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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소설가협회에서 발간한 "소설로 읽는 진주" <진주, 너여서 아름답다>에 수록된 박혜원 소설가의 단편소설 "뿌에르또 바리오스와 은수저"를 올립니다.
단편소설 뿌에르또 바리오스와 은수저 박혜원
그는 사촌형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바로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그리고 조교에게는 세미나 개최일을 좀 더 뒤로 잡으라고 통보했다. 장마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다. 기압이 낮으니 몸도 가라앉는다. 신경통 같은 게 스멀스멀 몸속을 기어 다닌다. 그는 양쪽 어깨를 번갈아 주무르면서 통증과 함께 아련한 그리움과 죄책감 같은 것이 뼈 사이로 찌르르 파고드는 것을 느낀다. 그동안 사촌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어느 해 여름, 전국이 이산가족 상봉의 감동 속으로 몰려갈 때 그는 형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형의 연락처를 알 수도 없고 그러기 때문에 연락할 방법도 막막했다. 으레 그랬듯이 연일 밀물처럼 밀려들던 감동의 눈물바다가 한 차례 지나가고 나자 다시 세상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감동의 물결에서 빠져나와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 것처럼 어느덧 일상적인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게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상상한 일인지 알 수 없지만 형과 같이 놀다가 형은 보이지 않고 넓은 들판에 혼자 남아 어스레한 기운이 밀려드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가졌던, 그 아릿한 외로움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형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고모가 많이 편찮으시단다.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는 고모보다는 사촌형을 만나기 위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형을 만나지 않은 게 그러니까 벌써 십여 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동안 무심했지요?” “그거야 내가 더 심하지.” “건강하시지요?” “그럼! 피가 펄펄 끓는다. 하하하.” “요즘은 어디 계십니까?” “다 얘기하자면 좀 복잡하다. 암튼 만나서 이야기하자. 여긴 산이다.” 그러자 갑자기 전화가 혼선되었고 통화가 뚝 끊겨버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차례 기지개를 켠다. 뼈들이 우두둑 소리를 지르며 제 자리를 찾아든다. 내일 아침 비행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서둘 필요가 있다. 그는 퇴근할 준비를 한다. 벌써부터 마음이 바쁘다. * 공항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결항될까 마음을 졸였지만 비행기는 무사히 그를 비행장에 내려놓는다. 이른 아침인데다 지방공항이라서 그런지 사람들도 많지 않고 버스대합실 같이 조촐한 분위기다. 출찰구를 빠져나와 로비에 들어서자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다. “도착했냐?” “예, 공항 로비입니다.” “그럼 나와라. 바로 앞이다. 공항 주차장에 와 있다.” 건물을 나서자마자 꽁지머리를 한 형이 문 앞에 서서 웃고 있다. 사람들은 그보다도 사촌형이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다고 했다. 정말 나이가 들수록 부리부리한 눈매와 뾰쪽한 코끝이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형은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띠우고 두 팔을 넓게 벌려서 그를 끌어 앉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 교류가 없었음에도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가슴이 뭉클하다. “오랜만이다. 피곤하지?” “정말 미안합니다. 그동안 연락도 못 하고…….” “그런 얘긴 필요 없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냐.” 형은 한 번 더 그를 세게 끌어안는다. 형의 심장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의 가슴도 심하게 뛴다. “아직 식전이지? 시원하게, 재첩국 좀 먹고 갈까?” 사촌형은 그의 어깨를 싸안은 채 새까만 코란도 앞으로 이끈다. 차를 향해 걷는 형의 어깨는 단단하고 허리가 곧으며 등에는 한 가닥으로 묶인 머리채가 제법 어깨 밑에까지 내려가 있다. 세월이 형을 비켜 지나간 것 같다. 그러나 차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녹슬었으며 광택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어 있었다. 문짝이 엄청나게 무겁다. 힘들여 문을 끌어당긴다. 차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시동을 걸자 차는 한 차례 튀어 오를 듯이 심하게 흔들렸고 포효하듯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내닫는다. “좀 시끄럽지? 그래도 나한테는 재산 목록 일 번이다.” 운전을 하는 형의 손끝이 뭉툭하게 닳아 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손톱 밑이 발그레하고 매끈하다. 아직도 그의 손바닥에는 사촌형의 체온이 남아 있다. 형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영빈이는 잘 크지?” 차의 소음이 워낙 심해서 형은 고함을 지르며 묻는다. “네- 지금은 초등학생입니다!” 그도 함께 소리를 지른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하긴 내가 산에 들어가기 전에 돌이었으니까 그 정도 됐겠구나!” “그 때 형님이 돌옷을 한 보따리 사서 보냈지요? 집사람이, 딸하고 아들은 대접이 다르구나, 그랬습니다.” “하하, 제수씨가 서운했더란 말이지? 그렇지만 영빈이는, 우리 가문의 종손 아니냐? 대를 이어줄 유일한 기둥이란 말이다!” “요즘은 딸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딸이 더 예쁩디다!” “물론 그렇겠지. 그렇지만, 나는 구식이라 그런지, 아직은 아니다! 고모 봐라!” 차창을 내다보는 형의 옆얼굴이 일순 굳어지더니 그 이상 말이 없다. 그도 입을 다문다. 하늘을 두텁게 덮고 있던 구름이 땅 밑으로 내려앉더니 기어이 비를 뿌리고야 만다. 차는 남강을 따라 가로수가 잘 정리된 도로를 한참 달린다. 느티나무들이 처연하게 비를 맞고 있다. 도로가 한산하다. 차가 고개를 돌아서자 호숫가에 급조된 건축물들이 여기 저기 늘려 있다. 그러나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서양식 집들이 나지막한 산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사한 후로는, 고모집이 처음이지?” “네, 사람 구실도 못 하고 사는 거지요.”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니냐? 나도 처음이다. 너는 다르지만, 나한테 고모는 어머니나 마찬가지거든! 그런데도 안 찾아뵀으니, 나도 참 죽일 놈이지.” “나도 어릴 땐, 고모집에 자주 왔었는데…….” “그 때 그 집이 참 좋았지! 어간마루도 넓고 마당도 툭 트이고. 안채 축대에 올라서면, 멀리 강물이 은빛으로 빛나고 온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지. 그러면 왠지 으쓱해지곤 했어!” “뒷마당에 대나무 숲도 좋았지요. 형이 대나무 뿌리 틈새에서 두더지도 잡아 줬잖아요. 나는, 그 기억이 너무 선명해요. 뽀송뽀송하면서도 부드럽던 그 털의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거든요.” “그랬나? 그래, 대나무 숲에 누워서, 댓잎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곤 했지. 그 바람소리가 뭔가, 아련한 그리움을 자아냈던 것 같아. 그런데 일언반구도 없이, 그 좋은 집을, 온갖 추억이 담긴 그 집을, 달랑 팔아서 이곳으로 왔으니……. 하긴, 옛날에서 벗어나고 싶었겠지!” “누가요?” “누구긴? 고모부지!” 차가 하얀 색 스틸하우스 앞에서 멈추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어진다. 달력에 박힌 사진을 떠온 것처럼 낯선 풍경이다. “여긴가 보다. 내리자.” 마당에는 금방 깎은 것 같은 금잔디와 그 사이사이에 잘 손질한 반송이 몇 그루 서 있다. 대문에서부터 현관까지는 화강암 대리석이 깔렸는데 비를 맞고 있는 대리석은 물청소를 한 것처럼 티 하나 없다. 대리석 길가엔 동글동글하게 전지된 깡깡나무가 도열하고 군데군데 하얀 장미가 빗방울을 머금은 채 피어있다. 현관에는 반백의 고모부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고 그 뒤로 현관 벽을 아이비가 타오르고 있다. “비도 오는데 웬 일들이고?” “진작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원진이는 요즈음 여게 있나?” “네, 또 나가야지요.” “일단 들어오너라.” 현관문을 들어서자 박스가 어지럽다. 열린 박스 안에는 남색 공단 치마저고리가 개켜지지도 않은 채 걸쳐 있고 박스 바깥에도 갈색 체크무늬 겨울코트, 까만 벨벳 원피스 같은 옷들이 너저분하게 널려있다. “무슨 옷이 이리도 많던지……. 정리하는 중이다. 버릴 꺼는 버리야지.” “고모는?” “먼가 기분이 안 좋은갑다.” 그러나 거실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선반에는 굽다리 접시와 장경호 토기, 분청사발, 젖빛이 감도는 백자 항아리, 다기, 유병 들이 고아한 빛을 발하며 진열되어 있다. 소나무, 단풍, 괴목 분재, 난분도 즐비하다. 사촌형은 한 바퀴 휘 돌아보더니 안방으로 향한다. 고모가 모시적삼을 입고 단정히 방 한가운데 앉아 있다. 뒤에는 휘황찬란한 자개농이 번쩍거리고 있어 상대적으로 고모는 사그라드는 지푸라기 인형 같다. “고모, 원진입니다. 괜찮은 거지요?”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왜 왔니? 괜찮다니까……. 어, 현진이도 왔네?” 고모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그를 바라본다. 탄력과 윤기는 사라졌지만, 예전에 가졌을 아름다움이 아련한 기억처럼 얼굴선과 입가에 은은하게 남아있다. “무슨 옷을 그리 차리 입었노? 눕어 있지 않고……. 사람만 온다카마 저리 좋아한다.” 고모부가 고모에게 핀잔을 준다. “고모,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사촌형이 고모 등 뒤로 가더니 다정하게 어깨를 주무른다. 고모부는 입맛을 쩍 다시며 밖으로 나간다. 형은 얼른 고모 손에 봉투를 쥐어 주더니 넣으라고 재촉한다. 고모는 어색한 표정으로 방석 밑에 봉투를 넣는다. 그도 사촌형을 따라 봉투를 꺼낸다. 형은 손사래를 치며 만류한다. “너는 고모부한테 줘라. 안 그랬다가는 인정머리 없는 김가들 어쩌고 하는 소리를 고스란히 고모가 들어야 될 거다.” 창밖으로 하늘은 더 낮게 가라앉아 거의 땅과 맞닿아 있다. “원진이 너는 아직도 지리산에서 그러고 있니?” “고모, 돈도 벌고 집도 한 채 장만해 두었으니까 걱정하지마요.” “현진이는 아들 딸 골고루 낳아서 알캉달캉 재미나게 사는데, 너는 늘 그러고만 다니니…….” 고모의 목소리가 갈라지면서 가라앉는다. “나도 요즘은 살림 차려서 잘 산다니까요?” “그라모 머 하노? 또 얼매나 갈랑고?” 어느새 고모부가 엷은 청회색 다기가 담긴 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기 상을 받아든다. 고모부가 들어서자 고모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자개농에 등을 기댄다. “고마 자리에 눕지?” “그러세요, 고모.” 그가 고모부를 거든다. 그러나 고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버티고 앉아있다. “너거 집안 사람들 고집을 누가 꺾을 끼고? 내비 두라. 그라고 저 놈의 류마티슨가 먼가 땜에 저리 고생이다. 오데 류마티스 뿐이가? 당뇨에다 심장병에다, 병이라카마 없는 기 없다. 일이라고는 몬 한다. 하기사 언제는 일하고 살았던고? 평생 상전이지.” 사촌형이 고모부를 돌아보자 고모부는 다시 입맛을 쩍 다시며 찻물을 따른다. “점 보는 사람마다, 집안에 맹(命)이 짧아서 오래 몬 살 끼라 캤는데, 이만하마 오래 살았지 머.” “호영이는 가끔 옵니까?” “현진이 너맬로 대학에 눌러 앉으마 댈 낀데, 벤천가 먼가 한다꼬, 일이 바쁘다.” “고모부가 자본을 두둑이 대는데 뭐가 걱정이겠어요?” “원진이 니는 말을 해도 똑 그리 해야 되나? 내는 돈 없다. 이 집 하나 말고는…….” 사촌형은 파르스럼한 빛을 띠며 퍼지는 녹차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더니, “선산도 다 없앴다면서요?” 하며 고모를 바라본다. 고모는 눈을 감아버린다. 고모부는 얼굴에 노기를 띠며 원진을 노려본다. “니는 그런 말할 자격 없다. 그동안 누구 덕에 살았노? 선산이고 논이고 전부 내 아녔으마 벌써 다 날라갔다. 논이 다 머꼬! 내 아니었으마 너거 집안은 박살났을 끼다. 니도 현진이도 이 세상에 있도 몬 했다.” 고모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가 곧바로 득의만만해지면서 녹차를 훌쩍 마신다. “이렇게라도 니 할아버지 무덤이 남아있는 기, 누구 때문이고? 다 내 때문인 기다. 그란데도 원진이는 내한테 적의를 갖고 있제? 내가 지 껄 가로채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제.” “고모부가 이쪽저쪽 눈치 보면서 잘 대처했지요. 그 덕분에, 돈도 많이 모을 수 있었구요. 처가식구들 목숨을 담보로 말이죠.” “니는 맻 년만에 한 번 오마, 내 속을 확 디집어 나야 직성이 풀리제? 너거 할아버지가 말년에 그래도 서러운 꼴 안보고 돌아가실 수 있었던 기, 다 누구 덕이고? 나 아니마 가능했던 일이가? 요새사 세상이 달라졌지만, 뽈갱이 집안은 다 떡살 당갔다 아이가?” 원진이 형은 고모부의 말은 무시해 버리고 고모를 바라보더니 씽긋 웃고는 누우라고 한다. 고모가 이번에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 가만히 눕는다. 지푸라기 인형이 풀썩 가라앉는 것처럼 아사누비 이불 위로 가볍게 내려앉는다. 고모부는 고모와 형을 노려본다. “말이 나왔응케 카는 거지만, 내는 다 안다. 현진이 너거 큰아부지는 뽈갱이 여장교하고 눈이 맞아서 떠난 기다. 처남댁이 와 그리 비명횡사했겠노? 사람들은 너거 큰아부지를 위대한 사상가였다 카면서 감싸지만, 내는 알고 있제. 사실은 그기 아인기다. 내도 너거 꿈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원진이가 하도 애매한 소리를 한께…….” 고모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눕는다. 그는 사촌형을 돌아본다. 형은 아무 말도 않고 고모만 뚫어지게 내려다본다. 방의 넓은 공간 가득히 긴장감이 팽만하게 차오른다. 그는 녹차를 마신다. 그러나 목구멍에 걸려 잘 넘어가지를 않는다. 고모부도 입맛을 쩝 다시며 방 안에 가득 찬 팽팽한 긴장감을 느슨하게 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한 번 채워진 어색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원진이 형은 고모의 자리를 따독거리더니 “고모, 마음 편안히 가지고 건강하게 계세요. 여긴 애초부터, 전부 고모집이니까 눈치 볼 것 없다구요. 드시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라구요. 아셨지요?” 하고는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그도 고모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한다. 고모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목에서 숨이 걸려 가르릉거린다. 그 역시 숨이 막힌다. 그는 고모의 손을 잡은 후 자리에서 일어선다. 마른 삭정이를 잡은 것처럼 뼈만 앙상한데, 열이 끓듯 뜨겁다. 고모부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고모 구완하시는데 보태 쓰십시오. 그리고 제가 잘 아는 한의학 박사가 있는데 소개해 드릴까요?” “그랄 꺼 없다. 내가 그랬제? 이만하마 마이 산 기라고…….오늘은 콘디숀이 좋다만 평시에는 죽은 기나 매한가지다.” “그러니까…….” “댔다 안 카나?” 고모부가 말을 자르듯이 끊는다. 얼굴빛이 싸늘하다. “너거 식구들이 비현실적이라는 거는 내가 익히 알고 있다마는……. 너거 고모는 내가 젤로 잘 알 꺼 아니가? 요새 부쩍 원진이를 찾는 것도 그렇고……. 그런데 그 놈은 저카고 나간다. 똑~ 하는 짓이 저거 아부지라 카인께. 지 생각만 한다 아니가? 그라고, 원진이하고 너는 다릉께 내 하는 이야기지마는, 원진이도 어데 한 군데 진드그니 자리 잡으라 캐라. 인자 저거 아부지 제사도 지내야 될 꺼 아니가? 부정하고 접다고 기정사실이 바끼는 것도 아니고…….” 비를 함초롬히 맞고 있는 정원은 나무고 잔디고 모두 나지막이 가라앉아 있다. 형이 어느새 시동을 걸었는지 대문 밖에서 차가 요란스레 부르릉거리고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고모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몸을 돌린다. 고모의 가르릉거리는 숨소리가 뒤를 따르는 것 같다. 현관에 버려진 옷가지들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가슴이 답답해 온다. “우리 집에 들렀다 갈 시간 있어?” “좋아요.” “그럼 가는 거다? 집 생긴 이래 최고의 손님이겠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발길을 따라오던, 눈물이 그렁그렁한 고모의 큰 눈과 숨소리를 잊어버린 듯 형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속기를 밟는다. 코란도가 한 차례 튀어 오르고 드디어 비명을 질러대며 달리기 시작한다. 차는 호수를 지나고 물길을 따라 달려간다. 비가 꽤 내려 시냇물은 흐린 빛을 띠고 있지만 좁은 길을 따라 흐르기도 하고 갑자기 넓어진 공간에서 맴돌아 골을 이루기도 하고 합수지기도 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 물길을 편백 숲이 때론 벚나무들이 그리고 양류가 부드러운 손을 뻗쳐 감싸 안고 있다. “경치가 정말 좋군요!” “나는 이런 데가 아니면 안 산다! 고모부는 나보고 막사는 놈 취급하지만, 맨날 이렇게 좋은 공기를 마시고 사니, 내가 너보다 더 잘 사는 거지?” 이제 차는 고개를 꼬불꼬불 돌아 제법 가파른 산언덕을 오르기 시작한다. 도로 아래로 계곡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폭포가 되어 방울져 떨어진다. 비가 내려 바위 빛깔은 짙고 나뭇잎은 짙푸르다. 싱그러운 풀잎 향이 창틈을 비집고 든다. “그런데 형님, 아까 살림 차렸다는 말은 정말입니까?” “야! 속고만 살았냐? 형수가 해 주는 점심을 먹으면 믿을 거냐?” “그럼, 그 때 그 형수님인지…….” “아까 고모부 하는 말 들었지? 나도 아버지를 닮았는지, 여장교가 더 좋거든? 첫날밤에 남편 말귀도 못 알아듣는 조선시대 여자, 우리 엄마보다는, 세련된 여장교가 더 낫지 않겠어?” 갑자기 길이 급경사를 이루고 어느 순간 앞 발통이 번쩍 들리는 것 같아서 그는 차창 손잡이를 움켜쥔다. 더 이상 대화에 몰두할 수가 없다. “걱정마라, 안 죽는다! 골백번도 더 다닌 길이니까! 차가 죽겠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걸 보니까, 다 와 가는 모양이다!” 창밖으로는 조금 전에 지나온 길들이 아득히 저 아래로 안개에 휩싸이고 있다. 골짝을 따라 흐르던 안개가 이젠 길 위에도 나무숲 사이에도 차창으로도 뭉텅뭉텅 무더기로 밀려든다. “안개가 몰려오는군요.” “여긴 항상 안개야! 안개는 모든 걸 감싸고 숨겨 주거든. 그래서 평안해.” 이제 차는 비포장길로 접어든다. 그래도 형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 머리가 몇 번이고 천장에 부딪힌다. 형의 꽁지머리가 춤을 춘다. 흙탕물이 부챗살처럼 튀어 올라 앞창에 뿌려진다. 윈도우 브러시는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런데 목이 쉴 듯 질러대던 차의 아우성이 일순간 멈춘다. 문득 세상이 늪 속에 빠진 듯 조용하다. 차창으로 안개가 비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 숲 그늘이 짙은 안개 속에 빠져 있다. 운무 사이로 나무줄기가 희미하게 선을 그으며 위립해 있다. 형은 차문을 열어둔 채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 안개가 형을 에워싼다. 그는 얼른 차문을 닫고 형을 뒤따른다. 안개가 부드럽게 얼굴에 와 부딪혔다 뒤로 물러서곤 한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까워진다. 물소리가 요란해서 사방을 둘러보니 바위 아래쪽으로 누런 거품을 일으키며 개울물이 흐르고 있다. 사방에 물소리가 가득하다. 아랫도리가 안개에 묻힌 형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는 걸음을 빨리 한다. 안개가 길을 열며 밀려난다. 흩어지는 안개 속에 나지막한 집 한 채가 아스라이 드러난다. 가까이 다가서니 황토벽에 짱돌이 드문드문 박혀있고 나무껍질로 얽은 지붕 위에 돌무더기가 가득 얹힌, 산막이 하나 눈앞에 성큼 다가선다. 형이 나무문을 열고 산막 안으로 들어간다. 그도 형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다. 베니어판에 피죽을 댄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컴컴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집안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간신히 설 만한 공간이 현관인 셈이고 그 위로 열댓 평 남짓한 원룸이 펼쳐져있다. 널빤지 나무가 깔린 바닥끝에 투박스러운 나무침대가 하나 놓여있다. 방 가운데에는 무쇠난로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변변찮은 가구도 별로 없다. 벽도 돌이 그대로 드러난 황토벽이다. “여기가 내 집이다. 어떠냐? 좋지?” 형은 오른팔을 들어 집안을 가리킨다. 그는 사촌형을 따라 난로 앞에 놓인 나무스툴에 엉거주춤 앉는다. 어디선가 나무 타는 향기가 흘러들고 손바닥만한 창으로는 희미한 빛살이 들어온다. 비쳐드는 빛줄기에, 짙은 암갈색 러그가 바닥에 깔려있음을 발견한다. 형은 그의 시선이 러그에 가 있음을 보더니 갑자기 일어서서 러그를 둘둘 말아 그에게 건넨다. 가까이서 보니 비리디안과 반다이크 브라운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기하학적 무늬를 이루었는데 색채가 잘 배치되어 있다. “이건 마야의 문양 같은데요?” “그래 좋지? 뿌에르또 바리오스에서 가져온 거다. 가져가라. 그렇잖아도 색깔이 하도 좋아서 네 생각을 하며 샀던 거다.” “과테말라에 가셨더랬습니까?” “돈 벌러 갔었지. 다음 주쯤에 다시 나갈 거다.” “네?” “그래서 너를 보자고 했다. 이번에 나가면 언제 돌아올는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네? 다음 주에 나간다고요?” “나 같이 떠도는 사람이, 언제 어디를 간들 뭐 그리 문제가 되겠냐? 팔자 하나는 잘 타고 났지.” “형님도 참 대단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소식도 없이……. 그 동안 찾지 않은 나도 그렇지만…….” “고모부가 그러쟎던? 우리 김가가 인정머리 하나는 없다고?” “부끄럽게 왜 이러십니까?” “그래도 현진이 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니가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 나는 허깨비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삼촌이라도 오래 사셨더라면 내가 잘해 드릴 수 있었을는지……. 이젠 다 쓸데없는 소리다.” 그 때 문을 벌컥 열리면서 안개가 쏴아- 방안으로 밀려든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 여자의 그림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선다. “봐라! 드디어 네 형수가 등장하셨다. 나의 로자! 로자 룩셈부르크!” 형이 연극 대사를 읊듯 과장된 목소리를 낸다. 뒤에서 얼비치는 옅은 빛 때문에 여자는 실루엣으로 떠오르고, 안개와 함께 숯내가 방안으로 묻어든다. 그는 엉거주춤 선채 실눈을 뜨고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는 조그마한 상을 들고 서 있다. “어서 들어오시오, 부인. 늘상 이야기하던 내 동생이오.” 여전히 형은 연극적인 어조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낮지만 힘이 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선 여자는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남자 같은 얼굴이다. 이마가 팽팽하게 넓고 코가 약간 매부리코라 그런지 인상이 강하다. 소반에는 감자가 김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며 단내를 풍긴다. 여자는 무쇠난로 옆에 상을 내리고 형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깨가 당당하고 허리가 꼿꼿하다. 숱이 많은 머리카락을 한 뭉텅이로 묶어 옆으로 늘어뜨렸다. 형은 여자를 한 번 보고 또 그를 한 번 보며 미소를 짓는다. “너 지금, 형에게 웬 미인이냐고 묻고 있지?” “어떻게 아셨수?” 여자도 형을 따라 빙그레 웃으며 숟가락을 들어 그에게 준다. 상은 단출하게 차렸지만 깔끔하다. 물김치가 알맞게 익어 맛깔스럽다. 형은 풋고추를 된장에 푹 찍어서 먹는다. 그도 형을 따라 풋고추를 찍어 먹는다. 매콤하고 달다. “이거 다, 이 사람이 농사지은 거다.” “맛있네요.” 이번에는 겉절이를 집어 입에 넣는다. 상큼한 풋내가 나고 간이 알맞다. “이 사람도 너처럼 공부를 많이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산에서 내려가질 않는구나. 이 집 사람들에게 나만 죽일 놈 됐다.” “형이 뭐가 좋다고 이러고 사세요? 이렇게 궁벽한 곳에서.”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산이 좋아서지 뭐. 안 그렇소?” “다 좋지요. 안개도 바람도 물소리도, 아 그리고 별빛과 풀냄새도…….” “봐라. 나 좋다는 얘긴 없잖아.” 여자가 감자 하나를 그에게 건넨다. 감자를 한 입 베어 문다. 입 안 가득 구수한 향이 퍼진다. “형님이 나를 살렸거든요. 아마 형님이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거예요.” 여자가 형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눈에서 반짝 물기가 어리더니 눈동자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형도 여자를 조용히 마주본다. 형이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이제 당신은 내가 없어도 잘 살아갈 거요. 당신은 원래 혁명투사지 않소, 그렇지요?” 하고는 등을 다독거린다. 여자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마치 무대 위에 있는, 이별을 앞두고 마지막 정을 나누는 남녀배우를 보는 것 같아, 묘한 슬픔에 빠진다. 여자는 상을 남겨놓고 방을 나선다. 여자가 문을 열고 나가자 다시 안개가 문 틈새를 비집고 밀려든다. 문이 닫히고 잠시 어둠이 방에 머문다. “여자도 곧 내가 떠난다는 거 알고 있다. ……괜찮아. 그 여잔, 아마 잘 살 거다.” “고모부가…….” “그래, 이젠 자리 잡고 잘 살아야 한다고 했겠지. 저 여잔……. 만약에 또 인연이 허락한다면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 “어떻게 만났는데요?” “하나의 목적을 향해 싸우던 사람이다. 민주투사였지. 그런데 그 싸울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찾아온, 시대의 공극(空隙)을 견뎌낼 힘이 없었진 거다. 저 여자가 산을 찾았던 게. ……나는 그 모습을 통해 아버지가 겪었을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여자도 불쌍한 여자지.” 그는 방바닥에 남겨둔 감자를 들어 입에 문다. 입안이 탑탑해지면서 목이 막힌다. “이 곳에는 아버지 같은 원혼들이 떠돌고 있다. 운해 속에도 일몰에서도 밤마다 울부짖는 바람 속에도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뿌려대는 빗속에서도 눈물 같은 운무 속에서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거든. 저 여자도 그래서 만난 거고."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까, 비원의 삶은 아버지 세대로 돌려 보내고 이제 형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지요." “이게 바로 내 삶인데 뭐가 따로 있겠니? 온 삶 내내, 내 뒤에는 붉은 줄이 따라다녔는데.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와서 그 외의 무슨 다른 삶이 있을 수 있겠니?” “형이 한 때 우리 집에 와 있었지요? 나는 형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는데, 그땐, 형이 무서웠습니다.” “그래, 그랬을 거다. 그 때는 온 세상이 다 적이었으니까. 삼촌한테도 내 몫을 내어노라고 대들었으니까. 삼촌도 고모부한테 다 뺏겼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런데 나도 삼촌이 참 무서웠다. 너무 엄하셨거든. 아마 형을 대신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이었겠지? 나는 그게 싫어서 니네 집에서도 나와 떠돌기 시작했다.” 형은 물김치 국물을 훌쩍 들이킨다. 그도 형이 내려놓은 김치 그릇을 들어 후루룩 국물을 마신다. 형은 그러는 그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고모는……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글쎄, 고모부가 그렇다니까. 일단 사람부터 살릴 생각을 해야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이젠 모든 게 자기 거라는 생각도 들겠지. 짓누르던 열등감도 벗어 던질 테고……. 그런다고 과거가 묻히나? 온통 할아버지 흔적인데……. 그래서 이사도 했겠지.” “형하고 고모부는 언제부터 그런 거예요?” “왜? 웬수 같냐? 하긴 고모부는 만날, 자기가 날 키웠다고 서운해 하지.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생각이 다 같을 순 없으니까…….” 사촌형은 잠시 말을 뚝 끊고 멍해지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고모부가 우리 집안의 집사였던 건 너도 알지? 아버지가 월북하는 바람에 모두 자기 차지가 됐지. 고모도 차지하고 재산도 차지하고……. 아버지 때문에 할아버지는 완전히 망가지셨고…….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열등감 때문인지, 하도 그 인간이 고모를 때려서, 내가 돌멩이를 들고 안방에 뛰어들었지. 그 인간 죽이겠다고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근데 사실은, 고모부가 겁이 나서 그랬던 거 같아. 일종의 자기방어 기제지. 암튼 나도, 내 성깔 때문에 무덤 파는 일이 많다니까?” “그래도 형은 할아버지를 뵈었군요. 나는 뵙지도 못했는데…….” “그렇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당신 큰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불 위에다 피를 토하며 뒹굴던, 처참한 모습뿐이다.” 그는 가슴이 저미듯 아파오는 것을 느낀다. 형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끌어안고 싶다. 그의 눈빛을 본 형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너, 비행기 시간 늦겠다! 일어서자!” 형은 아까 말아놓은 러그를 옆구리에 끼고 성큼성큼 걸어서 문을 나선다. * 여자의 모습이 안개 속으로 사그라진다. 그는 여자를 버려두고 마치 자신이 먼 길을 떠나듯, 안개 속으로 사그라드는 그 여자의 모습이 애처롭다. 그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다. 흙집이 안개와 연기에 쌓여 몽환적인 그림 한 폭을 만들어낸다. 형이 빠른 걸음으로 앞선다. “형님, 왜 또 떠나는 겁니까? 이제 그만 여기 있지요? 앞으론 자주 들르겠습니다. 영빈이도 데리고 말입니다.” “그거 듣던 중 젤 반가운 소리다. 그렇지만 이 산도 많이 변했어. 저자거리가 돼 버렸거든. 이젠 정말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거다.” 형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하다. 그는 더 이상 이을 말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한다. “그 곳에 가서야 나도 알게 되었는데, 과테말라가 한국전 때 우리나라를 지원했더군. 그 곳도 전혀 생소한 데는 아니야. 나는 거기서 정말 마음이 편했다. 아직도 살아 움직이면서 연기를 피워 올리는 화산을 보고 있노라면 삶의 의욕 같은 것을 불끈불끈 느끼곤 했으니까……. 여기서 악착스럽게 살기엔 내 나이가 꽤 됐잖아?” 형은 그를 돌아보며 씽긋 웃는다. 눈가에 깊게 패인 골이 얼굴선을 부드럽게 만든다. 차가 안개 속에 웅크리고 있다. 어디선가 더덕향이 밀려든다. “타라. 이 녀석이, 내려갈 때는 엄살을 덜 부릴 거다.” 형이 운전석에 앉더니 뒷자리에 있던 낡은 가죽가방을 끌어 당긴다. 가방은 탈색되고 군데군데 표피가 떨어져나갔다. 형은 가방 안에서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꺼낸다. 회색 아이샬롬으로 둘둘 만 작은 몸피의 보따리다. 형은 그에게 불쑥 꾸러미를 건넨다. “이건, 아버지가 쓰시던 은수저하고 상아도장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있었는데 그건 그 여자한테 줬다. ……이건 너 주려고. 나 대신 잘 보관해 줬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나를 밀어냈던 이곳으로 또 다시 올 수 있을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곳, 커피농장 사람들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으니까……. 아예 그곳에서 몸집 좋은 인디오 여자와 살림을 차릴 수도 있고 말이야. 하하하.” 그는 형이 건네는 보따리를 두 손으로 받아든다. 아이샬롬을 벗겨내자 빛바랜 한지에 싸인 은수저 한 벌과 새끼 손가락만한 상아도장이 드러난다. 금으로 수(壽) 자가 새겨진 은수저는 마치 금방 쓰고 닦아놓은 것처럼 은회색 빛이 은은하게 광택을 발하고 있지만, 그 끝은 닳아 타원의 형태가 약간 일그러져 있다. 상아도장은 인주의 선홍색을 머금은 유백색 의 몸체가 아름답다. 그러나 세월의 아픔을 이겨낼 수는 없었던지 몸체 곳곳에 골고루 균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것들은,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들어주던 힘이었다.” “이걸,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혹, 내가 영- 돌아오지 않으면, 나중에 영빈이 줘라. 큰할아버지는 시대를 거슬러 꼿꼿하게 사셨던 올곧은 사상가였다고 말하면서……. 또 모르지. 큰아버지가 더 유명해질는지도……. 이국 먼 땅에서, 인디오 여전사와 함께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정부군 총알에 사라져간, 제 이의 체 게바라! 위대한 혁명 가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코리안, 김원진이었다고! 그렇게 그 곳 좌익단체 역사책에 길이 남을지도 모르지. 하하하!” 형의 웃음소리와 함께 차가 한 차례 튀어 올랐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기 시작한다. 어느덧 안개가 걷히고 지리산 자락마다 햇살이 구름 사이를 비집고 들어 짙푸르게 펼쳐진 산야를 눈부시게 비추고 있다.
* [작가 노트] 옛날 애인 같은 도시, 진주 나에게 진주는, 애잔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옛날 애인 같다. 촉석루와 옛 성곽, 그리고 진양호와 남강이 지리산으로 멀리 바다로 이어져 있다. 그 풍광이 참으로 고즈넉하고 조화롭다. 이곳 그 어디든 어귀를 돌 때마다 옛날 애인과 함께, 아련해져가는 서로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 날의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 * 오래전에 발표했던 작품을 다시 꺼내서 다듬었다. 지리산 자락을 배경으로 펼쳐졌던 가족의 역사를 다시금 돌아보았다. 우리 산하에 담긴 슬픔과 기쁨을 기억하며 옛날 애인과 함께 지나간 사랑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 나는 늘 우리보다 앞서 역사를 살아간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 특히 분단의 아픔 속에 소설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분들에겐 그 채무감이 더하다. 생사조차 알 수 없는 가족의 소식을 기다리며 자신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을 감당해야 했던 혈육들을 생각하면 늘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뒤틀리고 아픈 인생에 함몰되지 않고 그 상처를 딛고 올라서서 새롭고 아름다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애환을 그리고 싶었다. 마야문명이 남긴 초록과 어두운 갈색이 만들어낸 문양의 조화로움처럼,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이땅 그 어디에서도 더 이상, 강대국의 권력 논리에 의해 벌어지는 추악한 전쟁이 없어지길 바랄 뿐이다. 오늘도 우리의 강과 호수, 지리산 자락에는 비가 내리고 햇살이 퍼지고 꽃이 피고진다. 그 어느 어귀에서는 또 새로운 사랑의 이야기가 탄생되고 있을 것이다. *
박혜원 이화여대 국문과, 계명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4년 청구문화제 수필 부문 대상 수상 1999년 <세기문학> 여름호 단편소설, 「회신」으로 신인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수필집 『그 길 위엔 여전히 바람이 불고 있다 -터키 그리스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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