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실산성 (철원군)
<대전리의 풍경>
강원도 철원군 대전리의 서북쪽에 있는 옛 성터이며 가실현성지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성의 둘레는 452m이고 길이는 현재 약 250m가 남아 있으며 타원형으
로 성벽을 돌로 쌓았다.
거성(철원읍성)과 연관된 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갈야산고성 (삼척시)
<성북동의 산>
강원도 삼척시 성북동 북쪽의 갈야산(해발 111m) 남동쪽과 북동쪽 능선의 산세를 이용하여 돌과
흙으로 쌓은 포곡식 성으로 갈야산성지라고도 칭한다.
전체 길이 약 400m·높이 120~200cm·상부 너비 3.5m·기저부 너비 약 5m이다. 현재 산 꼭대기
의 동쪽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능선에 길이 약 155m, 북동쪽의 능선상에도 길이 250m의 성벽이 남
아 있다.
토성의 하단부에서 6~7세기 경의 신라고분 유적이 발견되면서 그 주변에 무수한 기왓조각 및 토
기조각들이 발굴되었다. 기왓조각 중에는 성의 축조 시기와 관련된 글자가 새겨진 것들이 발굴되었
다. 이외에도 성안에는 성과 관련된 건물지가 있다.
갈야산은 원래 원래 실직국(悉直國) 실직씨(悉直氏)의 터전라고 하며, 성안에는 실직국 시대의
임금이 마시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갈야산 동쪽 기슭에 삼척김씨 시조묘인
실직군왕릉(강원기념물 15)과 대규모 고분군이 있다. 발굴 당시 금제귀고리·유리옥 및 굽은옥 등의
장신구, 굽다리접시 및 항아리 등의 토기류, 철제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과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신라의 동해안 북쪽으로의 진출이 활발히 진행되던 당시 삼척
지방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의 성이다.
강릉고려산성 (강릉시)
<고려산성>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율곡로(정동진)동해가 내려다보이는 해발고도 60∼90m의 경사지에 남아
있는 돌로 쌓은 성이다.
성의 위치로 보아 바다에서 침입하는 적들을 막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름과 성 쌓은 기법, 성에 남은 유물 등을 통해 축조 시기를
고려 초기로 보고 있다.
성은 1곽으로 되어 있으며 면적은 19,998.5㎡, 총 길이는 약 451m이다. 서벽과 동벽만이 남아
있으며 현재 높이는 2∼3.5m이며 각 벽에는 문 터가 1개씩 있고 서벽의 문 터 북쪽에는 성가퀴가
있다. 이 성가퀴를 통해 적의 동태를 살펴서 방어에 이용하였다.
성벽 쌓기에 이용된 재료는 성 주위의 돌이며 돌의 모양은 불규칙한 직사각형이다. 잔돌을 성벽
의 틈에 끼워넣어 튼튼하게 만들었다.
성 안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조각과 자기조각이 출토되었으며 기왓
조각도 출토되었는데 그 무늬가 다양하다. 강원도에 있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성곽을 연구하
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강릉읍성 (강릉시)
<읍성내발굴 흔적>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 명주동, 용강동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강릉부의 행정성(行政城)이다. 세종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1452년 ‘읍토성(邑土城)’으로 불려진 토축 산성으로 기록되어있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632.4m, 높이 1.2m의 토축과 둘레 41.7m, 높이 0.6m의 석
축 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1512년(중종 7)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으며 문을 4곳
에 만들었고 성의 평면 형태는 전체적으로 마름모꼴을 하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약 209,355㎡ 이
다.
서북쪽의 벽은 내탁식으로 축조하였으며, 남동쪽의 벽은 내외협축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현재 성
벽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동북쪽 벽에 해당하는 15m 가량의 성벽이 천주교임당성당 동쪽에 남아
있다.
고성리 산성 (정선군)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고성리산 319 외 3필지 고방의 북서쪽 해발고도 425m 산 정상에 축조된
면적 53,980㎡의 석성으로 서북쪽으로는 남한강 지류인 동강이 흐른다.
축조 시기는 신라시대 또는 고구려시대로 추측되나 확실한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다.
성벽은 난층쌓기로 축조하였고 석재는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성벽의 가장 높은 곳은 약 8m, 안쪽
은 4m 정도이며 성의 시작점에서 460m 지점에는 ‘ㄷ’자 형태의 성치가 너비 5m, 길이 6m, 높이 37m로 있으며 성내의 서남쪽 가장 높은 곳에 봉수대터가 전해오고 있다.
고성읍성 (고성군)
<고성군의 풍경>
강원도 고성군 구읍리에 있는 옛 성터. 성의 둘레길이는 600m로서 방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축성
되어 있는데,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다. 성벽의 밑너비는 2m, 높이는 5m 정도이다.
공기산성 (영월군)
<공기리의 풍경>
강원도 영월군 북면 공기리에서 마차리의 솔치로 넘어가는 중간쯤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길이
는 약 2km이다.
흙을 일정한 높이로 쌓아올린 보축법(補築法; 성벽연결이 힘든 곳을 메워 성을 축조하는 방법)을
이용하여 축성하였으며, 중간중간에 돌로 쌓은 석축(石築)의 흔적도 남아 있다.
성벽의 전면(前面)은 북쪽 방향인 평창을 향해 있다. 1217년(고려 고종 4) 거란족이 침략했을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일설에 의하면 영월 흥교사(세달사, 현재 폐사)의 승려였던 궁예가 892
년 영월·주천·평창·진부를 점령할 때 축성되었다고도 하는데 고려시대의 산성일 것이다.
광태리고성 (삼척시)
<광태리의 산속 풍경>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광태리에 있었다고 하나 흔적이나 자료가 없다.
괘방산성 (강릉시)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의 괘방산(掛榜山)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500m 정도이
다. 1998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며 강릉 고려성과 함께 고려시
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은 괘방산 능선에 남북 방향으로 축조되었다. 등산로를 따라 고
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으며, 괘방산을 지나 삼우봉 정상부에서 폭 20m, 길이 40m 정도의
채석흔(採石痕)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부터 안인진리 방향으로 약 500m 가량 성곽의 흔적이 발견
되고 있다.
권금성 (속초시)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둘레 약 3,500m. 설악산성 ·옹금산성(擁金山城) ·토토성(土土城)이라고
도 하며,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다.
설악산 케이블카가 다니는 앞쪽, 깎아지른 듯한 석산 위에 있으며, 해발 800m의 성 정상에는 80
칸에 이르는 반석과, 실료대(失了臺) ·방령대(放鈴臺) 등이 있다.
신라 때 권 ·김 두 장군이 난을 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이 침입하
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말 이전부터 존속
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금강산성 (강릉시)
강원도 강릉시 소금강길 579-7 (연곡면)에 있으며 아미산성 또는 만월성이라 불린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마의태자가 쌓았다고 하며, 고려 충숙왕의 사위인 최문한의 아들 최극임이 의병을
이끌고 성을 쌓았다고도 한다.
서쪽의 성벽은 폭포 부근에만 약 400m정도 나타나 있고 동쪽 성벽은 남·서쪽으로 뻗는
산기슭을 따라 약 400m의 성벽이 남아있으며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기슭을 따라
약 700m의 성벽이 따로 쌓여있다.
성벽의 크기는 곳에 따라 다르며 높이 1∼2m, 상부의 폭 1m이다.
금두산성
<치악산>
원주시 소로면 학곡리의 치악산 계곡에 있으며 총 길이가 3.6km이며 산성테에서 그릇 조각과 기
와 파편이 있지만 축조 연대는 문헌이나 자료가 없다.
영원산성과 해미산성이 가까이에 있으며 서로 교류하여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
도록 자리 잡고 있다.
기우산성 (정선군)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신월리의 기우산에 해발 870m의능선에 있으며 애산성과 마주 보고 있는
위치이고 신월리 고성이라고도 한다. 성의 길이는 400m 이며 삼국시대에 자연석으로 쌓은 산성이
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옛모습을 찾기 어렵다.
노산성 (평창군)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 조선 선조 때 군수 김광복(金光福)이 쌓았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군
수 권두문(權斗文)이 지사함(智士涵)·우응민(禹應民)·이인노(李仁怒) 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왜군
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1.3m 전후이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이어서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하고 축조되었다. 서벽은 길
이가 약 115m 정도인데, 그 중 잘 보존된 부분은 길이 8.2m·높이 5.3m 규모이다. 주로 편마암을 사
용하였고 면석(面石)은 품자 형태로 쌓았으며 돌로 뒷채움을 하였다. 남벽과 동벽은 길이가 각각
334m, 122m인데, 대부분 붕괴되었다.
성 안에는 정상 부근에 우물터 1곳이 남아 있는데 규모는 동서 7.7m·남북 8.5m이고 깊이는 약
2m이다.
이밖에 고려 후기에서부터 조선 초기의 것들로 추정되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들이 출토되었다.
노성산성 혹은 평창노 산성 (평창군)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하리 및 중리에 있으며, 10 조선 선조 때 군수 김광복(金光福)이 쌓았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군수 권두문(權斗文)이 지사함(智士涵)·우응민(禹應民)·이인노(李仁怒) 등과 함
께 군사를 이끌고 왜군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의 둘레는 517m이며, 현존 성벽의 높이는 1.3m 전후이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이어서
성벽은 북쪽의 절벽 부분을 제외하고 축조되었다.
대공산성 (강릉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있으며 강릉시에서 서쪽으로 약 20km쯤 되는 성산면 보광리 북쪽에 있
는, 길이 약 4km의 산성이다. 보현산성(普賢山城) 또는 대궁산성(大弓山城)이라고도 불리우기도 하
며 축성연대는 미상이다.
축성에 관하여 두 가지 전설이 전한다. 옛날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溫祚王)이 군사훈련을 위해 쌓
았다고도 하고, 또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 성을 가진 사람이 쌓았기 때문에 대공산성이라는 이름
이 붙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동주산성 (철원군)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에 있으며 지표 수습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되며 태봉국 도성의 남쪽 방어기지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높다.
두타산성 (동해시)
강원 동해시 삼화동 1414년(태종 14)에 축성된 것으로, 해발 1,353m의 두타산 중턱에 부분적으
로 성벽이 남아 있다. 천연적인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자연지세에 따라 부분적으로 쌓았기 때문
에, 성을 한 바퀴 도는 데 약 7일 정도 걸리는 매우 큰 성이다.
석재는 산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약간 다듬어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벽이 그리 견고하지
는 않으나 천연의 요새지로서 중요시되었다.
도원산성 (영월군)
<도원리의 냇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도원리에 있는 산성으로 길이 약 2km로 추정되지만, 성벽의 흔적은 거의 남
아 있지 않는다.
영월군 북면 공기리에 있는 공기산성(恭基山城), 수주면 법흥리에 있는 법흥산성(法興山城)처럼 토
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합된 형태인 데다 모두 성의 전면(全面)이 평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보아
세 산성이 모두 동일한 양식으로 축성되고,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을에 성안(城內)·병진내(兵陣川)·화약골 등 군사와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성지(城址)가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마방리토성 (철원군)
<철원군의 산>
강원도 철원군 마방리의 토성은 높이 0.9∼2.1m, 너비 2∼4m, 둘레 약 700m의 네모꼴 산성으로
역시 궁예 때 축조되었다고 한다.
맹방고성 (삼척시)
<삼척로의 산 모습>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삼척로에 있음
명주산성 (강릉시)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장안동의 북쪽 구릉에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km이고, 성의 높이는
외측 3~5m, 내측 1~1.5m이다.
성벽은 변성암과 세립질 화강암으로 축조되어 성벽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다. 성의 내부에서 몇 개
의 건물지와 토기 및 기와조각들이 발견되었으며, ‘명주성(溟州城)’이라고 새겨진 와당이 발견되었
다.
명주성은 신라 하대에 왕위계승에 실패한 김주원(金周元)이 강릉으로 낙향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
된다.
방내리성 (강릉시)
강릉시 연곡면 방내리 지역은 남쪽으로 연곡천이 소금강과 진고개에서 발원하는 물을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 유입되고, 동쪽으로 7번국도가 지나고, 서북으로 세 개의 낮은 구릉(해발 50m)을 포용
하고 있는 곳이다.
방내리성(坊內里城)으로 불리는 이 토성으로 고허성(稿虛城), 교허성(校虛城)이라고도 불린다. 이
성은 고현성(古縣城)의 성격을 갖는 성곽이며 또한 인근에 서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후에 교허성
(校虛城)으로 불렸을 가능성이 높다.
성(城)의 명칭은 기록에 모두 교허성(橋虛城)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 향교가 있다가 없어
진 조선후기에 생겨난 명칭이며 인근에 교동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경우 교허성(校虛城)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또한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연곡현관중수기(連谷縣館重修
記)」에도 교허성(校虛城)이라 하였다. 그러나 고현(古縣)의 의미를 담고 있는 방내성(坊內城)이라
칭하는 것도 타당할 것 같다.
성의 평면은 방형이며 흙속에 잔자갈을 섞어 쌓은 토성으로 둘레는 약900m 이다. 성문은 남쪽에
2개소, 북쪽에 1개소, 동쪽에 1개소, 모두 4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성벽은 외벽 경사가 45°
이며 경사면의 높이가 10~15m에 이르는 곳도 있으며 상부 폭이 1.5m, 내벽 높이는 1m 정도이다.
북서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세이고 동·서·북면에 문지(門址)가 있으며 성내에는 북에서 남으로 3
개의 봉우리가 있고 현재 민가 30여 호가 자리하고 있다.
법흥산성 (영월군)
<법흥리의 산 풍경>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백덕산(白德山, 1,350m) 정상에서 남쪽으로 5.7km 정도 뻗어 내린
능선의 해발고도 829m 고지를 중심으로 구축된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 성벽이 거의 파괴된
상태이다.
흙으로 쌓아올린 토성(土城)으로 남동-북서 방향으로 축조되었으며, 성의 전면(全面)이 평창을 향
해 있는데 이는 영월군 북면 공기리의 공기산성(恭基山城), 수주면 도원리의 도원산성(桃源山城)과
동일한 형태이다.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광대평마을의 광대평교를 건너 오른쪽 개울을 가로지르면 산성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가 보이고, 입구에서 약 1.7km 올라가면 무너진 성벽이 보인다.
봉의산성 (춘천시)
강원 춘천시 소양로1가 산1-1번지에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봉산 산성의 둘레는 2,463척이고
높이는 10척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11개소에 석축 길이 196m, 높이 2∼6m가 보존되어 있
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거란족의 침입으로 안찰사 노주한이 이곳에서 전사하였고, 고려사에는 몽고
족의 4차 침입 때 춘천 주민들이 산성에 들어가 항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강
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의 활동지역이었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격전지였다. 산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춘천지방의 수호
성(守護城)으로 그 명맥이 이어졌으며 춘천지방으로 침입하는 외적(外敵)에 대한 항전장(抗戰場)으
로서 역사적 유적이다.
또 거란, 몽고와의 전쟁에서 격전지였던 기록을 감안해서 고려 중엽에 쌓은 성으로 추측하기도 한
다.
삼악산성 (춘천시)
강원도 춘천시 서면 덕두원리 47 에 있으며 성곽은 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진행되며, 자연 지형에 따
라 높이 1~3m, 윗부분 폭 0.8~1.8m 규모의 석축 성이 능선을 따라 동서로 약 5㎞ 정도 길게 뻗어
있다.
다듬지 않고 산상에 널려 있는 깨진 산돌을 이용해 쌓아가면서, 바위가 돌출된 부분과 절벽부분은
성벽을 쌓지 않고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산성의 서남쪽으로는 대궐터라 불리는 넓은 터전이 있고, 주변에는 기와조각들이 산재하고 있다.
이 곳에서 수습되는 기와조각들로 보아 축성 시기는 삼국시대 이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다.
삼척읍성 (삼척시)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 주변에서 조선시대 읍성과 관아터가 발견됐다.
발굴조사 결과 ‘세종실록지리지’ 등의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삼척읍성의 실체가 이번 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또 삼척도호부와 관련된 관아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다수 발굴됐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유구 하층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구도 남아 있을 것
으로 추정된다.
성모루토성
자연지형을 이용해 축조된 것으로 태봉국 이전 시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주민들에 의해 일부 토성
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성산 (철원군)
< 승양리의 풍경>
강원도 철원군 인목면 승양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고 불리는 높이 1∼3m, 너비 1.5∼2.1m,
둘레 약 400m의 궁예시대에 건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산산성 (철원군)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에 해발 471m 둘레 982m인 성산성은 가파른 자연 지형을 이용해 높
이 7∼8m의 성벽을 차곡차곡 쌓아 만들었으며 평강 쪽에서 철원과 화천 쪽으로 침략하는 적을 감하
기 위한 산성이며 축조 방식이나 성내에서 수습되는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최소한 통일신라 시기에
존재했던 산성이다. 면적은 약 44,033㎡로 성 안에는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 후 후삼국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고쳐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한 성산성
(자모산성·성재산성) 일대에 대한 발굴작업이 시급하다.
성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유일한 승전으로 기록되는 김화지역 전투와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문화재
로 평가되지만 자세한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아 2004년부터 발굴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통일신라 및 삼국시대 유물과 청자 백자파편과 6·25전쟁 유물 등을 대거 발굴, 인근 병자호란 당시
전사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전골총 유적과 연계해 체계적인 발굴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
했었다.
성산성 일대 2만9,700여㎡를 발굴키로 했으나 지주와 발굴에 대한 합의점을 찾지 못한데다 예산
부족 및 군부 동의 절차의 어려움 등을 들어 유야무야되고 있다.
성의 건립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성의 축성방법과 출토된 유물로 미루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이
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산성 일부에 일본식 축성방법인 횡굴(橫堀)의 흔적이 보여 임진왜란 때
왜군이 주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아 있는 성벽의 보존 상태가 좋아 산성의 역사와 축성방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 가등산성(加藤山城), 자모산성(慈母山城), 성재산성(城齋山城)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송계리산성 (정선군)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송계리 산 80에 있으며 성벽은 너비 50㎝ 내외의 납작한 괴석으로 정교하게
쌓았는데 높이는 4~7m로 지형에 따라 일정하지 않으나 평균 5m 정도이며 성의 상단에는 내벽이
높이 50㎝ 내외로 남아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서 성벽의 상단 너비는 3.6m 정도이다. 성의 전체
길이는 400m이다.
구릉 정상의 능선에는 남북으로 세 곳 정도 약간 높은 대지가 있고 이 중 남단의 대지에는 너비 약
5m, 길이 10m 정도의 조금 낮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어 이곳에 성내의 시설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산성과 고분의 서쪽 구릉에서 산국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토기 조각들이 일부 발견되었고, 함께 있
는 심국시대 고분이 있는 것으로 봐서 고구려가 신라의 진출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으로 보인다.
아미산성 (강릉시)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부연동길 753-13에 있으며 아미산만월성이라고도 한다. 높이 1∼2m,
상부 너비 1m이다. 명승 제1호인 명주군 청학동 소금강 남동쪽에 있는 산을 정점으로 축조되었으나
붕괴된 부분이 많다. 동쪽은 소금강 상류에서 계곡까지 이어져 약 3㎞에 이르나, 서쪽의 것은 폭포
부근 400m 정도에서만 나타난다. 또한 동쪽 성벽 중 해발 570m 지점 부근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
m의 성벽이, 그리고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약 700m의 성벽이 각각 성 내부로 뻗어 있어 성벽은 2∼
3겹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형태이다. 대동지리지에 의하면 에 ‘청학산 고성은 청학산 동쪽에 있고 둘
레는 1,200척(606m)’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 축성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신
라의 마이태자가 재기를 위해 성을 쌓았다고 하며, 고려축숙왕의 부마 최문한의 아들 최극림이 의병
을 거느리고 쌓았다는 설도 있다.
애산리산성 (정성군)
강원도 정성군 정선읍 애산리(愛山里)에 있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애산성이라고도 한다.
철미산(鐵美山) 남서쪽 자락의 해발 560m 지점에 위치한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원래 둘레 360m,
높이 2.4m, 폭 3.6m의 규모였으나, 현재는 길이 3m 높이 2.3m 정도의 두 곳만 남아 있다.
자연석을 난층(亂層)쌓기로 쌓은 석성이며, 성곽은 할석을 이용하여 쌓았다. 석성이 시작되는 곳에
서 120m지점과 225m지점에 각각 서문지(西門址)와 동문지(東門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양읍성 (양양군)
<양양읍의 산 풍경>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내에 있는 성으로만 조사됨
영원산성 (원주시)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에 금대리에 있으며 ‘영원산성(靈原山城)’, ‘영원산성(鈴原山城)’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산 정상과 계곡을 아울러 돌로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2.2㎞로, 규모가
큰 편이다. 현재는 대부분 무너져 1㎞ 정도만 돌무더기처럼 쌓여 있다. 다만 동쪽 성벽은 상태가
좋은 편인데, 높이는 2m 가량으로 비교적 가지런히 쌓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가 3,749척이고, 성 안에 우물 1곳과
샘 5곳이 있었다고 전한다.
영원산성의 축성 연대에 대해서는 문무왕 때 쌓았다는 견해가 있으며 892년(진성왕 6)에 궁예
(弓裔)가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근거로 주변 고을을 공략하였다는『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으로 보아, 궁예가 이곳에 머물며 활동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1291년(충렬왕 17)에 거란이 침입하였을 때, 원주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이 10여
차례에 걸쳐 적과 싸우면서 영원산성을 지켰다. 당시 판관 조신(趙愼)은 원주 군민과 함께 성 밖에서
싸웠고, 원충갑과 별장 강백송(康伯松) 등은 동쪽 봉우리에서 싸웠으며, 주리(州吏) 원현(元玄)·전행
란(傳行蘭)·원종수(元鍾秀) 등은 서쪽 산에서 진격하였다. 적군은 동서쪽에서 협공을 당해 갈팡질팡
하였고, 아군은 크게 승리하고서 적장을 비롯한 58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왜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
는 군사와 맞서 싸워 일부를 무찔렀으나 군력 부족으로 산성이 함락되면서 아들 김시백(金詩伯), 부
인 이씨(李氏)와 함께 순절하였다고 한다.
옥원성지 (삼척시)
요전산성 (삼척시)
삼척시 오분동 동쪽에 있으며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지증왕 13년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한
곳이며 고려 고종때 몽고의 침입을 막은 곳이며 우왕 10년 (1384년)에 토성을 쌓고 삼척포진을 설
치하여 왜구의 침입을 막았는데 성의 둘레가 1,876척이었다.
조선의 세조때 감찰사 허종이 568척을 증축했고, 중종 15년(1520년) 삼척포진영을 정라진 육향산
밑으로 옮겼다.
우계산성 (강릉시)
<현내리의 풍경>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에 있는 우계산성은 주수천(珠樹川) 하류의 충적지 쪽으로 돌출한 구
릉의 말단부에 축조되었다.
성적은 남서쪽을 정점으로 하여 북동쪽의 완사면을 둘러싸고 있다.
축성 시기는 신라시대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것은 옥계면 일대가 본래 고구려 우곡현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 우계현으로 개칭된 사실에서 이 성을 당시 현의 기능과 관련된 산성으로 간주한 데에 기
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벽은 상수도 관리사무소 건설공사로 자취 조차 없어졌으나 남벽의 서쪽에는 높이 3m, 상부의 폭
이 1.5m의 원형이 관찰된다. 한편 남벽의 중앙부는 소곡지로서 흔적이 분명치 않고 북·동벽은 거의
붕괴되었으나 밭들의 경계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크기가 다양한 운모편암과 변성암으로 구축된 석성으로 주민의 전말에 의하면 북벽의 석축부 밑에
서 염분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는 판축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성내에는 토기 및 와편이 산재
되어 있다.
원주성
1291년(충렬왕 17)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원주성이 포위되자, 원충갑은 10여 차에 걸친 공방전
으로 적을 무찌르고 성을 고수하였다.
월계촌고성 (삼척시)
강원도 삼척시
정선읍성
정양산성 (영월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 1-1 외 8필지둘레이며 771m, 성벽 높이 4∼10m, 너비 6m로 면
적은 11만 8,637㎡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에서 연하리에 걸친 계족산에 축성된 테뫼식
산성이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인 것은 틀림없다. 거란족
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검왕이 쌓았다는 설과 남쪽에서 침입하는 신라를 막기 위하여 고구려에서 대
야산성ㆍ온달성ㆍ봉래산성 등과 함께 축조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제왕산성 (강릉시)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의 제왕산 정상에 있다. 고려 말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다양한 사암으로
축조한 석축산성이다.
당시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근래에 와서 쓰여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
資料)》에 의하면 ‘강릉 서남쪽으로 약 4리 떨어진 정선군과의 경계면 높은 봉에 있는 석성으로, 고
려시대 우왕 창왕이 개성에서 도망하여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400m 정도로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200m 정도이고,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1.5~2
m이다. 붕괴된 성벽 주변에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발견
되었다.
죽령현성 (삼척시)
강원도 삼척시
철원읍성 (철원군)
<철원읍 풍경>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서남쪽에 있는 옛 성터로 거성이라고도 하는데 배모양으로 축성되어 있다.
길이 640m이며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이며 현재 그 일부 구간과 남문터가 남아있으며 909년에
궁예가 축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철원토성 (철원군)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토성리 일대의 남대천(南大川)의 하류의 넓은 편야에 위치하며 이 성곽으로
인하여 토성리(土城里)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되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토성리’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부르던 호칭임을 알 수 있다.
성벽은 전체 길이가 약 1㎞이나 경작 등의 인위적인 파손과 재료의 취약점으로 인하여 심하게 훼
손된 상태이다. 성벽의 잔존한 높이는 10m이고, 하부너비 약 9m, 상부너비 약 4m이다.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성벽의 흙을 운반하여 가서 현재는 서벽 약 150m, 남벽 10m, 높이 5∼6m가
량만 남은 상태이다. 성벽의 전체적인 평면구조는 방형(方形)이고 평지성(平地城)인 점으로 보아 읍
성(邑城)의 성격이 짙다.
성내에서는 무문토기편과 석기류 등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축성되기 이전에
주거생활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축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축성법으로 보아 삼국시대 또는 그 후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 장수 마부대(馬夫大)와 용골대(龍骨大)가 수 만명의 군사
를 이끌고 한양으로 침공하였다. 이 때 평안관찰사(平安觀察使) 홍명구(洪命耉)와 병마절도사(兵馬
節度使) 유림(柳琳)이 포위하고 공격하자, 청나라 군대는 하루만에 성을 쌓은 것이 이 성곽이라는 전
설이 있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쌓은 것이 확실하다.
칠봉산성 (강릉시)
<칠봉산 풍경>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제비리 칠봉산 산정에 위치한 고대 산성.‘강릉의 서쪽 약 2리, 구산리 남쪽
약 1㎞의 칠봉산에 있는 석성으로 주회 약 850간(間)이고, 대부분 붕괴되었으며 일반에 칠봉산성으
로 불린다.’
‘도적골', '마귀할미(城)'라 불리는 석성으로 도적의 무리들을 막기 위하여 축성하였다는 전설이 있
다. 구정면, 성산면, 왕산면 등 3개 면을 내려다볼 수 있는 칠봉산 정상 능선 위에 4㎞에 걸쳐 석축을
쌓았던 흔적이 있다.’ 결국 이 산성은 자세한 기록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곽의 표면은 흙으로 얕게 덮여 있으나, 그 밑에는 다양한 크기의 편암으로 구축되었다. 판축부의
높이는 1.5m~2.0m로 추정되나 대부분 붕괴되었고 총길이는 약 1㎞이다. 성벽의 석벽 사이에서는
토기와 와편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능선부 및 동사면에는 건물지로 추정되는 평탄지들이 확인되
고 있다.
석벽은 크기 30~50m, 두께 10~20㎝의 점판암의 파편석으로 1.5~2.5m 높이로 쌓았다. 현재 서
쪽 성벽의 위는 허물어져 있으나 그 아래 묻힌 부분의 0.7~1m 정도가 잘 남아 있으며, 나머지 대부
분은 붕괴된 상태이다.
태백산성(황해도)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도 평산군 산성리에 있는 고구려의 산성 둘레 2,425m, 높이 7m. 군사의 요
충지이며 교통의 중요한 거점인 평산군 산성리의 예성강을 끼고 솟은 태백산에 있는 산성으로 394
년(광개토왕 4) 백제의 침입에 대비하여 남쪽지방에 쌓았다는 7개 성의 하나로 비정된다. 조선시대
에 성을 보수하기 전까지는 성황산성(城隍山城)이라고 불렀으며 고구려 때 쌓은 대곡성(大谷城)으
로 추정된다.
태백산의 험한 봉우리와 능선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동쪽은 예성강의 절벽을 이용하여 성
벽으로 삼았다. 성벽은 사각형으로 다듬은 돌로 쌓았는데 밑으로부터 4단까지는 대체로 큰 돌로 계
단식으로 쌓았고, 그 위로부터는 성돌의 면과 선을 정연하게 맞추면서 곧추 쌓아올렸다.
성벽이 밖으로 내민 5개소에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을 설치하였으며, 성가퀴[城
堞]는 이미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성문은 동·서·남·북에 홍예형(虹霓形)으로 냈는데, 동문과 서
문에는 18세기에 고쳐 세운 문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동문은 잘 다듬은 너비 2.4m의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합각식 단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에
는 정면에 ‘先得樓(선득루)’라고 새긴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곳은 성 안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이
다.
동문 가까운 곳에는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고, 서문에는 너비 3.07m의 위 홍예문 축대에 동문
루와 꼭같은 규모의 합각식 건물을 세웠다.
성 안에는 물원천이 풍부하여 평양 대성산성(大城山城)의 못 형태와 비슷한 인공연못과 우물이 있으
며, 왕건이 고려를 세울 당시의 주요 신하들을 제사하던 사당인 태사사(太士祠) 건물이 있었는데 6·
25 때 파괴되고 비석만 남아 있다. 이 밖에 산성 안에는 망월사(望月寺), 군기고, 북창 등이 있었다고
한다.
태봉국도성 (철원군)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방 풍천원 일대이며 면적은 약 9,549만4,000㎡다.
외성과 내성, 왕궁성의 3중성 구조로 평지성이며 주로 토축이며 필요 시에 석축을 하기도 했다.
내성 둘레는 약 7,656m, 외성 둘레는 1만2,306m, 높이는 3.6m 내외, 폭은 하단 6간(10.9m)정도
다.
궁예가 개성과 철원 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때는 893년이며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
긴 뒤 경기도ㆍ강원도ㆍ황해도ㆍ평안도ㆍ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과 자웅을 겨루
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였던 왕건이 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궁예를 축출하였다.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의
비무장지대에는 풍천원(楓川原)이라는 들에 성터만 남아 있다.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御水
井)은 흔적만 있고 두 겹으로 쌓았던 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터
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태화산성 (영월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팔괴리의 태화산에 있는 토성(土城)으로 대야성, 정양산성, 영춘산성과 동일
한 시기(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다른 산성들이 돌로 축조된 석성(石城)으로
실전용으로 사용된 반면, 4개 산성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태화산성은 토성(土城)으로 적정을
감시하고 그 상황을 우군에게 전하는 사령탑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화산(泰華山, 1027.4m)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해발고도 약 900m의 봉우리에 자
리 잡고 있다. 길이·너비 약 400m, 둘레 약 1,200m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 성 내부에 골짜기를
포용하고 있는 형태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한 산성)이다.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부분적으로 여장(女墻;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
여 낮게 쌓은 담장)과 망을 보는 망대(望臺)의 흔적이 확인된다. 성 안에는 약 300㎡의 평지가 있으
며, 깊이 6m·폭 4.2m의 우물도 있었다.
통천읍성
북한에 있어서 정부 수집 불가
풍청원도토성 (철원군)
강원도 철원군 근북면 홍원리와 어운면 중강리에 걸쳐 평원에 있는 궁예 때의 도성터로서 흙과 돌
을 섞어 외성을 쌓았는데, 외성은 높이 1.2∼3.6m, 너비 2∼6m, 둘레 약 6,000m 규모이고, 내성은
높이 2.1m, 너비 2.6m, 둘레 약 400m로 내,외성 모두 네모꼴이다.
포진성 (삼척시)
ㅇㅇㅇ
한계산성 (인제군)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 있는 둘레 약 1.8㎞. 강원도 기념물 제17호. 해발 1,430m의 안산에
서 남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 산성으로 계곡 쪽에 남문터가 있고, 성 안에는 절터·대궐터·천제단 등
이 있다.
전설로는 신라 경순왕 때 축조되었다고 하며,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신라부흥운동을 할 때 성을 수
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고려 후기에 몽고의 침입과 홍건적의 침입 등 잦은 이민족의 침입 때문에 부근주민들의 입보(入保)
를 위하여 수축되었다고 여겨진다. 지금 성벽이 남은 곳은 높이 5. 6m나 되나, 천연의 절벽은 성벽
을 쌓지 않고 암벽을 이용하였다.
성벽은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오르며 작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아래에서 2m쯤까지는
벽면이 거의 수직을 이루다가 위로 오르면서 85°정도의 기울기가 된다.
성문은 문구(門口) 너비가 157∼166㎝이고 측벽의 높이가 230㎝인 사각문형식이다. 성벽의 기초
는 쐐기돌로 수평을 맞추듯 작은 돌조각을 사용한 수법이어서 삼국 시대부터의 전통적 방법에 속하
지만, 성벽의 윗부분은 여러 차례 수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