을 모릅니다.
힘들면 무조건 어렵다 하고 나 몰라라 합니다.
고정관념 그대로 오류하며 이것이 인생이다 합니다.
늘 긍정 없는 그런 날로만 살기로 하지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 끝을 생각하지 않는 마음의 진실,
역경 속에 있으면 자기 주변이 모두 다 시금석이고,
약이라서 지기도 모르는 사이에 절조와 행실을 닦게 되며,
순경 속에 있으면 눈앞이 모두 칼과 창이라서
기름을 녹이고 뼈를 깎아도 알지 못한다 합니다.
"경험은 사상의 아들이고 사상은 행동의 아들입니다"
나'라는 인생의 자각은 어느 날인가 느껴지는 것이지
나의 의지로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는 나의 책임입니다.
잉태부터 생명은 현재 진행형,
호흡이 자동 조절되어 삶이 그냥 살아지는 것 같지만
생명의 끈은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가듯이
생명활동에 계속 힘을 더 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이나 운동을 하면 몸의 균형이 잡혀 심폐활동과 소화력이 왕성해 집니다.
팽이가 돌 때 계속 채찍질을 하면 생생하게 돕니다.
그러면 더 안정감 있게 가만히 있는 것 같지요.
우리는 열심히 일하다가도 어느 때는 다 놓고 놀고 싶어합니다.
아니 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 자주 봅니다.
쉰다는 것도 일 속에 있습니다.
인생은 멈출 수 없는 자전거와 같습니다. 멈추면 죽고 맙니다.
그래서 때에 따라 방향전향이 문제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의 리듬에 맞는 일과 마음이나 신체를 고루 쓸 수 있는 값진 일을 해야
건강이 유지되고 행복감, 진리를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일이 돈벌이라는 집착에만 서있게 되면
생전에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을 찾지 못하고 생을 마칠 수 있습니다.
가장 뜻있는 일 꼭 나'만이 할 수 있는 사명(使命)! 말입니다.
단언컨대 사명을 찾지 못하면 진정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진정한 짝을 찾는 것보다도 상위 개념입니다.
"휴식은 오직 고된 노동 '
일상에서 노동이 있어 신성이 채워진 복으로 무엇이든 생깁니다.
마음 챙김이 쓰이도록 변화도 노동이 있어야 합니다.
지구의 숨, 지각변동이 그렇기에 그렇습니다.
신성을 채우겠다는 신념 늘 덤으로 있는 '돈' 써야만하는 이유가
변화의 일상을 살아야 하는 목적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불행에 맥없이 추락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처음 겪어본 일이기에 그렇고 처음이니까 아픈 것 입니다.
더 많이 경험하도록 거짓말 적인 이 사회에서
내 가슴은 세상으로 받아드리는 아픔에서 성숙함 입니다.
지금 밑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진짜 밑바닥이 아닙니다.
휴식을 권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 말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휴식은 오직 고된 노동의 결과로 나타나니까요!
애고의 뜻으로 휴식은 안주하는 마음입니다.무위자연에 의해
숨이 찾아지는 것이 휴식입니다.
쉰다는 것에 대하여
살아가다보면
이래저래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 많다.
오늘도 집안 어른일을 도와야 하는 일이 갑자기 있다
크고 작은 일들이 터져서 계속 나를 바쁘게 만들지요
사람이 지치게 되면 쉬어야 합니다
문제는 진짜로 사람이 지치게 되면 쉬는 방법에 대해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미도 있는 드라마 연달아 보면 시간이 잘가고 세상일 잊게 됩니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한 휴식이란 몸과 마음을 깨어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지
몸과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쉬는 것이 아니다.
극단적인 걱정거리앞에서는 그런 방법도 처방이겠으나
대개 그런 휴식은
몸과 마음을 둔하게 만들고 점점 지치고 절망을 만듭니다.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머리속에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고
걱정거리는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술마시고 술을 마시면 자신이 주정뱅이라는 것을 잊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술이 깨면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술을 다시 마셔야 합니다.
이런 것은 반드시 술마시기라는 잘못된 휴식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것 같습니다.
진정한 휴식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것을 하는게 휴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일을 하는게 휴식입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근심만 늘고 지쳐갑니다.
어떤 때는............
집안 청소를 하거나 목욕을 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을 하는 것이 휴식이 되고
어떤 때는........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치거나
미뤄두었던 자잘한 숙제를 해치우는 것이 휴식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음악을 듣는 것이 휴식이지만
어떤 음악인가 하는 것은 그때 그때 틀린 것같습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를 만나야 휴식이 됩니다.
아이들이나 아내 같은 사람이나 친구 말입니다.
어떤 때는....... 혼자여야 휴식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식과 일을 객관적 자기 잣대로 말하기 어려운 것같습니다.
어떤 때는........ 마라톤을 하는 것도 분명 휴식이 될것입니다.
저의 체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세상 사는 법의 달인이 있다면
매순간 매시간 매일을 한시도 쉬지 않고 휴식할수 있는 사람이지요
'생활의 달인'은 그저 계속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쉬고 있을 뿐입니다.
충분히 쉬었을때 마음속에는 움직임을 여의는 올바른 매일이 있습니다.
늘 오늘에 어떤 습관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때 우리는 우왕좌왕합니다.
그저 어제나 그제했던 것을 반복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몸을 바쁘게 움직여 일을 했어도.....
해변에 누워 휴식을 하기도 하지만.................
그건 일을 하는 것도 아닌것이 되고 휴식을 하는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실은 도대체 나는 지금 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며
뭐가 중요한 것인지 길을 잃은 사람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쉰다는 것은 그래서 시간과 공간에서 분리된 독립된 하나의 행동이 아니고
하나의 연속된 춤동작 같은 것같습니다.
한 걸음을 제대로 걷고 한박자를 제대로 밟으면 다음 동작이 따라나옵니다.
반대로 한동작을 잘못하면 다음 동작도 잘못됩니다.
잘못이라는 느낌에 서두르다보면 점점더 엉망이 되곤 합니다.
뭔가 잃어버린 듯한 아쉬움이나 허전한 마음이 드는 것은
인생이 허무하고도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스트레스는 단순히 육체가
그것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암시일 뿐입니다.
스트레스는 육체가 그 어떤 문제와 싸울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일지라도 흥분하지 않으며
스트레스에 몰입해서 싸움을 위해 그것을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스트레스 그 엄청난 에너지는
나의 신성함을 소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여야 있는 힘!
그것에 우리는 투사고 전사입니다.
“즉시 고양되는 느낌,
그 것으로 경계심이나 긴장감을 챙긴다는 사실입니다.
반드시 그런 식으로 행동 하십시오...
그 마음으로 싸움을 벌이고, 또 경쟁하게 하지요.
우리가 일단 스트레스를 받아들이고 나면
스트레스를 에너지로서 활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엄청난 행복을 느낄 것입니다.
세상의 광대함에 비하면 몸의 스트레스는 너무나 하찮습니다.
도의 길은 하루하루를 채움으로 없애가는 것
없애고 또 없애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함이 없는 지경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아프도록 했던 것이 있었기에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에게 이 말을 전합니다.
각성을 이용하여 내 인연의 모든 분들과
진정한 인격의 가치를 세우는
가족이 되어 가겠습니다.
하늘 북두칠성 신명계 옥황의 메시지
나는 누구인가에 말한다.
칠성옥황(신성)의 시너지로 공동체
신성이 변화하도록 하늘이 보우하사
칠성신에게 제사를 지내야한다.
나는 이 없는 처신
무위(無爲)의 “무(無)`는 없다는 것이며
과거의 농업,공업시대
1:1 긍정의 각인이면
우주가 생성되기까지 디지털 세상계
나의 중심 시대 개벽에 복원되도록 희망의 통로
억지로 금을 긋는 고정관념은 없어졌다.
거짓에 세뇌되어 이기심에 처하고
신성함이 없으면 나를 볼수없다
벼랑끝에 나를 뛰어 내릴 수 있는 숨을 쉴 수없다.
인위가 말하는 예와 지는 바이러스다.
다양하게 보고 변화 할 수 있어야
지식의 생이 물려지는 부자다.
하늘의 마련이 매일에 있습니다.
보는대로 찍혀라 저절루있는 디지탈세상의 확인입니다.
대장이 전부였던 시대는 없어졌습니다.
돈으로 부자 될 수 있나요?
밤의 정막과 함께 개벽 기다림을 잊지마시기 바랍니다.
심오한 세상은 이미 없다.
그 경험들로 진리를 맛보도록 신성이 도와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