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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073. [역경의 열매] 김해철 (1-10) 교수 퇴임 10년 목사 은퇴 5년만에 복귀
지난해 7월 말, 루터대학교 이사들과 만났다. 학교를 건축하고, 증원 및 증과를 해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3대 총장이 사표를 냈으니 학교를 맡아주세요.” “루터대 총장직을요?”
당혹스러웠다. 일선에서 물러나 여유롭게 노년을 즐기고 있는데, 다시 그런 중책을 맡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런 나를 향해 “그리 생각 말고, 숙명으로 받아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숙명이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소명으로 받아 달라는 외침이었다. 목회생활 46년, 20년간 루터대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기독교한국루터회 총회장으로 4년을 보냈다. “숙명으로 받아 달라”는 음성이 계속 맴돌았다. ‘더 이상 내가 회피할 길이 없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결단을 내렸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지난해 11월 27일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나는 제4대 총장에 선임됐다. 2010년 2월 16일부터 학교에 나가 근무를 시작했고, 3월 2일 루터대 총장에 취임했다. 75세 나이에 루터대로 복귀한 것이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8)
이 말씀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지난날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 말씀을 늘 강조했다. “언제 어디서든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하라.” 그런데 나는 총장직이 힘들고 부담된다고 사양하려고 했다. 그랬다면 지금껏 내가 강조한 말들은 모두 위선이 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이쯤에 이르자, 결정은 쉽게 내려졌다.
교수로 정년퇴임한 지 10년이 됐고, 목사로 은퇴한 지 5년이 지났다. 총장이 되고서 4개월, 정말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그저 한 학기를 마무리한 시점에서 “주님의 은혜구나”라는 말밖에….
나는 총장에 취임하며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먼저 학생들이 자긍심을 갖고 공부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이를 위해 일부러 학생들과 접촉할 기회를 많이 가졌다. 때론 총장실로 불러 대화를 나누고, 집으로도 불렀다. 학교 앞에 있는 우리 집에 격의 없이 놀러 오도록 했다. 처음엔 어려워하던 학생들이 지금은 할아버지를 만나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큰 대학이 있는가 하면, 루터대처럼 작은 곳도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슈마허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를 보면, 이 제목이 얼마나 유명한 명제인지 알 수 있다. 여기에 나는 한 가지를 더 붙이려고 한다. ‘작은 것이 강하다(Small is strong)’. 루터대는 규모 면에선 작지만, 아름다운 대학이고 강하다는 걸 보여줄 것이다.
점심식사를 하고 산책 중에 한 남학생을 만났다. “학생은 루터대에 온 것을 후회한 적이 있어?”라고 물으니, “두 달 전만 해도 학교에 대해 잘 몰라 후회했다”고 답했다. “지금은 어떠한가?”라고 다시 묻자, “교수님들이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화답했다. 바로 이것이다. 학생들이 많다보면 사랑을 나누는 게 쉽지 않다. 적은 수이기에 더 관심을 갖고 더 많은 대화가 오갈 수 있는 것이다. 루터대로 복귀한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해철 (1) 교수 퇴임 10년 목사 은퇴 5년만에 복귀
* [역경의 열매] 김해철 (2) 중학교 입학 4달 만에 6·25 터져
* [역경의 열매] 김해철 (3) 교회 출석 6개월… “목사 되겠다” 결심
* [역경의 열매] 김해철 (4) 뒤늦게 고교 졸업… 한국신학대학 입학
* [역경의 열매] 김해철 (5) 1967년 지원상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
* [역경의 열매] 김해철 (6) 목회인생 45년 중 루터교회서 43년
* [역경의 열매] 김해철 (7) 은퇴 앞두고도 개척… 200성도 꿈 이뤄
* [역경의 열매] 김해철 (8) ‘한 사람이 한 평 짓기’ 대학 육성 운동
* [역경의 열매] 김해철 (9) “100년에 거두려거든 사람을 키우라”
* [역경의 열매] 김해철 (10·끝) “여생도 복음의 중매자로 살아갈 것”
◇약력 1935년 경기도 광주군 곤지암리 출생, 한국신학대(한신대) 연세대연합신대원 루터교신학원 졸업, 팔복교회 명예목사, 루터대학교 총장
***[역경의 열매] 김해철 (2) 중학교 입학 4달 만에 6·25 터져
교회에 나가기 전까지 내 귀가 닳도록 들은 말이 ‘팔자소관’이었다. 장수해도 내 팔자, 단명해도 내 팔자, 행복하거나 불행해도 모든 게 팔자려니 생각했다.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이라는 시골 마을, 그것도 지독하게 가난한 농부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것도 팔자였다.
초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으나 중학교에 들어갈 형편이 안됐다. 당시 중·고등학교 형들이 흰 테 두른 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마냥 부러웠다. ‘나도 흰 테 두른 모자 좀 써보자’며 가족 몰래 서울로 올라가 중학교 시험을 쳤다.
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덕수상업중학교에 합격했다. 부모님은 공부를 하겠다는 아들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쌀과 소, 돼지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해주셨다. 입학하고 보니 모자에 흰 테가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둘러져 있었다. 온갖 잘난 척하며 그렇게 서울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다. 입학 넉달 만에 6·25가 터진 것이다.
“아! 이것이 내 운명이로구나. 타고나길 그렇게 태어났어. 가난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게 내 팔자야.”
그토록 공부를 하려고 애쓴 이유가 그런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공부만이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꿈도, 희망도 모든 걸 접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조차 계획 속에 포함하고 계셨다.
서울에서 상업중학교에 몇 달 다닌 덕에 금융조합에 쉽게 취직했다. 급사 겸 금전 출납을 담당했다. 고객 중에 곤지암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김갑순 선생이 있었다. 학교의 입출금 업무를 담당해 나와 자주 만났다. 그런데 이 선생은 나만 보면 계속 교회에 가자고 졸랐다.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교회가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 우리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다. 또 예수님에 대해 전한 사람을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몇 차례 건성으로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더 이상 김 선생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나의 고객이고, 내 동생의 담임이었으며, 내 초등학교 2년 선배였다. 어쩔 수 없이 김 선생을 따라 교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신대리교회에 처음 간 날, 1954년 6월 5일 주일이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30평 정도의 마루바닥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전쟁 통에 불탄 성경을 보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잠자리채 같은 게 사람들의 손끝을 지나갔다. 그땐 몰랐지만 헌금주머니였다. 김 선생은 지갑에서 돈을 꺼내 살며시 내 손에 쥐어줬다.
‘한번쯤 나갔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이후에도 주일이면 꼭 나를 데리고 교회에 나갔다. 그렇게 김 선생을 따라 3개월을 다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말씀처럼 내 마음이 움직였다. 주일이 기다려졌다. 불타고 남은 성경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밤 새워 읽었다.
9월의 어느 주일 낮 예배. 설교자는 지원상 전도사님이었다. 기독교한국루터회 제1대 총회장을 역임한 루터교단의 산 증인. 그분을 산대리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3) 교회 출석 6개월… “목사 되겠다” 결심
신대리교회 지원상 전도사님은 독일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료선교를 통해 아프리카를 변화시킨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에 관해 설교했다. 그 말씀은 19세 청년의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쪼개었다(히 4:12).
“나는 어떻게 이 땅을 변화시킬까?”
전도사님의 설교를 듣는 내내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이었다. 먼저 여섯 동생을 교회로 인도했다. 또 마을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을 데리고 교회로 향했다. 6·25 전쟁 이후라 동네에는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다. 부스럼도 많고,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리는 길고 뒤엉켰다.
금융조합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으로 소독용 약품과 솜, 머리카락을 깎는 기계도 구입했다. 아픈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고름을 짜고 약을 발라줬다. 머리를 감기고 깔끔하게 이발도 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드디어 네 놈이 연애당(교회)에 나가더니 완전히 돌았구나. 어렵게 일해 번 돈으로 이상한 짓이나 하고. 아이고 내 팔자야.”
회사에서도 연애당을 나간다고 손가락질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뒷산으로 뛰어올라가 힘껏 소리치고 찬양을 했다. 기도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후련해졌다. 아마 그 시절, 산에서 소리치며 발성 연습을 잘한 덕에 지금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 같다.
교회를 다니고 6개월쯤 됐을 때,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전쟁 후 잿더미 위에서 무지와 가난 가운데 죽지 못해 근근이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민족을 살리고 우리 가족을 구원하는 길은 내가 목사가 되는 길밖에 없다. 곤지암이라는 내 마을에 복음을 전하려면 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서울로 올라와 신학교를 알아봤다. 입학 자격이 고교 졸업을 해야만 주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내 학력은 덕수상업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 전쟁으로 중단했으니, 고등학교는 고사하고 중학과정도 4개월 공부한 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20세에 다시 중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고…. 이 학교, 저 학교를 기웃거리며 고교과정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봤다.
우연히 신설 고교인 배명고에서 1학년을 추가 모집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중졸 이상이어야 했지만 당시 조용구 교장 선생님을 찾아갔다.
“저는 목사가 되려고 합니다. 그 사명을 갖고 이 학교에 왔습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입학 자격이 안 된다고 했다. 다시 애원했다. “그럼 가입학이라도 받아주십시오. 한 학기 열심히 한 거 보시고 그 후에 입학 여부를 결정해주세요. 그때도 안 된다면 내쳐주십시오.”
1학년 2학기 배명고에 가입학했다. 스무 살이었다. 수학 기학 물리 외에 모든 과목을 줄줄 외웠다. 오가는 전차 안에서는 성경을 읽었다. 교장 선생님은 결국 “김군, 그동안 고생 많았네. 입학을 허락하네”라며 나의 등을 두드려주셨다.
내가 열 살도 채 안됐을 때, 이웃 마을의 유명한 보살이 있었다. 어느 날 우리 집을 지나던 중 그 보살은 나를 유심히 살피더니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20세 벽을 넘기 힘들겠어.”
어머니는 그 이후로 나를 위해 열심히 치성을 드렸다. 하지만 나는 스무 살에 예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었고, 신학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주님의 크신 은혜인가.
***[역경의 열매] 김해철 (4) 뒤늦게 고교 졸업… 한국신학대학 입학
1950년대 후반만 해도 대부분 교단에서 4년제 신학교만 나오면 준목 고시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뒤늦게 고교를 졸업한 나는 우리나라 신학교 중 처음으로 신학대학 인가를 받은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에 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입학했다. 어렵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으니,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겠는가.
신학교에 들어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장남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며 당장 주일부터 바로 교회에 나가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교회 나가면 먹을 걸 주냐? 서양무당 되어서 뭐할 거냐?”며 여전히 펄쩍 뛰셨다. 의절하자고까지 했다. 그럴수록 나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난 목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모님에게, 마을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학교 내에서 학생회 활동과 교단(한국기독교장로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교수님, 교회 어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는 한신대 설립 이래 처음으로 실천신학상(설립자 상)을 받았다.
졸업과 함께 서울 신당동에 위치한 새밭교회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1년 후에는 모교인 한신대 문동환 교수님의 권유로 신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맡게 됐다.
지금 나는 기독교한국루터회 소속 목회자다. 장로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어떻게 루터교 목사가 됐을까? 종종 이런 질문을 받았다.
현실적인 두 가지 소망 때문에 그랬다. 첫째, 신학교에서 중세기 교회사를 공부하며 ‘어떻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또 오도된 구원관에 대해 항거하고 용기 있게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둘째,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대학원에 진학해 루터와 종교개혁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꿈을 키웠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도사로, 학교에서 학생 생활지도 일을 겸하다 보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루터회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한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지원용 박사님이 루터신학원을 세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지원상 목사님도 그곳에서 공부할 것을 권면하셨고, 나는 “심사숙고해 결정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만, 당시 루터교단은 소속 교회라야 임마누엘교회(현 도봉교회)와 성요한교회(현 왕십리교회)가 전부였다. 신학교는 무인가인데도 대학 졸업 후 4년이나 더 공부를 해야만 하는 험난한 과정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주변의 교수님과 선배 목사님들은 한결같이 “왜 큰 교단을 두고 그렇게 작은 곳에 가서 고생을 자초하려 드느냐”고 만류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
루터교신학원 제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강권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다. 이때부터 매주 4개 대학을 전전했다. 루터교신학원과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 적을 두고 감신대와 연세대 문리과대학에도 나가 수업을 들으며 마음껏 공부했다.
이렇게 4년간 모든 수업을 마치고, 1년간의 실습을 한 후 마침내 1971년 1월 10일,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더 이상 아버지도 반대하지 않으셨다. “내 아들이 목사가 됐어”라고 오히려 동네에 자랑하시며 교회로 기쁘게 걸음을 옮기셨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5) 1967년 지원상 목사님 주례로 결혼식
결혼에 관심이 생긴 건 한신대에서 신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하며 한 여성과 정기적으로 전화통화를 하면서부터다. 그 여성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본부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봄, 가을학기가 되면 대학 본부의 학생과에서는 총회로부터 장학금을 수령해 재학생들에게 전달하곤 했다. 나는 장학금 관계로 본부에 전화하는 일을 맡았다. 본부로 전화를 하면 이 여성은 청아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장학금과 관련해 설명해줬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했던 것이다.
몇 살쯤 됐을까, 어느 분야에서 공부를 했을까, 어떤 사람일까…. 결국 총회본부를 자주 오가던 친구에게 그 여직원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한마디로 그녀를 표현했다. “콧대가 엄청 높단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그녀의 프로필을 읊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바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는데, 총회본부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대. 기장 전국청년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했고, 신앙심이 굉장히 좋다고 하더라.”
염치불구하고 편지를 썼다. 나는 김해철 전도사이고, 전화를 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다, 한번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이 없었다.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역시 묵묵부답.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란 속담을 되새기며 다시 세 번째 편지를 썼다. 기다리던 회신이 도착했다. “미안하지만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거절이었다. 자신은 김해철 전도사란 사람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신앙생활은 열심히 해도 목회자의 아내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어 네 번째 편지를 보냈다. 몇 달 기다렸을까. 만나자는 회신을 받았다. 그러나 이정옥이란 여성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때쯤 나는 한 신문에서 여대생들을 대상으로 배우자감을 설문 조사해 기사화한 것을 보았다.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등 소위 ‘사’자 붙는 신랑감을 비롯해 외교관 교수 등을 일등 신랑감으로 꼽았다. 밑으로 죽 내려가보니 20등 정도에 ‘사’자 붙은 ‘목사’가 나왔다. 같은 그룹을 눈여겨봤다. 경찰과 지게꾼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설문 내용에 관해 언급하면서도 “한번 믿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그녀를 설득했다. 진실은 통한 것일까. 결국 우리는 1967년 10월 서울 인사동의 기독교태화관(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작성된 곳)에서 루터회 1대 총회장이신 지원상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다.
사실 아내가 조금씩 마음을 연 데는 주변 분들의 도움이 컸다. 아내는 내가 ‘귀찮게’ 하자, 외삼촌인 이운집 목사님(당시 흑석동교회 담임)에게 상담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은 “사모의 길이 힘들거나 어렵다고만 여기지 말고, 상대방의 됨됨이를 보라”고 충고했고 한신대 관계자들을 통해 나에 대해 알아봤다고 한다. “김해철 전도사는 보증수표 같은 사람이야.” 아내는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를 만난 것이다.
40여년을 함께 살면서 아내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수많은 사역들을 지원했다. 루터교 여선교연합회장직을 비롯해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회장, 아시아교회여성연합회 중앙위원, 세계기도의 날 국제위원회 실행위원, 루터교세계연맹 동북아지역 여성조정관 등의 직함을 갖고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6) 목회인생 45년 중 루터교회서 43년
한국에 루터교가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것은 6·25전쟁이 끝난 1958년부터다. 세 명의 선교사가 1월 13일 서울에 도착해 선교를 시작했고, 9개월 뒤 지원용 박사가 귀국해 한국루터교선교부에 합류했다. 교파 분열의 혼란기에 선교사들은 ‘깨끗한 출발’을 결단했다. 다른 교단들이 교회를 세우고 전도할 때 루터교는 매스컴 선교에 나섰다. 라디오용 드라마를 제작해 CBS를 통해 방송했고, 기독교 통신강좌도 시작했다. 출판매체를 통한 선교의 일환으로 59년 컨콜디아사를 설립하고, 해외 신학서적 및 일반 기독교 서적, 시각장애인용 점자교재 등을 배포했다.
나는 지난해 목회인생 45주년을 맞았다. 장로교(서울 새밭교회)에서 2년간 사역한 것을 빼면 루터교회서만 43년을 활동했으니, 어찌 보면 루터교 50여년 선교 역사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 기간 중 다섯 교회에서 사역했다. 임마누엘교회(현 도봉교회) 6년, 성누가교회(현 옥수동교회) 2년, 성베드로교회(현 부산제일교회) 5년6개월, 성삼위일체교회(현 중앙교회) 14년9개월, 그리고 루터교 선교 40주년 기념인 팔복교회를 개척하고 7년7개월을 시무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하나님의 생각은 분명 나(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걸 교회를 개척하며 깨달았다. 그럼 하나님의 생각은 어떻게 다를까?
루터교회의 모교회라 할 수 있는 임마누엘교회에서 시무하다 72년 1월 옥수동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당시 선교사였던 도로우 목사님(루터대 명예총장)이 허송 전도사님(기독교한국루터회 제3대 총회장)과 함께 사역했던 곳으로 개척한 지 4년이 된 교회였다. 내가 부임해 2년간 사역하면서 교회는 배 이상 성장했고, 특히 지역사회의 센터로서 역할도 잘 감당했다. 그 무렵 나는 루터교 총회본부의 서기직과 전도위원장직을 겸하고 있었다.
우리 교단은 당시 장기전도계획의 일환으로 서울 이외의 지역인 부산에 교회 부지를 마련하고 교회를 개척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때만 해도 루터교회는 교회개척보다 매스컴 선교에 주력해 서울에만 6개의 교회가 있었다. 루터교가 교단의 모습을 갖추고 성장하려면 서울에서 벗어나 전국의 주요 도시에 교회를 개척해야만 했다.
부산 광안동에 200여평 땅을 구입할 때만해도 몇몇 목회자가 지원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막상 터를 갖추고 개척의지를 묻자 한결같이 “못가겠다”는 것이었다. 전도위원장으로서 몇 달간 목회자를 찾으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선 말씀을 통해 나에게 ‘거룩한 부담’을 안겨주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수차례 하나님께 ‘항변’을 쏟아냈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7) 은퇴 앞두고도 개척… 200성도 꿈 이뤄
1974년 2월 12일 가족과 함께 교회 개척을 위해 낯선 땅 부산으로 이사했다. 40일 정도 지난 3월 20일 저녁, 두 할머니가 임시 목사관을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부산에 루터교를 알린 시작이었다. 이후 교회 대지에 임시 집회소 33㎡(10평)을 지었고, 6월 2일 주일에는 21명의 세례교인과 입교자가 생겨 작은 예배당은 북적였다.
성도들과 주민들의 요구로 어린이를 위한 교회학교를 개설했다. 이후 점차 성도들이 늘자 도저히 임시 예배처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런 부산의 개척 이야기가 미국의 자매교단 신문인 ‘루터란 위트니스’에 실렸다. 그 기사 덕분에 나는 미국 동역교회의 프리우스 총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선교 협의차 내한한 길에 부산까지 내려온 것이다. 프리우스 총회장은 “지금 당신에게 급선무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임시 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게 어렵습니다. 교회 건축이 시급합니다.”
그는 책임지고 건축비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4만 달러를 보내줬다. 여기에 성도들의 건축헌금을 보태 약 2000만원을 들여 마침내 교회 본당과 사택 등 총 605㎡(183평)을 건축해 하나님께 봉헌했다. 75년 12월 21일 부산제일교회 봉헌예배를 은혜 가운데 드렸다.
부산으로 떠나기 전, “못 가겠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께 항변했다. 그러나 그때 내 속에 들어온 말씀은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 55:8)였다. 분명한 건 하나님의 생각은 결국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이후로 나는 어떠한 길 위에서도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주저했던 적은 있었다. 98년 팔복교회를 개척할 때도 그랬다.
당시 루터교단은 한국선교 40주년을 기념해 루터신학교(현 루터대) 안에 기념교회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교회개척 겸 담임목사를 물색하던 중 나에게 의향을 물어왔다. 솔직히 40주년 기념교회에는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총회장직과 루터중앙교회 담임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그것도 60세를 훌쩍 넘겨 교회를 개척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이미 여러 차례 축복의 통로를 경험한 터라 금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주님이 지금 나를 필요로 하고, 교단에서 나를 원한다면 마지막 노후를 불태워 보자.”
98년 5월 18일 많은 성도들의 축복 속에서 팔복교회를 개척했다. 그때 아내와 나는 두 가지 기도제목을 세우고 기도했다. “앞으로 7년 후 목회 은퇴 시에는 명예롭고 건강한 몸으로 떠나게 해주세요. 재적 성도는 200명이 되게 해주세요.”
전 교인과 함께 전도 총력전을 펼쳤다. 어깨띠를 두르고 교회 주변 마을에 전도지를 뿌렸다. 더운 여름, 아내와 아파트 단지에 전도지를 뿌리다 쫓겨난 적도 있었다. 주변 군부대와 경찰지구대, 노인병원, 국가보훈병원 등을 방문해 위로예배도 드렸다. 천재지변을 당한 이웃을 위해 늘 앞장서 달려갔다.
바쁘고 거침없이 사역했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세상이 정한 은퇴의 나이가 되었다. 2005년 12월 첫째 주일에 은퇴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부의 기도제목처럼 명예롭고 건강한 몸으로 가족과 성도들의 축복을 받으며 떠났다. 재적 성도는 200명에서 6명이 미달됐다. 그러나 물 붓듯이 부어주신 주님의 은혜가 족할 뿐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8) ‘한 사람이 한 평 짓기’ 대학 육성 운동
나는 한국루터교선교부에서 최초 루터교 헌법을 제정하고 소집된 제1차 정기총회(1971년 2월)에서 서기에 임명됐고 15년을 일했다. 이후 부총회장 8년을 거쳐 1993년 10월 제23차 정기총회에서 지원상 목사님에 이어 제2대 총회장에 선임됐다.
이듬해 10월 왕십리교회에서 열린 제24차 정기총회에서 ‘루터란 비전 2000’을 선언했다. 루터란의 교단장으로서 새로운 세기의 지평을 열자는 의미에서 세 가지 비전을 선포했다.
“첫째, 모든 지교회는 자주 자립하는 교회가 되어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모되어야 한다. 둘째, 한 사람 한 평 짓기 운동에 동참해 루터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자. 셋째, 중국과 북한선교의 기틀을 준비하자.”
루터신학교의 교수 겸 발전후원회 회장도 겸하게 된 나는 루터신학교를 99년까지 대학으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게 됐다. 두 번째 비전인 ‘한 사람이 한 평(300만원) 짓기 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 있다.
최일평 집사님. 부모님이 자신의 이름을 지을 때 ‘최소한 한 평’이란 뜻에서 이렇게 지었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이 이때를 위함이라며 과감히 결단했다. 그리고 최소한 한 평, 그 이름대로 씨앗을 심었다.
한번은 이무열 목사님이 핸섬한 젊은 청년을 소개했다. 그 젊은이는 미국 하버드대 법대를 졸업하고 국제 변호사로 일하는 이상헌 박사였다. 그에게 루터교회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를 물었다.
“저의 부모님은 의사로서 오래 전에 도미하셨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가톨릭교회에 나가고, 아버지는 미국의 루터교회를 나가는데, 한국에 가면 꼭 루터교 총회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박사는 이후에도 몇 차례 본부를 찾아와 나와 교제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한 평 짓기 운동을 전해 들었고, 그 청년은 헌금도 했다. 이 박사가 출국할 때 선물로 ‘주를 찬양하세’란 설교집을 전달했다. 그리고 1년쯤 지났을까.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가 준 설교집을 모두 읽었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더 큰 기적이 이내 일어났다고 고백했다.
“건강하시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어요. 어머니는 큰 슬픔에 성당에도 안 나가시고 아예 문 밖 출입을 안 하셨지요. 그런 어머니에게 설교집을 전해드리며 꼭 읽어보라 당부했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새 힘을 얻으셨을 뿐 아니라 아버지가 다니시던 루터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피자 하면 ‘피자헛’이란 상호가 떠오른다. 루터대 명예총장인 도로우 박사님이 한 외국인을 내 사무실로 데리고 왔다. 피자헛 국제본부 이사인 빌 레이스하드씨였다. 한국에 피자헛 오픈 기념으로 좋은 일을 해보자며 한국 지사장과 함께 당시 3000만원(10평)을 루터신학교에 기증했다. 레이스하드 이사는 이후에도 후원금을 보내왔다. 총회장직에서 물러나고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 참으로 감격스런 대답이 나왔다.
“피자헛을 사임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피자들을 모아 굶주리는 전 세계 어린이들을 돕고 있어요.” 푸드뱅크 사업가로 변신한 그의 끝없는 열정을 나도 닮고 싶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9) “100년에 거두려거든 사람을 키우라”
1996년 여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동역교회 본부를 찾아갔다. 총회장과 선교부장을 만나 루터신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는 것은 한국루터교회의 최우선 과제임을 설명했다. 그리고 시설 확충을 위해 한평 짓기 운동을 전개했고, 이를 통해 100만 달러를 모금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100만 달러를 빌려준다면 한국교회가 원리금을 갚겠다”고 부탁했다.
내 말을 귀담아 듣던 선교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선교를 해왔지만 한국처럼 책임을 다하고 원리금을 갚는다는 조건으로 돈을 빌려달라는 곳은 없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본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100만 달러를 보조한다. 그 가운데 70만 달러는 후원금이다. 2000년부터 30만 달러에 대한 원리금만 갚으면 된다.” 마침내 루터신학교는 1997년 12월 루터신학대로 승격했고, 총회 본부와 대학 측이 30만 달러에 대한 원리금을 10년간 모두 갚았다. 이제 루터대는 제2의 중흥기를 맞기 위해 교육부로부터 증원 및 증과의 허락을 받아 다시 한번 재기를 도모하고 있다.
“당년에 거두려거든 곡초를 심고, 10년에 거두려거든 과수를 심고, 100년에 거두려거든 사람을 키우라.”
목회자이자 현재 루터대 총장으로 일평생 주의 일꾼으로 살면서 이 말을 교훈으로 삼았다. 그래서 장학사업에도 앞장섰다. 솔직히 나도 고교 시절엔 캐나다연합교회가 주는 장학금으로, 신학교 시절엔 교회 봉사를 하고 받은 장학금으로 공부했다. 루터교신학원과 미국의 자매교회가 주는 장학금으로 유학생활도 마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장학 혜택에 대한 사랑의 부채의식이 인재 양성이라는 비전으로 이어진 셈이다.
부산제일교회를 개척했을 때 한 집사님이 셔츠 상자를 보자기로 싸서 가져왔다. 그것을 풀어보니 1000원짜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300만원을 헌금한 것이다. “친분 있는 부인들과 ‘다이아몬드 목걸이 계’를 부었는데, 이번에 제가 탔습니다. 그런데 일전에 목사님께서 ‘겉 단장보다 속 단장하기에 힘쓰라’고 설교하셨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그 돈을 고스란히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동기에 반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자녀들을 키우는 데 사용키로 하고 150만원은 유치원 시설비로, 나머지는 부산제일교회 밀알장학기금으로 내놓았다.
또 1979년부터 14년 9개월 동안 서울 중앙교회 목사로 시무했을 때 일이다. 교회 옆에서 어렵게 홀로 사는 할머니가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목사님과 사모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어요. 목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마음대로 사용하세요.”
100만원을 내놓는 게 아닌가. 80세를 넘긴 이 할머니는 자녀도 없었다. 쪽방에서 나오는 월세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계속 사양하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일단 받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이 돈은 과부의 두 렙돈만큼 소중하니 여기에 돈을 더 보태 장학기금을 만들어 젊은이들을 돕자. 그들로 하여금 할머니의 정신적 손녀들이 되어드리게 하자.” 이렇게 해서 중앙교회의 루터장학기금이 탄생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퇴 후에도 일정액의 곤암장학금을 내놓고 있다.
늘그막에 목회 꿈나무들을 키우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역경의 열매] 김해철 (10·끝) “여생도 복음의 중매자로 살아갈 것”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나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중학교에 들어가 흰 테 두른 모자를 쓰고 등교하는 게 꿈이었는데, 교파와 국가를 초월해 마음껏 신학이란 학문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팔복교회에서 명예목사 추대를 받고 은퇴한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더 많은 교회와 기관을 다니며 설교하고, 때로는 미자립교회를 방문해 말씀도 전하면서 지쳐 있는 젊은 목회자들을 격려하는 것 또한 주님의 물 붓듯이 부으시는 은혜의 결과다.
마지막으로 다복한 가정을 주심에 감사드린다. 오는 10월이면 아내와 결혼한 지 43주년을 맞는다. 아내는 평생을 함께한 귀한 동역자이다. 매 순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를 고민할 때, 아내는 한결같이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동의했다. 아내의 순종에 고마울 뿐이다. 그러니 내 잔이 넘칠 수밖에….
구약 히브리어에 ‘사딕’이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나의 의로움’을 뜻한다. 새 신부를 부르는 ‘새댁’이란 말이 ‘사딕’과 비슷해 나는 줄곧 아내를 ‘새댁’이라고 불렀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가족, 특히 아내에 대한 배려를 잊고 사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이혼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높다는 통계가 나왔을까. 참으로 심각한 문제다. 상황이 이렇다면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쯤 시간을 내어 부부가 손을 잡고 외출할 것을 권한다. 나는 지금도 아내와 ‘재건 데이트’를 한다. 1960∼70년대 가난한 연인들이 돈을 조금 들이고 연애했던 데이트 문화를 말한다. 나도 젊었을 땐 서울 명동에서 값싼 두부백반을 사먹고 남산을 오가며 데이트를 즐겼다. 요즘에는 경기도 용인시 루터대 뒤쪽에 있는 산을 오르내리며 데이트를 한다.
부부 사이에 꼭 필요한 것이 서로 주고받는 대화이다. 목회의 비전과 자녀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누라. 같이 걸으며 대화를 나눌 때 얼마나 행복한가. 기적의 매체가 바로 대화이다.
평생 이런 마음을 안고 살다보니 아내와 나는 중매를 많이 했다. 그 중엔 성공한 적도 있고, 실패한 적도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 “나의 어리석음을 용납하라”며 이같이 말씀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목회자는 중매도 잘해야 하지만,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해서 저들로 하여금 평생 신랑되신 예수님의 순결한 신부로 살게 하는 ‘중매’, 즉 전도에 힘써야 한다. 75세에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만났다. 때론 주님을 모르는 청년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들을 ‘중매’ 중이다.
오라티오(Oratio·기도, 경건의 사람) 메디타티오(Meditatio·학문의 사람) 텐타티오(Tentatio·실천의 사람). 이런 인재들을 양성하는 게 나의 비전이다. 그들이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고 각계각층에서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아 한국교회, 더 나아가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나는 그런 ‘중매쟁이’로 노년의 삶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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