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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나들이
유석 / 조병욱
가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열린다. 끝없이 펼쳐진 검푸른 하늘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지친 심신을 달래 줄 여심(旅心)이 꿈틀대듯 살아나는 가을이 다가온 것에 자연의 순리 앞에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그렇게도 푹푹 찌던 지난 무더위를 떠올리면 시원한 갈바람에 풍성한 가을, 그리고 오색단풍으로 물들어가는 신비스러운 산새에 경외심마저 느껴진다. 구름이 조금 낀 날씨는 한낮의 뙤약볕을 생각하면 나들이하기에는 더 좋지 않을까 한다.
오늘은 문학기행을 떠나는 날이다. 대전역 동 광장에서 전국회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재회의 기쁨에 활짝 웃었다.
깊어가는 만추에 그 곱던 단풍잎들도 우수수 떨어지고 벼 수확이 마무리되는 텅 빈 들녘은 왠지 쓸쓸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속도로변 차창 밖 스치는 풍경을 감상하다 보니 오늘의 첫 여정인 청남대에 도착했다.
청남대
청남대는 몇 차례 와 본 곳이지만 올 때마다 감회가 다르다. 대청댐이 준공되고 난 후 대통령의 별장으로 1983년부터 이용되는 곳인데 청남대 주변에 잔디광장 골프장 헬기장 초가정 양어장 등 시설이 있고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하여 2003년 일반에 개방될 때까지 여섯 분의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었다. 입구에는 소담한 반송들이 우리 일행을 반겨주고 잔디밭에는 국화꽃 향기가 우리를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듯했다. 청남대 본관 2층에 대통령 접견실 거실 서재 침실 등을 둘러보고 대통령 기념관에 들어가 대통령 기록물들을 살펴보았다.
대통령의 신변안전을 위해 그렇게도 철저한 경호와 보안을 유지하던 이곳이 이제는 야생화전시장, 대통령 테마기록문화전, 국화 축제전시회와 드라마. 영화제작장소로 활용되고 있음에 세월의 무상함을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2. 속리산 법주사
속리산(俗離山)은 한자를 풀이하면 속세를 떠난 수려한 산이란 뜻이다.
예부터 속리산은 조선 8경의 하나로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명산이다.
속리산에는 8봉(峰) 8대(臺) 8 석문(石門)의 이름난 명소가 있다.
속리산 최고봉인 해발 1,058m의 천왕봉을 비롯하여 비로봉 문수봉 길 상봉 등이 있고
조선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올라가 글을 지었다고 하는 문장대와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충북 방어 사로 백마산성과 의주 성을 수축했으며,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이 높았던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이 젊은 시절 무예를 닦았다는 임경업 대(林慶業臺), 입석 대, 신선대, 청 법대 등 이름난 너른 바위가 많이 있다. 8석문은 금강 석문, 상환 석문, 비로 석문, 내. 외 석문, 추래 석문 등 명소와 기암괴석에 경관이 뛰어난 암봉들이 즐비하다.
또한, 속리산은 삼파수(三派水) 지점이라 해서 더욱 명성이 높다.
속리산 문장대 동쪽에 내린 빗물은 흘러 낙동강이 되고, 서쪽은 금강, 북쪽은 한강으로 흐르는 삼파수 지점이 된다.
전설에 의하면 법주사가 창건 233년이 지난 신라 선덕왕 5년(784)에 진표율사가 김제 금산사에서 이곳으로 오는 길에 밭을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율사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짐승까지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 서랴, 참으로 존귀한 분일 것이다."하고 머리를 깎고 율사를 따라 입산수도하는 이가 많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부터 '속세를 떠난다.'라는 뜻으로 이곳을 속리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속리산 자락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義信)이 창건하였고, 그 뒤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였다. 법주사라 한 것은 창건주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당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그 후 이 절은 진표율사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되어 오늘날의 대사찰로 변모하게 되었다. 금산사(金山寺)를 창건한 진표율사는 제자 영심(永深) 등에게 속리산으로 들어가서 길 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택하여 가람을 이룩하고 교법을 펴라고 하였다. 이에 영심 등은 속리산으로 들어와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그 뒤 고려 숙종 6년(1101)에는 그의 아우 대각국사의천大覺國師義天(1055~1101)을 위하여 인왕경법회(仁王經法會)를 이 절에서 베풀었는데 당시 3만 명의 승려들이 모였었고, 1363년(공민왕 12) 왕이 법주사에 들렀다가 통도사(通度寺)에 있는 부처님의 사리 한 점을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한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가 상환암(上歡庵)에서 기도하였고, 세조는 피부병을 요양하기 위하여 복천암(福泉庵)에 와서 3일 동안 법회를 열고 목욕소(沐浴沼)에서 목욕 후 병이 나았다고 한다.
법주사까지 이르는 숲길은 오리쯤 된다고 해서 오리 숲으로 불리는데 이 길은 전나무, 소나무 굴참나무 등이 하늘을 가릴 만큼 우거진 울창한 숲길이다. 법주사 들머리에 있는 정이품송은 조선 세조가 이곳을 행차할 때 타고 온 연(輦; 임금이 타는 가마)이 걸릴 것 같았으나 소나무 가지가 위로 올라가 연이 걸리지 않았다고 해서 상서로운 나무라고 조정에서 정 2품 벼슬을 내린 유서 깊은 나무다.
정오가 되어서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맛있는 버섯찌개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동동주 한잔에 여정의 시름을 달래보았다.
법주사 경내로 들어가려면 먼저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 쓴 일주문을 지나야 한다.
이어서 두 명의 금강역사가 지키고 있는 금강문을 지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무시무시한 형상의 사천왕문이 나오는데 옛날에는 임신부가 이곳에 들어서면 아기가 떨어진 다 고할 정도로 정말 무서운 곳이다. 이어서 오층 목탑 팔상전(八相殿)이 나온다. 팔상전은 법주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목탑유물이다. 법주사는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 의하여 화재를 입게 되었으나, 그 후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1544∼1610)이 절을 다시 지으면서 팔상전을 복원하였다. 팔상전이란 이름은 안에 부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으므로 붙여진 것이다.
이곳에는 곳곳에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90년에 새로 만들어진 청동미륵대불(靑銅彌勒大佛)이다. 기단까지 합친 전체 높이가 33m이며 사용된 청동이 100여 톤이 넘는 거대한 불상인데 원래 법주사의 중심건물이었던 용화보전이 있던 곳으로 신라 시대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장육상이 천 년간 서 있던 자리라고 한다.
국내에 남아 있는 옛 목조건물 중에서 2층으로 지어진 건축물은 궁궐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은데 법주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이 팔작지붕의 2층 건물이다.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이 함께 모셔져 있어 인상적이다. 대웅보전 앞에 쌍사자석등은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그 크기와 조각 미의 역동성에서 손꼽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국보유물이다. 삼천 명이 먹을 수 있다는 무쇠 장 솥과 석조와 오래된 철제당간지주, 석연치, 그리고 추래 암의 마애석불 등이 돋보인다.
법주사 경내를 둘러보고 강풍과 벼락으로 쇠락해가는 600여 년 된 정이품송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늦가을의 정경을 만끽할 수 있는 굽이굽이 열두 굽이 말티고개를 넘어왔다.
말티고개는 조선 세조가 이곳에 행차할 때 고개가 가파르고 높아 가마에서 내려 말로 갈아타고 속리산을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삼년산성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성으로 신라 자비왕 慈悲 王 13년(470)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소지왕 炤智王 8년(486) 이찬 실죽伊飡 實竹) 장군이 선산 장정 3천 명 동원하여 개축했는데
국내 수천 개성중 축성과 개축을 明記한 唯一한 城이다.
三國史記 권3 新羅本紀」 3 慈悲麻立干에
築三年山城<三年者, 自興役, 始終三年訖功, 故名之.>이라 기록되어 있다.
성 둘레 1,680미터, 높이 13~20m, 너비 8-10m고, 1,500여 년 전 3년간 3천 명이 쌓았다고 ‘삼년산성’이라 한다.
산 지형을 활용한 산성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에 井자 축성술로 쌓았으며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4중의 계단식이다, 한 켜는 가로 쌓기, 한 켜는 세로 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고, 동서남북 4개 성문에 너비 4~5m로 서문이 주문이다.
또한, 7곳의 옹성甕城(철옹성의 준말)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이고,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동쪽에는 지상 약 1m 되는 성벽에 65×45㎝의 5각형 수문이 남아 있다
성벽에는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 아미지(蛾眉池)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의 명필 김생(金生 ; 711∼?)의 필체로 전해 오고 있다.
이곳 삼년산성은 역사의 현장이다.
신라. 당 연합군에 의한 백제 패망 후 당의 고종이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파견하였을 때 신라 태종무열왕 제29대 (654~661)이 왕문도(王文度, ? ~ 660)를 맞이하였던 곳이고,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년)에 웅천주(현 공주) 도독이었던 김헌창 金憲昌(? - 822)은
아버지 金柱元(강릉김씨의 시조. 785년)이 왕이 되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김헌창(金憲昌)의 난 때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고 항거한 거점이 이곳 삼년산성이었다. 신라 경덕왕 1년(742)에 삼 년 군으로 명명했으며, 고려 태조 왕건 11년(王建; 877-943)에 이곳을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삼 년 성 서원이 있었다.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에 희생된 보은 출신 충암(冲菴) 김정金淨(1486∼1521; 형조판서 겸 대제학)을 흠모해 지방 유림들이 명종 4년(1549) 세웠으며, 광해군 2년(1610)에 상현서원象賢書院] 이라는 사액을 받은 서원이고, 현종 13년(1672)에 이 서원을 외 속 서원으로 옮겼으나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으로 폐쇄 후 그 목재를 활용하여 현 보은향교 명륜당‘明倫堂’(충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을 건립하였다.
삼년산성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 산속에는 장사로 이름난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장사 남매는 모두 몸이 건장하고 힘이 억세기로 말하면 태산을 들고 바위를 움직이는 힘을 자랑했다.
어머니는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기 위해 하루 동안에 아들에게는 나막신 신고 소를 몰고 서울을 갔다 오게 하고, 딸은 성을 쌓게 했다. 그리고 이긴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기로 했는데 딸이 졌다. 결국, 오빠는 누이동생을 죽이고 말았다는 슬픈 전설이다.
보은은 국립공원 속리산, 구병산, 금적산의 삼산 고을이다. 청주-상주, 대전-영동으로 이어지는 사통팔달의 교통요지로 사철 관광객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삼년산성은 보은 읍내를 지나 상주 가는 길 우측에 있다. 늦가을 해가 짧아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스쳐 지나온 것이 아쉬웠지만 함께한 문우들의 흐뭇한 마음에서 위안을 찾아보련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daumbin백림 시인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거운 날들이 이어지시기를 빕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보은 대추맛을 보아야
가을 맛이 제대로 우러나는데.....
daumbin백림 시인님 감사합니다.
daumbin백림 시인님 감사합니다.
박종국 시인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