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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대의 재침례교회들
오메가하계세미나(2001.8.13.-14) Providence Baptist Ministries
제 1장: 카톨릭교는 이교도다!
카톨릭교는 하루 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결과로 발생한 것이다. 천주교의 기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세웠을 때 종교적인 세계의 형편을 알 필요가 있다. 두 개의 강력한 종교체제인 유대교와 이교신앙은 널리 퍼져있었다. 유대교는 유태인들의 종교로서, 그것은 의식들에 의한 구원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교신앙은 이방민족들의 종교로 많은 의식들과 많은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1882년판)의 첫 장에서 윌리암 존스(William Jones)는 이방인들의 종교들에 대해 논하면서 예수님 탄생시의 세계 상황을 말하고 있다. 그는 “여러 나라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타락한 천지만물의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 비록 만물의 근원이시오, 우주를 통제하는 교령집(decrees)이신 하나님은 완전히 사멸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비해 모든 이방민족의 일반신앙 즉, 만물은 신(gods) 이라고 불려지는 강력한 영혼들의 연합에 종속되어 있고, 행복과 번영하는 삶을 바라는 모든 사람이 섬겨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다는 일반신앙이 우세하다” 라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이방민족들의 주요 신들을 고대의 황제들, 왕들, 도시의 설립자들 또는 저명한 공훈자인 잘 알려진 영웅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이 인류에게 베푼 이점들은 그들을 신들의 대열에 올리고, 거룩한 명예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후손들의 감사의 마음에 의해 후대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고 오래 기억되었다” 라고 덧붙였다.
이교신앙(Paganism)
이교신앙이란 많은 신 즉 다신교를 믿는 것이다. 모든 이방민족들은 같은 신을 섬기지 않고, 각기 이름과 속성이 다른 그들 자신만의 신, 악령을 숭배하였다. 각 이방민족들은 가지각색의 신들을 가졌다. - 그리스인들은 그 수를 30,000으로 부풀렸다.
이교도들의 예배의 장소에 대해 죤스는 “사원, 신전의 이름아래 가장 화려하고 장대한 종류의 건물들은 신이 그들 자신이 직접 사는 장소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건축물로 만드는 것에 동의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대부분의 모든 나라 이교도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신전은 모든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개인적인 신앙심의 수양을 위해 일부에 제한되었다. 그러나 그곳의 내부에는 희생제물을 바치기 위해 필요한 장치와 제단을 설치하였고, 그들 신들의 형상으로 장식되어졌다.” 라고 쓰고 있다.
덧붙여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미신숭배에 관해 죤스는 “제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하루나 며칠 전부터 세속적인 즐거움을 삼감으로써 그들 자신을 준비하도록 요구되고, 사원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은 성수에 그들의 손을 적셔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유대교는 카톨릭교의 성장과 발전을 이해하는 것을 도와주는데 적합하다고 믿어져왔다. 왜냐하면 카톨릭 교회가 그 사악한 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유대교의 일부를 끌어갔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모든 다른 이방인들보다 많은 축복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이런 수많은 특별한 은혜를 열거함으로 그들에게 허락된 거룩한 계시, 즉 현재와 영원한 복락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성서를 중요히 강조했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시대의 그들의 종교는 이교도들의 종교보다 우세하지 못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고 깨달은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교는 근본적으로 도덕적인 제약이 부족한 의식들을 가진 종교였다.
죤스는 예수님 시대의 종교세계의 묘사에서 유대인들의 종교에 대해 명백한 증언을 했다. “유대종교의 본질은 구약성서에서 정리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시기에 유대교는 근본적인 미와 미덕을 잃어 버렸고, 다양한 자원들로부터 침투한 대부분의 극악한 종류의 실수에 의해 타락되었다. 하나님에 대한 대중의 숭배는 여전히 모세적 관습의식을 가진 예루살렘 성전에서 계속되었고, 그들의 향연은 정기적으로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집합을 이끌어 내는데 전혀 실패하지 않았고, 그런 계율을 지키는 것을 로마인들이 방해하는 것 또한 실패하지 않았다. 또한 일반적으로 가정에서도 율법의식이 어김없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제시한 증거에 따르면 수많은 의식들과 무미건조한 계율들, 심지어 성전에서의 의례조차도 이교민족의 종교적인 숭배에서 나왔고, 그것이 그들의 신성한 관습과 융합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게다가 수많은 잘못된 원리(principles)들, 이러한 대중적 속성 같은 미신들은 바빌론이나 갈데아의 구속으로부터 회귀했던 조상들이 가져왔거나 이웃인 그리스인, 시리아인 이집트인들을 따라 분별없는 군중에 의해 받아들여져 개인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그의 교회를 세우셨을때, 유대교와 이교신앙이 침투한 환경 안에 세우셨다. 대양에 둘러싸인 작은 섬같이 초대교회도 이런 강력한 힘을 가진 두 개의 종교적 체계에 둘러 쌓여 있었다. 이교신앙의 조수는 일찍이 많은 초대교회들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3세기 동안 종교의 대부분의 시대에서 약간의 기독교 신앙을 가미한 유대교와 이교신앙의 결합이상의 의미는 거의 없었다.
초기 잘못들
예수님은 절대로 그분의 교회들에게 무오류성(infallibility)을 약속하진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들이 잘못으로부터 절대적으로 보호받는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성서는 회중을 이끌어 주지만, 그들이 진리를 버리고 잘못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실패와 책임은 그들의 몫이었다. 사도서들에 의해 증명된 바로는 심지어 1세기에도 진리로부터의 이탈이 나타났다.
“2세기부터 4세기까지 우리는 진리로부터의 빠른 이탈을 발견한다. 많은 교회들은 설교자의 규칙과 성도들의 규칙을 버렸다. 로마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신앙의 힘을 원했고, (적어도 명목상으로) 그는 기독교인이었다. 통치자의 직권아래 많은 교회들도 A. D 313년에 통합되었고, 성직자 계급제도가 생겼다. 그러한 발전은 606년에 첫 번째 전세계의 교황인 보니파스(Boniface) 3세에 의해 정점에 달하여 시작되었다. 카톨릭의 관습은 길고 지루한 발전의 결과였고, 1세기에는 교회들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셰임(Mosheim), 1권, 92쪽에서 “고대의 교회들은 전체적으로 독립적이었다. 그들 중 어떤 교회도 외국의 사법권에 종속되지 않았으며 각각의 교회를 그들 자신의 규칙과 법률에 의해 지배했다. 비록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은 그들에게 다르고 의심스러운 경우에 충고를 받는 등으로 존경을 표하기는 했지만, 그들은 사법적인 권위나 다른 교회 위에 있는 우월성, 법률을 제정할 최소한의 권리도 갖지 못했다. 이에 반하여 초대 교회들 사이에서는 완전한 평등성을 가졌음이 명백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카톨릭교의 발전
카톨릭 교회가 발전해 왔다는 현세의 역사가들의 증언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역사교과서에서 교회(Church)라는 용어는 카톨릭 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이단자로 여겨졌다. 저자가 대학에서 공부한 교과서들 중 하나는 James Wesfall Thompson과 Edgar Nathaniel Johnson이 쓴 「중세유럽의 소개」였다. (W.W.Norton and Company Inc. Publishers, New york). 46쪽에서는 교회의 조직을 다루고 있는데, “서로 싸우는 작은 교파들로 분리될 위험을 피하고, 정통 이교신앙과의 싸움을 도와주고, 공공의 적의와 민중의 의심에 직면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로마사회로부터 분리하여 그의 신도들을 구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수련사를 지도하고 그 직무를 관리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은 강제적으로 조직을 개조했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유태인의 집회와 이교도의 종교적인 연합의 영향아래 있었으나 대부분은 로마의 정치적인 조직체의 영향아래 있었다. 카톨릭교의 장대한 개념은 시간과 상황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상상에 의해서는 실현되기 힘든 하나의 조직체, 하나의 신념, 하나의 의식 안에서 함께 결합되었다. ”
역사는 카톨릭 교회를 세우는데 “시간과 환경"을 고려한다고 확언하고 있고, 그래서 카톨릭 교회가 하나님의 양식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는 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것은 신도와 성직자 사이에 폭넓은 배도가 확립된 이교도의 신비 의식적인 예배의 영향아래 있었다. 카톨릭 주교의 계급아래 성직자 계급제도의 발전은 주로 4~5세기동안 이루어졌다. 그래서 카톨릭교 전체는 몇몇 역사가들이 “기독교 신앙을 밀어낸 교회”라고 말하는 이러한 조직체였다.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 계급제도의 성장과 발전에 따라서 다른 잘못들이 발생하였다.
이교신앙에 빠진 사람들과 카톨릭교회의 성경에서 침례의식이 죄를 씻어내는 마법 같은 힘을 가졌다고 자주 말한 이후로 자연스럽게 그것을 따라왔다. 이런 실수가 잇따르자 그것에서 탈피하고자 한 것이 초기의 침례였다. 4세기 전의 주교들은 교회회의에서 무엇이 정통파인지 결정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혹은 왜 이런 실수들이 생겼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주교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교회들은 입법부가 되었다. 전통이 성서보다 우선시 되었다.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교나 대중의 호소에 의해 많은 교리들이 결정되었다.
성장의 비밀
고도로 조직화 된 카톨릭 교회는 자신의 교리를 전파하고 교회를 심어나갔다. 카톨릭 교회는 주저 없이 승리로 나아갔다. 그 빠른 성장의 비밀은 무엇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카톨릭 교회는 자신에 대한 종교들을 없앰으로써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 교과서인 「중세유럽의 소개(An introduction to Medieval Europe)」(Thompson and Johnson 공저)의 33쪽에서 저자들은 이교신앙의 생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교신앙이 비록 도시에서 배척 당하고, 시골에 피난처를 찾아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어찌하여 사실 그것의 이름까지도 얻어냈지만, 명백히 분리된 종교로써의 이교신앙은 사라졌다고 말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전혀 소멸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변형되어서 기독교신앙 속으로 흡수된 것뿐이다. 기독교 신앙 중심의 다양한 표현 속에 이런 변형과 전통문화와의 병합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복합적인 지중해 문명 전체의 확실한 후계자로써 강력한 힘을 가지고 그것을 묵인한 기독교 신앙을 휩쓴 이유를 설명한다.”
흡수에 앞서 교회의 질에 관해 저자들은 같은 식으로 비평하였다.
“동양의 신비적인 의식과 경쟁하는 기독교 신앙은 스스로가 동양의 신비적인 의식화됨으로써 극복하였다.”
이런 식으로 카톨릭 기독교 신앙은 어느 정도까지 다신교화 되면서 스스로 그리스-로마식의 다신교를 극복하였다. 그 다신교는 순교자들과 성자 같은 고행한 영웅들의 헌신으로 이루어졌고, 지역의 기독교 성자들은 지역의 이교신들의 힘을 가졌다. 전에는 이교신들에 의해 치료되거나 누그러뜨려지거나 만족되었던 고통과 아픔, 공포와 희망이 이제는 그들의 카톨릭 기독교의 대리인에 의해 돌봐졌고 그들은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이교신앙의 선배들에게 특별한 예배의 날들을 바치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몇몇 카톨릭 기독교 성인들은 그들의 선배들의 바로 그 사원을 물려받기도 했다.
사례
597년에 교황 그레고리는 색슨족을 카톨릭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오스틴(Austin)을 영국에 선교사로 보냈다. 오스틴은 색슨족의 예배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도록 명령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매우 자유주의적 용어를 사용했지만 사람들을 침례로 구원받는다는 사상에 복종시켰다. John T. Christian(침례교도 주일학교 위원회 Texarkana, Ark.-Texas)의 「침례교도의 역사」1권 1179쪽에서는 이런 위험을 무릅쓴 임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이교사원들을 없애지 않았다. 단지 이교신들의 상들을 없애고 성수로 벽을 닦고, 제단을 세우고 그 안에 유물을 넣어서 기독교 교회로 변형시켰을 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자주 예배를 드렸던 익숙한 장소에서 설득되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 그레고리(Gregory)는 사람들이 변화에 놀라지 않도록 가능한 한 많이 이교신앙의 예배의식과 기독교의 예배의식을 조화시키라고 지시했다. 특히, 사람들이 전에는 악마의 영광을 위해 했던 것과 같이 어떤 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많은 수의 수소들을 죽이고 먹을 수 있도록 기독교의 변환을 허락하도록 했다.”
현세 역사의 놀라운 진술은 이미 말해졌던 많은 부분을 요약하고 있다.
“중세유럽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어떤 일탈도 묵인하지 않는 것으로써 하나의 종교의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라고 부르는 그 종교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이방인의 이교신앙이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새로운 예배의식에 통합되었는지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에서 예수님만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대부분 새로운 종교, 이교 신앙화된 기독교에 속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일부의 주장처럼 기독교화된 이교도에 속한 것이다.(「중세유럽의 소개」, by Thompson and Johnson , 674p)
이교도의 교리와 음모
카톨릭 교회의 많은 교리들과 음모들의 기원 안에 이교신앙이 있다는 것은 매우 명백하다. 451년에 칼케돈 총회의에서(the Council of Chalcedon) 카톨릭 교회의 교리로써 극단적 성모마리아 숭배사상이 세워졌다. 이교사상의 영향아래서 또 다른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중보자는 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중보자는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시라”(딤전 2:5) 중요한 중보자로써 추가된 마리아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모습으로 많은 다른 중보자들이 있었다.
순례여행과 유물숭배는 이교사상으로부터 빌려온 것들이다. 4세기의 로마제국의 황후이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성 헬레나는(Saint Helena) 예수님을 못 박았던 진짜 십자가의 조각을 발견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순례여행을 하였다. 6세기에는 그것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과 유물에 대한 믿음이 널리 전파되었다. 오늘날 유물은 카톨릭 종교의 필수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성서의 침묵과 역사가들의 증언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이교사상에서 나온 유물 숭배를 분명하게 만들었다.
카톨릭교의 기도들 중 매우 중요한 묵주의 기도(The Rosary)는 그 기원이 고대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모든 이교민족들 사이에서 매우 보편적이다. 그것은 힌두교의 신성한 책들과 관계 있다. 인도의 회교시대의 브라만들은 묵주의 기도를 오랫동안 써 왔다. 그것은 불교를 믿는 신자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일이었다. 그것의 기원과 쓰임을 보면 그것은 이교도적이다. 성경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기도를 돕기 위해 묵주의 기도를 사용하라는 암시를 조금도 하지 않았다.
연옥의 교리도 그 기원상 이교도적이다. 로마의 시인 버질(Virgil BC70~19)이 연옥을 쓴 것은 카톨릭교가 그것을 가르치기 오래 전부터 이교도가 그것을 믿어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연옥이 기독교사상이라면, 그것은 성경에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13세기까지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가 아니었던 변화(Transubstantiation)는 이교도적이다. 이 카톨릭교의 교리는 사제가 축복할 때 빵과 포도주가 예수의 진짜 살과 피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자정미사를(미사는 카톨릭예배의 중심이다) 봐왔고, 전체적인 의식에는 이교사상과 유대교의 낌새가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아름다운 의식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나 다른 이들에게는 그것이 이교도의 산제물과 이교도의 신비주의적 예배를 생각나게 하였다. 만약 변화의 교리가 기독교적이었다면 왜 교회는 1세기에는 그것을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종종 헌신하는 카톨릭교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십자가의 표식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이교도로부터 나온 것이다. 실제로 현재 로마의 신자들에 의해 쓰여지는 같은 표식은 예수님이 나무에 못 박히기 이전에 바빌로니아 신비주의에서 쓰여졌다!
1870년까지 선언되지 않았던 교황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은 기독교의 교리가 될 수 없다. 많은 역사가들은 카톨릭 추기경단과 교황의 권력에 대한 생각이 분명히 초기 시대 때부터 로마에 있어왔던 이교도의 최고권자 퐁티프와 그 주교단으로부터 나왔고 바빌론의 진짜 퐁티프 위원회를 위해 짜 맞춰져야만 했다고 믿는다. 교황의 무오류성은 세 교황들, 우르반 Ⅵ, 클레멘트 Ⅶ, 알렉산더 Ⅴ가 하나로 일치됨을 볼 때 실로 이교도적이다!
카톨릭교가 가르친 구원의 방법도 이교도적이다. 그것은 행위에 의한 구원의 방법이다. 로마의 교회처럼 선한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치는데 주력했던 교회는 세상에 없다. 그것은 이교도적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인 것이다. 에베소서 2 : 8~9에는(카톨릭 번역)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더 이교도 적인 것들
성경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검증해볼 때, 카톨릭교는 기독교라기 보다 이교도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 조직에서 기독교라고 불리는 것은 이교도와 유대교의 오래된 신전 위에 얇은 박판을 붙인 것이다.
새뮤얼 몰랜드(Samuel Morland)는 1658년에 「피에드몽(Piedmont) 계곡의 복음교회사」를 썼다. 서문에서 그는 고대 카톨릭 교회에 대하여 썼다.
“사실 나는 그들(카톨릭 교회)이 일종의 오래된 그들의 종교를 위한 전통에 도전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그들 전통의 많은 부분이 수백만의 불쌍한 영혼들을 현혹시키려고 세상에서 오랫동안 실행되어 왔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기브온 거민들의 교활함보다도 더 휼륭한 표현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속이고, 자기들이 매우 먼 나라로부터 왔다고 믿게하고자 계획했을 때, 그들은 교활하게 작업하였고, 그들이 사신인 것처럼 행세하여,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히여,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고 말하였다.(수9장) 그래서 나는 이 기브온적인 카톨릭교도들은 오래된 유대 의식의 가방을 메고, 이교 신앙의 낡은 신을 신고, 아리안 이단의 마르고 곰팡이난 빵들이 뒤섞인 종교를 만들어 냈다. 이제 결국 그들은 날마다 늘어나는 개종자를 얻었고, 확신있는 척하지만, 실로 이런 유전들이 한 낯의 빛처럼 분명히 반대되는 것임에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로부터 나왔다고 기꺼이 우리를 믿게 만들었다.”
이방인의 종교는 그리스도인 세계 속으로 전진하여 그녀의 겉옷을 변화시키기 위해 순간적으로 멈춰 섰고, 그리고 나서 기독교 신앙을 가장하여 계속 전진하였다.
“옷이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기독교 신앙처럼 옷 입었다는 것이 카톨릭교를 진리의 교회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대중들은 카톨릭교가 주의 종교를 신봉해 왔다는 잘못된 생각을 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가? 진실한 기독교신앙은, 결과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지배를 낳는 이교신앙을 임신한 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앞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구원은 성경의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음이라.” (행 4:12)
제 2장: 재침례교도와 종교개혁
제목 그 자체는 이 글의 외부적 한계를 제한하고 있다. 현재 서양문명의 모습에 따른 명백하게 영구적인 종교적, 정치적 영향력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을 일으켜 연합된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힘들은 그것들이 주제에 영향을 주는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흥미로울 것이다. 이 장은 단지 침례교회들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종교개혁자체에 관심이 있다.
세속의 역사학자들은 겨우 증거를 뒤로 흘끗 보고, 보편적으로 모든 기독교 교회들을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로 분류하려고 해왔다. 분류의 방법은 그것이 명확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카톨릭 교회의 역사가들을 따라왔다. 이용가능한 역사적인 자료나 정확한 계산을 알지 못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역사가들도 같은 절차를 따라왔다. 상당수의 침례교도들도 그들 교파의 모체로써 종교개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하는 경우가 없었다.
반면에, 많은 재침례교도들은 그들의 교회가 종교개혁에 의한 것이 아니고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나오는 세상에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목자로서의 기간동안 예수님에 의해 세워진 영적인 후예라고 주장하는 교회사에 대해 뚜렷이 대조되는 시각을 가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답을 필요로 하는 3가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⑴ 침례교도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파인가? ⑵ 만약 그렇다면, 어떤 역사적 기준에 의해 그렇게 분류되었는가? ⑶ 결과적으로 침례교도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파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교회로써 신약 성경에서 묘사되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인가? 따라서 이 글의 영역은 이러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수반한다.
무엇이 프로테스탄트인가?
기독교역사라는 주제에대해 말하거나 쓰는 사람들이 그 용어,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트 교파같은 용어들을 정확하게 정의내리는데 계속해서 실패해왔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발생했다. 그 용어들이 언어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되지 못했다면, 종교개혁과 연관된 침례교 문제는 의미론적인 면에서 쓸데없는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침례교도가 프로테스탄트냐 아니냐 하는 역사적인 결론을 말한다면, 그때 우리는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트 교파라는 용어들의 실질적인 정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용어의 두 개의 권위 있는 역사적 정의를 내려준 모건 패터슨 박사에게 영원히 빚을 진 것이다. 패터슨(Patterson) 박사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가 정확한 역사적 정의와 명확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의 의미와 적용은 다양하다. 그것은 1529년에 Diet of Speier(스피에르 회의)에서 카톨릭 대다수에 반대하는 독일 귀족집단에 의해 최초로 사용되었다. 카톨릭교의 어떤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 루터파 소수들은 ‘protest(항의, 항거하다)’라는 연설문을 기안하였고, 그것이 ‘protesters'(반항자들)혹은protestants'(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중한 문맥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둘째로, 그 단어의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루터파들로 한정될 수 있다. 그것은 16세기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지지자들이었다.
재 침례교도가 프로테스탄트인가?
질문에서 벗어나서 침례교도들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프로테스탄트였는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용어의 역사적인 정의에서는 확실히 아니다. 패터슨 박사는 그 용어는 역사적으로 위튼버그 대학교회의 문에 루터의 95가지 “반박문”을 못박는 것부터 시작하여 약 1530년에 루터파 교회를 조직하기까지 로마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마틴 루터 혁명을 지지했던 독일 왕자들에게 적용된다고 말했다. 그의 ‘protest 혁명’을 지지했던 독일 통치자들은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렸다. 만약 침례교도들이 역사적인 단어의 의미 안에서 “프로테스탄트”였다면, 그들은 루터파로 불렸어야 할 것이다. 1964년에 침례교도들과 루터파들의 진리와 이론 사이의 너무나 뚜렷히 상반되는 것이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우스운 것이였다.
침례교도라는 단어는 오직 한 가지 의미에서만 “프로테스탄트”로 분류될 수도 있다. 다음은 패터슨 박사의 말이다.
“그 역사가가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가 미국과 유럽에서 기독교 사상의 발전을 연구할 때, 그는 두개의 커다란 전통을 분별할 수 있는데: 카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가 그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정신의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일반적인 용어로 구별하는 편리한 방법이다. 이러한 구분에서 침례교도가 어디에 속할지는 자명하다.”
만약 “프로테스탄트”와 “프로테스탄트 교파”라는 용어가 이렇게 정의된다면, 침례교도들은 실제로 프로테스탄트일 것이다. 종교 개혁전의 수세기 동안 그들은 로마의 종교적인 난폭과 그 폐해에 “저항”해 왔던 것이다.
종교 개혁전의 침례 프로테스탄트들
1. 노바티안 교회들(The Novatain Churches)
어떤 사실들은 확실한 진리로 간주될 정도로 자명하다. 역사를 건성으로 공부하는 어떤 학생이라도 제국의 정치적 수도였던 로마가 점차 기독교의 중요한 중심이 되었다는 것은 알 것이다.
로마에 있던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기원과 교리, 실행상 신약 성서의 한 교회였음은 확실하다. 이것 역시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바울이 이 교회로 로마서를 쓰지 않았거나 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약 성서의 기원에 충분한 주석을 달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A. D. 251년에 로마에서 카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의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고 거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 때 당시 로마 교회는 교회 사제직분을 놓고 두 후보자들을 옹호하여 파벌이 나누어져 있었다. 코넬리우스(Cornelius)파가 우세했고, 그가 선출되었다. 그 결과 노바티안의 지지자들은 로마 교회에서 축소되었다. (침례교 역사, John T. Christian 저, Broadman 인쇄, 1922, 44쪽)
노바티안의 항거는 ,단지 2차적 의미로, 교리적인 탈선에 반대하여 인도되었다. 우선, 그것은 느슨한 규율의 수행에 대항하는 항의였고, 로마 교회의 도덕적인 부패의 성장에 대항하는 항거였다. (간략한 침례교 역사, G.H.Orchard, Ashland Avenue Baptists Church, Lexington, Kentucky, 재판, 1956, 53 ~ 57쪽)
노바티안의 항거는 광범위하게 퍼졌고, 영구히 지속되는 결과에 이르렀다. 노바티안 교리에 대해, 역사가 죤 크리스회안(John T. Christian)은 말했다:
“노바티안은 그의 항거에서 많은 교회들과 성직자들을 움직였다. 광범위의 노바티안 운동은 로마 제국이 번성했던 당시 로마 제국의 여러 부분들과, 그에게 반대하는 글을 썼던 저자들에게서 살펴볼 수 있다.”(Christian, John, 침례교의 역사, 1권, 44쪽, Broadman 인쇄)
그 용어가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저항(protest)”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노바티안 교회들이 “프로테스탄트”였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 이제 용어의 역사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용어의 역사적인 의미에서 노바티안 교회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라고 불릴 수 없는 몇 가지 자명한 이유들이 있다.
(1) 명백한 항거로써의 노바티안 운동은 A. D. 251년에 시작되었고, 종교 개혁은 마틴 루터에 의해 1517년에 시작되었다.
(2) 노바티안 교회는 종교 개혁에서 분리된 교파로써 그들의 시작 연대를 정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 교회의 구성원으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교파이름을 얻었다. 로마교회는 16세기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사도 바울의 생애 동안 조직되었다.
(3) 그들의 교리와 관계하여 노바티안 교회는 프로테스탄트보다는 훨씬 더 침례교적이다. 이것은 침례를 지지하는 그들의 방침을 참고하면 확실히 증명된다.
그 방침에 따르면, 오챠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노바티안은 모든 인간의 첨가물들을 없애기 위해서 지지자들에게 말했다 ‘만약 너희가 성결한 신자이고, 죄에 대항하는 우리의 연합을 계승하려면, 너희는 침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에게 인정받아야하며, 그렇지 않고 만약 너희가 전에 카톨릭에서 침례받았다면, 너희는 재침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사이에서 인정될 것이다.’” (Orchard, 같은 책, 55쪽)
오챠드의 말에서 노바티안들은 오직 믿는 자에게만 침례를 행하였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이 침례교의 특성이다. 또한 노바티안들이 카톨릭교의 신앙을 버리고 그들에게 온 추종자들을 재침례했다는 것도 명백하게 추론된다. 이런 특징들로 보아 그들이 역사적인 프로테스탄트이기보다는 재침례교도이지 않겠는가?
(4) 그들의 실행과 관계하여 노바티안 교회들은 역사적 프로테스탄트이기보다는 훨씬 더 침례교적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크리스핀(Cryspin)은 그들이 또 다른 저항 집단인 도나티스트(Donatists)와 공통으로 다음과 같은 실행을 하였다고 말했다.
“그들 둘 다 장로들, 주교들, 종교회의들의 반-크리스쳔적 침해에 대항하여 개별교회들의 권력과 권리, 특권들을 옹호하였다.” (침례교의 계승에서 인용, D.B. Bay저, The E3ng's 인쇄, Rosemead, 캘리포니아, 1949년 198쪽)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분명히 침례교의 특성이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의 특성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만약 크리스핀(Cryspin)의 주장이 노바티안들이 분명히 실제로 침례교도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증명하겠는가?
노바티안 교회가 종교 개혁 때까지 지속되었다는 전제에대해 인상적인 역사적 근거가 있다.
“이런 교회들은 6세기동안 기독교 전체의 많은 부분에서 번성을 지속했다. 로빈슨 박사(Dr. Robinson)는 재침례교도 운동의 생성과 종교 개혁 때까지의 그들의 지속을 조사하고 있다. 그는 ‘노바티안의 사례를 따르는 다수가 있었고, 제국 전체의 청교도 교회들은 200년 동안 계속적으로 조직되고 번창하였다. 그 후 형법이 그들에게 구석으로 숨을 것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강요하자 그들은 다양한 이름들에 의해 구분되었고, 종교 개혁 때까지 그들은 계속 이어졌다.'라고 말한다” (Christian, 같은 책 44 ~ 45쪽)
사려깊은 독자라면 이러한 역사적 근거의 인용으로부터 추론되는 명백한 결론들을 오랫동안 숙고할 것이다. 그것은 로마 교회에 대항하는 저항에서 시작된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 개혁 때까지 지속해온 저항 운동을 말한다. 노바티안 교회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침례교 개혁자들 이였다.
2. 파울시안스 교회(The Paulician Churches)
파울시안스(The Paulician) 교회들의 역사는 침례교도의 “저항(Protest)”과 침례교 교리, 실천이 종교 개혁보다 수세기 먼저 일어났다는 한층더 깊은 증거를 제공한다.
이 교회들이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인 집착 때문에 그들의 적에 의해서 파울시안스(Paulicians)라고 불려진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침례교의 역사, John T. Christian, Broadman인쇄, 1922, 50쪽)
사학자 오챠드는 이 교회가 약 653년에 동방에 알려졌다고 말한다. (간략한 침례교 역사, 같은 책 127쪽) 만약 그들이 드러난 해가 그들이 생긴 때였다면, 그것은 유럽에서 루터의 혁명 시작 거의 900년 전의 아르메니아(Armenia)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울시안스가 7세기보다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거의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 사도 시대의 기원임을 주장했다. 크리스티안은 한 파울시안 저자가 쓴 고서인 「진리의 열쇠」에서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거룩한 교회에 겸손히 복종하고,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믿음으로 행동하고 우리를 가르치는 그들의 사역들을 따르자.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귀중한 신비를 유일한 적당한 때, 즉 회개와 믿음의 때에만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우주만물의 주님과 사도교회에 배웠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나아간다: 그리고 (그때까지) 거룩한 침례를 갖고있지 않은(즉, 침례를 받지못한 라틴족, 그리스인, 아르마니아인들)자들 ;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맛보지 않고, 거룩한 보혈을 마시지 않은 그들을 완전한 믿음 안에 세운다. 그러므로 주의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들을 믿음으로 이끌고, 그들이 회개토록 하고, 그것을 주어야만 한다.” (침례교의 역사, 같은 책, 49쪽)
파울시안이 사도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주장이 그들이 실제로 그러한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관찰된다면, 부정하는 것이 그들이 신약 교회의 직접적인 계승하에 서있었다는 그들 자신들의 주장을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관찰되어야 한다.
저명한 역사가 기본(Gibbon)은 Paulician이 신약성경 계승자라고 주장하였다.
“안디옥(Antioch)과 팔마라를 통해 믿음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로 전파되었을 것이고, 그것이 아라랏(Ararat)산까지 타루스 산맥을 통해 전파되었듯이, 그 지역들이 신앙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초기 형태였다. 타루스 산맥의 범위 안에 있는 교회들은 거대한 은거지 혹은 원형의 댐을 형성했는데, 초기 파울시안 신앙이 수세기 동안 주류에서 거꾸로 흘렀듯이 수세기 동안 그가 붙잡아 유지해 온 초기 파울시안 신앙이 이리로 흘러들었다.(깁본의 역사서에 대한 버리의 수정, 6권 543쪽)
만약 프로테스탄트가 카톨릭 운동의 과도한 세속성에 대항하는 저항으로써 특징 지워진다면 파울시안은 “프로테스탄트”라고 쉽게 불릴 수 있다. 그들은 목사로써 그들의 삶의 방법, 의복, 다른 것들에서 평신도들과 구별되는 것이 없었고, 종교 회의나 비슷한 기관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의 스승들도 같은 서열이었다. 그들은 사도 시대 삶의 검소함을 닮으려 부지런히 노력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우상 숭배에 반대했다. 불가사의한 유물들은 생명과 덕이 없는 잿더미였다. (침례교도사 John T. Christian. 55쪽)
파울시안은 기원상 사도 시대적이고 성격상 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이제 그것은 교리와 수행상 분명히 침례교적이다.
(1) 그들은 교회 위에 어떤 인간의 권위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사람들은 Acephali(통치자가 없다)나 지도자가 없다고 불려졌다. (Orchard, 같은 책 130쪽).” 그것이 지구상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파에 해당된다고 하기는 힘들다. 그것은 침례교도적 특성이다. 침례교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부른다.
(2) “그들은 신․구약을 충실히 사용한다. (「침례교도사」, 같은 책 55쪽) 오늘날 침례교도들은 그들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써 성경만을 중시한다.
(3) 그들은 신약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확실히 침례교적이다. “그들은 사람은 회개하고, 믿고, 성년이 되면 침례를 받고, 침례를 통해서만 그들이 교회로 받아들여져야한다고 믿고 지켰다.”(「침례교도사」, 같은 권 55쪽), 정확히 어떤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이런 계율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 이것도 침례교의 특징인 것이다.
(4) 그들은 침례 의식의 집행에 있어서 프로테스탄트이기보다는 훨씬 더 침례교적이다. 다음은 역사적인 권위있는 근거에서 인용한 것이다.
"모셰임은 ‘그들이 유아세례를 거부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그들은 침례를 주었고, 머리까지 담구는 재침례를 주었다. 그들은 명백한 재침례교도라고 생각된다. (Allix, 「피트몽의 고대 교회사」, Oxford, 1821)
편견 없는 독자로써 의견을 말해보자. 파울시안 회중이 교리와 그 행위상 프로테스탄트인가? 침례교도인가? 우리는 죽은 순교자의 수로부터 파울시안 운동의 숫자상 인원을 알고 있다. 오챠드는 그 수를 10만이라고 하였다. (Orchard, 137쪽)
그러나 파도치는 로마교회의 박해의 물결은 이러한 고대 목격자들을 뒤덮지는 못했다. “파울시안의 첫 희생자의 피와 재로부터, 그들을 계승하는 설교자들과 회중들이 계속하여 일어났다.”(「간략한 침례교역사, 같은권 133쪽)
“모셰림은 ‘이탈리아에서부터’ 파울시안은 유럽 거의 모든 지역으로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교리를 고수하고, 교황들로부터의 방해와 모욕을 받는 꽤 많은 수의 모임들을 점차적으로 형성하였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기록에 따르면 11C 중반에 그들중 상당한 수가 롬바르디, 인수르비아에 정착했으나, 주로 밀라노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그들중 다수는 프랑스, 독일과 그외의 지역들에서 순회하는 삶을 살면서, 자신들의 거룩함으로 대중의 존경과 감탄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그들은 파울시안 대신에 자기들의 이민국에서 이름을 따서 Bulgarians으로 명명되거나, Publicans, 그리고 Boni Homines(착한 사람)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프로방스에서는 알비(Alby)의 마을에서 이름딴 알비겐시스(Albigenses)라고 알려졌다.” (Orchard, 138쪽)
그러므로, 우리는 동쪽의 터어키와 불가리아 지역에서의 사도시대 기원으로부터 종교 개혁 500년 전인 1017년경 유럽에 정착할 때까지의 파울시안 교회들을 추적해 왔다. 그러므로 적어도 하나의 침례교도들의 공동체가 마틴 루터 시대 훨씬 전부터 번성해 왔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파울시안 운동이 사라졌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종교 개혁에서 살아남은 재침례교도(Ana-Baptists)처럼 종교 개혁 전에 500년 이상을 살았고, 파울시안의 사상은 오늘날의 재침례교회에 생생히 남아서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다.
3. 왈덴시스 교회(The Waldenses)
왈덴시스 교회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은 종교개혁 이전 시기에관한 연구는 피상적인 교회사 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오랜 옛날은 카톨릭교도, 프로테스탄트, 침례교도 같은 많은 증인들의 입에서 증명된다.
Life 지의 편집자들은 “가장 오래된 프로테스탄트 교파인 왈덴시스 교도들은 1532년에 종교 개혁과 결연하기 전에 수세기 동안 박해당해왔다.”(세계의 위대한 종교들, “Life" 편집자 공저 3권, 258쪽)라고 말했다.
16세기 종교 개혁 지도자인 테스도로 베자(Theodore Beza)도 같은 뜻으로 말했다.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풍부히 명시되었듯이 왈덴시스들이 지지된 이후로 그들을 초기의 순수한 기독교회의 자손으로 부르는 것을 인정했을 것이다. 이른바 그릇된 로마 주교에게 비참하게 학대당했던 서부 지역들과 계속되는 오랜 기간동안 기독교 세계를 흔들었던 끝없는 폭풍과 혼란도, 그들에게 행해지던 잔혹한 박해도 왈덴시스 교도들로하여금 로마의 폭정과 우상 숭배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만들 수 없었다. (「피에르몽 계곡의 교회들, Samuel Morland 경, 침례교 주일학교 위원회 편찬, 6쪽)
장로교회 역사가인 미쉘 박사는(Dr. A. W. Mitchell)은 1853년에 쓴 글에서 고대의 순수한 복음주의였던 왈덴시스 교회에 대하여 놀랄만한 증언을 하였다.
그의 책 왈덴시스(The Waldenses)의 서문에서 미쉘 박사(Dr. Mitchell)는 “왈덴시스 교회는 기독교계의 불타고있는 떨기나무(burning bush)이다. 그들의 역사는 대단한 초인적인 성결로써 인내해야했던 계속된 지독한 박해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카톨릭 왕관가까운 피에르몽(Piedmont) 계곡에서 자란, 그들의 성경적 믿음과 질서는 거대한 성직자 계급의 부패에 대항하는 영원하고 가장 중요한 저항이였다. 그들에 관한 모든 것은 이 증언에 날카로움과 요점을 주는데 기여하였다. 시대상 그들은 로마교황청의 강탈보다 먼저 일어났다. 그들의 논박되지 않는 전통들은 거의 서기력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들의 교회가 사도들이나 그 직계 후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가정을 정당화시킨다. 그들은 종교 개혁 전 몇 백년 동안의 날짜가 기입된 확실한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그 문서는 교황의 최고성을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덮인 로마의 미신적인 허례허식과 기괴한 교리의 시작을 반대하고,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써 성경만을 고집했으며, 처음부터 지켜왔던 그들의 교리와 조직이 지금의 그들의 것과 정확하게 같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 교회는 박해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엄청난 배도(Apostasy)의 변하지 않는 기념물이자, 관대함을 기대할 수 없는 로마의 혐오스러움에 대항하는 생생한 증언인 것이다. (「왈덴시스」, A. W. Mitchell, M. D., 장로회 출판(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53)
보편적인 권위에 의해 입증된 먼 옛날의 왈덴시스 교회들이 지금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왈덴시스 교도의 저항의 본질과 영역은 적 그리스도에 관한 그들의 논문의 조사에 따르면 쉽게 명백해진다. 이 문서의 본문은 A. D. 1120년에 편찬되었었다. 그 논문은 새뮤얼 몰랜드 경(Sir Samuel Morland)이 쓴「피에드몽 계곡의 교회들」의 132 ~ 144쪽에서 완전히 검증 될 수 있다.
왈덴시스는 적 그리스도의 행위에 대해 말하고 있다.
(1) 적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행위와,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은, 의미있거나 의미가 없는 불쌍한 피조물들에게, 여성이든 남성이든 죽은 성자같은 자들에게, 그리고 우상, 유물이나 유골, 특히 그에의해 축복되고 신성시된 물건들과 함께 그가 하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숭배하는 성체의 의식들에게 경배를 드리게 함으로써, 적 그리스도는 당연히 하나님 홀로 받으셔야 할 예배를 왜곡시키고, 하나님 홀로 경배받으시는 것을 금지시킨다.
(2) 적 그리스도의 두 번째 임무는 그가 충만한 은혜와, 의로우심, 거듭남, 죄사함, 깨끗케하심, 확신, 영적 양육이 한데 어우러진 그분의 공적들을 강탈하여 빼앗아 그 자신의 권위와, 말의 형식, 자신의 행위, 그리고 성자들과 그들의 중재, 연옥의 불로 그 공적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을 앞서 말한 것들로 이끌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대한 살아있는 믿음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행위로 모든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적 그리스도의 설교에 따라 자신들의 행위와 의지, 기쁨을 쫓게 하는 것이다.
(3) 적 그리스도의 세 번째 임무는 성령의 거듭남을 죽은 외적인 행위의 결과로 만들어, 그러한 믿음으로 아이들에게 세례하고, 그래서 세례와 거듭남이 반드시 소유되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거기에 그는 조직들과 다른 신성한 것들을 두며, 거기에 성령에 반대하는 자기 자신의 기독교정신을 세운다.
(4) 적 그리스도의 네 번째 임무는 모든 종교와 사람들의 거룩함을 미사로 모으고, 유대교, 이교도, 기독교 의식들의 모든 방식들을 함께 이어 맞추었다: 그리고 회중들을 그리로 이끌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한 것을 듣게 하였으며, 그에 따라서 그들에게서 영적이고 신성한 만찬을 빼앗고, 진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들로부터 그들을 꾀어내었고, 긍휼의 사역에서부터 그를 분시시켜, 그의 제사와 미사같은 것으로써 사람들을 헛된 소망들 속에 머물게 했다.
(5) 적 그리스도의 다섯 번째 임무는 그가 노력을 다하여, 자신이 보여지게 하거나, 만족을 모르는 그의 허욕을 배불리거나, 모든 사물들이 매매되도록 하였고,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6) 적 그리스도의 여섯 번째 임무는 교회가 아무런 견제도 없이 명백한 죄들을 허용하고, 또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을 축출하지 않는 것이다.
(7) 적 그리스도의 일곱 번째 임무는 성령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거나 다스리지 않고, 세속적 권세로써 영적인 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8) 적 그리스도의 여덟 번째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증오하고, 박해하고, 두렵게 한 후 그들을 약탈하고 멸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A. D 1120년에 왈덴시스는 부패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글로써 항의했다. 그들은 그 내용을 “적 그리스도”로 이름지었는데, 이것은 한 사람이 가까스로 항의하는 것 이상이었다.
적 그리스도에 대항하는 왈덴시스에 의해 나온 1120년의 맹렬한 공격은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일 뿐만 아니라, 침례교도라고 지적한 신앙고백과 같은 시대에 나오게 되었다.
미쉘 박사(Dr. Mitchell)는 A. D 1120년의 왈덴시스 교도의 신앙고백을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나열하였다.
제 1 조
“우리는 12개 조항이 말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교로 간주하는 사도신경이라고 불리는 신조의 12조항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굳게 지키고, 믿는다.
제 2 조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다.”
제 3 조
“우리는 거룩한 성경-KJVB을 거룩한 표준 성서로 인정한다.”
즉 - 1611년의 공인판에 따른 KJVB-킹제임스 성경 66권을 말한다.
제 4 조
“앞서 말한 KJVB-성경은 유일신 하나님께서는 전지 전능하시고, 그의 선으로 모든 것을 만드시는 가장 선하신 분임을 가르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비슷하게 아담을 만드셨으나 사탄의 질투와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우리는 아담에 의해 아담 안에서 죄인인 것이다.”
제 5 조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받은 우리의 선조들에게 약속하셨고, 율법으로 그들의 죄, 불의와 허물을 알게 하셔서, 그들은 홀로 율법을 이루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여주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길 소망했다.”
제 6 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된 시간에 태어나셨다. 즉, 불법이 충만해 있을 때 의인을 위해서가 아닌 모든 죄인을 위해서 신실한 존재로써 우리에게 은혜와 자비를 보여주셨다.”
제 7 조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자, 진리, 평화, 정의이시며 또한 우리의 목자이시고, 지지자시며, 산제물이시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 우리의 의로움을 위해 살아나신 목자이시다.”
제 8 조
“마찬가지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 하나님 아버지에대한 다른 중보자가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거룩하고 겸손하고 은혜가 충만한 처녀 마리아와, 마찬가지로, 모든 다른 성도들이 하늘에 있으면서, 심판에 날에 그들의 몸이 부활할 것을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다.
제 9 조
“우리는 죽으면 천국과 지옥이라고 불리는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곳과 벌받을 자들을 위한 곳’ 오직 두 곳만 있다는 것을 믿고, 진실과 반대되게 적 그리스도가 만든 날조된 연옥을 완전히 부정한다.”
제 10 조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사람이 만든 모든 것 즉, 향연과 성자들의 축일전야, 거룩하다고 부르는 물을 이루 말할 수 없이 혐오해 왔다. 마찬가지로 특별한 날들과 그런 것들, 특히 미사를 지키는 것을 삼간다.”
제 11 조
“영혼의 자유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편견을 갖게 하는 인간들이 만든 모든 것들을 혐오스러운 것과 비크리스쳔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제 12 조
“우리는 만찬이 거룩한 것의 표시들 혹은 보이지 않는 은혜의 가시적인 형태들임을 믿으며, 성도들이 그것을 행할 때, 그들이 때때로 앞에 말한 표시들 혹은 가시적인 형태들로 사용하는 것이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위에서 말한 성도들이 그것들을 사용할 다른 수단들이나 장소가 없다면, 그들이 위의 표시들을 받지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제 13 조
“우리는 침례와 만찬 외의 카톨릭이 다른 성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제 14 조
“우리는 헌물을 바치는 것과 즉각적인 복종, 순종으로 俗勸을 존경해야 한다.”
- 출처 (왈덴시스파,장로회 출판부 A.W. mitchell, 376~378쪽)
이것은 종교 개혁 전 400년 이상 된 침례교적 신앙 고백으로 조건이나 애매함이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오직 침례 교회만이 114개의 모든 조항들을 승인할 수 있고, 지상에서는 그렇게 승인할 프로테스탄트(역사적인 의미 안에서의 용어 사용상)가 없다.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역사학자들은 똑같이 왈덴시스의 사도 시대적 기원의 문제에 대해 싸우기를 거절하였다. 로마에 대항하는 그들의 저항의 정도는 충분히 기록되어 있다. 종교 개혁 전에 수세기를 살아온 저항하는 침례교도들의 가장 명확한 예처럼, 그들은 진실로 전 기독교의 “불타고 있는 떨기나무(the burning bush)"이다.
재침례교도들과 종교 개혁가들
침례교회와 침례교적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성직 활동 때부터 종교 개혁 때까지 1400년 동안을 끊임없이 번성해왔다. 이런 전제는 노바티안, 파울시안 그리고 왈덴시스 교회들의 역사를 호소함으로써 유지되는 것 이상이었다. 사도 시대와 사도 시대 근처의 기원의 각 경우는 먼저, 주장되어진 후 증명되었다.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수많은 증언들을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유사점은 노바티아니스트(Novatainists), 파울시안스(Paulicians), 왈덴시스 교도들, 몬타니스트스(Montanists), 알비겐시스 교도들, 보고밀스(Bogimils), 페트로브루시안스(Petrobrusians), 핸리시안스(Henricians), 아놀디스츠(Arnoldists), 그리고 많은 다른 교파의 신도들 사이에서 보여진다. 그것은 거의 필요하지 않다. 침례교도들이 예수님과 사도들의 정통 계승자로써 그들의 신앙은 종교 개혁을 필요로 하지 않았듯이, 침례교도들은 종교 개혁가가 아니었으며, 그러나 로마에 관한 한 그들이 항상 프로테스탄트(저항자)였던 것은 매우 분명하다.
“침례교”라는 이름으로 이해될 아무런 계승자도 없다는 것은 솔직히 인정된다. 만일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시대 이래로 지속해 온 (그 이름이 무엇이 됐든 간에) 침례교의 교리와 그 실행을 인정한다면, 침례교도들이 “침례교” 그 이름 자체를 계승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종교 개혁의 시대에 (이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뜻에 따라서) 침례교도들이 있었다. 역사는 그들이 역사에 한결같은 의견으로 반응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다. 상당수의 고대의 목격자들은 종교 개혁을 지지하고, 그것과 그들의 주체성을 융합시키고, 프로테스탄트가 되었다.
역사가 크리스티안(John T. christian)은 "모든 제도는 변화하고, 진보 후에 쇠퇴한다. 종교 개혁 직전에 모든 것 - 믿음, 빛, 생명 - 은 쇠퇴하고 있었다. 왈덴시스가 그랬다. 박해는 그들의 수를 줄였고, 그들의 영혼을 부수었고, 일부의 흩어진 지도자들은 종교 개혁의 떠오르는 영광에 현혹되었다. 더 큰 무리는 재침례교도 운동과 함께 사라졌다. 1530년에 지치고 상처받은 나머지 왈덴시스 교도들은 종교 개혁가와 협상을 시작했지만, 1532년까지 별 소득이 없었다. 그 때 이후로 왈덴시스는 유아침례론자 (Pedobaptists)가 되었다." 라고 말했다.
- 1권 Broadman 인쇄, 1922, 82쪽
크리스티안이 말한 종교 개혁의 새벽은 종교개혁(Pre-reformation)이전 침례교 프로테스탄트들을 갈림길로 몰아갔다. 많은 이들이 종교 개혁에 동참했고, 더 많은 이들이 동참하지 않았다. 이들은 재침례교도 운동을 하였는데, 곧 접두사인 “재(Ana)”를 떨어뜨리고, 단순하게 “침례교도”가 되었다.
재침례교도의 종교 개혁과 종교 개혁가에 대한 태도는 역사적인 기록의 문제이다. 1848년판 데이비드 베네딕트(David Benedict)의 「미국과 세계 다른 지역의 침례교파의 일반 역사」79쪽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재침례교도와 종교 개혁에 대해, 베네딕트(Benedict)는 말한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이름으로 알려진, 두개의 거대한 그룹들이 아주 상이한 판단을 내렸던, 기독교계의 교회사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대에 이제 우리는 도달하였다.”
루터는(Luther) 이러한 거대한 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참가자였고, 처음에 그의 이름은 로마 카톨릭교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두에게 적용되었고, 현재는 루터주의 교회로 유럽 프로테스탄트의 매우 큰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카톨릭 또한 그(루터)의 이름을 일반적으로 구별 없이 반대자로 특히, 동방 전도 지역의 반대자로 적용하고 있다.
칼빈(Calvin)은 루터 직후에 나왔다. 그와 그의 보좌인들 아래 처음에는 그의 이름을 가진 별개의 파가 생겼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의 추종자들은 개혁된 교회나 교회들의 이름에 의해 구별되기 시작했고, 그들은 대부분 스위스에서 활동하였으나, 프랑스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도 퍼졌다.
나는 종교 개혁의 발생과 진보에 대해 생략 같은 것을 하지 않겠다.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비추어 그 시대와 그 이후의 침례교도들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이 침례교도들과 그들의 원리들에 무슨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 줄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얼마 되지 않는 이런 점들은 다음의 항목들 아래 요약되어 있을 것이다.
(1) 그들은 수세기 동안 매우 잔인하게 권력을 행사해온 로마교황의 지나치게 커진 권력에 대항하여 루터와 그의 보좌인들에 의해 일어난 대단한 저항으로 매우 사기가 높았다.
유럽전역에 숨어 있던 군중들도 로마 교회의 포악한 우두머리들의 박해하는 권력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준 그날의 시작을 기쁨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곧 그들은 그들 자신의 기대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였고, 종교 개혁을 지휘한 교리의 일부에 대해 완전히 실망하고, 그러한 소리들이 들렸을 때,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에 항의할 것을 결정하였고, 종교 개혁이 개혁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다.
(2) 그들은 교회와 국가가 연합하는 것과 세속 권력을 고용하여 종교 사건들을 간섭하거나, 교회 업무들을 관리하는 것에 저항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곧 종교개혁자들이 기독교사상의 국가적 형태를 단호히 옹호하는 사람들임과 그들이 지상의 왕자들의 이익과 보호를 지키는데 부지런하였음을 발견하였다.
(3) 그들은 곧 종교 개혁가들이 어떤 중요한 점에서는 주의 깊고, 타협적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그들은 종교개혁가들이 오래된 의절한 카톨릭교회의 가장 나쁜 부분의 일부를 유지하고 싶어했고, 그 초기 시스템은 유지하되, 그 시스템에 속해있는 모든 것에대해서 무조건적인 포기와 단념이 그들과 함께 공존한다는 것과, 이는 완전한 모순임을 알았고, 그것을 제거함없이는, 종교 개혁가들의 정돈과 변경이 그들의 견해로는 헛되고 쓸데없는 것이였다.
교회가 로마 카톨릭의 22가지 의식에 참여하던, 회원들로 구성되어졌는지, 아니면 프로테스탄트들로만 구성되었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호하게 그들의 기독교 신앙에대한 확실한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만, 교회회원자격(membership)을 수여하였다.
(4) 침례를 주는 의식에서, 오래된 침례교도들은 곧 루터파든 칼빈파든 종교 개혁가들과 다투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의 일반 교리로는 아프거나 약한 경우를 제외하고 완전 침수 침례를 제안하고 있었지만, 실제 실행함에 있어서 그들 모두는 완전 침수 침례를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하였다. 계속해서 논쟁이 일어났고, 공개 토론회도 열리고, 두 입장을 담은 책도 나왔으나; 반대하는 편이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논쟁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없었다면, 그들은 칼로써 할 수 있었다.
(5) 침례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의 규율을 위해 성경을 지키고, 교회나 학교의 교리에 대해 자유스럽고, 국가의 지위로부터 확고한 개인의 판단의 권리를 요구함으로 신앙의 오래된 터전을 지켰다. 종교 개혁가들도 이런 원칙들을 시작하였으나 그것을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6) 재침례의 시행상, 종교 개혁가들은 엄청난 힘으로 침례교도들에 반대하였고, 이에 비추어 보아 그들은 고대 카톨릭 박해자의 뒤를 쫓은 것이다.
(7) 종교의 자유와 관용의 원칙상 두 집단은 극과 극으로 반대되었고,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적인 본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드 베네딕트(David Benedict)는 종교 개혁 집단과 재침례교도 집단사이에서 불일치 하는 7개의 넓은 부분을 기술하였다. 만약 오늘날 침례교도들을 확실히 프로테스탄트 교파로 친다면, 재침례교도들의 조상과 역사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실제 창시자들 사이에서 발견된 것 보다 더 많은 교류가 발견되어져야할 것이다.
처음의 질문들에 이제 대답이 된다. 분리된 교파로써의 침례교도들은 종교개혁 훨씬 이전, 신약 성서에서 그들의 기원을 찾는다. 그러므로 침례교도들을 용어의 역사적 의미상 정확히 프로테스탄트라고 부를 수는 없다. “프로테스탄트” 용어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난폭에 대항하는 저항의 의미를 함축하는 한, 침례교도들은 늘 그래왔듯이 “맨 먼저 자격을 얻어” 진정한 프로테스탄트인 것이다.
제 3장: 전시대의 재침례교회
하나님의 교회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은 여기 이 땅에서 본인의 구원자의 임무를 수행하시는 동안에 그분의 교회를 세우셨다. 신약성서에는 이러한 진술의 진실에 대한 많은 증거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 영광을 부인하려 하고 교회가 오순절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의 여호와께서 오순절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분의 구원자의 사역을 수행하시는 동안에 세우신 것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진술들을 제기했다.
1. 교회는 오순절 전에 설교해야 하는 사명을 지녔다.(마태복음 28:19,20)
2. 교회는 오순절 전에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요한복음 4:1,2)
3. 교회는 오순절 전에 최후의 만찬을 가졌다. (누가복음 22:15-20)
4. 교회는 오순절 전에 선거를 실시했다. (사도행전 1:15)
5. 오순절 전의 교회 기록부가 있었다. (사도행전 1:15)
6. 예수님의 말씀인 “ 교회에 가서 말하라”는 오순절 전에 말씀되어졌다.(마태복음18:17)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에 가서 어떤 것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7. 오순절의 교회에 대한 약 3000명이 더해졌다(행2:41). 교회는 3000명이 더해지기 전에 세워졌음이 틀림없다.
8. 우리의 여호와는 그분의 집인 교회 안에 계신다. (마가복음 13:34) 성령의 인도로 사도 바울은 여호와의 집을 진실의 기둥이자 근원인 살아있는 여호와의 교회와 동일시했다. (디모데전서 3:15)
9. 교회 안에 세워졌던 첫 번째 영적 선물은 사도들의 선물이었다. (고린도전서 12 : 28) 교회는 사도들이 그 안에 세워지기 전에 존재했음이 틀림없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의 교회를 직접 세우셨다는 것과 그분께서 아버지께 돌아갈 때 세상에 그분의 교회를 남겨놓았다는 그들의 증명을 분명하게 한다.
언약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약속하셨다(마16:18).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교회가 시대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 내려오는 역사임을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누가 뭐라해도 사실이다.
신약성서는 교회 역사서
신약성서는 세상에서 첫째가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교회역사서이다. 교회의 기원과 초기 역사는 신약성서의 신성한 기록들에서 발견되어진다. 성령님을 진심으로 수용하는 것은 진실한 교회의 기원과 역사를 이해하는 첫 단계이다. 여호와의 쓰여진 계시에 대한 무지함이 교회와 어린양의 진정한 성도들로하여금 이교 카톨릭을 따르도록 인도할 것이다.
모든 시대
오래 전에 저자는 사람에 의해 쓰여진 교회 역사서를 읽었고, 그는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시대를 통해 존속할 것이라고 믿었다. 신약성서의 메시지는 그에게 이런 진리를 확신시켰다. 에베소서 3:21의 말씀은 저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인장을 찍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교회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그분의 교회가 실패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 같은 교회들은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해왔다. 여호와의 약속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분의 교회가 시작된 이래로, 이 세상에 그와 같은 교회들이 없었던 적은 하루도 없었다.
다른 이들의 증언
침례교회의 역사는 초대 교회와 함께 시작되었으며 세기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침례교도들의 허풍이 아니다. 다양한 교파의 역사가들은 침례교도들이 그리스도 이후로 시대를 통해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음의 사람들은 비-카톨릭교 그룹, 비-프로테스탄트 그룹의 오랜 증언을 수록하였다.
아이작 뉴튼(Isaac Newton)경은 “침례교도들이 로마를 상징하지 않았던 유일한 그룹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말했다.(휘스톤Whiston의 자필 메모, 201)
루터주의 역사가인 모셰임은 침례교도들을 종교개혁 이전에 둔다. 그는 “루터와 칼빈의 출현 전에 네덜란드 침례교의 원리를 완강하게 고수했던 사람들에대해서 유럽 대부분의 모든 나라에서는 숨겨졌다.” 라고 썼다. (교회사연구, 3권 200. 모셰임)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bell)은 장로파인 마칼라(Macalla)와의 논쟁에서 “사도시대 때부터 현재까지 침례교의 사상과 침례의 실행은 매시대마다 계속되는 지지자들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존재에 대한 대중적인 기념비들이 세워졌다.”고 말했다. (마칼라와 캠벨의 침례교에 대한 논쟁, 378,379.Buffalo-미국 뉴욕주 서부 Erie 호반의 도시,1824)
카톨릭의 그레쳐 신부(Father Gretcher)는 왈덴시스 교도들의 가르침을 차근차근 이야기한 후에 말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이교도, 특히 재침례교도들의 진짜 모습이다.” (D'Anvers, 침례교,253)
“교회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카톨릭교도, 가이사 바로니우스(Caesar Baronius)는 “왈덴시스교도들은 재침례교도들이다”라고 말했다.(D'Anvers, 침례교, 253)
존 클락(John Clark)은 DePauw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으며 감리교 신자였다. 그는 “나는 침례교회가 A.D100년 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할 수 없다, 비록 당시에 침례교도들이 존재했고, 모든 크리스쳔들이 당시에 침례교도였다 할지라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Jarrel. 침례교회의 영속성. 59)
A. D 1560년에 트렌트 공회의 멤버 중 한사람인 호시우스(Hosius) 추기경은 재침례교도들은 1200년 동안 박해를 받아왔다고 증언했다. 정통한 교회 역사가들의 진술에서 그가 말했다. “만약 종교의 진리가 어떤 교파의 한 사람이 고통과 직면했을 때 보여지는 자발성과 대담성의해 판단되어진다면, 어느 교파의 신앙이나 생각도 지난 1200년 동안 대개 환난을 받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받고, 그것을 기꺼이, 꿋꿋하게 겪어온 재침례교도들보다 더 진실되고 확실할 수는 없다. (호시우스, Letters Apud Opera 112-112. 침례교지(Baptist Magazine CVIII,278, 1826년 5월)
1819년에 그로니겥(Gronigen)의 신학교수인 이페이(Ypeii)박사와 네덜란드 왕의 목사인 덜모트 목사( Rev. j. j. Dermout)는 둘 다 종교개혁 교회 학구적인 회원들이었으며, 사도들의 기원에 대한 네덜란드 침례교도들의 주장을 조사하였다. 그들의 자발적인 증명은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예전에는 재침례교도라고 불렸고 그후에는 메노나이트파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본래 왈덴시스들이였으며, 그들만이 교회사에서 그 기원에대한 존중을 받지 못했던 자들이였음을 보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침례교도들은 사도시대 이래로 유지되어온 유일한 성경적 기독교 무리들이며, 시대를 통해 복음의 순수한 진리를 보존해온 기독교 사회로 고려되는지도 모른다.” (Ypeii en Dermout, Geschiedenis der Nederlandsrhe Hervormade kerk. Brenda,1819)
침례교의 유산
침례교회는 영광스러운 과거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완고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천국의 진리를 증명하고 보존하기 위해 순교자의 피로 산 유산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핏빛 흔적을 따라서 영웅들의 고귀한 사례들로 영감을 받고, 실패하지 않는 지도자를 쫓음으로써 미래를 확신하여 복음의 빛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비춰질 때까지 복음의 영광스런 광명과 함께 나아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