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지은이 한강
펴낸이 강일우
초판 1쇄 발행일 2014.05.19.
7쇄 발행일 2016.06.06.
펴낸곳: (주)창비
대통령의 휴가 중 독서 목록에 있는 책. 도서관에 있나 검색해보니 한 곳만 대출 가능이라고 떠서 급히 빌려왔다. 읽기 시작하니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행방불명 된 누나를 찾아다니다가 총에 맞아 죽고 혼이 된 정대. 함께 있던 정대가 총에 맞은 것을 알고도 살기 위해 도망쳤던 동호는 정대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돕다가 결국 목숨을 잃는다. 민간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참여했고 계엄군이 온다는 소식에 총기를 소지하고 마지막까지 대기했던 양심의 소리에 충실했던 이들은 군에 잡혀 입에 담을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삶을 이어나간다.
끝 부분에 중3 셋째 아들, 동호를 잃은 할머니의 독백을 읽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죽은 아들 뒷모습과 너무 닮은 사람을 따라 길을 나섰다가 홀린 듯이 멀리까지 다녀왔던 일, 군인 대통령 그 살인자가 온다는 소식에 유족회 어머니들이 모여 소리에 맞춰 구호를 외치려던 계획은 엉망이 되고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날개가 달린 듯 책상 위를 겅중겅중 건너가 벽에 걸린 살인자 사진을 끌어내려 밟아 부수고 발에 유리가 박혀 병원에 갔던 일, 서울에 있던 첫째 형이 둘째 형에게 왜 동생을 데리고 오지 않았느냐고 타박해 두 형제가 뒹굴며 싸우는데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일, 어린 시절 아들의 모습을 회상하는 일. 어쩌끄나 로 시작하는 글에서는 저절로 애끓는 소리가 났다. 피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음성이 들린다.
이 책을 읽으며 5월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작가의 깊은 가슴 아픔을 함께 느꼈다. 고통에의 직면. 이러한 고통을 마주하는 것조차 힘들었을 텐데 당사자들과 그 가족들의 아픔을 예리하게 전해준다.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91쪽
어쩌끄나, 내가 서른살에 막둥이 너를 낳았는디. 나는 타고나기를 왼쪽 젖꼭지 모양이 이상해서, 느이 형들은 잘 나오는 오른쪽 젖만 빨았는디. 내 왼쪽 젖은 퉁퉁 붓기만 하고 애기들이 빨지 않아서, 보드라운 오른쪽 젖하고 딴판으로 단단해져버렸는디. 그렇게 흉한 짝젖으로 여러해를 살었는디. 허지만 너는 달랐는디. 왼쪽 젖을 물리면 물리는 대로, 이상하게 생긴 젖꼭지를 순하디순하게 빨아주었는디. 그래서 두 젖이 똑같이 보드랍게 늘어졌는디.
어쩌끄나, 젖먹이 적에 너는 유난히 방긋 웃기를 잘했는디. 향긋한 노란 똥을 베 기저귀에 누었는디. 어린 짐승같이 네발로 기어댕기고 아무거나 입속에 집어넣었는디. (...)
여덟살 묵었을 때 네가 그랬는디. 난 여름은 싫지만 여름밤이 좋아. 암것도 아닌 그 말이 듣기 좋아서 나는 네가 시인이 될라는가, 속으로 생각했는디. 여름밤 마당 평상에서 느이 아부지하고 삼형제하고 같이 수박을 먹을 적에. 입가에 묻은 끈끈하고 다디단 수박물을 네가 혀로 더듬어 핥을 적에.
114-115쪽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212쪽
특별히 잔인한 군인들이 있었던 것처럼, 특별히 소극적인 군인들이 있었다.
피 흘리는 사람을 업어다 병원 앞에 내려놓고 황급히 달아난 공수부대원이 있었다. 집단발포 명령이 떨어졌을 때, 사람을 맞히지 않기 위해 총신을 올려 쏜 병사들이 있었다. 도청 앞의 시신들 앞에서 대열을 정비해 군가를 합창할 때,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외신 카메라에 포착된 병사가 있었다.
어딘가 흡사한 태도가 도청에 남은 시민군들에게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을 받기만 했을 뿐 쏘지 못했다. 패배할 것을 알면서 왜 남았느냐는 질문에, 살아남은 증언자들은 모두 비슷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