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삼릉 정소공주의 묘
"장수(長壽)와 단명(短命)에 기수(氣數)가 있으니, 예로부터 피하기 어렵지만, 부녀간(父女間)의 정은
언제나 변할 리가 없는 것이다. 대개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오는데 어찌 존망(存亡)을 가지고서
다름이 있다 하겠는가. 아아, 네가 죽은 것이 갑진년(甲辰年)이었는데, 세월이 여러번 바뀌매 느끼어 생각함이 더욱 더하도다.
이제 담제일(禫祭日)이 닥쳐오매 내 마음의 슬픔은 배나 절실하며, 나이 젊고 예쁜 모습을 생각하매 영원히 유명(幽明)이
가로막혔도다. 이에 중관(中官)을 명하여 사실을 진술하고 전(奠)을 드리게 하노라. 아아, 제도는 비록 한정이 있지마는
정에는 한정이 없도다. 영혼이여, 어둡지 않거든 와서 흠향하기를 바라노라."
큰딸 정소공주(貞昭公主)를 잃은 세종이 삼년상이 끝나는 날(담제일)에 가슴 저미는 슬픔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정소공주는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장녀이며 문종과 세조의 누나이다.
1418년 세자(양녕대군)가 폐위되고 부친인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녀 아기씨로 신분이 격상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아버지인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다시 공주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관례를 치르기 전 해인 세종 6년(1424년) 완두창(마마)에 걸려 1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소공주 묘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상감조화문항아리
왕은 말하노라. 수요(壽夭)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은 비록 옮길 수 없는 것이나, 부자간의 지극한 정리는 스스로 끊을 수 없구나.
슬프다. 너의 일생은 연약한 여식으로 자라났다. 자태가 단정하고 맑으며, 품성은 곧고 아름다우며, 손을 이끌고 다닐 때부터 효제(孝悌)함이 너의 행실이었다. 나이는 어렸지만은 성인(成人)과 같았다. 자애의 정이 쏠리어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두터이 하였다.
네가 결혼하여 함께 편히 영화를 누리려 하였더니, 어찌 어린 나이로 하찮은 병에 걸려 좀 더 살지 못하고 드디어 대고(大故)를 당할 줄 뜻하였으랴. 조섭을 잘못 하였던가, 기도함이 궐(闕)하였던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성음과 용모는 완연하건만 정상(精爽)한 넋은 어디로 갔는가.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며, 눈물을 참으려 하니 가슴을 적신다. 빈실(殯室)에 치제(致祭)하여 슬픈 회포를 펴고자 하니, 넋이 알음이 있거든 내 이 말을 알리라.”
1424년 3월 3일스물여덟의 젊은 세종은 그 어린 큰딸이 홀현히 떠나자 제문에서 한 없는 슬픔을 토하였다.
세종은 삼일동안 조회와 시장을 폐하고 그 비통함을 달랬다고 전한다.
본래의 시호는 정혜(貞惠)였으나 태종의 딸 정혜옹주와 같아서 정소(貞昭)로 고쳤다.묘소는 고양현에 있다.
그녀는 태종의 첫 손녀였기 때문에 태종과 원경왕후는 물론이고 다른 왕실어른들의 총애를 한몸에 받으며 성장하였다고 한다.
세종은 유독 첫딸인 정소공주를 아꼈기 때문에, 세종이 바쁜 업무중에도 그녀를 찾아가 친히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녀가 죽은 후 세종은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큰 상심에 빠졌으며, 그녀의 장례는 세명의 공신(功臣)과 육조의 당상관들이
성문 밖에까지 장송할 정도로 크게 대우해 주었다.
세종은 왕비 소현왕후와의 사이에 8남 2녀를 두었다. 그 중 세자녀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세종이다.
스물여덟에 큰딸 정소공주를 잃은 세종은 마흔여덟에 다섯때 아들 광평대군 이여를 잃는다.
세종이 그토록 사랑하였던 광평대군 이여이었다. 그에게는 이런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세종대왕이 관상쟁이를 불러서 여덟 대군의 관상을 보았다.
"귀골로 뛰어난 재질과 복록을 갖추었으나 안타깝게도 오래 살지 못하고 굶어서 돌아가실 상"
관상쟁이가 광평대군의 관상을 보고 세종에게 전한 사주팔자이었다.
"어찌 왕자가 굶어서 죽을 리가 있는가"
세종은 그 말에 웃으면서 오히려 광평대군에게 경기도 광주의 넓은 땅을 사패지로 주었다고 한다.
광평대군은 그만 식사 때 준치의 가시가 목에 깊숙히 걸려 빼지 못하여 도지고, 또한 창진(瘡疹)이 겹쳐
식사를 하지 못하다가 동년 12월 8일에 20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야사집인 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종은 놀라 슬퍼하며 수라를 끊고 3일 동안 정사를 폐하였으며, 저자는 점포의 문을 닫는 등 조야가 모두 슬퍼하였다.
의정부에서 예조의 정문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지금 광평 대군이 돌아가셨으니 마땅히 각도로 하여금 조위(弔慰)하는
전문(箋文)을 올리게 하겠나이다.” 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세종 26년 12월 7일
승정원과 사헌부에서 광평대군을 치료한 의원 배상문에게 죄줄 것을 청하였다. 세종은 임금으로서 소소한 정무를 살핌에
있어서도 행여 아버지에게 누를 끼칠까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문이란 자는 본디 맹랑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이 상문의 죄가 아니고 죽은 자의 운명인 것이다. 옛날 성녕대군(誠寧大君)이 돌아가매 의원을 죄주었더니,
그때 사람들이 비웃었다. 그러나 그 의원은 병 증세를 알지 못하고 치료를 옳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였던 것이고, 태종의 의사로 하신 것은 아니었다. 지금 배상문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예로부터 임금된 이가 사랑하는 첩이나
아들의 죽은 것으로 의원을 죄주는 일이 많으나, 나는 실로 그것을 잘못으로 여긴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 세종 26년 12월 11일

경기도 포천 소흘읍 평원대군 제안대군 묘
광평대군 사후 1개월 후에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7남 평원대군(平原大君) 이임(李琳)도 죽어 세종 내외의 상심은 더욱 커졌다.
평원대군 이임(李琳)이 졸하였다. 풍도가 헌걸차고 천성이 슬기로왔다. 정사년에 문묘에 배알하고 종학에 입학하였는데,
날마다 종학에 나아가서 배움에 힘써서 게으르지 아니하여 경서를 깊이 연구하고, 시전과 예기와 대학연의에 더욱 숙달하였다.
또 글을 잘 짓고 글씨가 신비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활쏘기와 말타기가 참으로 빼어났는데, 이에 와서 홍역을 앓다가 화위당(華韡堂)에서 돌아가니, 나이 19세였다, 양궁이 몹시 슬퍼하여 수라를 중지하고, 조회와 저자를 사흘 동안 정지하였다. 임은 기개와 풍도가
호걸스럽고 준수하여 범상하지 아니하고, 악함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남의 착함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며, 평상시에는 엄하고
꿋꿋하고 침착하고 묵중하여 말과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접대하고 사물을 다룰 적에는 겸손하고 공순하고 온화하고 우아하여 일찍이 존귀와 권세로 교만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천성의 지극함에서 나왔으며, 더욱이 천후를 점치기를 잘하여 바람·비·구름·천둥들의 변화를 미리 말함이 거의 다 틀림이 없었다. - 세종 27년 1월 16일
평원대군의 죽음으로 수라를 중지하니 의정부와 육조에서 수라를 들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술을 마시고 죽을 먹으며 몸도 탈이 없으니, 경들은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 세종 27년 1월 17일
연이은 아들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었을 터임에도 세종은 지나친 격식을 경계하였다.
“광평과 평원의 장사에 신하로서 분수에 벗어나는 예식을 참람(僭濫)하게 함이 없게 하라.” - 세종 27년 2월 19일
세종을 아프게 한 것은 다름아닌 가족사의 불행이다. 젊디 젊은 자녀 세명을 앞세워 보낸 세종의 아픔이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 가족사의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 상왕 태종은 자신의 사돈이자 세종의 장인 심온을 처형시키고 심온의 부인을 관노비로 삼았다.
외척의 발호를 원천적으로 막아 보겠다는 태종의 조처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세종은 생전에 자녀 3명을 먼저 보낸다.
그의 사후에도 큰아들 문종도 일찍 죽고 세째 안평대군과 네째 금성대군도 둘째 수양대군과의 권력다툼에 희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