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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결론)/ 돌아온 탕자 : 영적으로 죽었다 살아난 자
누가복음 15장 11-32절(돌아온 탕자)에서, 큰아들은 율법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한다. 곧 하나님의 사정을 알지 못한다. 작은 아들(돌아온 탕자)은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대표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사정을 아신다. 곧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의 주인공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이렇게 묵상해 보자. 아버지를 떠나는 아들이 등장한다. 한 부유한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자애로우셨고, 집안의 종들까지도 풍족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성장한 둘째 아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씀은 귀찮게 들렸고 아버지의 존재가 자유를 속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은 아버지를 떠나는 것이었다. 아버지만 떠나면 자유가 있고, 아버지의 말씀만 없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아버지만 없으면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넘치도록 충족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쾌락과 방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아버지의 존재와 교훈은 귀찮고 방해하는 돌이었다. 욕구는 만족시켜야 할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없으면 방탕이 되고 자신을 결국 망칠 것임을 둘째 아들은 알지 못했다.
둘째 아들은 또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 둘째 아들은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졸랐다. 떠나기를 작정한 아들을 이길 수 있는 아버지는 없다. 여기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신속히 떠난다. 아들은 왜 그 좋은 아버지와 집을 떠났을까? 그가 영적으로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었으므로 아버지의 선하심을 보지 못했다. 영적 눈이 먼 사람은 육적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추하게 보이고, 하나님께서 추하게 보시는 것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는 영적 소경이다. 그는 영적으로 귀가 먹었으므로 아버지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씀이 싫었다. 그의 마음은 벌거벗었으나 그는 벗은 줄을 몰랐다. 어떻게 되겠는가? 신속히 아버지를 떠나가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하여 기록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이 시대의 많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부른다.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과 적대감이 죄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잘못한 일이 없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에 대한 적개심과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을 적대하는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을 신속히 떠나게 한다. 떠나는 발걸음은 둘째 아들이 보여주듯이 가볍고, 즐겁고, 행복하다. 그러나 그 발걸음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고, 덫에 잡히려고 달려가는 여우와도 같은 것임을 알지 못한다. 영적으로 죽어있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어이할꼬?
영적으로 무감각한 시체와 같은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영적으로 죽어있다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사망이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자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리라…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11:9-10, 13).
구하라? 여기서 구하는 것은 그저 맹숭맹숭 구하는 것이 아니다. 원문을 참조하면, 간절히, 열렬히 구하는 것을 말한다. 찾으라? 이것은 그냥 찾는 것이 아니다. 열심을 다하여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을 의미한다. 두드리라? 그것은 그저 두드리는 것이 아니다. 큰 쇠망치로 두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성령을 구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분명히 명심하라!
바울이 말했듯이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10). 우리는 목숨을 바쳐 성령을 구해야 한다. 왜 그런가? 성령은 무슨 일을 하실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를 때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롬8:26).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의 마음을 구하시고, 찾으시고 두드리신다. 성령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깨우는 일을 하신다. 영적으로 살려 회심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만이 영적 눈을 열리게 하고, 영적 귀를 뚫리게 하실 수 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지혜가 충만했던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어리석은 사람이 된 것과 같다. 하나님의 형상이 빛을 발했던 솔로몬이 우상 숭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다. 백성을 깊이 사랑했던 솔로몬이 백성을 핍박하는 자가 되었던 것과 같다.
탕자, 그는 아버지께 받은 것을 이미 모두 낭비한 상태다. 둘째 아들의 돈이 떨어지자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쾌락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안개와 같은 것임이 드러났다. 관능적 쾌락은 비참함의 민낯을 드러냈다. 달콤한 유혹의 말은 새빨간 거짓임이 명백해졌다. 그는 거지가 되었고, 돼지를 치는 사람이 되었다.
매일 돼지를 치면서 그가 깨닫게 된 것은 허무함과 비참함이었다. 벌거벗음이었다. 처참함이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은 때때로 비참한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자신이 한심하고 처참하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멀리 떠나오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인생의 노고는 다 헛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 아래 있다. 그리스의 시인들이 신이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참혹한 벌이 무엇일지를 생각했다. “인간에게 지옥 같은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과 같을까?”를 생각했다. 그리고 시지프스(Sisiphus)의 신화를 만들어 냈다.
시지프스는 신의 저주를 받았다. 그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산꼭대기는 뾰족하게 되어 있어서 고되게 밀고 올라간 바위는 다시 산비탈을 굴러 아래로 굴러가 버렸다. 시지프스는 죽을 힘을 다해 다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고 올라갔다. 바위는 다시 굴러떨어졌다. 그 일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하는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 헛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을 그리스의 시인들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의 신과 같은 분은 아니시지만 떠나간 자녀들에 대하여 분노하시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분노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와 같기 때문이다.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서 비참함과 처참함에 신음하고 있는데 분노하시지 않는다면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결과로 헛일을 끊임없이 하면서 일생을 낭비하는 것에서 자녀들을 구원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과실을 쓰지 못할 것이라”(신28:30).
내가 헛수고를 쉬지 않고 인생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온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죄의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말한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도다”(롬1:28). 오! 주 예수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 시대는 너무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온 시대다. 죄의 저주가 넓고 깊게 퍼지고 있는 시대다. 돼지를 치는 아들의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오직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곧 참된 회개에 있다. 회심에 있다. 아들이 떠난 뒤에 아버지는 얼마나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까? 밤잠을 제대로 주무셨을까? 밥 한술인들 편하게 드셨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실까? “예수님께서 힘써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더라”(눅22:44).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의 비참함과 처참함을 보고 영적 눈이 열려 아버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돌아오게 되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피땀 흘린 기도를 드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원의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았을까? 돼지우리에서 아들은 육의 눈의 껍질이 벗겨졌다. 영의 눈이 열린 것이다. 자신의 벌거벗음을 보았다. 아버지의 선함이 보였다. 아버지 집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속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진정한 자유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돼지우리에서 일어났다. 비참함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기를 결단했다. 나의 처참함과 비참을 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를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3:6-7).
아들은 육으로 난 사람이었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돼지우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돼지우리가 익숙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죄의 습관은 지구의 중력만큼이나 벗어나기가 힘들다. 일어나기도 어려운데 돌아가는 길이 쉽겠는가? 그 아들은 돼지우리에서 일어나고 주저앉기를 수백 번 반복했을 것이다.
산보다 무거운 죄책감과 독화살보다 지독한 정죄가 그를 얼마나 많이 주저앉혔겠는가? 회개는 어렵다. 회심은 힘이 든다. 죄와 죄책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두 발에 쇳덩이를 단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회심이다. 회개이다.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넘어져도 일으켜 세워서 돌아오는 발걸음을 다시 재촉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돌아오고자 하는 자를 돌아오게 하시는 데 실패가 없으시다. 그러니 결코 포기하지 말라! 날마다 아들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아버지는 어느 날 멀리서 걸어오는 아들을 보았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눅15:20).
아들은 느릿느릿 걸었으나 아버지는 달려가신다. “달려가”라는 단어와 “안고”라는 단어에 돌아오는 모든 자녀들의 의혹에 대한 답이 있다. 죄인은 죄책감의 무게와 정죄의 창에 찔려 상한 심령으로 힘들게 걸어오나, 하나님은 돌아오는 자에게 달려가신다. 누더기의 모습을 한 아들에게 사랑이 없으면 달려가시겠는가? 달려가서 안으시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하나다. 회심이다. 회개이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거듭남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품에 안겨 말했다. “아버지, 제가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저는 아들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22-24). 빛의 마술사로 불렸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는 ‘돌아온 탕자’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아버지의 눈을 시력을 상실한 것으로 그렸다. 아들을 너무나 그리워하여 날마다 울다가 실명한 것이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그와 같지 않겠는가? 아들은 떠날 때 명품 옷으로 치장하고 거들먹거리며 떠났을 것이다. 그 명품 옷은 육신의 누더기 옷이다. 교만과 자만의 옷이다. 위선의 옷이다.
하나님은 돌아온 자녀들의 누더기 옷을 벗기시고 그리스도의 의(義)의 옷으로 입히신다. 달려가 안으셔서 그의 모든 죄의 빚을 십자가의 희생으로 덮어주신다. 아들은 떠날 때 아들의 표시인 손의 가락지를 끼고 떠났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는 그 가락지를 팔아버렸다. 회심하여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들의 표시인 가락지를 끼우신다.
당시의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다. 아버지는 죄의 종으로 살았던 아들에게 신발을 신기신다. 그 힘들고 괴로웠던 돌아오는 길을 방해했던 아들의 죄책감은 달려오시는 아버지로 인하여 어깨에서 산을 내려놓은 듯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정죄로 괴로워했던 상한 심령은 아버지께서 안아주심으로 온전히 치유가 되었다.
바울은 선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롬8:1). 무슨 뜻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돌아오는 자에게 기쁨으로 거대한 파도처럼 달려 나가시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예수님은 돌아오는 자를 그 넓은 품으로 안으시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늘과 아버지께 지은 아들의 죄들의 빚은 십자가의 피로 다 갚아주셨다.
돌아오는 자가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다함없는 은혜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구원이다. 아들은 완전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 왜 그런가? 그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달려오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안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철저히 돌아가자.
그러면 넓은 팔을 벌리고 버선발로 달려 나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포근한 품에서 쉼을 얻으며 감사와 찬송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이 너무나 수상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이다. “롯의 때와 같으리니… 내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눅17:28-30).
정말 그런 시대가 되었다. 문자적으로 소돔의 시대가 내 곁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때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 지체하고, 우유부단한 그리스도인이 이 소돔의 시대를 살아 나갈 수 있을까? 소돔의 문제는 단지 나의 문제가 아니고 가족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고, 내 자녀들의 영원한 생명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명확하고 분명한 예수님의 말씀의 성취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회개하고 일어나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눅21:28). 일어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 소돔의 시대를 승리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그분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에 우리는 소돔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는 달려오시는 하나님, 안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기쁨과 찬양으로 소돔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주님의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주님를 앙망하는 자들은 주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돔은 멸망할 것이다. 죄가 끝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어둠이 깊으면 새벽이 가까움을 생각하고 이 소돔의 시대에 회개함으로 주님의 다가오시는 재림을 깊이 소망하기를 기도드린다.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돌아온 탕자를 안으시는 성령하나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