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낭만주의>
1. 낭만주의가 유럽의 문화적 분위기를 지배했던 시기는 19세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는 프랑스 대혁명과 인과적 관계는 아닐지라도 분명 연관성을 지닌 문화적 전환이었다. 사실 혁명시대 프랑스의 중요한 예술사조는 ‘다비드’를 중심으로 한 ‘신고전주의’였다. 다비드는 혁명의 강령을 엄격한 예술적 실험을 통해 성취했다. 그는 역사적 사건의 재현을 통해 ‘혁명적 시민계급의 스토이시즘’을 표현했다. “다비드는 그의 고전주의를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효과를 완전히 단념하고 단순한 눈요기에 그치는 것과의 어떠한 타협도 일체 용납하지 않는 순수한 선의 예술로 발전시켰다.”
2. 그러나 혁명이 제기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은 예술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예술적 자유’가 중시되었고, 예술의 감상자층이 확대되었으며, 소수의 예술가들의 독점 권리가 폐지되었다. 그것은 하우저의 말처럼 혁명이 낭만주의를 성숙시킨 것은 아닐지라도 혁명 속에는 낭만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이 담겨져 있었던 것이며 혁명은 낭만주의의 폭발적인 변화를 추동하였던 것이다. “혁명이 창조한 진정한 양식은 이 고전주의가 아닌 낭만주의, 다시 말해 혁명에 의해 실제로 행해졌던 예술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준비되었던 예술이다. 혁명 자체는 새로운 양식을 구체화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혁명은 비록 새로운 정치적 목적과 새로운 사회적 제도 및 새로운 법규는 갖고 있었지만 자기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할만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사회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3. 프랑스에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본격적으로 분화된 것은 1820 - 30년대 사이였다. 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성취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목표를 추진하였지만, 혁명 후 사람들은 이 둘을 일치시키기 어렵다는 현실을 발견했다.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혁명 이후 비관주의의 근원이었다. 비관적 정서는 혁명에 동조했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협력을 파괴했고 낭만적 반동은 고전주의를 공격하였고 해체시켰다. 정치적 실망은 개인과 예술에 대한 자유에 전념시켰다. 이제 예술은 사회적, 공적인 기준과 원칙보다는 개인의 개성과 개인이 수립한 기준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체의 개성적 표현은 유일무이하고 대체될 수 없으며, 또 이러한 개성적 표현의 법칙과 기준은 개인 자신 속에 있다는 생각은 혁명이 예술을 위해 이룩한 위대한 성과다.”
4. 프랑스 혁명은 독일의 젊은 지식인들을 일시적으로 고무시켰지만, 소수의 엘리트들에게 통제되는 정치적 현실은 결국 정치적 변화보다는 현실에서의 도피라는 낭만주의 성격을 강화시켰다. 낭만주의가 서유럽 국가에서는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진보적인 성격을 보였다면, 독일에서의 낭만주의는 현실도피 속에서 정치적 반동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비현실적, 비합리적인 사고와 현재와 미래의 파멸에 대한 두려움은 현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켰다. 인간정신, 정치제도, 법, 종교, 예술의 본질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초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역사적 삶 속에서만 나타난다는 ‘역사주의’적 사고가 주도한 것이다. 우리의 세계가 파르메니데스적 질서와 안정의 세계가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변화와 흐름 속에 있다는 인식은 낭만주의가 발견한 현대적 세계상이었다.
5. 현실에서의 도피는 ‘과거의 것’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으며,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이성적인 것을 부정하였고 삶을 예술에 적응시키는 미학적, 유토피아적 생존의 착각에 빠지는 일종의 ‘낭만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유토피아와 동화, 무의식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과 신비스러운 것으로의 도피, 유년시절과 자연, 꿈과 광기로의 도피” 등과 같은 표현방식은 책임과 고뇌에서 도피하려는 의식의 반영이었으며, 고향상실과 고독이라는 감정 속에서의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노발리스의 “목적도 끝도 없는 방황,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찾아져서도 안되는 ‘푸른꽃’, 그리고 찾으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고독,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인 무한성”도 독일 낭만주의의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6. 혁명 이후의 시대는 전반적인 환멸의 시대였다. 정치적 불통과 무능과 대립되는 정신적 성장은 개인주의와 정신의 자율성을 신장시켰고 개인의 천재성을 통한 고독과 고립의 감정을 폭발시켰다. 낭만주의는 인간을 갈등 속으로 몰아넣었다. ‘삶과 정신, 자연과 문화, 역사와 영원, 고독과 사회성, 혁명과 전통’은 이제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닌 동시에 실현시켜야 하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수많은 기존의 형식이 해체되었고 기존의 원칙이 부정되었다. 새로운 변화는 개인의 가능성을 넓히고 확장시켰지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고 강했다. 예술가들의 실제적인 사회적, 정치적 생활로부터의 소외는 반항적인 젊은이들의 보헤미안적 행동을 촉발시켰다. 이러한 모습에서 비예술적 속물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려는 낭만주의의 징후적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낭만주의를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혁명 후 시대의 해방된 그리고 환멸을 겪은 개인의 특징이 되는 이러한 분열과 과잉보상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면 낭만주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7.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낭만주의가 ‘정치적 현상’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면, 영국에서의 낭만주의는 근본적으로 산업혁명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반동에서 생겨났다. 영국 낭만주의자들이 보였던 염세주의는 영국 공업도시의 황량함과 비참함이 없이는 생각될 수 없고, 그들의 자연예찬 또한 전원에서 유리된 도시의 비참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을 착취하고 자유를 파괴하는 산업사회의 확장은 자연적인 생활의 소중함과 자유의 중요성을 다시 반추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비타협적인 휴머니즘은 착취와 억압의 정치에 대한 반항으로 나타났으며, 그들의 반인습적인 생활태도, 공격적인 무신론, 도덕적으로 편견없는 태도 등은 착취와 억압의 수단을 장악한 계급에 대한 투쟁의 여러 형태”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8. 19세기 낭만주의는 정치적 혁명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변모시킨 ‘개인의 개성’과 ‘개인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을 지배하는 외부의 기준이나 규칙이 아닌 내면의 기준과 조건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의 탄생과 그가 만들어낸 예술작품의 가치는 때론 정치적 현실에 따라 진보적인 성격으로 때론 반동적인 성격으로 표출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동일성은 ‘개인의 발견’과 인정에 대한 욕구였다. 정치적인 소외는 예술적인 천재라는 관념으로 승화되었고, 물질적인 부족은 자연에 대한 찬미와 부르주아지적 속물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되었다. ‘낭만주의’의 예술적 성취가 가장 폭넓게 나타난 영역은 ‘음악’이었다. 가장 늦게 ‘낭만주의적’ 변화를 겪었던 음악은 점차 보통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연주법으로 작곡되었고 특별히 연주자만 가능한 기법이 요구되었다. 낭만주의는 어쩌면 특별한 재능을 지녔지만, 여전히 사회적 차별과 몰이해에 고통받았던 수많은 문화적 천재들의 울분과 자기과시가 중첩적으로 형성된 시대적인 흐름이었는지 모른다.
첫댓글 -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