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신 예수님
말씀:마가복음 8:22-26
마가복음은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막은 갈릴리와 그 주변 사역(1:1-8:21)이고, 제2막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길(8:22-10:52)에 있었던 사역이고, 제3막은 예루살렘에서의 사역(11:1-16:20)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제1막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부터는 우리는 제2막을 공부하고자 합니다. 제2막은 처음과 끝이 소경 치유로 시작해서(8:22-26) 소경 치유로 끝이 나는(10:46-52) 수미쌍관(inciusio)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2막은 소경과 관련된 내용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2막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영적인 소경 상태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막에서는 ‘노중에’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8:27; 9:33-34; 10:17, 32, 52).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제2막의 중심 주제로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벳새다 지역에서 소경을 고쳐 주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벳새다는 게네사렛 호수 서편에 있는 벳새다가 아니라 동북편에 있는 벳새다입니다. 22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벳새다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안수하여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소경의 두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소경에게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24절에 보면 이에 소경은 주위를 살펴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기는 보이는데 똑똑하게 보이지는 않고 희미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그 모습이 나무 같은 것이 걸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의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소경이 다시 주위를 주목하여 보았는데 그때 그의 눈이 완전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한 번에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두 번이나 안수하셔서 고쳐 주셨을까요? 본문이 거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군사적인 메시아로 여기는 중간 단계를 거친 후에 고난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메시아이심을 밝히 파악하게 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안수로 눈이 나아 모든 것을 밝히 볼 수 있게 된 소경은 대단히 기뻤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한없이 감사의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곧 그 소경으로 하여금 마을에 들어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마을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군사적인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5:5-6절에 기초해서 유대인들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을 메시아의 표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군사적인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군사적인 메시아로 오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벳새다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에만 관심이 있고 그 이적에서 계시해 주시고 있는 복음 진리에는 강팍 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음을 감추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입니다. 이사야 6:9-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이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배척하며 믿지 않는 곳에서는 이적을 베푸시지 않으셨습니다(참조. 마 13:58). 그리고 이적을 체험한 자들에게는 자신이 행한 일을 알리지 말 것을 경계시키셨습니다(마 8:4; 막 5:43, 9:9).
그런데 벳새다에서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쳐 주신 것은 이제까지 행하신 다른 이적들과는 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소경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고쳐 달라고 간청했을 때 그 소경의 손을 이끌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경을 고쳐주시지 아니하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 마지막 절에서 고침 받아 광명의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소경으로 하여금 집으로 보내시며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심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행한 일을 드러내지 않게 하신 일에서 알 수 있습니다(26). 당시 예수님의 행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시각과 인식은 계시 의존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가르침이나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쫓아내시는 일이나 여러 가지 이적이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듣고도 귀머거리였고, 보고도 소경이었고, 입이 있어도 벙어리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깨닫기에 둔하고 강팎 하였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이적을 보고자 하는데 있었습니다. 곧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는데 있었습니다.
벳새다 사람들의 경우에서는 그 정도가 특히 심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6:5절에도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배척하는 고향에서는 아무런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 벳새다 사람들도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왜 자신을 보고자 하여 모이는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그들에게 이적을 나타내시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권능을 베풀어 주어야 할 자에게는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들리신 것도 그래서 였고, 또한 소경을 고쳐 주신 것도 그래서 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된 자를 고쳐 주시기 위해 그를 마을 밖으로 이끌고 나갔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는 소경을 고치는 이적을 직접 보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는 방법은 그들의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적절하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벳새다 소경을 고치실 때에는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안수해 주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도 단번에 눈을 밝히 고쳐 주시지 않으시고 두 번에 걸쳐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든지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나 장애 자를 고치시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 모두는 거룩하시고 크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시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벳새다의 소경 되었던 자는 지금은 두 눈이 온전해져서 만물을 밝히 볼 수 있는 은혜를 예수님에게서 입었지만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존재 목적과 그분이 행하신 권능의 의미를 확연히 깨달아 예수님이 베푸시는 죄 사함과 영생의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의 소경을 고치시게 된 데에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나와 그를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고쳐 주셨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그 이유가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뜻도 목적도 없이 소경의 눈을 고치시는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항상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목적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천국의 능력을 행하여 나타내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증거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받으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소개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서 본문의 소경을 고쳐주신 사건은 더욱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인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예수님이 그동안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천국의 능력을 행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지만 사람들과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존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에서 나타내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예고하고 알려 나가십니다. 이 일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하나님에 의해서 신앙 고백 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말씀 해 나가십니다. 이제 이런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참조. 8:31; 9:31). 예수님은 이에 앞서서 벳새다에서 한 소경을 고쳐주시는 이 이적의 능력을 행하여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 것도 보지 못하던 상태에서 이제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지니신 분이심을 다시 한번 나타내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기 계시의 사건으로 이 벳새다 소경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권세를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듣고 보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얻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를 행하여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중보기도’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순종에까지 나아가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스릴 권세를 행사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 최종적인 일은 물론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는 일에서 보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땅 위에 있는 동안은 본문의 소경을 고쳐 주시는 일을 하시는 것과 같은 사역에서 실제 죄와 사단의 권세를 멸하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을 자기에게 나아오게 하여 자신 안에 모으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 안에 죄가 없는 나라요, 영생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렇게 이사야 선지자에게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누가복음 4:18-19절을 보면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들의 눈으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 곧 주의 구원을 보게 하십니다(참조. 눅 2:29-32).
벳새다의 소경되었던 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고쳐 주신 이적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단지 온전한 눈으로 만물을 보게 되는 은혜만을 입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생명의 빛을 보는 은혜의 자리로 인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모든 사람이 영접하지 않는데,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는 복에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요 1:4-5, 9-14). 예수님은 비록 지금은 소경으로 있지만 그런 그도 그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다른 지역에서 행하셨던 이적을 이곳 벳새다의 소경에게 행하셔서 그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마음에 회심과 신앙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영혼이 더 이상 어둠 속에 있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광명한 세계인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과거 우리도 소경 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었다면 우리는 육의 눈이 멀지는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죄와 사단의 권세에 사로잡혀 어둠 속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인이 가는 곳인 ‘지옥’은 그곳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곳이요, 전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볼 수없는 어둠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값으로 인해서 그 불행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에 의해 생명의 빛에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의 방식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전히 달라져 있는 존재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신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진행되면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이 생명의 주가 되신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 삶을 맡기고 그분의 인도함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생명을 받은 자를 빛의 자녀로 말하면서 빛의 자녀답게 살 것을 권면합니다. 에베소서 5:8-21절을 보면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 활동 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구속함을 받아 죽음을 보지 않고 생명을 누리는 그 복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이 세상에서 힘 있게 발휘하는 그 즐거움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는 하늘에 있는 해는 빛을 발산합니다. 해는 단지 해가 지니고 있어서 거기에서 나오는 빛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런데 그 빛은 참 아름답습니다. 온갖 색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빛을 나타내십니다. 우리를 빛의 자녀 삼으시고 그 자녀가 지니고 있는 빛을 나타내십니다. 그것이 빛의 자녀답게 행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빛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말합니다.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서 성령의 다스림에 의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빛의 자녀에게는 이런 생각을 품게 하시고, 이런 일을 행하게 하십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며, 빛의 자녀는 그 나타내시는 빛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에서 나오는 악한 죄의 본성 그 자체로서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을 증거케 하는 빛을 그의 자녀된 우리를 통해서 발산하여 세상에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어 광명한 하나님 나라의 세계를 사는 자의 실체적 모습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공동체로 교회를 이루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얼마나 힘 있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벳새다 소경을 고쳐 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적인 소경과 같은 저희들의 마음 눈을 밝히사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 예수님을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그리스도로 믿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에 참예하는 복된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