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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적 싸움과 기도
적을 모르면 적을 이길수 없다.
성도의 적인 마귀의 정체와 궤계를 모르고서는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그리고 마귀의 정체와 궈계를 알았다면 분명히 승리를 체험하게 된다.
영적인 싸움은 영계에서의 전쟁, 즉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 지는 대결이다 (욥 7:1).
보이지 않는 악신인 마귀는 성도를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기습 공격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등한시한다면 마귀에게 기습을 당하여 정복당하고 만다.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을 미끄러운 곳에 넘어뜨리려고 할 뿐만 아니라 무섭고 뽀족한 끝을 가진 함정을 파놓고 치명타를 가하려고 한다.
어떻게 하든지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고, 자빠지게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요10:10)한다.
마귀는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며(욥 1:7), 끊임없이 삼킬자를 찾아 돌아다니는 우는 사자(벧전 5:8)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활동을 쉬지도않고, 멈추지도 않는 원수 마귀의 궤계(흉계, 전략)를 잘알고 있어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영적 전쟁의 준비와전략을마련할수있다.
1. 마귀의 궤계-ⅰ
성도가영적전쟁에서승리하려면 마귀의 궤계를 잘 알아야 한다(엡6:11~12).
왜 마귀의 궤계를 잘알아야 하는가?
첫째, 마귀는 결코 지치거나 피곤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귀는 휴식, 휴일이 없다.
마귀는 우리가 쉴때 쉬지 않는다.
성도들의 기도가 쉬게되면 마귀는 즉각 심방 온다.
따라서 심장이 쉬면 호흡이 끊어져 죽는 겻처럼 우리의 기도가 쉬면 우리의 영도 죽게 되므로 절대 기도를 쉬면 안된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 18:1)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해야 그때그때 맞는 새로운 전략을 주신다.
사무엘하 5장에서 다윗은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된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삼하5:19) 정면 돌파하여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
그 후 블레셋이 재정비하여 또쳐들어온다.
이때 다윗은 지난번의 경험으로 바로 나가 싸우지 않고 다시 한 번 겸손하게 하나님께 묻는다(삼하 5:23).
그리고 새로운 전략을 허락받고 복병 정책을 써서 마침내 전쟁에이기게된다.
여기서성도들은중요한교훈을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내 길과 하나님의 길은 다르다는 것이다(사 58:8).
따라서내생각으로하나님을제한해서는 안된다.
내 생각대로 안된다고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반드시합력하여선을 이루시기 때문이다(롬 8:28).
새로운 전략을 주셔서 그 때 맞는 상황에서 이기게 하시니 성도들은 기도하여 그때 그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겠다(히 4:16)
(2)
1. 마귀의 궤계-ⅱ
둘째, 마귀의 공격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공격해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매우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성도들을 공격한다.
특히 마귀는 사람의 약점을 잘 파악하고 그 방면으로 시험을 준다.
가룟 유다는 돈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 시험을 당한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겁약자였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 시험을 당한다.
일찍이 마귀는 아담을 타락하게 하기 위해서 아담의 아내 하와를 발판으로 삼아 먼저 유혹하였다.
아내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잘 듣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 유혹한 것이다.
욥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역시 욥의 아내를 발판으로 삼았다.
심지어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까지 하였다.
마귀는 항상 뒤를 돌아보게 한다.
잘못된 과거를 회상하게 하여 쓸데없는 후회를 하게 한다.
허송세월 보내게 된 것을 기억나게 한다.
그래서 더욱 낙심과 불안을 심어준다.
지금 한국의 도시에 사는 주부 가운데 많은 사람이 우울증 환자이다.
우울하게 하여 결국은 자살까지 선택하게 한다.
이처럼 마귀는 사람의 취약점, 단점을 잘 알고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을 해온다.
셋째, 마귀는 너무 교활하기 때문이다.
마귀는 변화무쌍한 전술로 자신의 모습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하는데 특히 두 가지 모습으로 공격한다.
① 우는 사자의 모습으로 공격한다(벧전 5:8).
사자는 밀림의 왕이요, 모든 동물 가운데서 가장 강하다.
사자가 울부짖으면 모든 피조물이 몸서리친다.
이처럼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 등을 통해서 성도들을 넘어지게 한다.
②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유혹한다(고후 11:14).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왔을 때는 가장 매혹적인 모습을 가지고 빛의 천사로 변장하여 찾아왔다.
마귀는 항상 우는 사자와 같이 추하고 잔인하고 무자비하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광명의 천사로도 나타나 성도들을 유혹한다.
낚시에 있어서 은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기술이듯이 마귀는 은폐를 잘한다.
은폐를 잘하여 많은 성도를 넘어지게 해놓고는 안그런 척 은밀히 은폐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고는 마귀가 한 것이 아니라고 은폐한다.
그래서 환경이 나쁘거나 성격 때문이라고 가지가지 이유를 대며 둘러댄다.
그런 다음 어김없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기습 공격을 하는 이 마귀에게 파수병을 세워두지 않으면 우리 성도들은 점령당하고 만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 마귀의 궤계에 대비해야 한다.
마귀의 중요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안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항상 혼란과 말썽과 혼돈을 일으킨다.
그 중 마귀의 최대, 최고의 야망은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되도록 이간질하는 것이다.
마귀는 능력이 미치는 한 이 일을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
마귀 존재의 최대 목적은 하나님과 성도, 주의 종과 성도, 성도와 성도, 가족이나 공동체의 구성원끼리 이간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 사역 가운데서 가장 정점이기 때문이다(창 1:31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사람보다 더 우수한 것은 없다.
사람은 창조의 머리부분이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으로 지음을 받았고, 지상에서는 하나님 아래 있는 최고의 존재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귀의 매우 특별한 공격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3)
1. 마귀의 궤계-ⅲ
마귀는 크게 두 가지로 공격한다.
1) 소유물(가족, 재산, 건강, 생명)을 공격한다.
이 경우는 아주 심한 공격이다. 대표적인 사람은 욥이다.
(1)마귀는 자연까지 지배하는 권세로 공격한다.
욥은 사단의 공격으로 하루 만에 재산 등을 다 빼앗기고 자녀들은 죽고 만다.
그는 번개(욥 1:16)로, 대풍으로(욥 1:18~19) 공격을 당했다.
심지어 마귀는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까지도 죽게 하려고 폭풍을 일으켰다(막 4:37-큰 광풍).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자연 권세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스릴 수 있다.
(2)동물들에게 능력을 행사하는 권세로 공격한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시는데 쇠사슬도 끊어버릴 만큼 힘이 센 군대 귀신이 들어간 어느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곤 두러워한다.
그리고는 예수님께 제발 무저갱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
마침 산에 돼지 떼가 있어 그리로 들여보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여 그 돼지 떼에게 들어 간다.
그러나 그 돼지 떼는 호수로 달려들어 몰사한다(눅 8:26~33).
이처럼 귀신은 동물들에까지 능력을 행사한다.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선물 중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것은 마음이다.
이것이 동물과 다른 점이다.
동물은 주로 본능에 의하여 행동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귀한 사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바라보고, 추리하고, 증명하고, 연구하고, 논리적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교활함, 간교함이 가장 큰 특성인 마귀는 인간을 올무에 걸리게 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하여 그 교활함을 사용한다.
무엇보다 인간의 마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을 혼미케하는 것”(고후 4:4)은 바로 마귀하고 지적한다.
“마음을 혼미케하다”의 의미는 영적안목을 가리운다는 뜻이다.
마귀는 성도들의 영적인 안목을 가려버린다.
소망과 비전을 갖게 하기보다 낙심과 절망을 주어 결국에는 스스로 죽게 만든다.
마음의 상처도 크게 받게 하여 쓴 뿌리가 되어 성도들의 삶을 파괴한다.
우리의 신앙의 전진도 막는다.
상처를 통해 심각한 질병을 준다.
그래서 성도들의 받을 풍성한 복도 못 받게 한다.
결국 성도들에게 견고한 진을 구축한다.
또한 미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요 8:44)이므로 늘 성도를 속인다.
속여서 넘어지게 한다.
마귀는 속이는 데 있어 최고의 전문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 있어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바로 자기 마음, 즉 자신과의 전투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자기 마음을 지켜야 한다(잠 4:23).
생각에 의해서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된다.
로마서 8장 6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했다.
왜 육신의 생각이 사망인가?
노아의 시대 때 수많은 사람이 홍수로 멸망했다.
왜 멸망했는가?
창세기 6장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생각은 자기를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자기를 파산으로 멸망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날마다 악한 생각은 버리고, 성령의 생각을 건설함으로 인생의 위대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육신의 생각인가?
영의 생각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고 많이 깨달아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검토해보고 조명해보아야 한다.
때로는 성경을 암송하기도 하고, 암송된 말씀을 근거로 생각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수태해야 한다.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상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상이 곧 나타날 실제임을 알아야 한다.
(4)
1. 마귀의 궤계-ⅳ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ⅱ
하나님의 생각으로 수태되지 못한 사람은 내일이 없고, 장래가 없다.
내 속에 상상이 있어야 상상이 생산이 되고, 내 속에 생명이 있어야 생명이 생산이 되고, 내 속에 축복이 있어야 축복이 생산된다.
이처럼 상상은 성공의 비결이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를 해놓고 계속 응답을 상상했다.
그 응답이 빨리 오지 않아도 다니엘은 계속 응답을 상상했다.
그런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21일만에 응답하셨다.
상상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응답을 기다리니 응답이 오고야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 구한 것은 응답이 올 때까지 생각을 죽이지 말고 상상을 계속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상상이 끊어지면 신상생활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생각은 중요하다.
만일 다니엘이 “응답이 없구나. 그만두자”하고 그만두었다면 그는 절대로 응답 받지 못했을 것이다.
뿌리에서 진액이 공급되어 잎까지 올라가는데 중간에서 차단해버리면 그 나무는 결국 죽고 만다.
그러므로 생각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상상과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상상을 하나님의 상상과 생각에 집어 넣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살리라는 생각을 먼저 가진 다음 ‘나는 이 생각으로 성공하리라’고 결심하라.
그러나 육신의 생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날마다 성령의 생각으로 충만해서 영원한 나라에 갈 때까지 자신의 생각을 좌절시키지 않는 것이 나 자신을 성공시키는 비결이다.
내 생각을 통해 성령을 감동시켜서 나를 성공시켜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을 잘해야 한다. 생각의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의 성공자가 되어야 한다.
나의 생각을 성공시키려면 먼저 살아 있는 생각, 산 생각을 해야 한다.
죽은 생각을 하면 죽은 것을 생산하고, 산 생각을 하면 산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이란 무엇인가?
세상에서 죽어 있는 생각을 했던 것을 살아 있는 생각으로 바꾸어 생활하는 것이다.
죽은 물이 살아나면 고기가 몰리듯이 생각이 살아나면 살고자 하는 영혼이 몰리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죽은 생각을 살려야 한다.
항상 성령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생각을 공급 받아서 그 생명의 생각이 계속 샘솟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
육신의 생각으로 사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생각을 보면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죽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영”(요 6:63)이라고 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100% 장악한다면 나는 영원히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살면 우리는 승리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이는 자리를 페하지 말고, 열심히 모여서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면 이것이 생명이요, 평안을 준다.
많은 사람이 세상의 생각에 동의하다가 죽는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육의 생각에는 동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각에 철저히 동의해야 한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각이 충만하도록 늘 기도해야 한다
(5)
1. 마귀의 궤계-ⅳ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ⅲ
신앙생활도 알고 보면 좋은 생각으로 사느냐, 나쁜 생각으로 사느냐의 싸움이다.
예수 믿기 전의 나쁜 생각을 모두 철수시켜버리고, 좋은 생각으로 살게 되면 계속 좋은 열매를 맺고 살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좋은 생각이 죽고 나쁜 생각이 자리를 잡으면 결국 죽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생각을 품고 나쁜 생각을 몰아내야 한다.
"교회가 싫다. 원망스럽다.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
기도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몰아내야 한다.
나쁜 생각은 나를 죽이는 것이고, 내 생각이 죽었다는 것은 내 영혼이 죽었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죽으려고 할 때, 그 생각을 단호히 거절하고 이겨내야 한다.
특히 병에 걸렸을 때 단단히 거절하고 이겨내야 한다.
병은 나의 삶과 희망과 인생을 몰수한다.
이 때 하나님께 완전하게 나의 생각을 맡기면 어떠한 중병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분이 내 대신 일하시기 때문이다.
아프기 시작할 때 병원이나 약국에 가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반드시 병원이나 약국에 가야 한다.
심지어 중병에 걸리면 묘지에 갈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질병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살리는 영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능력 있게 살아야 한다.
사단은 가만히 내 생각 속에 들어와 가라지를 뿌려 좋은 생각과 거룩한 생각을 파괴해 버린다.
그러므로 나쁜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히 채워져야 한다.
진실로 생각은 중요하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결박당했는데도 하나님께 찬미하고 기도하므로 자유했다.
비록 육신은 결박당했지만, 영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사자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를 지켜주실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기드온의 300명 용사들은 메뚜기같이 무수한 미디안의 군대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주변을 살피고, 물을 손으로 움켜서 입에 대고 먹었던 것이다.
이처럼 영의 생각들을 통해 사도 바울은 자유했고,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보호받았으며, 기드온의 300명 용사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생각에 동의하면서 영의 생각으로 승리하자.
(1)정죄와 죄책으로 공격한다.
예수님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원수들은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이었다.
이들은 단지 의견을 달리하거나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깊은 적의와 증오와 비판으로 예수님을 정죄하였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자꾸 정죄할 것이다.
그러나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옷이 없듯이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런 정죄를 받을 때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나를 해방하였다(룸8:1-2),
하나님은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사43:25),
죄를 덮어버린다(시85:2),
멀리 옮기신다(시103:12),
죄를 지워버리겠다(사44:22),
죄를 발로 밟으시고 깊은 바다에 던진다(미7:19)라는 말씀으로 물리쳐야 한다.
(6)
1. 마귀의 궤계-ⅵ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ⅳ
(2)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어준다.
처음부터 마귀는 그렇게 시작하였다.
창세기 3장에 있는 말씀처럼 마귀는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창 3:1)라고 말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전에는 한번도 하나님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뱀이 간교한 질문을 하면서 다가와 교묘하게 의심을 갖게 하였다.
마귀는 그것을 공공연하게 말하지 않고 그럴듯하게 넌지시 말하였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의식(Self Consciousness)을 촉발시킨 것이다.
우리가 흔히 겪고 있는 경험으로 예를 들어보자.
완전히 행복한 기분에 도취되어 있을 때 갑자기 예기치 않은 불길한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어떤 독서를 하고 있을 때 의심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마귀는 그것을 우리에게 암시만 한다.
심지어 예수님에게까지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마 4:3)이라고 말하며 의심케 한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님의 다가올 죽음과 영원한 임무에 대해서 의심했다.
그러한 베드로에게 우리 예수님은 단호히 “사단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셨다.
이렇게 수제자 베드로였지만 마귀는 의심으로 넘어지게 하려고 했다.
성도들은 이러한 경로로 마귀에게 공격을 당할 것을 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귀는 죽음의 참상까지 찾아와 구원이 흔들리도록 의심케 하는 궤계로 우리를 맹렬히 공격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악한 자의 화전(불화살)”(엡 6:16)이라고 말한다.
(3)공포의 영으로 우리를 억누르려고 한다.
이것은 흔히 일종의 부인으로 유도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바로 베드로의 경우가 그렇다.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베드로는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를 계획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에 그 용감하고, 충동적이고, 자신만만했던 베드로가 욕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만큼 베드로의 믿음은 흔들리는 믿음이었다.
베드로가 심문을 받았던 법정은 가야바의 법정인데 이 법정은 사형 언도를 내리는 법정이 아니다.
사형 언도를 내리는 것은 로마 총독 빌라도의 법정에서만 가능하다.
즉 로마법에 의해서만 사형 언도를 내리고 집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리 겁을 먹고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의 믿음은 진실로 매우 연약한 믿음이었다.
이처럼 마귀는 성도를 놀라게 하고 무섭게 한다(악하고 불경한 생각을 갖게 한다).
성도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있을 때 마귀는 어떤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성도에게 나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위협한다.
그 때 사단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지만 그보다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벧전 5:9).
또한 죄를 회개할 때도 위협한다.
이런 모든 것이 심리학이나 생물학이나 과열 현상이 아닌 바로 마귀의 활동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떤 공포는 사람들의 기질상 어느 정도 쉽게 가질 수 있다.
유난히 쉽게 겁을 먹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마귀는 우는 사자의 모습으로 다가와 성도들을 두렵게 한다.
(8)
"1. 마귀의 궤계-ⅷ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Ⅵ
(4)낙심(영적 침체)으로 공격한다(시 42:5).
●선을 행하다가 지쳐서 낙심한다.
오늘날 마귀의 궤계 가운데 가장 흔한 보편적인 방법이다.
성도들은 생활의 긴장과 반복되는 일상 업무의 단조로움, 어려움과 자극이 없음으로 인하여 지치기 쉽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선을 행하는 성도들은 진리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어두움의 왕국을 대적할 때 빛의 왕국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보여줄 것이 많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중요치 않다.
성도들은 그 곳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햇빛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작은 불빛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느린 것 같으나 완벽하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것이 자신이 책임을 맡은 것이든, 다른 사람이 책임을 맡은 것이든 간에 어느 것이든 멸시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시시하다고 느끼는 모든 감정은 마귀의 장난이지 그 밖에 다른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오늘날 마귀는 크고 위대한 것만이 가치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은 하잘것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마귀의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아햐 한다(눅 18:1)
●고난과 핍박 때문에 낙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다(행 14:22, 빌 1:29, 딤후 3:12). 이것은 여러 번, 여러 가지 모양과 형태로 일어나므로 여기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잘 대비해야 한다.
이처럼 성도의 신앙생활과 기도 생활을 크게 망치게 하는 마귀의 궤계인 낙심을 조심해야 한다.
더욱이 이 낙심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온다.
슬플 때도 물론이려니와 기쁠 때도 찾아온다.
때로는 심각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심지어 기도할 때도 찾아오니 진실로 깨어 있어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도 환경은 우리가 기도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비유(눅
18장)를 말씀하셨다.
아무런 배경도 없고, 돈도 없는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
이 때 과부는 재판관에게 원한을 풀어달라고 구하나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는 이 재판관은 과부를 무시하였다.
그런데 이 여인이 낙심하지 않고 재판관을 번거롭게(성가시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일로 다른 정상적인 업무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할 정도) 하였더니 마침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런 불의한 재판관도 귀찮게 하닌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택한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에게도 낙심하지 말고 과부처럼 끈기있고, 간절하면서도 꺾일 줄 모르는 부르짖음이 필요하다.
밤낮 부르짖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열심이 필요하다.
이런 기도의 침노자가 될 때 깊은 은혜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간절함이 없다면 기도의 응답도 없다.
그러므로 간절함으로 밤낮 기도해야 한다.
아주 절박하게 기도해야 한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기도해야 한다.
또한 삶 속에서 기도의 제목이 잊혀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기도하자.
낙망하지 말고 밤낮 부르짖자.
(9)
1. 마귀의 궤계-ⅸ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Ⅶ
(5)충동적인 거짓 교훈으로 공격한다.
● 이단의 특징
이단은 첫째,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훼손한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는 구원이 없다(요14:6).
둘째, 성경을 더하거나 뺀다.
셋째, 지금도 성경적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이단들은,
①성경의 교리가 아니다.
또한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다.
언제나 실제적인 면에서부터 출발한다.
②성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③겸손이 없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영적 각성이 없다.
오히려 자랑과 교만이 가득 차 있다.
④아주 단순한 형식과 방법을 중요시하며 찬양한다.
⑤즉시 복을 주고, 즉시 치료해준다.
때로는 기다리는 것도 있는데 무엇이든지 그저 즉시 준다고 한다.
(6)정욕과 욕망의 영역으로 공격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거대한 연기로 불태우고 흥분시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왜 따먹었는가?
창세기 3장에서는 하와가 선악과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라고 했다.
결국 정욕, 욕심 때문이다.
정욕, 욕심이 저들을 타락켸 한 것이다.
욕심 때문에 교만하게 되고, 타락케 되는 것이다.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욕심 때문에 죄가 들어왔다.
이렇게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고 말았다(롬 5:19).
그리고 그 때부터 그동한 누려왔던 모든 특권과 축복은 전부 상실하고 만다.
①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②공포가 생기고,
③부패한 인성이 생기고,
④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⑤도덕적으로 악하게 되고,
⑥생활의 고통이 임하고,
⑦자연까지 저주받고,
⑧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저들에게 살아가는 데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부터 인간의 비극은 시작되고 말았다.
바로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온 인류를 구원하셨고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하셨다(롬 5:19).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 욕심을 몰아내야 한다.
욕심을 붙들고 있으면 사단은 춤을 출 것이고 계속 찾아올 것이다.
지금도 마귀는 계속 선악과의 유혹을 할 것이다.
그 때마다 우리의 욕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다 못 박아야 한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지금 나에게 욕심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할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다(롬 8:7~8).
그런데 종종 성도들이 우선순위의 신앙에서 처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예배도 뒤로 하고, 기도 생활도 뒤로 하고, 십일조, 감사, 헌신, 봉사하는 것도 뒤로 한다.
전부 욕심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이 욕심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뒷걸음치게 만든다.
앞으로 전진해야 할 성도가 뒷걸음치면 침륜(멸망, 파괴, 죽음)에 이르게 되고 만다(히 10:39).
(10)
. 마귀의 궤계-ⅹ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Ⅷ
(6)정욕과 욕망의 영역으로 공격한다.
오늘도 사단은 성도들의 삶의 현장 곳곳에 선악과를 준비해놓고 따먹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사단의 이러한 전략을 분별하고 있는 성도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에 전략과 흉계인 줄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식어지고 세상일에만 분주하게 뛰어다닌다면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그리고 그 욕심 때문에 침륜에 빠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최초의 타락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사단은 성도들을 욕심으로 게속 넘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에게 속지 말고 욕심을 다 버려야 한다.
또한 다 놓고 갈 세상 것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다 무너질 세상에 애착을 갖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잠깐 누리고 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은 길어야 100년이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더욱이 욕심을 내어서 시기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합 왕 때 이세벨 왕비가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차지했다.
그까짓 포도원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앞에는 비참한 결말이 놓여 있는데 포도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욕심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가인도 욕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였다. 삼손도 욕심 때문에 비참한 일을 당했다.
다윗도 욕심 때문에 음행을 범하고 사람을 죽이는 등 큰 죄를 범했다.
그리고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가룟 유다도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욕심 때문에 성령을 속이고 즉사하고 마는 침륜을 당하게 된다.
언제나 욕심 때문에 갈등, 미움, 싸움, 살인, 분쟁, 전쟁 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욕심을 성도의 생각 속에 집어 넣는 것이 사단의 전략임을 잘 분별하여 속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몰아내야 한다.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에덴 동산에서 맺었던 그 최초의 언약은 오늘날에도 지켜져야 한다.
왜나하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마 24:35),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찬송하고 예배드리면서 살아야 할것이다.
우리 주님도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을 것을 요구하셨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욱이 주님의 가르침은 이론상의 가르침이 아니다.
체험적인 가르침이다.
주님 자신이 먼저 행하신 후에 가르치셨고, 가르치신 대로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체험이 있어야 진정한 성도이다.
깨달은 대로 체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목적은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었다.
못 박혀 죽기 위한 것이 우리 예수님의 최대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목적대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과연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힐 목적을 갖고 있는가?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6)을 들으시고는 처음으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언급하신다.
이 때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22절에서 예수님을 붙잡고 “정신 차리라”고 꾸짖는다(‘간하여’라는 말은 ‘꾸짖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리 마옵소서”라고 애원한다. 아주 간절하게 부탁한다는 의미이다.
십자가를 지려는 예수님의 목적을 무산시키려는 단호하고 강한 의지를 보게 된다.
이것을 보면 첫째, 하나님의 일에는 언제나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며 둘째, 하나님을 공격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영적 교만으로 나가게 된다.
셋째, 육의 생각으로 십자가를 지려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1)
1. 마귀의 궤계-(11)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Ⅸ
(6)정욕과 욕망의 영역으로 공격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3절에서 단호하게 꾸짖는다.
심지어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사단은 아니다.
베드로의 배후에 숨어 있는 세력이 사단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꾸짖는 것이다.
베드로를 하나님보다 앞서게 하는 베드로의 배후에 있는 사단을 꾸짖는 것이다.
즉 베드로를 넘어지게 하는 사단을 꾸짖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사단을 꾸짖는 것이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제거되지 않고는 예수님이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음을 알기에 베드로를 꾸짖는 것이다.
그리고는 24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무엇보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다”라는 의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때와 똑같은 단어가 사용되었다.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 말은 예수님과의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기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정욕, 명예, 물질, 성공,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고,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언제든지, 무슨 일이든지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이 아니다.바로 ‘자기 자신’이다.
가장 결정적인 걸림돌은 ‘나’다.
제일 무서운 싸움의 대상은 다른 사람보다 ‘나 자신’이다.
자기를 이기는 것이다 이기는 것이고, 승리하는 것이지만 자기를 못 이기면 다 지는 것이고, 실패하는 것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옛사람의 죽음을 뜻한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에서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옛사람이 내 안에서 죽는 것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자기의 야망, 사심(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자기가 죽는 것은 사심이 죽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육의 사람, 육의 생각이 죽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내 옛사람의 꿈이 좌절되어야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진다.
내 옛사람이 죽어야 하나님이 살아나고 내가 새사람이 된다.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국 육의 사람이 죽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또 육의 사람이 죽어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육의 사람이 죽어야 예수님처럼 고통과 희생을 달게 질 수 있다.
육의 사람이 죽어야 매일매일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다.
다미안은 문둥병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자신도 문둥병에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며, 실제로 그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 그들과 함께하며 전도하였다.
C.T.스턴드(케임브리지 7인 중의 한 사람)는 영국에 큰 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 조그만 움막에서 생활하였다.
윌리엄 케리는 최초의 인도선교사였고, 아도니람 저드슨은 최초의 미얀마 선교사였으며,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선교사인데 이들은 모두 복음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이다.
이와 같이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해야 철야기도나 금식기도를 할 수 있다.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해야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예수님을 좇을 수 있다.
봉사하고, 헌신하며, 선교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다니엘은 자기를 부인했을때 왕의 진미를 거절할 수 있었다.
사자굴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스데반은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을 받으며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통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를 부인할때 되어지는 것이다.
자기 부인 없이 하나님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욕심과 정욕으로 공격하는 마귀의 궤계에 속지 말아야 한다.
(12)
1. 마귀의 궤계-(12)
2) 우리의 마음을 공격한다-Ⅹ
(7)교만으로 공격한다(사 14:14)
이 공격은 이 때까지의 공격과 정반대인 마귀의 활동이다.
또한 지금까지 고찰해온 모든 면에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가장 간교한 최후의 적은 자아이며, 한 인간에 있어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그 자신과의 전투이다.
실제로 모든 죄는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첫 번째 타락은 마귀의 타락이다.
이 마귀는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한 재능과 능력과 힘과 이해력을 가진 완전한 자로 창조되었다.
마귀는 하나님의 궁창에서 하나의 빛나는 별이었다.
자기 분수를 모르고 교만하여 넘어진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였다(사 14:12).
마귀는 하나님이 자신보다 더 위대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불평이 대단했다. 반역까지 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했다. 교만하니까 하나님과도 비기려고 하였다(사 14:13~14).
이렇게 타락한 사단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 역시 마귀와 똑같은 방법으로 타락했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 의 자만과 자아를 이용했고 부추겼다(창 3:4~5).
이 원리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 우리 성도를 교만하게 만든다.
이 방법으로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공격한다.
더욱이 이 상태는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의 원인이 된다.
자아는 언제나 그 자신에 관심이 있다.
모든 것은 이 특별한 실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즉 자아는 만물의 중심이 되고 거기에 따라오는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는 질투와 시기의 원인이 된다.
이런 현상은 고린도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는 이 공격에 대한 해결 방법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무엇보다 교만하면 누구든지 망한다(잠 16:18).
또한 하나님도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물리치신다(약 4:6, 벧전 5:5).
그러므로 우리는 자아를 깨고(시 51:17)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겸손하며, 새로운 가치관을 갖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안 바뀌면 절대로 하나님은 역사하시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는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살아야 한다.
영의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되었으면 계속해서 새롭게 바뀌어져야 한다. 그래서 참된 영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 막 결혼한 사람들을 ‘새 신랑, 새 신부’라고 부른다. 결혼 전까지는 낡은 사람들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구태여 새 신랑, 새 신부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새롭게 가정을 꾸린 후부터는 이제까지 살아왔던 각자의 삶의 방식과 습관으로 살아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렇다.
새 신분을 가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과 습관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새 신랑 새 신부가 되는 것이다.
세례 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세례를 받으므로 세례 받기 전의 정과 욕심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장사되었으므로 세례 받은 후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받은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로서, 영의 사람으로서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낡은 생각과 고정관념, 잘못된 습관과 옛 생활들을 철저히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은혜, 새로운 질서로 살아야 한다.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삶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는 나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높이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이제는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
특히 우리는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성도의 소속은 하늘나라임을 기억하고 우리의 목적과 가치관과 의식구조 모두가 다 하늘나라의 백성다워야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은 무능하고 연약하므로 간절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야 한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약함은 강함인 줄 알고 자아와 교만을 버리고 낮아져야 한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응답하실 것이다.
(13)
1. 마귀의 궤계-(13)
3) 마귀의 최대 목적은 이간질하는 것이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사람과 사람 사이(주님의 종과 성도, 부모와 자녀, 부부, 주인과 종)를 갈라놓으려 한다.
욥의 가정도 마귀의 이간질로 인하여 상상할 수 없는 처참한 고난을 당하였다.
특히 속여서 이간질하기 때문에 이 사단의 궤계를 잘 분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귀는 속이는 자(요 8:44)이기 때문에 속이는 일을 잘한다.
어떻게 하든 성도들을 속여서 미혹에 빠지게 하고, 함정에 빠뜨려 넘어지게 하고, 자빠지게 하고, 망하게 하고, 죽이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귀의 궤계를 잘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속고 만다.
더욱이 잘 속이려는 ‘긴급한 일의 횡포’를 부린다.
이 ‘긴급한 일의 횡포’는 모든 상황을 급하게 만들어 성도들을 두렵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믿음을 혼미하게 만들고(고후 4:4) 결국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 9:62)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낙심’, ‘의기소침’, ‘영적 침체’에 빠뜨려 성도들을 늘 넘어지게 한다.
이 낙심이 극대화되면 엘리야 선지자가 로뎀나무 아래에 가서 죽여달라고 간구한 것처럼 자살을 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낙심의 궤계는 사단이 가장 아끼는 무기 중 하나이다.
낙심의 궤계는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너무 쉽게 속기 때문에 이만큼 가장 보편적으로 성도들을 넘어지게 하는 무기가 또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마귀는 성도들을 무조건 넘어지게 하고 자빠지게 한다.
여기에 늘 깨어 기도하므로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과 성령께서는 늘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
“일어나 가서 외치라”(욘 1:2),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 26:46)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